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 H. 매킨토시의
완전한 구원
4장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말미암아
"나의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 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 오리라" (요 13:36)
요단강에 제시되어 있는 예표적인 교훈들을 묵상하면 할수록 우리가 상고하고 있는 관점에서 그리스도인의 위치에 대해 우리는 더욱 분명히 보게 됩니다. 요단강이 죽음을 의미한다고 할 때 우리는 그것을 꼭 체험해야만 하는데, 그렇다면 우리의 전망은 암울하기만 할 것입니다. 죽음은 죄의 삯입니다. 죄는 사망의 쏘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죽음을 대면해야만 한다면, 그것은 참으로 두렵고 떨리는 일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 감사합시다.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위대한 모형인 언약궤가 앞서 요단강으로 들어가서 요단강의 세찬 흐름을 막았고 우리의 발이 마른 땅을 걷도록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하늘에 속한 유업을 얻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생명의 주님이 우리를 대신해서 사망의 권세를 가진 자를 멸했습니다. 주님은 사망에게서 그 쏘는 것을 제해버리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죽음이라는 방법을 통해 죽음을 정복하셨고 우리는 바로 그 방법을 통해 영으로, 또 믿음으로 참된 하늘의 가나안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모형을 통해 어떻게 계시되었는지를 알아봅시다. 이스라엘 관원들에게 내려진 다음의 명령을 주목해보십시오.
"너희는 레위 사람 제사장들이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언약궤 메는 것을 보거든 너희 곳을 떠나 그 뒤를 좇으라" (수 3:3)
언약궤가 앞서 가야만 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언약궤가 앞에서 사라질 때까지 그 신비한 길을 따라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너희가 그 사이 상거가 이천 규빗쯤 되게 하고 그것에 가까이 하지는 말라 그리 하면 너희 행할 길을 알리니 너희가 이전에 이 길을 지나보지 못하였음이니라"(수 3:4)
그 길은 아무도 모르고, 아무도 가보지 않았던 길이었습니다. 어느 인간도 무사히 지나갈 수 있는 길이 아니었습니다. 죽음과 멸망만이 있는 길이었습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히 9:27)
공포의 대왕 앞에 설 자가 누구입니까? 누가 잔인하고도 두려운 원수를 대면할 수 있단 말입니까? 누가 요단강의 창일함에 맞설 수 있겠습니까? 가련한 베드로는 자신이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실패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라고 물었고 예수님께서는 "나의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 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 오리라" (요 13:36)고 대답하셨습니다.
이 구절들은 이스라엘과 언약궤 사이에 놓인 신비스러운 "거리(space)" 의 중요성에 대해 얼마나 잘 설명하고 있는지요! 베드로는 이런 거리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아마도 여호수아 3장 4절을 제대로 공부하지 않은 듯합니다. 베드로는 자기의 복되신 주님께서 이제 막 들어가시려는 그 끔찍스러운 길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를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 (요 13:37)
오 가련한 베드로! 그는 자신에 대해서 또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그는 진지한 사람이긴 하지만, 분명한 것은 자신이 할 수 있다고 생각한 일에 참으로 무지했던 것을 봅니다. 멀리서도 들리는 사망의 엄몰하는 강물 소리만으로도 그는 공포에 질려 자신이 이제 곧 주님을 모른다고 저주하고 맹세할 사람임에 대해 전혀 상상도 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가 나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겠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닭 울기 전에 네가 세번 나를 부인하리라" (요 13:38)
"그러나 너희와 그 사이 상거가 이천 규빗쯤 되게 하고" (수 3:4)
이 얼마나 필요한 일인지요! 참으로 절대적으로 필요한 일입니다! 참으로 베드로와 주님 사이에는 "거리" 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앞서 가셔야만 했습니다. 주님은 가장 두려운 형태로 죽음을 맞으셔야만 했습니다. 주님은 극심한 외로움 속에서 아무도 가본 일이 없는 길을 걸으셔야만 했습니다. 과연 누가 그러한 주님과 동행할 수 있었을까요?
"그러나 너희와 그 사이 상거가 이천 규빗쯤 되게 하고 그것에 가까이 하지는 말라 그리 하면 너희 행할 길을 알리니 너희가 이전에 이 길을 지나보지 못하였음이니라" (수 3:4)
"나의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 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 오리라" (요 13:36)
주님을 찬송하십시다! 주님은 자신이 그 길을 앞서 가보기 전에, 연약하기 그지없는 자기의 종들이 그 두려운 길에 들어서는 것을 허락하실 수가 없으셨습니다. 그래서 그 길의 성격을 전적으로 바꾸셔서 사망의 길에 도리어 생명과 썩지 아니할, 즉 불멸의 광선이 비추도록 하셨던 것입니다. 즉 우리 주 예수님은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셨습니다.
따라서 사망은 이제 신자에게 더 이상 사망이 아닙니다. 사망은 예수님께 격렬하게, 큰 두려움으로, 그리고 실제적으로 임했습니다. 주님은 사단이 인간의 영혼에게 휘두를 수 있는 힘과 권세에 준하는 사망을 맛보셨습니다. 주님은 죄에 부과되는 형벌로서 죽음을 맛보셨습니다. 주님은 죄에 대한, 그리고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인 죽음을 받으셨습니다. 주님은 사망에 이를 만한 조금의 모양도, 조금의 흠도, 조금의 잘못도 없으셨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이 모든 것을 다 경험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찬송합시다. 주님 안에서, 그리고 주님을 통해서 이 모든 것을 우리가 직접 받은 것으로 여김을 받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죽었습니다. 따라서 사망은 이제 더 이상 우리를 주장하지 못하며 그 권세를 행사하지 못합니다. 모든 신자들에게 있어 사망은 그 힘을 잃고, 그 권세는 깨어졌으며, 영원히 사라졌습니다. 사망은 이제 우리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졌고, 오직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으로 충만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베드로의 경우에, 우리는 요한복음 마지막 장에서 주님이 자기 종의 마음의 갈망을 매우 은혜로운 방법으로 어루만져 주시는 것을 봅니다. 베드로는 온전히 충성하고 싶었고 그 마음에 자신의 사랑하는 주님을 죽기까지 따르고 싶었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요 21:18,19)
이제 베드로에게 죽음은 하나님의 심판이기 때문에 두렵고 떨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으로 하여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수단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입니까! 이 얼마나 위대한 신비입니까! 이 얼마나 십자가를 높이는 일이며, 또한 거기에 달리신 주님을 영광스럽게 하는 것인지요! 한 가련한 죄인이 죽음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다니, 이 얼마나 위대한 계시인지요! 사망은 이제 그 쏘는 것이 완전히 제거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성격이 완전히 변화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죽음에 대해 두려운 마음으로 움츠러들 필요가 없습니다. 만일 사망이 우리에게 닥친다 할지라도 우리는 승리의 노래를 부르며 맞이할 수 있습니다. 사망은 이제 우리에게 더 이상 감당하기 어려운 죄의 삯이 아니라, 도리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수단이 되었습니다.
우리를 위해 이 모든 일을 이루신 주님께 모든 찬송을 돌립시다. 주님은 우리를 위해 요단강의 가장 깊은 곳까지 내려가셨습니다. 그리고 구속함을 받은 자기 백성들로 하여금 하늘 유업을 얻을 수 있도록 그곳에 새롭고 산 길을 만드셨습니다! 우리의 마음으로 주님을 찬송합시다. 우리 모든 힘을 다해 그분의 거룩한 이름을 찬미합시다 우리의 전체 삶을 주님을 찬송하는데 온전히 드립시다.
여호수아서를 좀 더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여호수아가 또 제사장들에게 일러 가로되 언약궤를 메고 백성 앞서 건너라 하매 곧 언약궤를 메고 백성 앞서 나아가니라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오늘부터 시작하여 너를 온 이스라엘의 목전에서 크게하여 내가 모세와 함께 있던 것같이 너와 함께 있는 것을 그들로 알게 하리라" (수 3:6,7)
여호수아는 성령의 능력 안에서 자기 백성을 인도하여 하늘 기업을 얻도록 하시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모형으로 우리 앞에 서있습니다.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이 요단강 속으로 들어간 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친히 죽음을 경험하시고, 사망 권세를 완전히 깨뜨리신 것을 예표합니다.
"주님이 사망의 어둡고
맹렬한 강물 속으로 들어가신 것은
우리의 안전을 확실히 하기 위함이라네."
하나님은 우리를 안전하게 하셨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말미암아 이제 우리의 영과 믿음을 통해서 매일의 삶에서 우리의 안전이 실제적인 사실이 되도록 인도하십니다.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되 이리 와서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하고 또 말하되 사시는 하나님이 너희 가운데 계시사 가나안 족속과 헷 족속과 히위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여부스 족속을 너희 앞에서 정녕히 쫓아내실 줄을 이 일로 너희가 알리라 보라 온 땅의 주의 언약궤가 너희 앞서 요단으로 들어가나니" (수 3:9-11)
언약궤가 요단강 속으로 들어간 것은 두 가지를 나타냅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 살아계신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내주고 또 다른 하나는, 하나님께서 그들에 앞서 모든 대적을 확실히 쫓아내실 것을 나타냅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이러한 우리의 믿음에 대한 모든 근거와 보증입니다. 여기서 우리에게 주는 가장 큰 교훈은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사망 속으로 내려가셨다는 것이고, 이 한 가지 위대한 사실을 통해서 모든 것이 안전하게 되었다고 확신 있게 말할 수 있게 된 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또한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십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롬 8:32)
불신앙은 "하나님이 과연 그렇게 하실까?" 하고 의심하는 것이라면, 참된 신앙은 "하나님이 어찌 그러실 수 없단 말인가?" 하고 도리어 반문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 앞에 있는 가나안 모든 족속들을 어떻게 쫓아낼 수 있을지 염려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염려를 그치고 요단강 한 가운데 있는 언약궤를 바라보아야 했습니다. 우리는 염려하지 않을수록 더 큰 믿음 속으로 들어갑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는 것을 보면서, 우리가 믿지 못할 이유가 무엇이 있겠는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를 위해 자기의 독생자를 아끼지 아니하시고 내어주신 하나님이시기에, 우리를 위해서라면 너무 좋아서, 너무 위대해서, 너무 영광스러워서 못하실 것이 없으신 하나님이십니다. 모든 것이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죽음을 통해서 우리를 위해 확보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영원한 수문을 활짝 열어 놓았습니다. 따라서 그 풍성한 사랑의 강물줄기가 우리 영혼의 깊은 곳까지 흘러넘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유일한 독생자를 우리를 위해 그 저주받은 나무에서 아끼지 아니하셨던 하나님이 이제 우리의 모든 필요를 채워주시고,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돌아보시며, 우리를 위해 쌓아두신 하나님의 영원한 은혜의 섭리를 우리로 하여금 소유케 하시고, 또한 누리도록 하실 것이란 달콤한 확신으로 우리의 마음을 충만하게 하십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처럼 놀라운 사랑의 증거를 주신 하나님께,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하나님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신 복스러운 주님과 연합된 자로 우리를 보시는 하나님께 이제 우리가 받지 못할 것이 그 무엇이 있을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 가운데 있는 언약궤를 보았을 때, 그들은 모든 것이 안전하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참으로 그들은 그런 확신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주신 기업 위에 자신의 발을 친히 내디뎌야만 했습니다. 사망의 흑암한 강물을 멈추게 한 능력은 또한 그들 앞에 있는 모든 대적을 내쫓을 수 있었고 또한 하나님이 약속하신 모든 유업을 평안한 중에 소유하도록 해줄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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