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그
후에는
2장
불신자에게
지금까지 "그리스도인에게 죽음 이후에 무슨 일이 있는가?" 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이제부터 더욱 엄숙하고 진지한 주제에 대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곧 "불신자에게 죽음 이후에 무슨 일이 있는가?"에 대한 것입니다.
장차 오는 세상의 실제성에 대해 생각할 때, 우리의 마음을 가장 아프게 하는 것은 바로 회개치 않은 불신자들에 대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던 그리스도인들에 대해서는 염려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장차 오는 세상은 바로 그들을 위해 준비되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계시 문제는 별개로 하더라도 우리가 확실히 느끼는 것은 그 사랑하는 제자였던 요한이 영원세계에 대해서 말한 것은 모두 그에게 있어서 매우 실제적인 것이었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또한 십자가에 못 박혔다가 다시 부활하신 주님을 헌신적으로 좇았던 사도 바울도 오는 세상에서 그 신실함에 대한 상급을 결코 잃지 않으리라는 것도 확신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죄에 대해 회개했던 다윗이나, 마지막 순간에 자신을 정죄하고, 구주되신 주님을 높인 십자가의 강도에 대해서도 염려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확신하는 바는 이 모든 사람들이 다 영원한 생명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속죄하는 피를 통한 구원으로부터 돌아선 가인에 대해서 우리가 생각할 때 마음에 깊은 부담을 가지게 됩니다. 한 그릇 팥죽을 얻기 위해 자신의 장자권을 팔아버린 에서와, 은 삼십에 영원한 축복의 소망과 맞바꾸어버린 배도자 유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들과 또 이와 같은 부류에 속한 무수한 사람들을 생각하면서, 한 호흡을 멈추고 묻고 싶습니다.
과연 이러한 사람들을 위해 예비된 영원하고 끝없는 미래는 무엇입니까?
욥기 14장 10절에 보면, 우리는 "사람은 죽으면 소멸되나니 그 기운(ghost)이 끊어진즉 그가 어디 있느뇨"라는 구절을 대하게 됩니다. "기운(ghost)이라는 단어의 앵글로 색슨족의 고어체 표현은 독일어 "geist"와 유사합니다. 이것은 간단하게 "영"(spirit)을 의미합니다. 인간이 죽을 때에는 영이 나가게 되는데, 문제는 바로 그 영이 이디로 가느냐 하는 것입니다. 몸은 장사되어 매장되거나 혹은 다른 방식으로 처리될 것이지만, 과연 그 몸 안에 일생동안 거주하며 살았던 영적인 실체는 어떻게 될까요? 욥기 14장 14절에 보면 또 다른 질문이 있는데 주목하여 보시기 바랍니다.
"사람이 죽으면 어찌 다시 살리이까? 나는 나의 싸우는 모든 날 동안을 참고 놓이기를 기다렸겠나이다."
그러므로 여기 두 가지 질문이 있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소멸되나니 그 기운이 끊어진즉 그가 어디 있느뇨?" 그리고 "사람이 죽으면 어찌 다시 살리이까?" 입니다.
첫 번째 질문은 죽음과 미래의 부활 사이에 있는 사람의 상태와 관계가 있습니다. 두 번째 질문은 그렇다면 어느 곳에서 부활하게 될 것인가의 문제입니다.
이제부터 이러한 질문들에 대해서 성경을 통해서 해답을 찾아보고자 합니다. 그러나 불신자, 즉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들의 장래에 대해서 살펴보는 것임을 염두에 두시기 바랍니다. 불신자가 몸이 죽게 되면, 어디로 가게 되며, 과연 그 몸은 무덤에서 다시 부활하게 될까요?
이러한 질문에 대해서 하나님의 계시를 떠난 답변은 아무런 권위가 없습니다. 인간의 사색은 그에 대한 해답을 찾을 수 없을 뿐 아니라, 합리적이지도, 온당하지도 못합니다. 성경의 증거를 거절하는 사람들은 무덤 너머의 삶의 문제에 대해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100년 전, 곧 소크라테스 시대에 살았던 헬라 철학자들이 생명과 죽음과 불멸에 대해서 논했던 그 이상 나아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대학에서는 플라톤에 대한 연구와 학습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현 시대의 사람들은 여전히 영혼불멸에 대한 옛 철학자들의 논거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많은 진보가 있었다는 것이 수긍이 가고 또한 사실임에도 여전히 권위 있는 해법은 없다는 사실이 무척 흥미롭기만 합니다. 영혼의 문제는 여전히 불확실한 가운데 남아 있습니다. 오직 성경만이 우리에게 명확한 지식을 제시하고 잇습니다.
우리가 이 궁금한 질문에 대한 명쾌한 해답을 얻고자 한다면 성경의 어디를 찾아보아야 할까요? 구약성경은 아닙니다.
마음을 가다듬으시길 바랍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가지고서도 물질주의적인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말하건대 그러한 사람들은 잘못된 사람들입니다. 그 가운데는 다양한 분파를 가진 안식일교와 그리스도아델피안,(삼위일체 하나님과 타락한 천사, 마귀, 영원한 지옥불은 비성경적이고 타협과 관습으로 형성된 사상들이라고 주장하는 무리-역자주) 러셀파(여호와의 증인 창설자-역자주)와 및 소규모의 이단들이 있는데, 그들은 성경이 죽음과 부활 사이에 죽은 자의 무의식적인 상태를 가르치고 있다고 주장하며, 그 가운데는 심판 후에 악한 자의 영혼소멸론(annihilation)을 주장하는 자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들 가운데 자신들의 이론을 주장하기 위해서 신약성경을 인용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거의 모두가 구약성경 구절을 근거로 삼고 있으며, 이들 대부분은 구약성경 가운데서도 세 곳, 즉 욥기, 시편, 전도서에서 그 근거 구절을 제시하고 있고, 특히 전도서를 많이 인용합니다.
우리가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은 구약성경은 영원미래에 대한 계시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주로 이생에서 개인적이고 국가적인 문제에 대해 하나님이 인간을 어떻게 다루시는지를 보여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위에서 언급한 세 가지 구약성경은 다른 성경과 더불어 경험적인 책으로, 우리의 인생에서 겪게 되는 경험에 대한 세부적인 사항까지도 세세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 여기서 사용된 '썩지 아니할 것'(immortal), '불멸'(immortality), '영생'(eternal life)이라는 단어는 구약성경에서는 발견되지 않습니다. 물론 신약시대뿐 아니라 구약시대의 모든 경건한 자들은 모두가 다 직관적으로 그에 대해 믿고 있었음은 사실이며, 장차 그에 대해 공개적이고 완전히 드러나도록 선언하실 하나님의 아들의 오심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구약시대에도 구원 이전에 속죄제사의 필요성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공개적으로 전파될 수 있었고, 영원에 대한 문제들이 계시로 드러나 있었습니다.) 을 드러내신 분은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분명한 것은 이 위대한 진리들이 구약성경에서는 완전히 제시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구약성경에서 그에 대해 희미하게 볼뿐입니다. 후에 계시를 통해서 주어진 복음의 충만한 빛을 통해 우리는 확연히 보게 되었습니다. 구약시대의 성도들은 불멸의 소망을 전혀 가지지 못했다고 말씀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구약 성도들도 그에 대해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성경 가운데 가장 오래된 책은 욥기일 것입니다. 의심의 여지없이 욥도 자신이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될 것을 믿고 있었습니다. 욥은 큰 소리로 "내가 알기에는 나의 구속자가 살아 계시니 후일에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나의 이 가죽 이것이 썩은 후에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욥 19:25)고 말했습니다.
모세는 족장들을 언급하면서 죽는 것을 자기 조상들에게 돌아가는 것으로 말했고, 아브라함은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실제로 죽여서 제물로 바칠지라도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했습니다(히 11:17~19). 이러한 일은 확실히 아브라함에게 영생의 믿음이 없었다면 결코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다윗은 그 사랑하는 아들이 병들었을 때, 금식기도하고 많이 울었지만, 아이의 죽음을 알았을 때는 눈물을 그치고 숙고한 끝에 "나는 저에게로 가려니와 저는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 하리라"(삼하 12:23)며 스스로를 위로했습니다. 또 다른 곳에서 다윗은 "나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보리니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시 17:15)고 외쳤습니다.
사무엘 모양을 한 노인이 엔돌의 신접한 여인에게 나타난 흥미로운 일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하고 싶진 않지만, 사울에게 한 그의 말은 "내일 너와 네 아들들이 나와 함께 있으리라" 는 것이었습니다.
구약성경의 선지서들 가운데는 죽음 이후에도 삶이 있음에 대해 알려주는 여러 본문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것들에 대해 인정은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구약성경 기자들의 목적은 이 위대한 진리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었으며, 이미 언급했던 경험적인 책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어떤 본문들이 그 반대적인 것들에 대해 언급하는 듯 보여도 놀랄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이러한 일은 문맥을 따라 조심스럽게 살펴볼 필요가 있으며, 그러할 때 전적으로 잘못 해석하고 적용하는 일이 없게 됩니다.
이제 여기서 진지하고도 냉정하게 한 문장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혹시 여러분 가운데 놀랄 분이 계실지 모르고, 곧 궁금증이 생길지도 모르겠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이지만, 진실되지 않은 구절들이 많이 있다!"
잠시 이에 대해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마음을 가라앉히시길 바랍니다. 사람들은 종종 성경의 어떤 본문이 논쟁을 불러 일으킬만한 문제들을 다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문맥과 정황에서 벗어난 본문의 일부가 해악한 성경해석 오류의 근거로 사용되고 있기도 합니다. 실제로 완전히 거짓된 이단의 기본 신조로까지 사용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몇 년 전 유명한 남부출신 변호사가 켄터키 주 판사 앞에서 어떤 소송에 대한 변호를 맡았는데, 곧 그 의뢰인이 자기 생명에 대한 변호를 의뢰했던 것입니다. 검사가 배심원들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소장을 읽었습니다. "배심원 여러분, 우리가 가지고 있는 최고한 권한은 바로 우리가 가진 모든 소유물로 자기의 생명을 바꾼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판사에게 상당히 인상적인 일이었는데, 왜냐하면 그 검사가 바로 성경에서 그 글을 인용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검사가 소장 읽기를 마쳤을 때, 변호사가 일어나 "검사께서 최고한 권한에 대해 말씀해주셨는데, 우리도 사람이 그 모든 소유물로 자기의 생명을 바꾼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는 성경을 펴서 욥기 2장의 사단이 말한 부분인 "가죽으로 가죽을 바꾸오니 사람이 그 모든 소유물로 자기의 생명을 바꾸올지라"를 읽었습니다. 그리고는 극적인 효과를 살리면서 "배심원 여러분,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기소한 검사는 최고한 권한에 대해 우리에게 상기시켜주었습니다. 물론 사단에게도 말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 구절이 성경에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사단이 한 말이고, 또한 이것은 많은 경우에 진실된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그 모든 소유물로 자기의 생명을 바꾼다:는 것이 언제나 사실인 것은 아닙니다. 우리 주님께 헌신된 허다한 제자들은 하나님의 진리의 일전일획이라도 부인하기보다는 차라리 자신의 목숨을 내어놓았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일은 제가 "성경과 관계된 것들이 다 참된 것은 아니다"라고 말씀드린 바를 잘 보여주고 잇습니다. 성경에는 마귀가 한 말이 있고, 욥의 친구들과 같은 선인들이 한 말도 있는데, 그들이 한 말 가운데는 성령님의 감동이 없이 한 말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쓰여진 책인 성경에는 매우 악한 사람이 한 말도 기록되었지만, 그 말이 곧 하나님의 진리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자연인의 마음속에 있는 사상과 이론들도 때로는 기록되었는데, 전도서가 그와 같은 책입니다. 우리가 구약성경 가운데 특히 경험적인 책들을 읽을 때, 이것을 염두에 두고 읽는 일은 매우 중요합니다.
전도서에서 솔로몬은 우리에게 죽은 사람들은 아무런 상급이 없다고 말합니다..(전 9:5). 우리가 아무 생각 없이 그 말을 진리로 받게 되면 그것은 곧 전도서의 마지막 부분에서 하나님의 감동을 통해 솔로몬이 말한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간에 심판하시니라"(전 12:13,14)는 구절 뿐 아니라 신약성경의 계시를 직접적으로 부정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이것이 과연 전도서가 영감 받지 않은 책이라고 주장하는 근거가 될까요? 물론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입니까? 왜 전도서에서 솔로몬은 우리에게 자기의 마음을 다하며 지혜를 써서 하늘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을 궁구하며 살핀 것에 대한 기록을 주고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까? 솔로몬은 사람들이 죽고, 장사되는 것을 보았고, 그 가운데 다시 무덤에서 나온 사람은 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죽은 자는 아무 것도 모르며"(전 9:5) 라는 구절을 보게 됩니다. 이 구절이 과연 죽은 자들이 몸을 떠나면 완전한 무의식 상태가 되는 것을 의미할까요?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은 그러한 생각과 전혀 다르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생명 없는 시신은 바로 어제까지도 왕성하게 활동하며 그 머리에 가득했던 세상 일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생각이 짧고 피상적인 사색가는 "죽은자는 아무것도 모르며"라는 구절을 가지고, 신약성경의 모든 가르침을 반박할 것이며, "영혼의 잠"과 같은 교리를 들고나올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 표현은 전혀 그런 뜻이 아닙니다. 그 동일한 표현이 사무엘상에서 다윗과 요나단이 서로 약조를 맺는 일 가운데 사용되고 있습니다.
다윗은 들에 숨어 있었고, 요나단은 자기 부친을 살피고 과연 다윗의 생명이 위급한 지경에 있는지를 알아보고자 돌아갔습니다. 요나단은 동행한 아이를 시켜 그를 들로 보내고 화살을 쏘기로 미리 다윗과 약속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 아이에게 이르기를 "보라 살이 네 앞 편에 있다" 하면 사울이 다윗의 생명을 노리고 있는 줄로 알도록 했고, 혹시 "보라 살이 네 이편에 있다"고 하거든 다윗이 안전하다는 표시였습니다. 그 계획은 약속대로 진행되었고, 요나단은 아이 뒤에서 외치되 "살이 네 앞에 있지 아니하냐"고 말했고, 다윗은 그 말을 알아들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아이는 아무런지 알지 못했다"는 글을 보게 됩니다(삼상20:17~42). 그 소년이 무의식 상태에 있었기 때문일까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다만 그 아이는 다윗과 요나단 사이에 있었던 약조에 대해서 몰랐던 것입니다. 그와 똑같은 표현들이 사용된 여러 가지 사례들을 일일이 소개하자면 시간이 부족할 것입니다. 시간이 허락된다면 여러분이 직접 찾아보시길 바랍니다.
말라기서의 마지막 장을 보면, 악을 행한 죽은 자들의 운명에 대한 문제가 해결될 것처럼 보이는 본문이 있습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극렬한 풀무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초개같을 것이라. 그 이르는 날이 그들을 살라 그 뿌리와 가지를 남기지 아니할 것이로되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 또 너희가 악인을 밟을 것이니 그들이 나의 정한 날에 너희 발바닥 밑에 재와 같으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말 4:1~3).
말라기 선지자가 여기서 말하는 대상은 이스라엘 민족이라는 점을 주목하여 보시기 바랍니다. 과연 말라기 선지자가 여기서 죽은 악한 자들에 대한 심판을 말하고 있습니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본문은 주님의 재림 시에 있을 이 땅의 악한 자들에게 임할 심판에 대해 예언적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이 심판은 천년왕국 이전에 있을 심판을 말하는 것이지, 천년왕국 후에 있는 심판에 대한 것이 아닙니다. 백보좌 심판대 앞에 서게 될 사람들이나 그들의 부활에 대한 내용은 전혀 없습니다. "극렬한 풀무불 같은" 날은 바로 주의 날을 가리키며, 죄로 물든 악한 자들은 그 뿌리와 가지가 함께 살라질 것이며, 뿌리와 열매도 모두 다 태워질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이러한 심판을 행하시는 그 날에 발바닥 밑에 재와 같을 것입니다.
이 말씀들이 죄 가운데 죽은 사람들의 영혼소멸을 입증해 주고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다만 이 말씀은 그 때에 있을 심판이 소돔과 고모라에 임한 심판과 성격에 있어서 유사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롯과 그 식구들이 소돔 성을 떠나던 날, 하나님의 진노의 불이 그 성 사람들과 그 땅과 뿌리와 가지를 다 살라버렸습니다. 만일 롯과 그의 삼촌, 아브라함이 심판이 끝난 며칠 후에 소돔과 고모라 성을 돌아보았다면, 그 악한 자들이 그들의 발바닥 밑에 재가 되어버린 것을 친히 목격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아직도 이 구절들이 영혼소멸을 의미하고 있습니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수세기 후에 기록된 유다서에서 우리는 "소돔과 고모라와 그 이웃 도시들도 저희와 같은 모양으로 간음을 행하며 다른 색을 따라 가다가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음으로 거울이 되었느니라"(유 7절)는 말씀을 보게 됩니다. 또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주님이 이 땅에 계신 동안 하신 그분의 말씀을 거절한 자들에 대해 "심판날에 소돔과 고모라땅이 그 성보다 견디기 쉬우리라"(마 10:15)고 선언하셨습니다. 따라서 비록 뿌리와 가지가 살라지고, 의인들의 발바닥 밑에 재와 같이 될지라도, 소돔과 고모라 사람들은 여전히 자기 정체성을 잃어버리지 않습니다. 그들은 지금도 또렷한 의식 가운데 고통을 받고 있으며, 심판 날에 다시 부활하게 될 것입니다.
이제 더 이상 구약성경에 머물지 않고, 또한 사도들의 말이 아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하신 말씀들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주 예수님의 가르침과 성령의 영감을 받은 사도들의 가르침이 다르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저는 바울이나 베드로, 또는 요한의 가르침은 받아들일 수가 없어요.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들려주세요"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렇게 말씀드린 것입니다.
성경의 여러 곳에서 악한 자의 영원한 심판에 관해 기록된 엄숙한 경고를 거절하는 사람들은 어리석게도 예수님의 가르침이야말로 자신들이 바라는 전부라고 말합니다. 곧 자신들에게는 산상설교만으로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의 친구여! 산상설교에서도 영원한 심판에 대해 가르치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까? 만일 당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받아들인다고 할 것 같으면, 그리스도께서는 다른 무엇보다도 그리스도 없이 죽은 자들의 실제적인 상태에 대해 더욱 많이 말씀하셨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마 5:29,30). 하나님의 복되신 아들, 하나님의 가장 사랑하시는 독생자, 곧 이 땅에 살았던 가장 충성된 인자이신 주 예수님보다 더 죄인들 앞에 놓여있는 파멸적인 운명에 대해 심각하고 엄숙한 말을 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불도 꺼지지 아니하는 곳"에 대해 처음으로 말한 사람은 베드로가 아닙니다. '불로서 소금 치듯 함을 받는 것"에 대해 말한 사람은 바울이 아닙니다. "불구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막 9:43~49)는 말을 한 것은 요한이 아닙니다. 바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하신 말씀입니다. 신약성경에 기록된 악한 자의 형벌에 대한 거의 모든 교훈이 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주 예수님의 가르침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가르침의 가장 단순하고 분명한 형태를 누가복음 16장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그 이야기는 단지 비유일 뿐이잖아요"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누가 당신에게 그렇게 말했습니까? 성경입니까?
이 말씀은 비유라고 불리지 않았습니다. 비유란 어떤 진리를 그림처럼 보여주기 위한 하나의 예화 혹은 이야기입니다. 여기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는 비유로 불리지 않았습니다. 비유는 일반적으로 "비유를 말씀하여 가라사대... "와 같은 식의 표현이 먼저 나오지만 여기 누가복음 16장에서는 그러한 표현이 없습니다.
그리고 설령 이것이 비유라 하더라도, 이 말씀은 하나님과 화목하지 못한 채 죽는 자의 가공할만한 두려움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 확실합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그 시대의 청중들과 그때로부터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일어난 느낌이나 인상은, 여기서 예수께서 가르치시는 교훈의 목적과 같이 자기 죄 가운데 죽는 일의 두려움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제 말씀이 도입되는 부분의 자연스러움도 주목하여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 주님은 사람들 앞에서 이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교훈하시는 과정에서 매우 자연스러운 방식으로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로이 연락하는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한 부자가 있어...," 이 부자가 실제로 있다는 얘기입니까, 아니면 없다는 얘기입니까? 예수님은 있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한 사람이 있다고 추측해보자'고 말씀하지 않으셨고, 그러한 사람이 확실히 존재하며, 그 사람이 어떠한 옷을 입었고, 얼마나 값비싼 음식으로 잔치를 베풀었는지에 대해 명확히 선언하셨습니다.
제가 설교하는 중에 최근에 회심한 아리조나 주에 사는 어떤 인도 사람이 있다고 말한다고 해봅시다. 제 설교가 끝나는 즉시 여러분은 "설교 중에 말씀하신 그 인도 사람에 대해 더 알고 싶습니다"라고 말하며, " 그 사람이 회심한지는 얼마나 됐지요?"라고 물으실 것입니다. 그때 제가 "너무 진지하게 들으셨나봐요 그것은 단지 비유일 뿐입니다. 단지 예화를 든 것 뿐이라구요. 저는 그런 인도 사람에 대해서 전혀 모릅니다."라고 말할 때, 여러분이 제게 "그렇다면 당신이 우리에게 마치 그러한 사람을 실제로 알고 있는 듯한 인상을 준 것은 참으로 정직하지 못한 것이며, 그것은 당신 자신에게도 부정직한 일입니다."라고 지적하는 것은 매우 합당한 일이 될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정확하게 예수님이 하신 일입니다. 예수님이 그날 모든 청중들에게 믿도록 말씀하신 것은 그 이야기 가운데 또 다른 사람에 대해 언급하시며, "나사로라 이름한 한 거지가 있어..."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요점을 설명하기 위해서 어떤 일을 추측해서 말할 때에는 일반적으로 이름은 언급하지 않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왜 거지의 이름을 언급하셨을까요? 왜냐하면 주 예수님이 그 나사로를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요 10:3).
우리는 과연 심판의 날까지 그 부자의 이름을 알지 못할 것이지만, 그 거지의 이름은 알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비록 가진 것은 없지만, 믿음에 부요했던 나사로는 그리스도의 양무리 가운데 하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은 이 이야기와 관련해서 매우 상세히 언급하셨고, 심지어 나사로에게 와서 헌데를 핥던 개들조차도 언급하셨습니다. 만일 이것이 단지 비유라면 비유적인 부자의 비유적인 집의 비유적인 대문에 누운 비유적인 거지에게 비유적인 개들이 와서 비유적인 헌데를 핥았을 것이고, 거지 나사로를 지켜보며 비유적인 음식을 먹지 않았겠습니까? 종종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던 청중들은 주님이 설명하시는 일들을 그런 식으로 생각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갔다고 말씀하십니다. 물론 이 일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 전에 있었던 일입니다. 아브라함은 믿는 자의 조상으로 낙원에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아들로서 이 구속함을 받은 거지는 아브라함의 품으로 환영을 받으며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신자들이 죽을 때,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 게 됩니다. 아브라함의 품속에 들어가는 일은 구약 성도의 분깃이었습니다.
그러나 부자의 경우에는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그도 죽어 장사되었고, 육체에서 분리된 그의 영은 다른 세계로 들어 가게 된 것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은 그에 대해 "저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친구여! 저는 지금까지 할 수 있는 대로 성경에서 여러 차례 인용해왔습니다. 지금 저는 리차드 백스터(Richard Baxter)가 "천국은 가득하게 하시고, 지옥은 텅 비게 하소서!"라고 기도한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저는 리차드 백스터가 쓴 책을 탐독했고, 다양한 견해를 가진 신학자들이 쓴 여러 권의 책들도 읽으면서, 자기 죄 가운데 죽은 사람들에게 일말의 희망이라도 있는지를 부지런히 살펴보았지만 도무지 찾을 길이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성경 본문에서 그 옛날 앵글로 색슨어인 "지옥"(hell)이라는 단어는 버리고, 대신 헬라어인 "하데스"(hades) 라는 단어를 사용하고자 애를 쓰고 있습니다. 물론 이 "하데스"라는 단어는 형벌의 장소라는 개념이 없습니다. "하데스"는 단순히 보이지 않는 세계, 즉 음부(陰府)를 가리킵니다. 그렇다면 그 헬라어를 다음 구절에 적용해보겠습니다. "저가 '하데스'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장소의 이름은 바뀌어도, 여러분이 보시는 바와 같이 그 고통은 없애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당신이 '하데스'를 사람이 죽은 후에 가는 장소 또는 상태로 본 것은 큰 실수입니다. '하데스'는 단지 무덤의 의미밖에 없습니다"라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저는 그 말에 조금도 동의하지 않습니다. 제가 확신하는 바에 의하면 성경은 그 반대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굳이 말이 나왔으니, 지옥이라는 단어와 무덤이라는 단어를 바꿔서 적용해보겠습니다. 다음과 같이 될 것입니다. "저가 무덤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앞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단어를 바꾼 것만으로는 그 고통을 없애지 못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그 단어를 무덤으로 불러도 좋고, 단지 "음부"(陰府) 로 생각해도 좋습니다. 또는 "영계"(靈界)로 읽어도 좋습니다. 당신이 좋아하는 그 어떤 말로 불러도 좋습니다. 그러나 그 부자가 간 곳이 어디이든지, 또는 그곳의 이름을 무엇으로 부르든지 간에 한가지 엄중한 사실은 그가 고통 중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계속해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까? 그 두려움에 대해서 더 많은 말이 필요합니까?
당신이 더 잘 아실 것입니다. 당신은 이 가련한 사람, 곧 십자가의 구속을 경험하지 못하고 죽은 이 부자가 고통의 수렁에서 애걸하는 신세가 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는 두가지 애처로운 간구를 올렸지만 둘 다 거절당했습니다.
그는 죽음의 부정적인 측면 때문에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우선 나사로의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바싹 마른 자기 혀를 서늘하게 해달라고 구했습니다. 은혜로 값없이 주어지던 생수를 거절했던 그 부자는 이제 영원한 목마름을 해결할 수 있는 생수가 전혀 없는 곳에 있습니다.
그 부자의 또 다른 간청은 다섯 명의 동생들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종종 말합니다. "내가 만일 지옥에 간다면, 그곳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지 않겠소. 그렇다면 지옥에서 그들과 같이 있으니 외롭진 않을 것 아니오."
그러나 나의 친구여, 이것을 눈여겨보시기 바랍니다. 여섯명의 형제들이 있었습니다. 정말 멋진 가족입니다! 한 사람은 지옥에 가있고, 다섯은 지옥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그 사람은 지옥에서 "할 수만 있다면 저희로 이 고통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해주십시오. 제발 부탁입니다. 그들이 이곳에서 저와 함께 있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나사로를 보내어 저희에게 경고하여 이 고통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라며 간청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에 "저희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고 대답했습니다. 즉 그들도 당신이 가지고 있는 것처럼 성경을 가지고 있고, 그들 스스로 직접 성경을 주의 깊게 살펴볼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고통 중에 외치며,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저희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고 말했습니다. 아브라함은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고 대답했습니다.
이 말씀의 증거를 받아들이시고, 또한 성경이 계시하고 있는 구주를 영접하십시오. 그렇지 아니하면 영원히 바깥 어두운 곳으로 가게 될 것입니다! 다른 대안은 없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냐, 지옥이냐의 선택의 문제로써,곧 하나를 선택하면 다른 하나는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은 저에게 "당신이 설명한 바에 따르면 심판 이전에 그 사람이 고통 중에 있다는 말이 되잖아요. 만일 그렇다면 심판의 날은 왜 필요합니까?" 라고 물으실 수 있습니다.
간단한 예화를 들어 설명해드리겠습니다. 극악무도한 범죄를 저질러 체포된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주립 구치소에 구금되어 있습니다. 어느 일정 기간 동안, 수개월이 걸릴 수도 있지만 그곳에서, 실제 범죄 사실이 있다면, 아직 드러나지 않은 범죄로 인해 고통스러워하다가, 또 때로는 그 사실을 격렬히 부인하기도 하면서 지내게 됩니다. 마침내 법정이 열리고, 형이 확정되면 교도소로 보내지게 되는 것입니다. '하데스'(음부)는 구치소에 해당하고, '게헨나'(지옥)은 교도소에 해당합니다.
요한계시록 20장에서 우리는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는 날이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사망은 몸을 내어주고, 음부는 영과 혼을 내어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심판의 부활로써, 생명의 부활이 있은지 천년 후에 일어나게 됩니다. 사도 요한은 기록하기를, "또 내가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자를 보니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피하여 간데 없더라.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 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바다가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더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마지막 열리게 될 엄청나게 큰 법정입니다. 그때 사람들은 자기 행위를 따라 심판을 받게 될 것이며, 하나님이 정한 공의(righteousness)를 따라 형벌이 정해질 것입니다. "불못"이라는 상징적인 표현이 품고 있는 그 의미에 대해 그 누가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나의 친구여, 당신을 위해 기도합니다. 스스로 위험을 감당하려 하지말고, 즉시 피난처 되신 그리스도께로 피하십시오. 그리하면 당신도 폴 게르하르트(Paul Gerhardt) 가 말한 것처럼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내게 정죄 없으니, 지옥이 없네.
고통도 지옥불도 이젠 영원히 보이지 않도다."
죄인의 마지막 운명에 대한 상세한 내용은 말씀드리지는 않았지만, "영원히 예비된 캄캄한 흑암에 돌아갈 유리하는 별들," "많이 맞을 것이요," "풀무불에 던져 넣으리니," 그리고 그 외 여러 말씀들에 나타나 있는 표현 속에서 그 두렵고 끔찍스러운 모습이 잘 그려져 있습니다.
이 모든 말씀들은 하나님과 영원히 멀어지는 것이 얼마나 두려운 일인지를 우리 마음에 깊이 새기도록 그 의미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없이 영원히 사는 것! 그 무서운 운명에 도전하지 마시길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바로 지금 은혜로 구원하기 위하여 당신을 기다리고 계시는 그리스도를 피난처로 삼아 피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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