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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6.01.30 구원의 확신을 갈망하는 이들에게 - 제3장 큰 확신

                구원확신

                                             갈망하는 이들에게

                                                                    H. A. 아이언사이드


                                             제3장

                                         큰 확신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그들이 구원받은 결과로 그들의 지역에 이뤄진 하나님의 역사를 상기시키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너희 무리를 인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도할 때에 너희를 말함은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쉬지 않고 기억함이니,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 이는 우리 복음이 말로만 너희에게 이른 것이 아니라 오직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이니,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 어떠한 사람이 된 것은 너희 아는 바와 같으니라"(살전 1:2~5).

   이것은 매우 놀라운 선언입니다. 특히 오늘날 전도라는 이름 아래 행해지는 많은 일들과 뚜렷이 대조된다는 점에서 더욱더 놀랍습니다. 오늘날 수많은 교회들에게서 전해지는 설교의 경우, 영혼에 크게 번민하는 사람이 매년 설교를 듣고도 여전히 불확실한데 머무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것들은 청중에게 아무 확신도 주지 못하는데 반해, 바울의 설교는 큰 확신을 낳는 능력을 발했습니다.

   그의 설교를 들은 청중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몇 달 전만 해도 그들은 대부분 이교도 우상숭배자들로서 온갖 죄와 더러움 가운데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기독교 진리 안에서 전혀 양육 받지 못했습니다. 그들 중 소수는 유대인들로서 율법과 선지자에 대해 약간의 지식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은 무지한 이교도로서 미신적이고 자유분방한 생활에 탐닉했고 생명의 길을 전혀 알지 못햇습니다.

   그들에게 바울과 그 동료 순회 전도자들이 이르렀는데 그들은 그 삶으로 그 전하는 메시지의 능력을 입증하는 그런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성령을 의지하여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십자가에 못 박히심을 전파했습니다. 그들은 그분의 부활과 현재적인 구원의 능력을 증거했으며, 언젠가 그분이 다시 오셔서 산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것을 선언했습니다. 그것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입증되어 온 그 동일한 메시지였습니다.

   바울의 청중은 그들의 죄를 깨달았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삶의 죄악 됨을 인식했습니다. 그들은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이켰으며 그 들은바 복음을 믿었습니다. 그 결과는 어떠했습니까? 그들은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그들의 외적인 행동이 내적인 변화를 나타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어두움에서 빛으로 인도되었음을 알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그들을 받으셨다는 기쁨을 속으로 간직하고만 있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그들을 그분의 백성으로 삼으셨음을 알았습니다. 그들은 큰 확신이 있었습니다! 이보다 더 축복된 결과가 있을까요?

   오늘날 수많은 전도 사례가 이러한 축복된 결과를 맺지 못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까? 사람들이 평생 교회를 다니면서 결국에는 하늘에 갈 것을 막연히 기대하는데 머문다는 것은 확실히 뭔가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입니다!


   죽어가던 여자


   한 나이든 여자가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의사가 회생할 가망이 없다고 손을 놓았습니다. 목사가 마지막 임종을 지켜보도록 그녀의 병상으로 불려갔습니다. 그녀는 절망 중에 있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죄와 냉랭한 마음과 주님을 섬기는데 게을렀던 과거를 몹시 슬퍼했습니다. 그녀는 목사에게 하늘나라에 갈 확신을 심어달라고 애원했습니다. 목사는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그렇게 죽어가면서 구원의 확신을 갈망하는 사람은 만나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여러 성경구절을 뒤적이며 들려주었습니다. 그의 시선이 어느 대목에 머물렀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성령을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풍성히 부어 주사 우리로 저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후사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딛 3:5~7).

   그가 떨리는 목소리로 그 말씀을 읽는 동안 그 죽어가는 여자가 그 말씀을 받아들였습니다.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그녀가 소리쳤습니다.

   "오, 목사님, 바로 그거예요. 거기서 내가 안식할 수 있어요. 내 행위가 아니라 주님의 은혜를 믿는 거예요. 바로 그거예요. 이젠 평안히 죽을 수 있어요."

   그는 그녀와 함께 기도 드린 후에, 그 죽어가는 한 성도를 섬길 수 있는 은혜를 주신데 대해 감사하며 돌아갔습니다. 다시는 이 땅에서 그녀를 만나보지 못하겠지만 곧 그녀가 하늘 나라에 갈 것을 확신하며 위로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의사의 예상과 달리 그녀는 죽지 않고 그 시간 이후로 회복되어 몇 주 후에는 큰 확신으로 기뻐하는 행복한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그녀는 그 목사를 다시 만나서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죽음 직전에 내게 은혜를 베푸셔서 이렇게 건강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어떻게 보답해야 하죠?"

   목사가 대답했습니다.

   "자매님, 그저 그 은혜를 늘 마음에 새기고 그 안에서 즐거워하시기만 하면 됩니다."

   그것은 아주 합당한 답변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여러 해 동안 설교를 하면서 그 곤고한 영혼의 마음에 확신을 심어주지 못했다는 것은 참으로 슬픈 일이었습니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죄 사함에 대한 확신을 갖기 위해 임종 때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택하셨다는 사실이 그들 자신과 다른 이들에게 아주 실제적으로 증명되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그들의 삶에 어떤 은혜가 임했는지를 보았습니다.

   바울이 "우리 복음:, "내 복음"이라고 일컬은 것이 그 모든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우리는 그 복음이 어떤 것인지 추호도 의문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그가 다른데서 그 복음을 명백히 밝혔기 때문입니다. 그에게는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시고 장사되시고 다시 살아나셨다는 한가지 메시지뿐이었습니다. 그 메시지를 믿음으로 받아들인 것이 의심을 깨트리고 불확실함을 제거하고 큰 확신을 낳은 것입니다.

   물론 입술의 증거 뒤에는 삶의 증거가 있었습니다. 바울이 그들 가운데 보여준 삶의 모습은 영원의 세계에서 사는 그런 사람의 모습이었습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분명한 복음을 전파하는 그리스도의 거룩한 종은 열매를 맺게 마련입니다. 그런 사람은 사단의 견고한 성을 파하기 위한, 하나님의 손에 들려진 놀라운 무기입니다. 그러나 이 초대 성도들에게 확신을 준것은 전도자들의 경건함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에게 확신을 준것은 그들이 믿음으로 받아들인 메시지 그 자체였습니다.

   아무리 경건한 자로 보일지라도 어는 전도자의 인품에 인간의 영혼을 의지하려는 시도는 크나큰 잘못을 범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훌륭한 종이 아닌 그분의 변치 않는 말씀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종종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종을 흠모한 나머지 선포된 진리를 의지하는 대신 그 종을 의지하는 우를 범합니다.

   "당신은 영혼이 구원받은 것을 확신합니까?"라는 질문에 어떤 이는 "예, 모 전도자를 통해 구원받았어요!"라고 대답합니다.

   아마 그가 말한 모 전도자가 스스로 그리스도의 자리에 섰을 리 만무합니다. 대화를 더 나눠보니, 문제의 그 사람이 그 열정적인 전도자에게 마음이 빼앗겨 그와 나눈 "감동적인 악수"를 성령의 증거로 오해했던 것입니다. 사실 그는 모 전도자가 힘있게 외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어떤 생생한 감정적인 경험도 확신의 안전한 근거가 아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의 안전을 보증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피요, 우리의 확신을 보증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큰 확신-빅토리아 여왕이 그 문제를 해결하다


   방대한 대영제국을 장기간 통치했던 빅토리아 여왕에 대한 일화를 소개합니다. 그녀는 스코틀랜드 볼모럴 성에 기거했을 때 인근에 사는 주민들을 종종 찾아갔습니다. 주님을 믿는 한 연로한 스코틀랜드 여인이 여왕의 방문을 여러 차례 경험하는 영예를 입던 중 여왕의 영혼을 염려하게 되었습니다. 여왕이 스코틀랜드 체류 기간이 끝날 즈음 그 사랑스런 하나님의 자녀의 누추한 집을 마지막으로 방문했습니다. 여왕과 작별인사를 한 후, 이 늙은 스코틀랜드 여인이 주춤거리며 물었습니다.

   "폐하, 한가지 여쭤봐도 될까요?"

   "물론이죠." 여왕이 대답했습니다. "얼마든지 물어보세요."

   "여왕 폐하께서 하늘나라에서 저를 만나실 수 있을까요?"

   여왕이 즉시 대답했습니다. "예, 만날 수 있어요. 예수님의 보혈의 공로로요."

   이것이 확신의 유일한 안전한 근거입니다. 갈보리에서 흘린 피는 모든 사람들에게 동일한 효과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을 떠날 즈음, 마지막 무서운 재앙이 그 땅과 그 백성에게 임할 즈음, 하나님께서 친히 자기 백성에게 피할 길을 마련해주셨습니다. 그들은 양을 잡아 그 피를 문 인방과 문설주에 바르고 안에 들어가 문을 닫아야 했습니다. 멸하는 천사가 그 밤에 두루 다닐 때 피를 뿌린 문은 들어갈 수 없었는데 이는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라"고 여호와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집 안에는 두려워 떠는 이들도 있었고 기뻐하는 이들도 있었으나 모두가 안전했습니다. 그들의 안전은 그들의 마음상태나 감정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눈이 어린양의 피를 바라보며, 그들은 그 피 뒤에 숨어있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그분이 그 피에 관해 하신 말씀을 기억하고 확실히 믿는 한 그들은 큰 확신 가운데 있을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구속을 위해 갈보리에서 오래 전에 흘려진 피를 볼 수는 없지만, 그 피가 항상 하나님의 눈앞에 있다는 사실을 의식할 수는 있습니다. 회개한 죄인이 그리스도를 믿는 그 순간 그는 하나님 보시기에 피가 뿌려진 문설주 뒤에 숨은 자로 간주됩니다. 이와 같이 심판으로부터의 그의 안전은 거룩하신 분의 의로운 요구를 만족시킬 수 있는 그의 능력에 달려있지 않고, 그리스도 예수께서 자신을 우리 죄를 위한 대속물로 내어주시고, 또 그로써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악을 간과하고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의롭다 하실 수 있게 하심으로써, 그 의로운 요구를 온전히 만족시키셨다는 복스런 사실에 달려 있습니다.


   굽의 그 무서운 밤

   그 날밤 애굽에서 한 유대인 아이가 이렇게 생각한다고 가정해봅시다.

   "나는 이 집의 장자야. 그리고 오늘밤 수많은 집에서 장자가 죽어야 해. 나는 내가 안전하다고 확신할 수 있기를 바래. 하지만 나의 많은 허물을 생각하면 절망과 좌절을 느껴. 나는 다른 사람들은 죽어야 하는 이 와중에 내가 구원받을 만큼 선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나는 그 동안 고집이 셌고 불순종했고 믿지 못했어. 정말 오늘밤이 걱정돼. 과연 내일 아침빛을 볼 수 있을까."

   그의 걱정과 자책이 그를 심판에 내어줄 수 있을까요? 천만에요! 그의 아버지가 이렇게 말해줄 수 있습니다.

   "애야, 네가 네 자신에 대해 말한 것은 다 옳아. 우리 중 생각처럼 올바르게 산 사람은 아무도 없어. 우리는 다 죽어 마땅해. 그러나 어린양의 죽음이 너를 대신했어. 네 대신 어린양이 죽었잖아. 문 밖에 뿌린 어린양의 피가 너와 멸하는 자 사이에 있잖아."

   우리는 그 말에 그 아이의 얼굴이 밝아져서 이렇게 외치는 것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아, 맞아요! 나를 심판에서 구원하는 것은 내가 어떤 사람이냐가 아니에요. 피가 나를 구원해요. 나는 피 뿌린 문 뒤에 안전하게 숨어있어요."

   이제 그는 "큰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그 아들의 구속사역에 관해 하신 증거를 믿는 우리는 이제 우리가 모든 정죄에서 해방되었다는 것을 알고 평안으로 들어갑니다.

   아마 어떤 이는 이렇게 물을지 모르겠습니다.

  " 하지만 내가 어떤 사람인지는 하나님에게 아무 상관없지 않을까요? 구원은 받았지만 여전히 죄 가운데 살 수 있지 않을까요?"

   아닙니다. 절대로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진리의 또 다른 면으로 인도합니다. 어떤 사람이 복음을 믿는 순간 그는 다시 태어나고, 죄를 미워하고 거룩을 사랑하는 새 생명 내지 새 성품을 받습니다. 혹 당신은 예수께로 나와 그분을 믿었는데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한 것은 아닌지요? 당신은 과거에 얼마간 기쁨을 준 악한 일을 이제는 미워하고 거부하고 있지 않나요? 당신은 선을 위한 새로운 추구와 거룩을 향한 갈망과 의를 위한 갈증이 속에 있지 않나요? 이 모든 것은 새로운 성품이 당신 안에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리고 당신이 하나님과 동행할 때 날마다 내주하는 성령의 능력이 죄의 지배에서 당신을 실제적으로 건져주는 구원의 역사를 경험케 될 것입니다.

   이러한 측면의 진리는 당신의 구원의 문제에 영향을 끼치지 않습니다.그것은 당신이 구원받은 결과를 보여줍니다. 먼저는, 당신이 의롭게 되는 것은 당신이 행한 어떤 일 때문이 아니라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당신을 위해 행하신 일 때문임을 확실히 하십시오. 그러나 이제 당신을 위해 죽으신 그분께서 당신 안에서 역사하사, 날마다 그분을 닮아가고 또 경건한 삶을 통해 그분의 구원의 실제성을 드러내 보이게 하십니다.

   데살로니가 사람들은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며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심을 기다렸습니다"(살전 1:9,10). 하나님께로 돌아온 순간 그들은 주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과 온전한 부활의 생명 안에서 구원받고, 죄 사함 받고, 의롭게 되고, 하나님께 구별되었습니다. 그들은 사랑하는 자 안에서 열납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을 보셨습니다. 이 사실을 믿고 그들은 큰 확신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 문제가 해결되자 그들은 그들을 위해 그렇게 큰 일을 행하신 그분을 섬기기 위해 그들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산자처럼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위해 죽으신 분, 하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키사 지극히 높은 영광 중에 자신의 우편에 앉히신 그분의 다시 오심을 날마다 고대했습니다.

   합당한 섬김은 구원의 문제가 영원토록 해결되었음을 아는 지식에서 흘러나옵니다. 모든 자기노력과 상관없이 은혜로 구원받은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 행하게 하려 하심"입니다(엡 2:10).


   선행으로 구원받지 못한다


   우리는 선행에 의해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선행을 위해 구원받는 것임을 명심하십시오. 다시 말해서, 아무도 그리스도인의 생명을 소유하기 전에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이 생명은 거룩하고 영원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복음을 믿는 자에게 친히 부여하시는 생명입니다.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라고 사도 베드로가 말한 것과 같습니다(벧전 1:23~25).

   그러므로 새로운 출생은 복음의 말씀과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습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요 3:6). 이것은 주님께서 니고데모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그렇게 거듭난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며 결코 멸망치 않습니다. 어떻게 그것을 알 수 있을까요? 주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5장 24절의 보배로운 말씀을 주의 깊게 새기십시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그리고 그 말씀을 요한복음 10장 27~30절 말씀과 연결시키십시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요한복음 5장 24절에는 다섯 개의 연결고리가 있는데 모두 함께 연결되어 있습니다.

   "듣고"-"믿는"-"얻었고"-"이르지 아니하나니"-"옮겼느니라."

   이 단어들을 주의 깊게 연구하고 그 상호관계를 살펴보십시오. 그것들은 뗄 레야 뗄 수 없는 것들입니다. 좀 더 긴 요한복음 10장 본문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양들에 대한 말씀을 주목하십시오.

   (1) 그들은 그분의 음성을 듣는다.

   (2) 그들은 그분을 따른다.

   (3) 그들은 영생을 소유한다.

   (4) 그들은 멸망치 않는다.

   (5) 아버지와 아들의 손에서 아무도 그들을 빼앗지 못한다.


   이보다 더 큰 안전이 있을까요? 이보다 더 그 아들을 통해 하나님께로 나오는 모든 자의 완전한 구원을 확실히 보증해주는 말씀이 있을까요? 그분의 증거를 불신하는 것은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분의 기록을 믿는 것은 "큰 확신"을 소유하는 것입니다.

   혹 당신은 "믿으려고 노력해보겠습니다"라고 말하지는 않는지요? 누구를 믿으려고 노력한다는 말인가요? 자신의 말을 결코 철회하지 않으시는 살아 계신 하나님에 대해 감히 그런 식으로 말할 수 있나요? 만일 어떤 친구가 믿기 어려운 어떤 이야기를 들려준다면 "네 말을 믿으려고 노력해보겠어"라고 말하겠습니까? 그렇게 말하는 것은 그를 면전에서 모욕하는 셈입니다. 그런데 그 은사와 약속을 결코 취소하지 않으시는 진리의 하나님을 그렇게 대할 수 있을까요? 오히려 그분을 바라봅시다. 지난 모든 불신앙이 죄임을 자백하고 지금 그분을 믿읍시다. 그러면 당신이 구속받은 자 중 하나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몇 년 전 세인트루이스에서 어느 그리스도인이 어느구도자와 상담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구도자는 전도자의 초청을 받고 손을 들고 구원받고 싶다고 표하고 상담을 자청했습니다. 그 그리스도인은 그에게, 구원을 받으려면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고 하나님의 약속을 믿어야 한다는 것을 열심히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 구도자는 계속해서 "믿을 수 없어, 믿을 수 없어"라고 말했습니다.

   "누구를 믿을 수 없단 말이죠?" 그리스도인이 물엇습니다.

   "내가 누구를 믿을 수 없는 거죠?"라고 구도자가 되물었습니다.

   "그래요, 누구를 믿을 수 없단 말이죠? 하나님을 믿을 수 없다구요? 그분은 거짓말을 하실 수가 없어요."

   "맞아요," 구도자가 대답했습니다. "하나님이라면 믿을 수 있어요. 그런데 전에는 그 문제를 그런 식으로 생각해본 적이 없어요. 나는 늘 뭔가 감정이 따라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 사람은 하나님의 확실한 약속을 의지하는 대신 믿음을 감정으로 느끼려고 애써왔던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말씀하신 그대로 믿어야 한다는 것을 처음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믿고서 구원의 능력과 확신을 경험했습니다.


   "노력으로 구원 얻는 게 아니네.

   자아로부터는 아무 도움도 오지 않네.

   우리의 죄 값을 단번에 지불한 그 피를 의지하세.

   거룩하고 의로우신 예수님을 바라보고

   우리를 구원하는 그분의 위대한 사역을 바라보세.

   노력이 아니라 믿음일세.

   그리스도의 공로 위에 우리의 행위를 더할 수 없네.

   그리스도의 놀라운 보고(寶庫) 안에

   우리의 감정을 더할 수 없네.

   단순히 그 거룩하고 의로우신 분을 의지하세.

   단순히 그분을 믿으세.

   노력이 아니라 믿음일세!"

  

Posted by 행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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