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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5.10.19 야고보서 -제8과 위로부터 오는 도움(야고보서 4:6-17)

              야고보서


                     제8과

             위로부터 오는 도움(야고보서 4:6-17)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6절). 앞의 5절까지에서 우리는 신자들의 옛 성품이 얼마나 악하게 될 수 있는가를 보았습니다. 이제 그 육체의 정욕은 우리의 힘으로는 결코 떼어낼 수 없다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모든 필요를 채우시는 은혜(4:6)


   감사하게도 하나님은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주십니다(히 4:16). 하나님은 "...네 사는 날을 따라서 능력이 있으리라" 고 약속하셨습니다(신 33:25).


   우리의 짐이 더욱 더 무거워지면 주님은 더 큰 은혜를 주시네

   우리의 수고가 더 커지면 주님은 더 큰 힘을 보내 주시네

   우리의 고통이 더해지면 주님은 자비를 더해 주시네

   우리의 시련이 갑절이 되면 주님의 평강도 갑절이 되네


   야고보는 잠언 3:34을 인용하여 모든 필요에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는 것을 증명하려 하였지만 여기에서는 교만하지 않고 겸손한 자에게 그 은혜가 약속되었다는 사상을 더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는 물리치시지만 상한 심령은 물리칠 수 없습니다.


참된 회개(4:7-10)


   7-10절에서 우리는 참된 회개에 이어지는 여섯 단계를 볼 수 있습니다. 야고보는 성도들의 죄에 대해 외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죄를 드러내는 화살들처럼 우리의 마음을 찌릅니다. 그 말씀들은 번개처럼 하나님의 보좌에서 내려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의 말씀의 영향으로 보다 낮아져야 합니다. 이제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라는 질문이 생길 것입니다.

   첫째로, 하나님께 순복하는 것입니다(7상). 이는 우리가 하나님께 순복하여 주님께 들으며 주님을 순종하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부드러운 마음으로 죄를 깊이 뉘우치는 자가 되어야 하며 교만하고 목이 곧은 자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그 다음에 우리는 마귀를 대적해야 합니다(7하). 우리는 마귀의 꾀임과 유혹에 우리의 귀와 마음을 닫음으로 이를 행하는 것입니다. 또한 성령의 검인 하나님의 말씀을 사용하여 마귀를 물리침으로 이를 행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마귀를 대적하면 마귀는 우리에게서 달아날 것입니다. 다음으로 우리는 하나님께 가까이 해야 합니다(8절). 우리는 기도함으로 이를 행하게 됩니다. 우리는 필사적으로, 믿음의 기도로, 하나님 앞에 나아와 우리 마음에 있는 모든 것을 아뢰야 합니다. 우리가 그렇게 주님께 가까이 나아가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가까이 이끄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음란함과 세속적인 것 때문에 주님이 우리에게서 멀리 계신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우리가 주님께 가까이 나아갈 때 주님은 우리를 사하시고, 우리를 회복시키십니다. 네 번째 단계는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케 하라" 는 것입니다. 손은 우리의 행동을 말하며, 마음은 우리의 동기와 소원을 나타냅니다. 우리는 마음속의 죄와 밖으로 행하는 죄를 버림으로써 손을 씻고 마음을 성결하게 합니다. 죄인으로써 우리는 악한 행동을 자백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두 마음을 품은 사람으로써 우리는 뒤섞여진 우리의 동기에 대해 자백할 필요가 있습니다. 자백은 죄에 대한 깊은 애통이 동반되어야 합니다(9절).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지어다 너희 웃음을 애통으로, 너희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꿀지어다." 하나님께서 죄를 지적하심으로 우리를 돌아보실 때는 경솔하게 행할 때가 아니라 오히려 주님 앞에 우리 자신을 굴복시키고 우리의 죄악됨과 무력함과 냉랭함과 열매 맺지 못함을 슬퍼해야 할 때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겸비하여 우리의 물질주의와 세속주의와 형식주의를 슬퍼해야 합니다. 우리는 내적으로나 외적으로나 경건한 회개의 열매를 나타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주 앞에서 자신을 낮추어야 합니다. 우리가 진솔하게 주님 발의 먼지와 같은 우리의 자리를 취하게 된다면, 주님께서는 적당한 때에 우리를 높이실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우리 자신을 드러내실 때 우리가 반응해야 하는 방법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예를 들어, 어떤 집회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에 크게 말씀하실 때가 있습니다. 즉시 우리는 감동을 입고 선한 결심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집회가 끝나 사람들과 활발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대화를 나누게 되면, 그 집회 때의 모든 분위기는 사라져 버리고, 능력도 없어지고, 성령님은 소멸되어 버립니다.


비방하는 죄(4:11-12)


   야고보가 다루려고 하는 다음 죄는(11, 12절) 형제를 판단하거나 비방하는 죄입니다. 어떤 사람은 우리가 다른 사람을 비난하는데  빠지기 전에, 이렇게 하는 것이 그 형제에게 선한 것인가? 나 자신에게 선한 것인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드리는 것인가? 라는 세가지 질문에 답하여야 한다고 제안했습니다.

   베스 데이(Beth Day)는 "세 황금 문" 이라는 시에서 그것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당신은 말하기 전에

   세 황금 문을 지나도록 하라

   좁은 그 문들의 첫째 문은

   "이 말이 사실인가?" 이네,

   그 다음 문은 "이 말이 꼭 필요한가?"이며,

   당신은 마음속으로

   진실한 대답을 해야 하네,

   그 다음 문은

   마지막 문 또 가장 좁은 문으로

   "이 말은 유순한 말인가?" 이라네.

   이 세 황금 문을 통과한 뒤

   마침내 당신의 입술에 이르게 되면

   당신은 두려움 없이 그 이야기를 말해도 좋으리라

   그 말의 결과가 어떠할 지에 대해.


   사랑의 최고 법은 우리가 이웃 사랑하기를 내 몸과 같이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어떤 형제에 대해 비방하거나 그 형제의 동기를 판단하는 것은 이 율법에 반대하여 말하는 것이며, 그 율법을 무가치한 것으로 정죄하는 것과 같습니다(11절). 그 율법을 고의로 어기는 것은 그 율법을 경멸하고 모욕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 율법은 선하지 않고 순종할 가치가 없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순종하기를 거부하는 사람은 사실상 율법을 지키지 말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제 이것을 어떤 사람이 자신이 심판 받을 자가 되기보다는 오히려 그 형제를 심판하는 자라는 이상한 자리에 앉아 비방하는 것에 적용할 수 있습니다(12절). 그는 율법에 복종하기보다 자신을 율법보다 더 뛰어난 자로 세우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만이 율법보다 뛰어난 분이시며, 율법을 주신 분이시며, 그 율법으로 심판하실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누가 그 형제에 대하여 비방함으로 하나님의 자리를 감히 찬탈할 수 있겠습니까?


자기만족의 죄(4:13-17)


   야고보가 지적하고 있는 다음 죄는 자기 만족이요, 하나님에게서 독립된 허황된 계획입니다(13-16절). 야고보는 미래에 대한 완벽한 계획을 가지고 있는 장사꾼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자세하게 살펴보겠습니다. 그는 시간에 대해 (오늘이나 내일), 직원에 대해(우리), 장소에 대해(도시), 기간에 대해(일년을 유하며), 할 일에 대해(장사하여), 예상되는 결과에 대해(이를 보리라) 생각했습니다. 이 예화에서 빠진 것이 무엇입니까? 그는 한번도 그의 사업에 하나님을 개입시키지 않았습니다. 생활 가운데 우리가 미래에 대한 계획을 잡는 것이 필요하지만, 자기 뜻대로 세우는 계획은 악한 것입니다. "우리가 ~할 것이다" 이나 "나는 ~할 것이다" 이라고 말하는 것이 죄의 본질입니다. 예를 들어, 이사야 14:13에서는 루시퍼가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별 위에 나의 보좌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좌정하리라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 지극히 높은 자와 비기리라 하도다" 라고 하였습니다.

   마치 내일이 확실한 것처럼 계획을 세우는 것은 잘못입니다. "내일...하지 말며" (잠 3:28). 우리는 내일 무슨 일이 있을지 알지 못합니다. 우리의 삶은 "내뿜어진 연기" (필립스 역)처럼 덧없고 장래를 알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계획에 참여하셔야만 하며, 주님의 뜻 안에서 그 계획이 수립되어야 합니다(15절). 우리의 운명이 주님의 통제 안에 있다는 깨달음 가운데 살기도 하고 말도 해야 합니다. 우리는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라" 고 말해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에서 사도 바울이 '...만일 하나님의 뜻이면 너희에게 돌아오리라" (행 18:21)고 말하는 것을 볼 수 있으며 또한 고린도전서 4:19에서는 "주께서 허락하시면 내가 너희에게 속히 나아가서..." 라고 썼습니다. 때로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 의탁한다는 의미로 D.V.(디 브이)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이 글자는 라틴어 데오 볼렌트(Deo volent)의 첫 글자로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입니다. 

   "이제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자랑하니"(16절)라고 야고보는 말하고 있습니다. 그 그리스도인들은 미래에 대한 허황된 계획으로 스스로 자랑하였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계획을 방해할 아무 것도 없다는 것에 만족감으로 거만해졌습니다. 그들은 마치 자신이 운명의 주인인 것처럼 행동했습니다. 이 모든 자랑은 하나님을 떠난 것이므로 악한 것입니다.

   "이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니라"(17절).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선을 행하는 것은 우리 삶의 모든 상황에 하나님을 개입시키며, 삶의 매 순간마다 주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하지 않으면 그것은 명백한 범죄입니다. 물론 이 원리는 넓게 적용한 것입니다.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서 우리에게 선을 행할 기회가 주어지는 것은 선을 행할 책임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무엇이 옳은지 안다면 그 빛에 따라 생활할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 이웃에 대해, 자신에 대해 죄를 짓는 것입니다.

   4장에서 야고보는 탐욕과 다툼, 비방 그리고 주님께 묻지 않고 계획을 세우는데 대해 주의하는 것으로 우리를 시험하였습니다. 이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자신에게 해야 합니다. 나는 늘 더 많은 것을 가지려고 애쓰고 있습니까? 아니면 내가 가진 것으로 만족하고 있습니까? 나보다 더 많이 가진 사람들을 시기하고 있습니까? 나는 무엇을 사기전에 기도합니까? 하나님께서 내게 말씀하실 때 나는 순복합니까 아니면 반항합니까? 나는 형제들에 대해 좋지 않은 말을 합니까? 나는 주님께 묻지 않은 채 계획을 세웁니까?

Posted by 행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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