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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5.09.06 야고보서- 제2과 살아있는 말씀

          야고보서


                           제2과

                                        살아있는 말씀(야고보서 1:18-27)


   야고보는 하나님을 빛들의 아버지라고 말하였습니다. 이제 그는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이심을 상기시켜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수많은 창조물 가운데서 사람에게 특별한 임무를 주셨습니다. 그 임무를 이루기 위해 우리는 진리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19-27절).


성경과 영적 생활(1:18)


   이 구절은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사용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새로운 출생에서 어떠한 역할을 하는지 한마디로 나타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좇아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자기의 뜻을 좇아-이 말씀은 무엇이 우리를 구원하도록 하나님을 자극하였는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 있는 어떤 가치 때문에 우리를 구원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자신의 자유의지에 따라 역사하신 것입니다. 우리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사랑은 분에 넘치는 것이며,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이고, 우리가 구하지도 않은 것입니다. 그 사랑은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자원하셔서 베푸신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낳으셨느니라-새로운 출생의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낳으셨습니다. 이 영적 출생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출생은 깨어질 수 없는 관계이기 때문에 이러한 관계는 결코 변하지 않습니다. 진리의 말씀으로-성경은 새로운 출생을 위한 도구입니다. 모든 진정한 회심은 말에 의해서든 활자에 의해서든 성경말씀과 관련이 있습니다. 성경을 떠나서는 구원의 길을 알 수가 없으며, 사실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조차도 알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 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첫 열매라는 말과 연관된 세 가지 중요한 사상이 있습니다. 첫째로, 추수의 첫 열매는 처음 거둔 곡식단입니다. 야고보가 쓴 편지는 기독교 세대 중 처음 신자들에게 보내는 것이었기에 그들이 첫 열매들이었습니다. 물론 모든 신자들이 하나님의 조물 중 첫 열매들이지만, 우선적으로는 야고보가 서신을 보내는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에게 해당되는 것입니다. 둘째로, 첫 열매는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고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인정하면서 하나님의 호의에 감사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신자들은 자신을 하나님께 산 제물로 드려야 합니다(롬 12:1,2). 셋째로, 첫 열매는 완전한 추수가 시작될 것을 보증하는 것입니다. 야고보는 이 편지를 읽는 사람들을 그리스도 추수의 첫 곡식 단으로 비유했습니다. 그 후 수세기 동안 다른 사람들이 그들의 뒤를 따르게 되겠지만 그들은 새로운 피조물의 열매를 나타내는 성도들의 모형으로서 설명되었습니다. 결국 주님께서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그들처럼 온 세상에 거하실 것입니다(롬 8:19-23). 완전한 추수는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 임하게 될 것입니다. 그때까지 그들은 천년왕국 때에 온 세상이 그리스도께 복종하는 것과 동일한 복종을 그리스도께 하는 것입니다. 비록 이 구절이 우선적으로 1세기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적용되는 것이지만 그리스도의 이름을 높이는 우리 모두에게도 적용되는 것입니다.


말씀에 대한 우리의 책임(1:19-27)


   1장의 남은 구절들은 우리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조물 중 첫 열매가 될 수 있는지에 대해 실제적인 교훈을 하고 있는데, 진리의 말씀으로 거듭난 자들의 특징이 되어야 하는 실제적인 의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진리를 드러내기 위해 말씀으로 말미암아 출생한 것을 알았다면 이제 또한 우리의 책임을 다해야 합니다.

   듣기는 속히 하라(19절)는 말씀은 거의 익살에 가까운 평범하지 않은 명령입니다. 이 말씀은 "서둘러서 들으라" 는 말과 같습니다. 물론 그 의미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과 같은 모든 경건한 충고와 훈계를 들을 준비를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령님께 배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말하기는 더디하라. 야고보는 놀랍게도 우리의 언어생활에 대해 매우 많이 언급하고 있는데 특히 우리의 말하는 것을 조심하도록 경고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신체도 우리에게 그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사람의 입은 하나이지만 귀는 둘이다. 때문에 우리가 말하는 것의 두 배로 다른 사람의 말을 들어야 한다" -에픽테투스. 솔로몬도 야고보와 같은 마음이었습니다. 그는 "말이 많으면 허물을 면키 어려우나 그 입술을 제어하는 자는 지혜가 있느니라"(잠 10:19)고 말하였습니다. 무리하게 말하는 자는 결국 죄를 짓게 됩니다.

   성내기를 더디해야 합니다. 쉽게 분내는 사람은 하나님이 그 자녀들에게서 기대하시는 의를 이루지 못합니다(20절). 불끈 화를 내는 사람은 사람들에게 기독교에 대한 잘못된 인상을 심어주게 됩니다.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잠 16:32)는 말씀은 여전히 사실입니다.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조물 중 첫 열매로서 나타내는 또 다른 방법은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어버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악은 단번에 벗어버리는 더러운 옷으로 비유되었습니다. 더러움은 영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모든 정결치 못한 것을 포함하는 것입니다. "넘치는 악" 이란 우리의 회심치 않은 때로부터 이어져온 악의 모습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그 죄악은 아마도 우리의 삶에서 넘쳐서 다른 사람의 삶에 악한 영향을 미치는 죄를 말하는 것이든지 또는 아주 많은 악을 말할 수도 있는데 야고보서의 경우에는 악이 넘치는것을 설명한다기 보다는 악이 가지고 있는, 격렬하게 악을 행하는 특성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를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도덕적으로 깨끗해야만 합니다.

   거룩한 진리를 받아들이기 위한 또 다른 요구사항은 온유입니다. 성경말씀을 자신에게 적용시키지 않고도 성경을 읽을 수 있습니다. 또한 성경말씀에 감동을 받지 않고도 얼마든지 학문적으로 성경을 연구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교만과 완고함과 죄는 우리를 무디고 무감각하게 만듭니다. 오직 복종하는 겸손한 사람만이 성경으로부터 가장 많은 유익을 얻어낼 수 있습니다. "온유한 자를 공의로 지도하심이여 온유한 자에게 그 도를 가르치시리로다" (시 25:9).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나의 말을 인하여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권고하려니와" (사 66:2).

   야고보는 성경말씀을 "능히 너희 영혼을 구원할 바 마음에 심긴 도" 라고 말하였습니다. 권위역 성경은 이 구절을 "너희 영혼을 구원할 수 있는 접붙여진 말씀" 이라고 하였는데 이 번역에 의하면 야고보는 회심때에 그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접붙힘으로 그 신자가 연합되고 견고케 되는 것으로 본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많은 번역성경들은 "심기워진 말씀" 으로 묘사하는 것을 더 좋아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그리스도인이 거듭날 때 그의 삶 속에서 거룩한 보증이 된다는 견해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은  "능히 너희 영혼을 구원"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새로운 출생 시에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도구입니다. 하나님은 성경을 사용하셔서 우리의 영혼을 죄의 형벌에서 뿐 아니라 죄의 권세에서 구원해 주시고, 우리를 영원한 지옥 형벌에서 구원해 주실뿐 아니라 이생에서의 역경에서도 구원해 주십니다. 이 현재형은 야고보가 21절에서 말한 구원의 계속적인 면을 말하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마음에 심긴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 말씀에 순종해야만 합니다(22절). 성경을 가지고 있다거나 그 글을 읽는 것에는 아무 힘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 듣기를 간절히 원하며 그 하신 말씀을 의심 없이 기쁨으로 행해야 합니다. 우리는 성경말씀을 행동으로 옮겨야 합니다. 그 말씀이 우리의 삶 속에서 육신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삶을 더 나은 삶으로 바꾸신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은 채 성경을 읽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사랑을 고백하고 성경 학도의 자세를 취하는 것이 우리로 하여금 주 예수님을 닮아가게 하는 말씀의 지식을 점점 많게 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하나의 자기 기만의 모습에 불과합니다. 성경말씀에 순종하지 않은 채 성경에 대한 지적인 지식만을 얻으려고 하는 것은 복이 아니라 덫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 것을 늘 배우지만 그것을 행하지 않으면, 침체되고, 낙심되고, 무감각하게 됩니다. "표현 없는 감동은 낙심을 가져온다". 우리 역시 하나님 앞에서 더 책임 있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성경을 읽고 그것에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것은 이상적인 결합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그 행동에 변화가 없는 사람은 매일 아침 거울을 보고서 그 본 것을 완전히 잊어버리는 사람과 같습니다(23, 24절). 그가 거울을 본 아무런 효과도 얻어내지 못한 것입니다. 물론 우리의 모습 중에는 전혀 바꿀 수 없는 것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최소한 보이는 것만이라도 복종해야 합니다. 거울을 보고 "씻어야지" 또는 "면도해야지" 또는 "머리를 빗어야지" 또는 "이를 닦아야지" 라고 깨닫게 되면 우리는 최소한 그 본 것은 행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거울 본 것이 아무런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무심코 성경을 보거나 그 읽는 것에 아무런 감동도 받지 않은 채 의무감으로 성경을 읽기가 쉽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을 보았지만 속히 잊어버리고 자신이 이미 온전한 자인것처럼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기만족은 영적인 발전을 방해합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어떤 사람은 성경을 읽고서 그 실천적인 부분에 습관적으로 복종합니다(25절). 그의 깊은 묵상은 그의 삶에서 실천적인 결과를 낳게 합니다. 그에게는 성경이 자유케 하는 온전한 율법이기에 그 교훈들이 무거운 짐이 아닐 뿐만 아니라, 성경이 하라고 말하는 것은 정확히  그의 새 성품이 좋아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가 성경의 가르침에 순종할 때, 인간의 전통과 세상적인 논리로부터의 참된 자유를 발견하게 됩니다. 진리가 그를 자유케 하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성경에서 유익을 얻은 사람이며, 읽은 것을 잊어버리는 자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는 날마다 실천하는  중에 성경을 나타내는 삶을 살려고 애쓰는 사람입니다. 그가 단순하고 어린아이 같이 순종하므로 그의 영혼에 셀 수 없는 복을 받습니다. "이 사람이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

   26절과 27절에는 헛된 경건과 순전한 경건이 대조되어 있습니다. 여기서의 경건은 경건한 믿음과 영관된 외적인 행동의 모습들을 의미하는 것으로 내적인 영성보다는 외적인 모습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또한 교리들에 대한 믿음보다는 예배와 봉사에 있어서 믿음에 대한 외적인 표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스스로 경건하다고 생각하면서 그 혀를 제어하지 못한다면 그의 경건은 헛되고, 쓸데없는 것입니다. 그가 모든 종교적인 절기들을 지킴으로 매우 독실한 사람처럼 보이더라도 그는 자신을 속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식으로 만족하시는 것이 아니라 경건을 실천하는 삶에 관심을 두십니다.

   재갈먹이지 않은 혀만 헛된 경건을 나타내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단지 한 예일 뿐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믿음과 모순된 모든 행동은 무가치한 것입니다. 다음은 속이는데 능한 독실한 잡화상인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는 자기 가게의 위층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매일 아침 점원에게 이렇게 외쳐댑니다.


   "제임스!"

   "예!"

   "우유에 물을 섞었나?"

   "물론입니다"

   "버터에 색을 입혔나?"

   "그렇습니다"

  " 커피에 치커리를 섞었나?"

   "다 했습니다".

   "아주 잘했어, 아침 기도 드리러 올라오게나".


   야고보는 이러한 경건은 헛된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찾으시는 경건은 다른 사람을 불쌍히 여기며, 자신의 삶을 정결하게 유지하는 실제적인 경건입니다.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의 본으로서 야고보는 과부와 고아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사람에 대해 칭찬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거듭남을 실제적으로 드러내는 것은 "은혜로운 행위와 분리된 행동들" 이라는 것입니다. 가이 킹(Guy King)은 이러한 덕을 실제적인 사랑과 실제적인 거룩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이 단원을 마치면서 다음의 질문들로 우리의 믿음을 시험해 보아야 합니다. 나는 성경을 읽을 때 하나님께서 나를 책망하시고, 가르치시고, 변화시켜 주시도록 겸손한 마음을 가집니까? 나는 내 혀를 재갈 먹이기 원합니까? 나는 분내는 것을 정당화합니까? 아니면 분을 이기기를 원합니까? 어떤 사람이 음탕한 농담을 시작하면 나는 어떻게 반응합니까? 나에게 보답하지 못할 사람에게 친절을 베풂으로 나의 믿음을 나타냅니까?

Posted by 행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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