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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5.08.31 야고보서- 머리말, 제 1과 시련과 믿음

    야고보서


   머리말


   이 서신의 주제는 "믿음의 시련" 입니다. 이 짧은 다섯 장에서 야고보는 우리의 믿음을 시험하고 있습니다. 야고보는 우리의 믿음이 진품인지 아니면 값싼 모조품인지 알고자 하는 것입니다.

   D. A. 헤이스(Hayes)는 "이 서신은 우리가 있는 곳이 어디인지 우리가 알 수 있는 말로 말해주고 있다. 이 짧은 문장들은 마치 표적을 향해 곧장 날아가는 화살과 같아서 우리는 그 말씀에서 충격과 감동을 느낀다. 그 말씀 뒤에는 어떤 힘이 있으며, 그 말씀 속에는 우리의 생각 속에서 그 말씀이 생동하도록 만들어주는 어떤 실체가 있다" 고 말했습니다.

   이 서신은 이상하게도 그리스도인의 신앙의 위대한 근본적인 교리들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성육신이나 부활 등이 나타나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사실 그리스도의 이름도 단 두 번만 나올 뿐입니다(1:1과 2:1).

   그러나 그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습니다. 기록자가 가진 목적은 우리에게 교리를 가르치거나 보여주려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말씀이 우리의 삶에 구현되어야 하는 것인지, 어떻게 우리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생명을 나타내야 하는 것인지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독자들이 이 공부를 즐거워할 것이며 성령님께서는 주님께서 이것을 기록하실 때 가지신 목적을 우리의 삶 속에서 이루실 수 있다는 것을 믿습니다.


   제 1 과


시련과 시험(야고보서 1:1-17)


서론


   야고보는 자신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주 예수님의 산상수훈의 가르침을 많이 인용했습니다. 이것은 다음의 비교에 의해 쉽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야고보서                                          마태복음과의 병행구절                                 주제

   1:2, 12; 5:10                                      5:10-12                                                     고난

   1:5; 4:3; 5:13-18                                6:6-13; 7:7-12                                             기도

   1:8; 4:8                                            6:22, 23                                                   바른 눈

   1:10, 11; 2:6,7                                   6:19-21, 24-34                                             부

   1:19, 20; 4:1                                     5:22                                                           진노

   1:25; 2:1, 12,13                                 5:17-44                                                      율법

   1:26,27                                            6:1-18                                                  말뿐인 고백

   2:8                                                 7:12                                                       최고의 법

   2:13                                                5:7                                                            자비

   2:14-26                                           7:15-27                                                  믿음과 행함

   2:11,12                                           7:16-20                                                   뿌리와 열매

   3:13                                               7:24                                                           참 지혜

   3:17,18                                           5:9                                                      화평케 하는 자

   4:11,12                                           7:1-5                                                     남을 판단함

   5:2                                                 6:19                                                        녹슨 재물

   5;12                                             5:33-37                                                          맹세


   이 서신은 율법에 대해 자주 언급하고 있습니다. "온전한 율법"(1:25), "최고한 율법"(2:8), "자유의 율법"(2;12) 등입니다. 야고보는 율법을 이서신을 읽는 자들의 구원을 위한 것 또는 생활규범이라고 가르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율법의 위치를 은혜 아래 있는 자들을 위한 의로운 교훈으로서 인용하고 있습니다.

   야고보서는 잠언과 매우 비슷한데, 문체에 있어서도 잠언처럼 꾸밈이 없고, 생동감 있고, 사실적이어서 요약하기에 어려우며, 지혜라는 단어가 반복되고 있습니다.

   야고보서의 또 한가지 중요한 단어는 "형제"로 이 서신에 15번 나오고 있는데, 이것으로 우리는 야고보서가 구원받지 않은 자들에게도 해당되지만, 주로 신자들을 위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 가지 점에서 야고보서는 신약성경에서 가장 권위적인 책입니다. 즉 야고보가 다른 기록자들보다 지시사항을 더 많이 다루고 있다는 것입니다. 야고보서는 108구절의 짧은 내용 속에 54번의 명령어가 나옵니다.


문안(1:1)


   야고보서의 기록자는 자신을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야고보는 누구입니까? 신약성경에는 여러 야고보가 나오고 있는데 그 중에 누가 이 야고보서를 기록했는지 분명하게 알 수는 없습니다. 대부분의 복음적인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의 동생 야고보라고 생각하지만(마 13:55; 막 6:3), 분명한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저자가 누구인지 모르는 것이 이 서신의 영감에 영향을 미치거나 우리가 여기에서 얻는 유익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기 때문에 기뻐할 수 있습니다.

   만일 이 서신의 기록자가 우리가 추측하는 것처럼 주님의 동생이라면 그의 삶에 아주 놀라운 변화가 온 것입니다. 일찍이 그는 주 예수님을 믿지 않았었습니다(요 7:5) 그는 예수님이 미쳤다고 하는 일밥적인 견해를 갖고 있었습니다(막 3:21).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위대한 원리들을 가르치셨습니다. 그 때 뿌려졌던 씨가 야고보의 삶 속에 뿌리를 내렸습니다. 엄청난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회의론자가 종이 되었을 뿐 아니라 자신을 종으로 말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을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말하여 하나님과 주 예수님을 동등한 위치에 올바르게 놓았습니다. 그는 아버지 하나님을 존중한 만큼 그 아드님도 존중하였습니다(요 5:23). 야고보는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을 알고 있었으면서(마 6:24) 자신을 하나님과 주 예수님의 종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전혀 모순되지 않는 것으로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하나님이 같기 때문입니다.

   이 서신은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에게" 쓰여진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유대인으로 난 이스라엘 열두 지파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죄로 인해 본토에서 쫓겨나 지중해 연안의 여러 나라에 흩어진 자들입니다. 이러한 흩어짐은 BC. 721년에 10지파가 앗수르에 포로로 끌려간 것과 BC. 586년에 바벨론에 의해 나머지 지파가 포로로 끌려간 것이 기원이 되었습니다. 그들 중 얼마가 에스라와 느헤미야 시대에 돌아오게 되었으나, 남은 자 뿐이었습니다. 오순절날 경건한 유대인들이 그 당시 잘 알려진 각 나라에서 예루살렘을 방문하였습니다(행 2:5). 아마도 이들을 흩어진 유대인들이라 불렀을 것입니다. 그러나 후에 그리스도인 유대인들이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사도행전 8:1에서 우리는 초대 그리스도인들이(대부분 유대 혈통) 사울의 핍박으로 인해 유대와 사마리아 전역으로 흩어지게 된 것을 보게 됩니다. 이러한 흩어짐이 다시 한번 일어나게 되는 데 신자들이 뵈니게(페니키아)와 구브로 그리고 안디옥으로 쫓겨난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고난의 시기에 흩어졌던 사람은 누구든지 야고보서의 수신인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모든 참된 신자들은 이 세상의 나그네요 순례자이기 때문에(빌 3:20; 벧전 2:11), 우리는 이 서신이 직접적으로 우리에게 기록된 것이 아닐지라도 우리들에게 적용시킬 수 있습니다.

   한가지 더 어려운 문제가 있는 데 그것은 야고보서가 비 그리스도인 유대인에게 쓰여진 것이냐는 것으로, 그리스도께 회심한 유대인에게냐 아니면 믿는 유대인과 믿지 않는 유대인 모두에게냐 하는 것입니다. 기록자는 우선적으로 참으로 거듭난 신자들에게 쓴 것으로 보이지만(1:18), 고백적인 그리스도인이나 아직 회심하지 않은 자들에게 쓴 것으로 보여지는 때도 몇 번 있습니다.


시련과 시험(1:2-17)


   야고보는 이 단락에서 유혹에 관해 다루고 있습니다. 그는 그 단어를 두 가지 다른 의미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2-12절의 시험은 경건한 시련 또는 하나님께로서 온 문제들이라고 부르며, 우리의 믿음의 실체를 시험하므로 그리스도를 닮게 해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13절과 17절의 주제는 경건치 않은 시험으로, 죄로부터 나와서 죄로 이끄는 것입니다.


   1. 경건한 시련(1:2-12)


   그리스도인의 삶은 문제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것은 불청객이며 바라지 않는 것들입니다. 그러한 문제들은 어떤 때는 홀로 찾아올 때도 있지만 어떤 때는 떼를 지어 몰려들 때도 있습니다. 그것들은 피할 수가 없습니다. 야고보는 "너희가 만일 시험에 빠지면..." 이라고 말하지 않고 "너희가 시험을 만나거든..." 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결코 그 시험들로부터 달아날 수 없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그 시험들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 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서 시험이나 시련을 만났을 때 우리는 여러 가지 태도를 취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힘으로 싸워 이길 수 있다는 도전심과 자고한 마음으로 그것들을 대항할 수 있습니다(히 12:4). 또 한편으로 우리는 그 위세에 눌려 낙심하여 포기할 수도 있습니다(히 12:5). 우리는 때로 "무슨 소용이 있어? 될 대로 되는 거야" 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단지 숙명론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런 생각은 주님께서 우리를 돌보시는 일과도 관계가 되어 우리의 고난에 대해 불평과 원망을 토로하게 됩니다. 바울은 이에 대해 고린도전서 10:10에서 우리에게 경고하였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 아닌 자신에게 집착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동정을 얻으려하는 자기 연민에 빠질 수 있고 아니면, 삶의 어려움과 난관 때문에 번민할 수도 있습니다(히 12:11). 그렇지만 우리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이러한 시련을 허락하셨다. 하나님은 이것을 통해 내게 어떤 목적을 가지셨는데 나는 그 목적을 모르지만 그것을 알기 위해 노력한다. 나는 나의 삶에서 하나님의 목적이 이루어지기를 원한다" 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야고보가 지지하는 것입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대항하지 마십시오! 낙심하지도 마십시오! 기뻐하십시오! 이러한 문제들은 우리를 파괴하려는 대적들이 아닙니다. 그것들은 우리로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도록 도와주는 친구입니다.

   하나님은 그 자녀들 모두가 다 그리스도를 닮기 원하십니다. 이러한 과정은 반드시 고난과 역경 그리고 난관들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성령의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맑은 날만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비오는 날과 먹구름 낀 날도 있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시련은 기쁘게 여겨지지 않고 매우 어렵고 당황스럽게 여겨집니다. 그러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가 맺어지는 것입니다(히 12:11). 우리는 얼마나 자주 매우 어려운 때를 지난 그리스도인들이 "그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그 경험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라고 말하는 것을 듣는지요!

   야고보는 "믿음의 시련" 이라고 말했습니다(3절). 야고보는 믿음을 마치 금 제련사가(하나님) 순전한 것으로 여길 때까지 제련하는 금으로 묘사하였습니다. 그 금은 핍박의 불, 병의 불, 고난과 슬픔의 불에 들어가야 했습니다.

   야고보는 "인내" 로 우리의 믿음을 나타내라고 말하였습니다. 여기서 인내에 대한 가장 나은 말은 변함없는 또는 불굴이라는 말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시험받을 때에 우리는 다가오는 문제들을 잠잠히 맞기위해 강하게 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마치 한 겨울에 바람을 맞는 것과 같은 과정일 것입니다. 겨울 한파는 뿌리가 더욱 깊이 박히게 해주므로 그 나무는 더욱 강하게 됩니다. 어러움이 없다면 우리는 인내를 경험하지 못할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조차도 어려움은 성품을 강하게 해준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잘 알려진 사업가 찰스 커터링(Charles Kettering)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문제들은 진보의 대가이다. 나에게는 문제가 아닌 다른 것들은 가져오지 말라. 좋은 소식은 나를 약하게 한다."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고 야고보는 말하고 있습니다. 때로 우리에게 어려움이 임하게 되면 우리는 자포자기하거나 그 시련을 빨리 끝내려고 발버둥을 치면서도, 그 사건 속에 있는 주님의 목적에 대해 주님께 묻지도 않습니다. 마치 의사에게로 달려가서는 고통을 줄이려고 한꺼번에 많은 약을 삼켜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이렇게 하므로 우리는 사실상 우리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을 방해하는 것입니다. 또 이것은 주님의 특별한 목적을 깨닫기 전에 장래에 있을 더욱 긴 시련 속으로 자신을 넣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 속에서 짧은 인내가 만들어지게 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과 함께 함으로 우리는 성숙되고, 잘 다듬어진 그리스도인이 되어 성령의 은혜에 부족함이 없게 될 것입니다(4절).

   우리는 시련을 통과하는 동안에 낙심하거나 실망해서는 안됩니다. 우리의 아버지 하나님보다 더 큰 문제는 없습니다. 어떤 삶의 문제들은 결코 제거되지 않는 것도 있습니다. 우리는 그 문제들을 받아들임으로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증명하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바울은 자신의 육체의 연약함을 제거해 달라고 세 번이나 주님께 구했습니다. 주님은 그것을 제거해 주시기보다는 그것을 견딜 은혜를 주셨습니다(고후 12:8-10).


   불같은 시험을 지나갈 때 너에게 좁은 길이 놓였어라.

   모든 것에 넘치는 나의 은혜가 네게 공급되리.

   불꽃이 너를 해치 못하게 나 홀로 계획하였어라.

   너의 더러운 것이 제거되니 너의 금은 정금같이 되었어라.


   우리가 삶 속에서 하나님께서 제거하지 않으시는 문제에 직면하게 되면,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복종해야 합니다. 소경 찬송작가인 화니 크로스비(Fanny Crosby)는 8세의 소녀 때에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습니다.


   오 나는 얼마나 행복한 사람인가!

            비록 나 볼 수 없을 지라도;

   나는 결심하였네 이 세상에서

            나는 만족하리라고.

   얼마나 많은 복을 나 누렸던가

            다른 사람들은 누리지 못한.

   나의 소경됨을 인하여 울고 한숨졌지만

            나 이제 할 수도, 하지도 않으려네.


   하나님의 뜻에 복종할 때 평강이 옵니다.

   어떤 삶의 문제들은 그것으로부터 교훈을 배우게 될 때 사라집니다. 제련사는 그 녹은 금속에 자기의 얼굴이 비취게 되면 곧 불을 꺼버립니다. 우리 대부분은 삶의 압박을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는 지혜가 부족합니다. 우리가 근시안적인 안목을 가지면 즉시로 우리 자신은 불안에 빠지게 되어 하나님께서 서두르지 않는 것이 고난을 통해 우리를 원만하게 하려는 것임을 잊어버립니다(시 4:1).

   우리는 우리 자신의 지혜로 삶의 문제들을 대해서는 안됩니다. 만일 우리가 고난의 시기 속에 있는데, 우리에게 영적인 통찰력이 없다면 우리는 하나님께로 나아가서 우리의 곤란과 자신의 무지에 대해 모두 다 주님께 말씀드려야 합니다(5절). 시련 속에서 하나님의 목적을 찾으려고 그렇게 행하는 모든 사람들은 후하게 보답 받을 것이며 또한 그는 하나님께 꾸지람을 받을 것이라는 걱정은 할 필요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가르칠 만하고, 다룰 만하게 될 때 기뻐하십니다. 우리 모두는 지혜가 부족합니다. 성경은 생활 속에서 일어나는 셀 수 없이 많은 문제들에 대해 세세한 답을 해주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들은 그 문제들을 해결해 주는 것이 아니라 일반적인 원리를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문제가 일어나면 이러한 원리를 적용해야 합니다. 이것이 왜 우리에게 지혜가 필요한가 하는 것입니다. "신령한 지혜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매일의 삶에 실제적으로 적용하는 것이다."

   우리는 의심 없는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6절). 우리는 하나님께서 사랑하시고, 돌보시며, 그분께는 능치 못한 것이 없음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선하심과 능력을 의심한다면 고난의 시간에 우리는 견고하게 서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가 일 분 동안은 하나님의 약속 위에 침착하게 머물 수 있겠지만 그 다음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자비를 잊어버리셨다고 느껴질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마치 바다의 파도처럼 아주 높이 올랐다가는 이내 벼랑 끝으로 곤두박질치며, 헤매고 흔들거리게 됩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낙천주의와 비관주의 사이를 왕래하는 믿음에 의해서는 존귀히 되실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요동하며 변덕스러운 사람들에게 신성한 통찰력을 주시지 않습니다(7 ,8절).

   다음으로 5-8절을 살펴보겠습니다. 지혜의 원천은 하나님이시기에, 모든 사람들이 기도로 구하면 꾸짖지 않고, 나무라지 않고 후히 주시는 지혜를 얻을 수 있는데, 그 가장 중요한 조건은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구하는 것입니다.

   9-11절을 처음 보면 마치 삽입 구절처럼 전혀 새로운 주제를 소개 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야고보는 특별한 예를 들어서 경건한 시련에 대한 주제를 계속 이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이나 부한 사람이나 모두 삶의 어려움과 고비를 통해 영적인 유익을 이끌어 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낮은 형제가 자신의 불만스러운 모습과 낙망되는 모습을 보게 되면 그는 자신이 하나님의 후사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인 것으로 인해 항상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9절). 그는 모든 것이 그의 것이고, 그리스도의 것이며, 그리스도는 하나님께 속했다는 진리 안에서 위로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 낮은 형제는 아마도 자신의 열악한 환경을 어찌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 형제가 게으르다거나 경솔한 자라고 볼 아무런 이유도 없습니다. 오히려 그는 하나님이 낮은 임금을 받는 그곳에서 일하는 자신을 합당하게 보시기에 그곳에서 줄곧 일해왔던 것입니다. 아마도 그는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부자가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이제 그는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하늘에 속한 영적인 모든 복을 받았습니다. 그가 무엇을 해야 할까요? 그가 괴로워하고 부러워해야 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자신이 어찌할 수 없는, 하나님께로부터 온 그 환경들을 받아들이고 자신의 영적인 복들로 말미암아 기뻐해야 합니다.

   너무나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살아가면서 그들의 성, 나이, 키 그리고 자신의 삶에 대해 반항하고 있습니다. 야구에 재능이 있는 소녀들은 그들이 남자였기를 바랍니다. 젊은 사람들은 그들이 좀더 나이가 들었으면 하고, 나이가 많은 사람들은 그들이 좀더 젊었으면 하고 바랍니다. 키가 작은 사람들은 키가 큰 사람들을 부러워하고, 키가 큰 사람들은 자신이 그렇게 두드러지지 않았으면 하고 바랍니다. 어떤 사람은 이런 말도 합니다. "나는 죽었으면 좋았을 것을!" 이는 정말 어이 없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세는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진, 자신이 바꿀 수 없는 일들에 대해서는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정해 주신 것이기에 우리는 그것을 하나님의 영광과 다른 사람들의 복을 위해 사용해야 합니다. 우리는 사도바울과 같이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라고 말해야 합니다(고전 15:10). 이를테면, 우리가 자신의 약점을 잊어버리고, 다른 사람들을 섬기는 데 열중하면 신령한 사람들이 우리의 겉모습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사랑하는 것을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다음에 야고보는 부한 자들에게로 향합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는 "부한 자들이여 너희의 부유함을 자랑하라" 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는 부자들이 자신을 낮춤으로 자랑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야고보는 예레미야 9:23, 24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지혜로운 자는 그 지혜를 자랑치 말라 용사는 그 용맹을 자랑치 말라 부자는 그 부함을 자랑치 말라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인애와 공평과 정직을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일을 기뻐하노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는 말씀과 맥을 같이 하고 있습니다.

   부한 자는 사실상 자랑할 수 있는 이유를 그의 물질적인 소유를 잃어버렸을 때에 발견하게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10,11절). 그가 사업에 실패하게 되면 주님께 나아올 지도 모릅니다. 또는 그가 이미 그리스도인이라면 자기 사업을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하는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산업이 하늘에 있는 줄 알기 때문입니다(히 10:34). 세상의 부는 풀의 꽃과 같이 지나가 버리는 것입니다(사 40:6, 7). 어떤 사람이 가진 것이 그저 물질적인 부에 지나지 않는다면 그의 모든 계획은 무덤에서 끝날 것입니다. 야고보는 부자의 생명이 빠르게 지나가고 그의 부요함도 쓸데없다는 것에 대한 예로 덧없이 왔다 가는 풀을 예로 들었습니다. 부자는 "그 행하는 일에 이와 같이 쇠잔하리라" 는 말씀처럼 그가 추구하는 것들 중에 사라질 것입니다. 물론 그 요점은 해나 뜨거운 바람도 영적인 가치에는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사라질 것들을 사랑하는 것으로부터 우리를 멀어지게 만드는 시련이나 위의 것을 사모하게 하는 시련은 모두 동일한 은혜의 두 가지 모습입니다.그렇기 때문에 낮은 자를 높여주는 것이나(9절) 부한 자를 겸손하게 하는 것(10절)은 동일한 은혜입니다. 그 두 가지 다 자랑할만한 이유입니다.

   경건한 시련에 대한 논의를 마치면서 야고보는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12절). 그러한 것에 "인정하심" 을 받은 사람은 생명의 면류관을 받을 것입니다. 면류관은 왕의 왕관이 아니라 승리자의 화관으로 그리스도의 심판대에서 받게 될 것입니다. 물론 여기에는 시험을 견딘 것에 대한 상급이 영생이라는 어떠한 암시도 없으며, 인내로 견딘 자들은 그 삶으로 인해 존귀케 되고, 하늘에서 영생에 대한 더 깊은 감사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하늘에서는 모든 사람의 그릇이 가득차게 될 것이지만 그 가진 그릇의 크기는 서로 다르며, 그것은 하늘나라를 누리는 크기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생명의 면류관" 이라는 표현이 하늘나라의 영광을 더욱 풍성히 누리는 것을 나타냄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이제 우리는 경건한 시련에 관한 이 단원의 내용을 우리 삶에 실제적으로 적용해야 합니다. 여러 가지 시험이 우리의 삶에 찾아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러한 불행에 대해 괴로워하며 불평합니까? 아니면 그에 대해 주님께 감사하며 기뻐합니까? 그러한 시련을 알리고 다닙니까 아니면 잠잠히 견뎌냅니까? 우리의 환경이 바뀌기를 기다리며 미래에 살고 있습니까 아니면 우리에게 임한 모든 것 속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알려고 하며 현재에 살고 있습니까? 자기 연민에 빠져 동정을 구합니까 아니면 다른 사람들을 섬기는 삶 속에서 자신을 가라앉힙니까?


   2. 경건치 않은 시험(1:13-17)


   이제 경건치 않은 시험에 대한 주제로 넘어가겠습니다(13-17절). 경건한 시련이 우리에게서 가장 좋은 것을 이끌어내기 위해 계획된 것처럼 경건치 않은 시험은 우리에게서 악한 것들을 끄집어내기 위해 계획된 것입니다. 분명히 알아두어야 하는 한  가지는 우리가 죄를 짓도록 시험받는다면 그 시험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13절). 하나님은 믿음에 관해서는 사람들을 시험하시고 검증하시지만, 어떤 형태일지라도 악을 범하도록 시험하시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십니다.

   사람은 항상 자신의 죄에 대한 책임을 전가하려고 합니다. 하나님을 탓하지 않으면 죄를 하나의 병이라고 말하는 현대 심리학의 접근 방식을 수용해 버립니다. 그렇게 함으로 심판을 면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죄는 결코 병이 아니며, 사람이 반드시 셈해야 하는 도덕적인 잘못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죄에 대해 물질을 탓합니다. 그러나 물질은 그 자체가 죄가 아니며 죄는 거기에서 시작되지 않습니다. 야고보는 사자 굴까지 추적해 갑니다.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14절). 죄는 우리 안에서, 우리의 악하고, 타락하고, 거듭나지 못한 옛 성품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이니" 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15:19).

   실제로 야고보가 14절에서 사용한 욕심이라는 단어는 선한 것이든 혹은 악한 것이든 모든 형태의 갈망을 나타내는 것으로 그 단어 자체는 중립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신약 성경에서는 예외적으로 악한 것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된 경우가 있는데 이 구절이 바로 그러한 경우입니다. 14절의 욕심은 유혹물들을 늘어놓고 거기에 걸리는 자들을 미혹하는 악한 여자로 비유됩니다. 우리가 갖고있는 비열한 욕심과 더러운 욕구는 우리를 계속해서 죄로 몰아갑니다. 우리가 속에 있는 욕심과 미혹됨에 이끌려 속수무책으로 희생되어야 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깨끗하고 거룩한 것들을 묵상함으로 우리 마음에서 모든 죄의 생각들을 몰아낼 수 있습니다(빌 4:8). 아주 강한 유혹이 오는 순간에도 우리는 "여호와의 이름은 견고한 망대라 의인은 그리로 달려가서 안전함을 얻느니라" (잠 18:10)는 말씀을 기억하여 주님을 부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가 죄를 범합니까? 그 대답은 15절에 있습니다.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고...". 우리가 더러운 생각들을 내쫓기보다는 오히려 더 생각해 보고, 마음에 품고, 즐길 수 있습니다. 이러한 암묵적인 행동은 결혼생활로 비유될 수 있습니다. 욕심이 잉태하여 죄라고 이름한 끔찍스러운 아이를 낳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생각해서는 안될 행동에 대해 너무 오랫동안 생각하면 실제적으로 그일을 행하게 된다는 것을 다른 말로 표현한 것입니다. 욕심이 잉태하는 과정과 죄가 태어나는 과정에 대한 생생한 예가 다윗과 밧세바의 사건입니다(삼하 11:1-27).

   야고보는 계속해서 "죄가 장성한 즉 사망을 낳느니라" 고 말하고 있습니다. 죄는 불모지도, 아이를 못 낳는 것도 아닙니다. 죄는 자기와 똑같은 종자를 만들어냅니다. 죄가 사망을 낳는다는 말은 여러 가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아담의 죄는 그 자신과 후손들에게 육체의 죽음을 가져왔습니다(창 2:17). 또한 죄는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로부터 완전히 분리된 사람이 되는 영원하고 영적인 죽음으로 인도합니다(롬 6:23상). 이것은 또한 죄가 신자들의 죽음을 가져온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디모데전서 5:6에서 일락을 좋아하는 과부는 살았으나 죽은 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그 과부가 자기의 삶을 허비하며 자기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목적을 완전히 상실하였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어지는 것은 살았으나 죽은 그리스도인의 한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죄에 빠진 사람들이 자신을 탓하기보다는 하나님을 탓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그들은 사실 자기를 만드신 창조자에게 "왜 나를 이렇게 만드셨나요?"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자기기만의 한 형태일 뿐입니다(16절). 좋은 은사는 하나님에게서 주어집니다(17절). 사실 하나님은 모든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의 근원이십니다.

   야고보는 하나님을 빛들의 아버지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17절). 성경에서 아버지라는 말은 때로 창조자를 뜻하기도 합니다(욥 38:28참조). 그러므로 하나님은 빛들의 창조자요, 근원이십니다. 그런데 빛들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분명히 해, 달, 별들의 천체를 포함하는 것입니다(창 1:14-18; 시 136:7).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영적인 빛의 근원이시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신" 만유 가운데 있는 모든 형태의 빛의 근원이시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하늘에 있는 하나님이 만드신 천체와는 다릅니다. 천체는 항상 변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변함이 없습니다. 아마도 야고보는 해와 별들의 빛이 기우는 것을 생각했을 뿐 아니라 지구가 회전함으로 생기는 지구와 별들과의 관계의 변화도 생각했을 것입니다. 해와 달 그리고 별들은 변화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는 표현은 "회전함으로 생기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라고 번역해도 될 것입니다.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회전함으로 그림자가 땅위에 드리워지는 것을 생각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니면 일식을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일식이 일어나면 달 그림자가 땅에 드리워집니다. 하나님은 이와는 완전히 다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은사는 하나님처럼 온전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사람을 죄에 빠지도록 시험 하신다는 것은 생각할 가치도 없습니다. 시험은 사람의 악한 본성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이제 경건치 않은 시험에서 배운 것으로 우리 자신의 믿음을 시험해 보아야 합니다. 악한 생각이 우리의 마음속에 계속 머물게 하십니까 아니면 속히 쫓아 버립니까? 우리가 죄를 범하고는 어쩔 수 없었다고 말하십니까? 죄에 미혹될 때 하나님을 탓하십니까?

  

Posted by 행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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