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 H. 매킨토시의
완전한 구원
5장
참된 영적 길갈의 체험을 위한 권고
완전한 구원이란 주제를 마치면서 우리의 관심을 집중해 온 이 메시지의 실제적인 적용에 대해서 우리는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만일 에수님이 우리를 위해 죽으신 것이 사실이라면, 물론 사실이지만, 우리도 그분 안에서 죽은 것 또한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다음의 시는 이것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나를 위해 주 예수님, 당신이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나 또한 당신 안에서 죽었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다시 살아나셨고,
나를 묶었던 속박을 모두 풀어주셨습니다.
이제 당신은 내 안에 살아계십니다.
아버지의 얼굴에 있는 은혜의 밝은 광채
이제 나를 향해 밝게 빛납니다."
이제 이것은 더할 나위 없는 위대한 실제적인 진리입니다. 이 진리는 기독교의 참된 기초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우리의 모든 옛 상태로부터, 또한 거기에 속한 모든 것으로부터 우리를 완전히 건져내셔서 전적으로 새로운 위치로 옮기셨습니다. 우리는 부활의 땅에서 사망의 어두운 강물을 뒤돌아 볼 때 생명의 주님이 우리를 위해 이루신 승리의 기념비를 그 강물의 가장 깊은 곳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이제는 사망이 우리 앞에 놓여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다만 그것을 되돌아볼 뿐입니다. 우리는 참으로 "사망의 두려움이 내게서 지나갔다."고 말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서 가장 끔찍한 상태로 사망을 맛보셨습니다. 이 사실은 마치 요단강이 가장 무서운 상태에 있을 때 강물이 갈라진 것과 같습니다.
"요단이 모맥 거두는 시기에는 항상 언덕에 넘치더라" (수 3:15)
우리 주님도 우리의 마지막 원수인 사망을 대면하시고, 가장 무서운 상태에 있는 그 원수를 정복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망의 어둡고 음울한 지경의 한 복판에서 밝게 빛나는 영광스러운 승리의 기록을 남겼습니다. 모든 찬송과 존경과 찬미가 우리 주님의 비할 데 없는 이름에게 돌려지기를! 우리가 영과 믿음을 통해 요단강의 가나안쪽에 서서, 우리의 참된 여호수아이신 구주께서 우리를 위해 이루신 일을 기념하는 것은 우리의 특권입니다.
"온 백성이 요단 건너기를 마치매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일러 가라사대 백성의 매 지파에 한 사람씩 열두 사람을 택하고 그들에게 명하여 이르기를 요단 가운데 제사장들의 발이 굳게 선 그곳에서 돌 열 둘을 취하고 그것을 가져다가 오늘밤 너희의 유숙할 그 곳에 두라 하라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매 지파에 한 사람씩 예비한 그 열두 사람을 불러서 그들에게 이르되 요단 가운데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궤 앞으로 들어가서 이스라엘 자손들의 지파 수대로 각기 돌 한 개씩 취하여 어깨에 메라 이것이 너희 중에 표징이 되리라 후일에 너희 자손이 물어 가로되 이 돌들은 무슨 뜻이뇨 하거든 그들에게 이르기를 요단 물이 여호와의 언약궤 앞에서 끊어졌었나니 곧 언약궤가 요단을 건널 때에 요단 물이 끊어졌으므로 이 돌들이 이스라엘 자손에게 영영한 기념이 되리라 하라" (수 4:1-7)
이스라엘 백성의 온 회중은 위대한 일이 일어났음을 잊지 말아야 했고 또한 실제적으로 그 일을 기념해야 했습니다. "매 지파에 한 사람씩", 제사장들의 발이 굳게 선 바로 그곳에서 돌들을 취하여 "이스라엘 자손들의 지파 수 대로 각기 돌 한 개씩 취하여 어깨에 메도록" 한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은 요단강물의 흐름이 끊어지는 놀랍도록 신비한 사건을 각 개인의 살아 있는 체험으로 맛보아야 했습니다. 모든 백성들은 후일에 그들의 자손들이 이것이 무슨 뜻인지 물어야만 하는 기념비적인 사건에 참여하고 있었습니다. 이 일은 결코 잊어버려서는 안 되는 사건이었습니다.
여기에 얼마나 놀라운 교훈이 있는지요! 우리 또한 과연 이 기념비적인 사건을 경험한 적이 있습니까? 어린아이의 마음에서 조차 충격을 받을 정도의 증거, 즉 우리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신 사실을 나타내는 증거가 있습니까? 우리의 매일의 삶 속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고, 우리 또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는 실제적인 어떤 증거가 나타나고 있습니까?
"각기 돌 한 개씩 취하여 어깨에 메라"는 말씀에 나타난 교훈을 따라 우리의 실제적인 삶 속에 날마다 응답하는 것이 있습니까? 우리는 이미 요단강을 건넜으며 이제 하늘에 속한 사람, 곧 육신에 있지 않고 성령 안에 있는 사람임을 분명히 선언할 수 있습니까? 과연 우리의 자녀들이 우리의 습관과 행동을 보면서, 우리의 정신과 태도를 보면서, 우리의 전체 인격과 삶의 방식을 보면서, 자연스럽게 "이러한 것들이 무슨 뜻입니까?" 하고 질문할 만한 것이 있을까요? 우리는 진정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기에 죄에 대하여 또 세상에 대하여 죽은 사람처럼 살고 있습니까?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연합의 능력 안에서 실제로 세상에는 관심이 없이,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을 떠나보내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사랑하는 그리스도인 독자 여러분, 이러한 질문들은 우리 자신의 영혼을 살펴볼 수 있는 질문들입니다. 하나님 앞에 있는 것 같이 정직하게 이 질문들에 대답해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신앙을 입으로만 고백하며 또 이론적으로만 아는데 그치기가 쉽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우리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죽었다는 것을 믿는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 증거가 어디에 있습니까? 생생한 기억 속에 그 기념물이 있습니까? 당신 어깨 위에 짊어졌던 돌은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우리 자신을 판단해봅시다.
"우리가 죽었고 우리 생명이 하나님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감추어 있다"는 이 위대한 진리를 실천하는데 있어서 조금이라도 철저하지 못하거나, 실제적인 것이 아니거나, 습관적으로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면, 더 이상 느긋하게 만족하지 않도록 합시다. 단순히 입술로만 믿는다고 고백하는 것은 전혀 가치가 없습니다. 우리는 살아있는 능력, 즉 진리를 경험한 결과로 나타나는 실제적인 열매를 원합니다.
"정월 십일에 백성이 요단에서 올라와서 여리고 동편 지경 길갈에 진치매 여호수아가 그 요단에서 가져온 열두 돌 - 매우 특별한 의미가 있는, 다른 돌로는 그런 이야기, 그런 교훈을 말해 줄 수 없는, 또한 그렇게 엄청난 사실을 상징해줄 수 없는, 유일 무이한 돌 - 을 길갈에 세우고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일러 가로되 후일에 너희 자손이 그 아비에게 묻기를 이 돌은 무슨 뜻이냐 하거든 너희는 자손에게 알게 하여 아르기를 이스라엘이 마른 땅을 밟고 이 요단을 건넜음이라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요단 물을 너희 앞에 마르게 하사 너희로 건너게 하신 것이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 앞에 홍해를 말리시고 우리로 건너게 하심과 같았나니 이는 땅의 모든 백성으로 여호와의 손이 능하심을 알게 하며 너희로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영원토록 경외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라" (수 4:19-24)
이제 우리는 길갈에 있는 이스라엘 민족을 봅니다.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명하사 백성에게 이르게 하신 일 곧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명한 일이 다 마쳐졌습니다. 이스라엘 벡성 모두가 다 요단을 건넜고, 단 한사람도 죽음의 강이 감히 건드리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그들로 하여금 조상들에게 약속한 기업의 땅으로 모두 안전하게 들어가도록 했습니다. 그들은 홍해를 건넘으로써 애굽에서 분리되었을 뿐 아니라 요단강을 마른 땅처럼 건넘으로써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 여리고 평지인 길갈에 진을 친 것입니다.
이제 다음 구절들을 주목해보십시오. "요단 서편의 아모리 사람의 모든 왕과 해변의 가나안 사람의 모든 왕이 여호와께서 요단 물을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서 말리시고 우리를 건네셨음을 듣고 마음이 녹았고 이스라엘 자손들의 연고로 정신을 잃었더라" 이구절을 주목해야 합니다. 모든 족속들이 이스라엘 자손들에 대한 생각 때문에 극도의 두려움으로 마비될 지경이었습니다. " 그 때에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너는 부싯돌로 칼을 만들어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다시 할례를 행하라" (수 5:1-2)
이것은 얼마나 깊은 의미가 있는지요! "부싯돌로 만든 매우 날카로운 칼!" 은 얼마나 암시적이며 또 얼마나 필요한 것인지요! 만일 이스라엘 자손들이 가나안 사람들에게 칼을 사용해야 할 것 같으면, 먼저 자신들에게 이 날카로운 칼을 적용해야만 했습니다. 그들은 광야에서 할례를 받지 않았습니다. 애굽의 수치가 그들에게서 굴러가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들은 유월절을 기념하고, 또 가나안 땅의 소산물인 곡식을 먹기전에, 우선적으로 자신들에게 선언된 죽음을 경험해야만 했습니다. 분명 이일은 그들에게 기분 좋은 일은 아니었지만 반드시 실행되어야만 했던 일입니다. 애굽의 수치를 안고 있으면서 어떻게 가나안을 정복할 수 있을까요? 어찌 할례 받지 않은 백성들이 가나안 족속과 싸워 이길 수 있을까요? 불가능한 일입니다. 날카로운 칼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음식을 먹고, 또 전쟁을 수행하기 전에 이스라엘 진 전체에서 본연의 임무를 수행해야만 했습니다.
"여호수아가 부싯돌로 칼을 만들어 할례 산에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할례를 행하니라 여호수아가 할례를 시행한 까닭은 이것이니 애굽에서 나온 모든 백성 중 남자 곧 모든 군사는 애굽에서 나온 후 광야 노중에서 죽었는데 그 나온 백성은 다 할례를 받았으나 오직 애굽에서 나온 후 광야 노중에서 난 자는 할례를 받지 못하였음이라...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오늘날 애굽의 수치를 너희에게서 굴러가게 하였다 하셨으므로 그 곳 이름을 오늘까지 길갈이라 하느니라 이스라엘 자손들이 길갈에 진쳤고 그 달 십사일 저녁에는 여리고 평지에서 유월절을 지켰고 유월절 이튿날에 그 땅 소산을 먹되 그 날에 무교병과 볶은 곡식을 먹었더니 그 땅 소산을 먹은 다음 날에 만나가 그쳤으니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시는 만나를 얻지 못하였고 그 해에 가나안 땅의 열매를 먹었더라" (수 5:3-12)
우리는 여기에서 그리스도인의 완전한 지위에 대한 모형을 보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대하여 죽었고,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지금 그리스도께서 계신 그곳에서 그와 함께 연합한 하늘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동안 마음은 그리스도로 가득하고, 그리스도에 대한 묵상으로 새롭게 된 우리 영혼의 양식을 삼는 사람들입니다.
그러한 것이 그리스도인의 위치이며, 또한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분깃입니다. 하지만 충만한 기쁨 속으로 더욱 들어가려면 반드시 자연인에 속한 모든 것들에게 "날카로운 칼" 의 적용이 있어야 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옛 사람" 에게 사형선고가 내려져야 합니다.
우리가 만일 하늘에 속한 사람으로서 우리의 신분과 우리의 위치를 유지하고 또 누리려면 이 모든 것들이 실제적이고 현실적으로 이루어져야만 합니다. 우리가 만일 육신의 본성 가운데 살고 있다면, 우리가 만일 낮고 천한 세상의 분위기에 젖어 살고 있다면, 우리가 만일 이 세상을 추구하며 이 세상의 쾌락과 정치와 부귀와 세상적인 명예와 패션과 영예를 좇고 있다면, 그렇다면 부활하신 머리되신 주님과의 사귐을 갖는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여기서 독자들은 가나안 땅의 곡식이란 부활하시고 영화롭게 되신 그리스도의 모형임을 주목해야 합니다. 만나는 겸손 가운데 자신을 낮추신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겸비하신 그리스도를 기억하는 것은 우리 영혼에게 말로 표현할 수 없이 귀한 일입니다. 자신을 낮추셔서 겸손하시며, 또 자신을 비우신 주님의 본을 돌이켜 추억해보는 일은 참으로 달콤한 일입니다. 이것은 감춰진 만나 - 를 먹는 것과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영광 가운데 들어가신 그리스도는 그리스도인의 마음의 참된 목적과 대상입니다. 이 그리스도를 인해 행복하려면 악한 세상의 수치가 그리스도의 할례의 영적인 적용을 통해 우리에게서 떠나가야 합니다.)
그리스도는 하늘에 계십니다. 우리가 영으로 또 믿음으로 주님이 계신 그곳에서 살게 될 때, 그분을 누리게 됩니다. 주님은 이 세상에 속한 분이 아닙니다. 우리가 만일 세상에 속한 존재라면 우리는 결코 그리스도와의 사귐을 누릴 수 없습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두운 가운데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치 아니함이거니와" (요일 1:6)
이것은 매우 중대한 일입니다. 만일 내가 세상에서 세상에 속한자로 살고 있다면 나는 어두운 가운데 행하고 있는 것이며, 따라서 하늘에 계신 그리스도와의 사귐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복된 사도 바울은 "(그러므로) 너희가 세상의 초등 학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거든 어찌하여 세상에 사는 것과 같이 의문에 순종하느냐" (갈 2:20)고 말합니다. 우리는 진정 이 구절의 의미를 이해하고 있습니까? "세상에 사는 것과 같이" 라는 표현 속에 담긴 강력함의 무게를 느껴본 일이 있습니까?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사는 것과 같이 살면 안 되는 걸까요? 물론 안 됩니다.
그리스도인은 영으로 그리스도께서 계신 곳에서 살아야 합니다. 물론 그리스도인은 이 땅에 살면서 하나님이 그에게 허락하신 다양한 삶의 영역과 또 다양한 삶의 관계 속에서 움직이고 행합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의 본향은 하늘에 있습니다. 그의 생명도 하늘에 있습니다. 그의 목적, 그의 안식, 그의 모든 것이 다 하늘에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땅에 속한 존재가 아닙니다. 그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습니다. 매일의 실제 삶에서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대로 유지하려면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땅에 있는 자신의 지체를 죽여야 합니다.
이에 관한 모든 것들이 골로새서 3장에서 자세히 기록되어 있씁니다. 사실 다음 구절에서 제시하고 있는 것보다 "길갈" 의 참된 의미를 확연하게 드러내주는 것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골 3:1-4)
이제 우리는 "길갈"과 "날카로운 칼" 의 참된 영적인 의미와 적용 부분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골 3:5)
성령님께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우리의 위치, 우리의 분깃, 우리의 실제적인 삶에 대해 더 깊고 더 충만한 지혜를 우리에게 주시길 기도합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참된 영적인 길갈의 체험을 통해 가나안 땅의 곡식을 먹는 것이 무엇인지 더 많이 경험하도록 도우시길 빕니다. 그렇게 될 때, 우리는 우리가 부르심을 받은 영적인 전쟁과 신령한 봉사에 더욱 합당한 사람들로 변화될 것입니다. 아멘.
'믿음,신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그 후에는? (0) | 2016.02.19 |
---|---|
다시 찾은 배 (0) | 2016.02.18 |
C.H. 매킨토시의 완전한 구원- 4장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말미암아 (0) | 2016.02.16 |
C.H.매킨토시의 완전한 구원 - 3장 그리스도인은 하늘에 속한 사람 (0) | 2016.02.15 |
C.H. 매킨토시의 완전한 구원 - 제2장 죄와 사단과 세상으로부터의 해방 (0) | 2016.02.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