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 새로운 출생 (BORN TO WIN)

                                                                                     -윌리암맥도날드


                                                     제2과

                                         본문 : 누가복음 10장 30-37절


                           선한 사마리아인

                      (The Good Samaritan)


   예루살렘과 여리고 사이를 가로지르는 사막 길은 종종 강도들이 출몰하는 지역을 통과해야 하는 아주 위험한 도로였습니다 인적이 드물고, 길가에는 집도 별로 없었으며, 치안경찰이나 군인도 거의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이 두 도시를 왕래하는 사람들에게는 이 도로 이외에 다른 길이 없었습니다.

   어느 날, 한 유대인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이 사막 길을 따라 여리고를 향해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수풀 속으로부터 강도들이 달려 나아와 그 사람을 덮쳤습니다. 그에게 가장 값진 것은 그의 옷이었기 때문에 강도들은 우선 그의 옷을 벗기고, 그가 가지고 있던 소지품들을 모두 빼앗고, 그에게 심한 상처를 입힌 후 그를 버리고 가버렸습니다. 강도 만난 그 사람은 피를 흘리며 거의 죽은 상태로 그곳에 쓰러져 신음하고 있었습니다.

   잠시 후, 한 유대인 제사장이 그 길을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는 강도들의 습격을 받고 길가에 쓰러져 신음하고 있는 사람을 발견하였습니다. 제사장은 그가 자기 회당의 한 회원임을 알았습니다. 그렇지만 제사장은 그를 외면한 채 빠른 걸음으로 먼지를 일으키며 그대로 지나쳐 버렸습니다. 일반적으로 그와 같은 사람을 보면 돕는 것이 제사장의 임무였지만 그는 광야에서 지체하다가 자신도 강탈 것을 두려워하여 그 강도 피해자를 외면한 채 그냥 사라져 버렸습니다. 만일 잠시라도 지체한다면 위험부담도 그 만큼 곱절로 크기 때문입니다.

   이번에는 어느 한 레위 인이 그곳을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레위인은 성전에서 제사장을 돕는 임무를 맡은 사람입니다. 그 레위인 역시 강도 만난 사람을 발견하였을 때, 신속한 응급조치가 필요한 상태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 레위인도 그 곳에서 지체한다면 필시 강도들이 자신을 덮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그 레위인도 그 강도 피해자를 보고도 급히 지나가 버렸습니다.

   마지막으로, 어느 한 사마리아인이 나귀를 이끌고 그곳에 이르렀습니다. 역사적으로 그 뿌리는 같으나 사마리아인들은 이방인의 피가 섞인 혼혈족이라 하여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에 대하여 거부감을 가지고 멸시했습니다. 따라서 이들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간에는 피차 대화조차 꺼리는 사이였습니다. 그렇지만 이 사마리아인은 곤경에 빠진 사람이 유대인인줄을 알면서도 그에 대한 동정심을 품고 그 곁으로 다가가서 그를 돕기 시작하였습니다. 사마리아인은 인종적 편견도, 자신의 안전문제도 상관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무릎을 꿇고, 그 사람의 상처를 닦아 주고, 그 위에 약(기름과 포도주)을 바르고, 상처를 붕대로 감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나귀 위에 그 사람을 태우고 인근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밤새도록 정성껏 그를 간호해 주었습니다.

   그 다음 날 아침, 사마리아인은 자신의 여행길을 떠나기 전, 여관 주인에게 부탁하기를 자신이 여행을 마치고 다시 돌아올 때까지 그 강도 만난 사람을 간호해 줄 것을 부탁하였습니다. 만일 치료하는데 경비가 더 든다면 자신이 다시 돌아오는 날 대신 갚아 주겠노라고 약속하였습니다.

   아마도 여러분은 이 사마리아인의 이와 같은 훌륭한 행동에 대해서 당신의 칭찬을 아끼지 않을 것입니다. 특별히 인종적인 편견을 넘어서 유대인에게 보여준 그 사마리아인의 순수하고 아낌없는 그 큰 사랑에 대해서 경탄을 금하지 못하리라 믿습니다.


   비유를 통해 주는 놀라운 교훈 (Get The Big Picture)


   예수님께서 비유를 말씀하실 때, 그는 언제나 어떤 분명한 교훈을 우리들에게 깨우쳐 주시고자 하셨습니다. 그가 이 비유의 말씀을 하시게 된 계기는 이렇습니다. 어떤 율법사가 예수님에게 찾아와 다음과 같이 질문을 하였습니다. "선생님(랍비)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그가 이러한 질문을 한 목적은 예수님에게 어떤 교훈을 배우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런 사실을 이미 다 아시는 예수께서는 그 율법사에게 한가지 질문을 하셨습니다.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느냐? 너는 거기에서 무엇을 읽었느냐?" 율법이라면 이미 해박한 지식을 자랑하는 그 율법사는 의기양양하게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사에게 "네 대답이 옳다" 고 하실 때, 그 율법사는 그 보란듯이 어깨를 으쓱대며 자신의 율법지식에 대해서 만족스럽고 자랑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을 때, 예수께서는 다시금 그에게 이처럼 말씀하셨습니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네가 살리라" 그 율법사는 율법 지식에 대해서 그 누구보다도 자랑할 수 있었지만 "그 율법대로 행하라" 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는 영 그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와 같은 대화의 함정에서 벗어나 보려고 이번에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바로 이와 같은 율법사의 질문에 대해서 그를 올바로 깨우쳐 주기 위해 예수께서 교훈해 주신 말씀입니다. 예수께서는 우리들에게 "우리의 이웃"은 인종이나, 신조나, 피부색깔이나 그 어떤 것도 상관없이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모든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깨우쳐 주시고 있습니다.

   한편, 예수께서 이 비유를 말씀하신 목적은 절망적 상태에서 도움을 필요로 하는 자에게 예수님께서 어떤 사랑과 자비를 주셨는지 우리들에게 나타내 보여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다시금 본 비유의 말씀으로 돌아가 그 속에 감추어진 구원의 놀라운 진리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첫째로, 이 사람은 예루살렘으로부터 여리고로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이란 "평화의 도성"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리고는 요단강 물이 흘러 들어오는 사해 바다 인근에 위치한 도시입니다. 그러므로 이 사람은 평화의 도시로부터 죽음의 땅을 향하여 내려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어떤 길은 사람의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 (잠언 14:12)고 성경은 우리들에게 깨우쳐주고 있습니다.

   둘째로, 그 사람은 이 길을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났습니다. 이는 우리 인간들이 하나님을 저버리고 그 등을 돌려 죄악된 세상을 향하여 내려 가는 길과 같은 것입니다. 성경은 말씀하시기를 "범죄 한 자의 길은 험하니라" (잠언 14:12)고 하였습니다. 죄는 단단하게 고정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으며, 거기에서 빠져나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셋째, 강도들은 이 가련한 사람의 모든 것을 빼앗아 갔습니다. 이 사람은 인간의 순결함과, 기쁨, 자유 그리고 그 생애의 가치 있는 모든 것을 강탈당하였습니다. 범죄 한 후의 우리에게 오는 결과가 바로 이와 같은 것입니다.

   마지막 넷째로, 강도들은 또한 그에게 상처를 입혔고, 그를 반죽음의 상태로 만들었습니다. 이는 죄가 인간의 삶에 슬픔, 고난, 죄책감, 상처, 그리고 후회를 가져다준다는 사실을 생생하게 상기시켜주고 있습니다.


   율법과 종교의 무력함(You Can't Cop a Plea)


   제사장과 레위는 강도만난 자를 보고서도 도움을 주지 않고 그대로 지나쳐 버렸습니다. 이는 몇 가지 교훈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첫째, 사람은 죄인을 구원하는데 아무런 힘이 없습니다. "사람의 구원은 헛되다" (시편 60:11)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둘째, 목사, 제사장, 랍비등과 같은 종교 지도자들은 우리 영혼을 구원할 힘이 없습니다.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요 14:6, 행 4:12).

   셋째, 율법은 우리를 구원할 힘이 없습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율법의 대표적 상징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모세의 율법에 의해 직임을 맡은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율법, 특히 십계명은 죄인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계명들을 우리들에게 말씀하신 목적은 그것을 통해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율법은 거울과 같습니다. 거울은 그것을 들여다보는 사람에게 그의 얼굴의 더러움을 보여주지만, 그 더러움을 씻어줄 힘은 없습니다.

   우리는 선한 사마리아인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사이에 몇 가지 유사한 공통점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참고로 말씀드릴 것은 예수님은 사마리아인으로 태어나지 않으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유대인으로 태어나셨습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그를 가리켜 멸시받는 사마리아인이라고 조롱하기도 하였습니다 (요한 8:48).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예수께서는 절망 중에 빠져있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는 하늘나라로부터 먼 길을 떠나 잃어버린 죄인들을 찾아 구원하시려 죄악의 소굴인 이 세상으로 내려 오셨습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예수님께서는 그의 놀라운 자비와 은혜를 보여주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멸시를 받는 사마리아인이 곤경에 처한 유대인을 구해 준 사실은 진실로 놀라운 일입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 역시 이 세상에 오셔서 사람들에게 배척을 빋으시면서도, 경건하지 않은 이 세상 죄인들을 위하여 자신의 생명까지 아끼지 아니하시고, 십자가의 고통을 당하시며, 속죄의 피를 흘려주신, 그 희생과 사랑은 이 세상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사랑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와 같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놀라운 은혜에 대해서 기록하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 (고후 8:9)고 하였습니다. 예수께서 가난하게 되심으로 우리를 영적으로 부요케 해 주셨습니다.


   희생을 무릎 쓰고 우리를 구원한 사람 (The Man Who Didn't Duck Out)


   선한 사마리아인은 자신의 위험을 무릎 쓰고 강도를 당한 사람을 돕기 위해 그의 걸음을 멈추었습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위험을 감수하실 뿐만이 아니라 우리를 위하여 자신의 생명까지 내어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 사는 것이라" (갈 2:20)고 바울은 말했습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은 길 가에 쓰러져 있는 피해자의 상처를 싸매주었습니다. 주님이 하신 일은 이보다 훨씬 더 놀랍습니다. 그는 심령이 상한 자를 치료해 주시며, 영적으로 소경된 자에게 빛을 주셨습니다 (눅 4:18). 사마리아인이 그 사람의 상처 위에 부은 기름은 하나님께서 그가 구원하신 자들에게 주시는 성령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사마리아인이 부상당한 자의 상처에 부어준 포도주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기쁨을 상징합니다. 구주께서는 죄로 인해 상처받았던 사람에게 기름(성령)과 포도주(기쁨)를 부어 주십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은 그의 새로운 친구를 길가에 그대로 버려두지 않았습니다. 그를 여관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이처럼 주님께서는 구원받은 자들을 다른 믿는 지체들 가운데로, 특별히 지역교회의 따뜻한 교제 가운데로 인도하십니다. 만일 우리가 구원받은 후, 홀로 떨어져 있으면 위험한 죄의 유혹에 빠지기 쉽습니다. 그리고 다른 그리스도인들과의 교제를 통하여 깨끗한 생활과 바르게 살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은 그가 여관을 떠나기 전, 그가 자신의 여행을 마치고 다시 돌아 올 때까지 그의 새 친구를 돌봐주며 그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도와줄 것을 여관 주인에게 부탁하였습니다. 예수님 또한 그리하셨습니다. 그는 우리들에게 그의 말씀 곧 성경을 주셨습니다. 그는 우리에게 그의 성령을 주셨습니다. 그는 우리들에게 그의 교회를 주시고, 가르침과 성도들과의 교제와 기도 시간과 주의 만찬을 주셨습니다. 그는 우리들에게 날마다 힘을 주시고, 그의 다시 오심에 대한 약속을 주시고, 또한 다시 오셔서 우리를 친히 그의 나라로 데려가 영원히 함께 하시겠다는 소망을 주십니다.

   결론적으로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는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로 말미암아 깊은 절망 가운데 빠져 있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우리를 위해 이루어주신 그의 모든 구속 사역들을 아주 실감나고 정확하게 그리고 아름답게 묘사해 주고 있습니다.

   또한 이 이야기는 세 종류의 현대인의 인생관을 대변해 주고 있습니다.

   첫째, "무엇이든 네 것은 내 것이고, 나는 그것을 내 것으로 빼앗고 말 것이다" 이는 강도의 인생관입니다.

   둘째, "무엇이든 내 것은 내 것이고, 나는 그것을 지킬 것이다" 이것은 제사장과 레위인의 인생관입니다.

   셋째, "무엇이든 내 것은 당신 것이고, 나는 그것을 당신과 함께 나누기를 원 한다" 이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인생관입니다.

   당신은 어떤 인생관을 따르고 싶으십니까?

  

  

Posted by 행복자
,

         로마서


                   12과 그리스도인의 상급

                                                (15장 14절 ~ 16장 27절)


       결론 및 문안


   1. 사도 바울은 본 서신 서를 쓰게 된 동기를 말씀하고 있습니다(14~21절). 그는 이방인의 사도로서 한 일이 하나님께 열납돠게 하기 위하여 이상의 위대한 진리들을 그들에게 상기시켜 주고자 합니다.


   2. 사도 바울은 이후의 그의 여정에 대한 계획을 말하고 있습니다(22~33절). 그는 서바나로 가는 길에 로마에 들리기를 희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당시 마게도냐와 아가야 성도들이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위해 연보한 돈을 가지고 예루살렘으로 가던 길이었습니다. 그는 그의 여정계획을 고려하여 그들에게 그의 여정이 성공적일 수 있도록, 유대의 불신자로부터 해를 받지 않도록, 또 로마에 이를 때 그의 사역에 풍성한 축복이 임하도록 기도해 줄 것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3. 성도들에 대한 문안(16장)에 대해서는 오늘날의 우리가 영적 의미라든가 흥미를 별로 발견하지 못하는 글이라고 생각해 버리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깊이 상고해 본다면, 이 16장은 성도들에게 여러 가지 교훈을 주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1) 여기에 기록된 그리스도인들은 본 서신서가 가르치고 있는 진리의 산 증인들입니다. 본 서신서가 역동적인 진리의 확신으로 막을 내리고 있음은 얼마나 감동적입니까?


   2) 사도 바울은 사랑하는 성도들에게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성도들이 성장했다는 소식에 기뻐하며, 또 그들이 그리스도를 믿음 가운데 쫓고 있다는 사실을 자랑스러워하였습니다. 우리 또한 우리의 형제자매들에 대해 이와 동일한 자세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


   3) 어떤 분들은 이 장을 가리켜 그리스도 심판의 축소판이라고 흥미 있는 말을 하였습니다. 주님께 충성한 모든 일들에 대해 칭찬하고 있습니다.


   4) 16장 전체는 기독교의 위대성을 나타내는 장입니다. 여기에 나타나는 인물들은 세상적으로 유명한 사람들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들의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 속에 영원히 간직 될 것입니다.


   5) 그들 이름 가운데는 흥미와 교훈을 주는 이름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에배네도는 '칭찬할 만 하다' 라는 뜻이며, 빌롤로고는 '말씀을 사랑하는 자' 라는 뜻입니다. 물론 이 두사람은 자신의 이름이 가진 뜻에 부응하는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6) 편지를 쓰는 일은 큰 사역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과 그의 백성을 돕고 격려하기 위하여 다른 이들에게 편지를 쓸 때 하나님이 어떻게 역사하실런지 알 수 없습니다.


   7) 하나님은 그의 이름으로 행한 모든 선한 일에 대해 상을 내리십니다. 이 16장은 이같이 작은 행위를 하나님이 보시고 기록하심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8) 16장은 성도들이 한 지역 교회에서 다른 지역 교회로 방문할 때, 천거서를 지녔던 사실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1절). 이것은 지역 교회의 친교 속에 불신자들이나 거짓된 자들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9) 이 16장에 여자들의 이름이 두드러지게 많이 나타나 있는 것은, 그들이 주님 앞에서 봉사할 수 있는 폭 넓은 범위를 강조하는 것입니다(1,3,5,7절 등등). 단에 서서 하는 봉사만이 하나님께 중요한 일은 아닙니다.


   10) 이 마지막 부분은 그리스도인이 예의범절을 훌륭히 나타내 보인 곳입니다. 이것은 성도로서의 합당한 예절을 말합니다.


   11) 16장은 성도들 사이에는 신분상 계층이 없음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들은 " 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입니다.


   12) 성도들 간에 친밀한 교제가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실로 그들의 삶은 기독교 신앙에 의해 강하게 끌렸으며, 이와 같은 공동의 열정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하나로 연합시켜 놓았습니다.


   13) 신약교회의 단순한 모습이 나타나 있습니다. 5절에 " 그 집에 있는 교회" (영역)라는 언급이 있습니다. 우리는 한 무리의 성도들이 가정에 모여서 예배를 드리고, 기도하며, 교제하던 모습을 그려 볼 수 있습니다.


   14) 17~19절의 말씀은 분쟁을 야기시키는 자들에 대한 경고의 말씀입니다. 이는 오늘날에도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15) 끝으로, 접대하는 일은 하나님 앞에서 매우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이에 대한 언급이 빈번하게 나타날 뿐 아니라 또한 접대에 대한 칭찬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위대한 서신 서를 마침에 있어서 우리는 바울의 기도를 인용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여러분 모두와 함께 있기를 빕니다(20절)" 아멘

Posted by 행복자
,

                         성 경  개 요 


                        제9과 그리스도와 그의 몸된 교회


                                                       복음서


   복음서는. 과거나 현재나 미래를 통틀어 중심되는 분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계시하고 있기 때문에 성경의 심장부라 할 수 있겠습니다. 또한 역사 그 자체가 주님에 관한 기록(History is His Story)이기는 하나, 특별히 복음서에는 하나님께서 친히 기록해 주신 주님의 사적을 볼 수 있습니다.

   구주의 지상 생활은 33년에 불과했습니다. 우리는 그 33년 중 초반 곧, 주님이 베들레헴 마굿간에서 동정녀에게 탄생하셨고, 양친은 애굽으로 피했다가 나사렛에 돌아왔던 사실을 복음서의 첫머리에서 읽게 됩니다. 또한 예수께서 열 두살 되던 해의 유월절에는 예루살렘에 올라 가신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이후 30세가 될 때까지에 관해서는 아무런 기록을 찾아 볼 수 없습니다.

   30세에 주님께서는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40일 동안 광야에서 사단의 시험을 당하셨습니다. 이후에 주님께서는 비로소 대중적인 활동을 시작하셨습니다. 주님의 공생애 기간은 편의상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 유대에서 약 1년간 지내셨고,

   2. 갈릴리에서 약 1년 9개월을 지내셨으며,

   3. 베레아에서 약 4,5개월간 머무셨습니다.

   또한 주님의 사역에는 몇 가지 뚜렷한 특징이 있었습니다.

   1. 주님께서는 많은 기적을 행하심으로 당신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이스라엘의 왕이심을 입증하셨습니다.

   2.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위대한 진리를 백성들에게 가르치셨습니다. 이를테면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자가 갖추어야 할 바람직한 품행은 어떤 것인가 등에 관한 진리를 가르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이같이 하나님의 나라를 가르치시기 위하여 비유나 실화를 사용하시기도 했고, 구약을 인용하시기도 하셨습니다.

   3. 주님께서는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시기 위하여 열 두 제자를 부르사 훈련시키셔서 보내셨습니다.

   그러다가 주님의 말씀이 점점 백성들의 반대에 부딪히고 배척을 받게 되자, 주님께서는 그 사역의 대상을 이방인에게로 확대하셔서, 당신 자신을 믿음으로 영접하는 모든 사람의 구주가 되실 것을 선언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여러번 자신의 죽으심과 부활에 대해 미리 말씀하셨고, 주님을 배척하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무서운 고난이 있으리라고 예언하셨습니다.

   한편 베레아에서의 사역이 끝날 즈음에 주님께서는 예루살렘에 개선의 입성을 하셨으며, 백성들의 열광적인 환호를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종교 지도자들은 주님을 모함했고, 유다와 더불어 주님을 체포할 것을 흥정하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주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은 제자들과 더불어 유월절을 지키려는 것이었고, 나아가서는 주님의 죽으심을 기념하는 주의 만찬을 분부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주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고난을 겪으셨으며 유대인들에게 체포되어 시련을 당하시고 빌라도와 헤롯 앞에서 로마인들에게 희롱과 멸시를 받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무죄하심이 명백함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는 거짓 증인들에게 에워싸여 송사를 당하셨고, 주님의 죄를 찾지 못한 빌라도마저 백성들의 요구에 못이겨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도록 넘겨 주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주님께서는 두 강도 사이에 매달려 고통을 당하시고 피를 흘리신 후 죽으셨습니다. 이런 외형적인 사실만을 보면 주님께서는 악한 자들의 손에 죽임을 당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실은 주님께서는 당신을 믿는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담당하시려고 친히 십자가로 나아가셨던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뒤 주님의 몸은 아리마대 요셉의 새 무덤에 장사되었다가 삼 일 만에 죽음에서 살아나셨습니다. 그 후 승천하여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으실 때까지 40일 동안이나 제자들과 여러 성도들에게 당신 자신의 모습을 밝히 드러내셨습니다.

   이러한 생애동안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을 모두 복음서에 기록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만일 주님의 생애에 있었던 일을 낱낱이 기록한다면 세상이라도 그 책을 두기에 부족할 것입니다(요 21:25).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요 20:31)

   네 권의 복음서가 각기 다른 면에서 흠도 없고 죄도 없는 완전한 한 인간을 증거하고 있다는 사실은, 어떤 문학에서도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는 일입니다. 주님의 생애가 이처럼 역사적으로 엄연한 사실이기 때문에 마치 우리 인생과 전혀 다를 바가 없다고 느껴지지만, 주님의 생애는 우리와는 달리 완전하셔서 전혀 흠을 찾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죄많은 인생으로서는 어느 누구도 감히 죄 없으신 분의 생애를 기록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기에 성령님께서는 네 권의 복음서를 우리에게 기록해 주신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필이면 복음서가 네 권이나 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한 권으로 충분하지 않았을까요? 이에 대해서는 네 사람의 저자가 저마다 다른 관점에서 다른 방법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다고 대답할 수 있습니다.

   마태는 주 예수님이 다윗의 후손으로서 유대인의 왕이라고 증거했습니다. 그리하여 마태복음에서는 메시야로서의 탄생, 메시야에 대한 세례요한의 증거, 시험을 받으시고 세상에 알려지셨다가 배척을 당한 메시야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또한 마태가 가장 관심을 가지고 있던 것은  그리스도를 유대인의 왕으로 증거하는 것이었으므로, 주님의 족보를 다윗과 아브라함에서부터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마가는 하나님의 아들을 아버지의 뜻을 행하려고 세상에 오신 종으로 묘사했습니다. 주께서 종으로서 하나님을 섬기신 사실이, 주님의 신분을 알려주는 선조에 관한 사실보다 더 중요했기 때문에, 족보 이야기는 전혀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다.

   누가는 주 예수님을 인자로 증거하고자 했습니다. 그러기에 누가가 밝힌 족보는 최초의 사람이었던 아담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누가복음에서는 뭇사람 중의 한 사람으로, 뭇사람을 섬기시며, 그들을 찾아 구원하시는 주님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요한복음은 위의 세 복음서와는 전혀 다릅니다. 요한복음에서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인간적인 족보를 기록하기 보다는, 주님을 태초에 계신 말씀으로 영존하시는 하나님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또 하나 특이한 점은 홀로 요한만이 유대에서의 주님의 활동이나 베레아에서의 활동을 주로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에게는 주님을 각기 다른 관점에서 기록한 네 권의 복음서가 있기에, 주님께서 세상에 계실 때 가까이에서 직접 모시던 제자들보다도 주님을 더욱 완전하고도 정확하게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영원한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도행전


   사도행전은 초기 기독교의 형성과 성장에 관해 간략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사도행전에는 전적으로 성령님께서 인도하신 사실들이 기록되어 있으므로 어떤 이는 성령 행전이라고도 부르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사도행전에는 베드로와 바울의 활동이 주로 기록되어 있어 두 사도의 행전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의 활동은 1-12장에서 뚜렷하게 나타납니다. 성령님께서 강림하심으로 교회가 탄생되었을 때부터 베드로는 활동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베드로는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으며, 만주의 주가 되신다는 사실을 특별히 강조하여 전파하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시작되었던 예루살렘 교회는 대부분 유대인 신자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그후 핍박이 일어나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는 최초의 순교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되자 신자들은 유대와 사마리아로 흩어지게 되었는데, 가는 곳마다 복음을 전파하였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도 본의와는 무관하게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게 되자, 이제 복음은 더 이상 유대인에게만 국한되지 않게 되었습니다. 유대인에게 국한되기는 커녕, 유대인들이 계속해서 복음을 배척함으로써 오히려 이방인들이 교회의 지체로 더해지게 되었습니다.

   한편 사도행전 13장 4절에서부터 사도행전의 마지막까지에는 바울이 주인공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기 위하여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에 구원을 받게 된 바울은, 베드로가 주로 유대인의 사도로 봉사했던 것처럼, 이방인의 사도로서 봉사하는 총책을 맡게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의 활동은 세 차례에 걸친 전도 여행과 죄수로서의 로마 여행을 핵심으로 하고 있습니다.

   제 1차 전도 여행에서는 수리아의 안디옥에서 출발하여 구브로와 소아시아의 여러 도시로 가서 복음을 전파하였습니다.

   제 2차 전도 여행에서는 재차 소아시아를 방문하고 나서 마게도냐와 그리이스로 건너갔다가 에베소와 가이사랴를 경유하여 안디옥으로 올라 왔습니다. 이 시기에 바울은 데살로니가 전 . 후서를 썼습니다.

   제 3차 전도 여행에서는 소아시아와 마케도냐와 그리이스를 거쳐 소아시아의 서남 해안으로 돌아 예루살렘에 돌아왔습니다. 이 시기에 바울은 고린도 전 . 후서로마서갈라디아서를 썼습니다.

   제 3차 전도 여행에서 돌아오는 도중에 바울은, 예루살렘에 가면 체포와 구금을 당하거나 심지어 죽임을 당할지도 모르니 돌아 가지 말라는 경고를 받았는데, 그래도 그는 그 모든 만류를 뿌리치고 예루살렘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도착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아시아에 살던 유대인들이 바울이 성전을 모독하고 있다고 무고하게 고소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바울은 산헤드린 공회와 벨릭스와 베스도와 아그립바 왕에게 심문을 당하다가, 바울이 황제에게 재판을 받겠노라고 상고하여 가이사에게 재판을 받기 위해 로마로 이송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을 실은 배가 항해 도중 멜리데에서 파선하게 되어 승무원과 승객들은 그곳에서 겨울을 지내게 되었습니다. 그뒤 마침내 바울이 로마에 도착했을 때에는, 자기의 셋집에서 살 수 있는 자유가 허락되었습니다. 그곳에서 바울은 2년 동안 머물면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고 옥중 서신으로 불리우고 있는 에베소서빌립보서, 골로새서빌레몬서를 썼습니다.

   사도행전의 기록은 여기에서 끝나고 있지만, 사도 바울이 1차 투옥에서 풀려나 다시 전도 여행을 했다는 믿을 만한 증거가 있습니다. 이 시기에 바울은 디모데 전서디도서를 썼을 것이며, 바울이 히브리서의 저자일진대 역시 이 시기에 히브리서를 썼을 것입니다.

   그뒤 바울은 재차 로마로 잡혀가서 투옥되었던 것으로 분별되며, 디모데 후서는 순교 직전에 씌어졌음에 틀림이 없습니다.

Posted by 행복자
,

                 성 경  개 요


                                             제3과 왕을 구하는 이스라엘


                                                          사사기


   사사기를 상고하게 되면 여호수아의 염려에는 상당한 있었음을 알게 됩니다.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 백성들은 거듭거듭 하나님을 등지고 우상숭배에 빠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때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외국 군대에게 압박을 당하도록 내버려 두셨습니다. 이 상태가 계속되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의 죄를 자백하고 죄를 버리고 하나님께 돌아와 구원을 요청합니다. 그 때 비로소 하나님께서 사사라 불리는 군사 지도자를 일으켜 압박하는 나라로부터 이스라엘을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이렇게 구원자를 통하여 겨우 평화를 누리게 되면, 이스라엘은 이 역사적 교훈을 잊어버리고 다시 우상숭배에 빠지곤 했습니다.

   한편 사사기라는 책명(冊名)은 이 책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던 위태로운 시대에 그 민족을 구원한 탁월한 지도자들의 이름과 행적이 기록된 데서 비롯되었습니다.

   이처럼 간략하게나마 살펴 본 사사기의 배경을 통해, 독자는 앞으로 드보라나 기드온이나 삼손과 같이 유명한 인물의 이야기를 읽을 때에 이들과 이스라엘 민족 역사와의 관계를 보다 분명히 깨닫게 될 것입니다. 드보라는 총사령관으로서의 놀라운 담력과 승전의 노래로 유명하며, 기드온은 그가 어떻게 소명을 받았는가 하는 흥미진진한 이야기와 더불어 그가 어떻게 나팔과 햇불과 항아리로 무장된 300명의 군사만으로 대승리를 거두었는가 하는 이야기로 유명합니다. 또한 삼손의 경우는 그의 초인적인 체력에 경악을 금할 수 없지만, 그의 도덕적인 약점에서는 서글픔을 느끼게 됩니다.

   이러한 사사기는 당시 이스라엘 민족의 종교적 도덕적 정치적 상태가 매우 타락되어 있음을 보여 주는 다음의 한 마디로 끝나고 있습니다.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삿 21:25)


                                                        룻기


   룻기는 사사시대에 있었던 사건의 기록입니다. 이 사건은 이스라엘에 흉년이 들어 나오미라 이름한 여인이 남편과 두 아들과 함께 모압으로 가면서 시작됩니다. 그 곳에서 나오미의 아들 둘이 각기 모압 여인과 결혼하였는데, 그 중의 한 여인이 바로 룻이었습니다. 룻은 나오미의 남편과 두 아들이 죽은 후에 나오미와 함께 베들레헴으로 발길을 옮겼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에는 한 여인의 남편이 죽으면 가까운 친족이 그 과부와 결혼하여 그 가문을 잇고 재산을 보존하는 관례가 있었습니다. 이에 따라 룻의 전 남편의 친족 중 보아스라 이름하는 아주 인자한 사람이 룻과 결혼할 의사를 밝힘으로써, 그는 룻의 친족 구속자(kinsman redeemer) 되었습니다.

   그후 룻이 아들을 낳아 오벳이라 하였는데, 그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선조가 되었습니다. 이로써 룻은 비록 이방 여인이었지만 주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에 그 이름이 기록되는 영광을 얻었습니다(마 1:5).


                                                    사무엘 상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자손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한 지 약 280년 쯤 지났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역사상 최대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백성들에게 본이 되어야 할 제사장이 타락해 있었던 것입니다. 이들은 대제사장 엘리의 아들들이었는데, 이렇듯 이들이 불량자로 드러나자 이스라엘 민족은 영적인 지도자를 대망(待望) 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위기의 시대에 사무엘이 태어났던 것입니다. 그의 출생을 기점으로 이제 하나님께서는 제사장 대신 선지자를 들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결국 사무엘은 최초의 선지자였던 것입니다. 이 선지자는 하나님의 대변자로서 백성들에게 죄에서 돌이킬 것을 경고하고, 때로는 백성들이 순종하거나 불순종함으로 당하게 될 분명한 사실을 예언하는 일 등을 하였습니다. 최초의 지자였던  사무엘 외에도 하나님께서는 다른 여러 선지자들을 일으키셨는데, 그들 중에는 사무엘이 세운 학교에서 배운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한편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처럼 내부적으로 연약해 있는 것과 때를 같이 하여 외부적으로는 블레셋 군대로 인하여 괴로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마침내 사무엘에게 나아가 다른 민족처럼 자기들에게도  왕을 세워 달라고 요구하였습니다. 그 때까지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친히 통치하시는 신정국가(神政國家) 였는데, 이제 그들은 왕을 세워달라고 요구함으로써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를 거절한 셈이 되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사울을 왕으로 세우라고 사무엘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사울 통치의 초기에는 서광(瑞光) 이 비치는 것 같았으나, 그는 참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에 점 점 죄에 깊숙이 빠져 들어갔습니다. 그가 행한 실정(失政) 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사울은 아론의 자손이 아니면 할 수 없도록 금지되어 있는 제사장의 직무를 수행했습니다.

   2. 사울은 불필요한 맹세를 함으로써 그의 아들인 요나단의 생명을 잃을 뻔했습니다.  

   3. 사울은 하나님께서 죽이라고 명하셨던 아각이라고 하는 적국(敵國) 의 왕을 살려 주었습니다.

   4. 사울은 여호와의 제사장들을 죽였습니다.

   5. 사울은 블레셋의 거인 골리앗을 죽임으로 명성을 떨치게 된 청년 다윗을 시기하여 거듭거듭 죽이려 했습니다.

   6. 사울은 점장이를 찾아가 장래의 길흉(吉凶) 을 물어 보았습니다.

   사울이 세 번째로 과오를 범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이미 그를 버려 더 이상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이어 그 대신 다윗이 후계자로서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기는 했지만, 사울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이스라엘을 다스리기는 고사하고 사울의 마수를 피해 수 년 동안이나 숨어 있어야 했습니다. 그러던 중 사울은 블레셋에 패하여 그의 세 아들을 비롯한 수 많은 군대를 잃고, 블레셋 사람에게 치욕을 당하지 않기 위해 차라리 자살을 택함으로써 자신의 최후를 맞았습니다.


                                                          사무엘 하


   사무엘하의 대부분은 다윗의 통치에 관한 기록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사울이 죽은 후에도 다웃은 칠년 반 동안이나 유다만을 다스렸습니다. 이는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이 북쪽에 있는 지파들의 통치권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에 두 세력 사이에 전란(戰亂) 이 일어나게 되었고, 마침내 이스보셋이 죽임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후에 비로소 다윗은 이스라엘 전국을 통치하는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다윗은 왕 위에 오르자마자 이스라엘 주위에 있었던 적국들, 그 중에서도 블레셋을 쳐부수는 데 전력을 기울였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예루살렘을 이스라엘 정치 종교의 중심지로 삼았으며, 그 곳에 하나님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하기를 소원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다윗이 장군으로서 전쟁으로 인해 수 많은 사람의 피를 흘리게 했다는 이유로 이를 거절하셨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그의 보좌가 영원무궁하리라는 것과 그의 후손으로 하여금 그 좌에 앉게 하리라는  약속을 주셨습니다.

   한편 11장에는 다윗이 추악한 죄를 짓게 된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한 사건이 있은 뒤. 일 년쯤 지나서 나단 선지자가 그의 죄를 책망했을 때 다윗은 회개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가정에 가혹한 환난을 보내사 그를 징계하셨습니다. 그 징계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1. 범죄의 열매였던 그의 아들이 죽었습니다.

   2. 그의 아들이었던 암논이 또다른 아들 암살롬에게 살해당했습니다.

   3. 암살롬이 반역하여 다윗이 도주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암살롬은 죽임을 당했고, 다윗은 무사히 예루살렘에 귀환하게 되었습니다. 그뒤 다윗은 그의 통치가 끝나게 될 무렵, 주님을 의지하는 대신에 교만하게도 이스라엘의 부강과 국력을 과시하려고 인구 조사를 실시했습니다.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전염병을 통해서 이스라엘인 70,000명을 멸하셨습니다. 이에 다윗이 회개하고 제단을 쌓고 하나님께 번제를 드리자, 하나님께서는 자비를 베푸셔서 그 재앙을 멈추셨습니다.

Posted by 행복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