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

                       두 개의 불가에서 일어난 베드로의 이야기

             두 개의 불가에서 일어난 베드로의 이야기

 

   베드로는 주님을 부인했던 날 밤에 사람들이 몸을 따뜻하게 하려고 피워놓은 "숯불"(요 18:18)가에서 함께 불을 쬐고 서 있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가 진정으로 주님의 쓰임 받는 사람으로 변하였고, 동시에 그 때 그곳에서 진정한 영적인 만족과 행복에 이를만큼 완전히 회복이 되어 있었던 바로 그 날에도, 베드로는 예수님이 피워 놓으신 또 하나의 다른 "숯불"가에 서 있었습니다. 시뻘겋게 타오르고 있는 불가에 서서 배운 전생애를 통해 마땅히 알아야 할 중요한 교훈은 우리 범인들에게도 결코 쉽게 잊혀 질 수 없는 것이겠지만, 주님의 제자 중에서도 특히 공격적인 성품을 가졌다는 제자로 알려진 베드로에게는, 결코 쉽게 잊혀 질 수 없는 것들이었습니다.

 

   "그 때가 추운 고로"(요 18:18)

 

   베드로가 그리스도를 부인하게 되는 데에는 그 이전에 몇 개의 단계가 그 앞에 놓여 있었습니다. 첫 번째 단계에서 베드로는 "그들 사이에 그 중 누가 크냐 하는"( 눅 22:24) 다툼에 개입되었습니다. 두 번째 단계에서 베드로는 자만심과 교만이 너무 커서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 라는 말을 용감히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 세 번째 단계에는 예수님께서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마 26:38) 고 부탁하신 그때, 베드로는 예수님을 위하여 깨어 기도를 하고 있기는커녕, 그 곳에서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마 26:40) 이런 일련의 일들은 "이에 시몬 베드로가 칼을 가졌는데 그것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서 오른편 귀를 베어버리니"(요 18:10) 하는 정도에 이르기까지 베드로를 자기 뜻과 자기 고집대로 행동하는 사람으로 나아가도록 인도한 것 같습니다.

   그러고 나서 정작 주님이 붙잡혀 갈때에 베드로는 멀리 떨어져서 충분한 거리를 두고 주님을 따라갔습니다. 이러한 여러 단계들 가운데서도 가장 극적인 경험은 " 문 지키는 여종이 베드로에게 말하되  너도 이 사람의 제자중 하나가 아니냐,"(요 18:17)하고 물을 때에 일어났습니다. 그 때 베드로는 여종에게 "나는 아니라"(요 18:17)고 말하며 주님을 부인하였습니다. 그 때에 날씨가 너무 추웠기 때문에 종과 하급관리들인 아랫사람들은 "숯불"을 피워놓고 서서 "숯불"을 쬐고 있었습니다(요 18:18) 베드로는 한 단계 한 단계씩 내리막길을 향하여 뒷걸음질쳐 오다가 급기야는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일행들 속에 실제로 들어가 그곳에 서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그들이 피워놓은 활활 타는 불가에 서서 그들과 함께 불을 쬐는 것이 조금도 이상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오히려 그들이 피워 놓은 불을 아무 생각 없이 즐기고 있을 정도로 베드로는 추락해 있었습니다. 이처럼 이어지는 환경과 정황 가운데서 보면, 그 자신이 과연 무슨 짓을 하고 있었는가하는 문제를 깨닫기 전에 베드로가 세 번 씩이나 주님을 부인 하였다는 사실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오직 닭이 세 번째 울 때, 때마침 주께서 돌아서서 베드로를 바라 볼 그때, 베드로는 그제서야 정신이 번쩍 들어 자신이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죄를 범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제야 비로소 베드로는 정신이 들었고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눅 22:62)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와서 조반을 먹으라"(요 21:12)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후에, 베드로는 6명의 다른 제자들에게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다른 제자들도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베드로와 함께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그 날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습니다"(요 21:3). 아침에 주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나타나셔서 "애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고 물으실 때에 이 질문에 대하여 제자들은 한 목소리로 "없나이다"라는 말 밖에 달리 다른 말을 할 수 없었습니다. 이 모습은 섬기고 봉사하는 일에 있어서 자기 뜻대로 하는 섬김, 자기 마음대로 하는 봉사가 결국에는 어떠한 결과를 가져 올 것인가에 대하여 얼마나 훌륭한 예가 되고 있습니까? 놀랍게도 제자들이 보여준 예와 같이 자신들의 커다란 부족과 결핍과 연약이 오히려 우리 주님으로 하여금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신적인 친절이 어떠한 것인가를 보여주는 기회를 갖도록 만들어주었습니다. 주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 하셨습니다.(요 21:6) "이에 던졌더니 물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그물을 육지에 끌어 올리니 가득히 찬 큰 물고기가 백쉰세 마리."(요 21:6, 11)나 되었습니다. "육지에 올라보니 숯불이 있는데 그 위에 생선이 놓였고 떡도."(요 21:9) 있었습니다. 주님은 어부들이 자신들이 잡은 고기를 직접 먹는 것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제자들에게 "지금 잡은 생선을 좀 가져오라"(요 21:10)고 명 하셨습니다. 그러고 나서 예수께서 말씀을 더하시고 이르시되 "와서 조반을 먹으라."(요 21:12)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이 조반을 다 먹고 난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 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요 21:15) 라고 물으셨습니다.- 한편 '이 사람들 보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원문 '플레온 투톤'은 '이것들 보다'로 번역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 질문을 다른 말로 옮겨보면,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다른 제자들 이 사람들 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네가 행한 사랑이 이와 같은 사랑을 의미하는 것이냐?"라는 의미가 될 수가 있고 아니면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배나 잡힌 물고기들 등 이런 것들 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와 같은 뜻의 질문으로 옮겨 볼 수도 있습니다. 주님은 이와 같은 질문을 세번씩이나 베드로에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질문에 이어서 세 번씩이나 응답하시면서 "내 어린 양을 먹이라."(요 21:15) "내 양을 치라"(요 21:16) "내 양을 먹이라"(요 21:17)는 명령을 하셨습니다.

 

   요한복음은 이 두 개의 불이 다른불이 아니라 숯불이라고 하는 정보를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그 날 아침에 두 번째 숯불 앞에서 주님 곁에 앉았을 때에 그 순간 그 첫 번째 부끄러운 숯불을 기억하였음에 틀림이 없었습니다. 그 순간 그는 그 자신의 연약에 대하여 그리고 통탄할만한 그 자신의 실패에 대하여 얼마나 뼈저리게 비참함을 느꼈을 것입니까! 세 번씩이나 주님을 부인했던 자신의 행동으로 말미암아 주 예수께서 행하신 세 번의 질문에 의하여 그가 받은 충격이 얼마나 깊었을 것입니까! 또 그가 받은 수치스러운 모욕감은 얼마나 깊었을 것입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날 아침 베드로가 불가에 앉았을 때에 한 없이 자비하신 주님으로 부터 받은 온유하신 말씀들 속에는, 베드로의 연약과 실패와 수치와 모욕감 등 이 모든 것들을 치유하고 남을 만큼 충분한 보상이 있었습니다.

 

   첫 번째 불은 주님의 대적들이 피워놓은 불이었습니다. 이에 반하여 두 번째 불은 주님 자신이 피워 놓으신 불이었습니다. 첫 번째 불가에서는  주님의 대적들이 베드로에게 질문을 던졌습니다. 두 번째 불가에서는 주님이 친히 베드로에게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첫 번째 불에서는 대적들이  베드로에게 줄 수 있는 것 중에 최악의 것들을 내어놓았고, 두 번째 불에서는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줄 수 있는 것 중에 최선의 것을 내어 주셨습니다. 사탄이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을 시험할 때 그 시험하는 동기는 그 사람 안에 존재하는 것 중에서 최악의 것을 끄집어 내는 것입니다. 사단은 이와 똑 같은 것을 욥에게도 시도하였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한 사람의 성도를 시험할 때에는 그 동기가 사탄의 것과는 전혀 다릅니다. 주님의 동기는 겨와 같이 쓸모없는 것은 채로 걸러 제거해버리고 믿는 성도 안에 있는 것 중에서 최상의 것을 드러나게 하는 것입니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시 23:3)

 

   온유하신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친절로 질문하셨을 때, 베드로는 자신의 죄와 연약과 실패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 보여주신 신실하심과 긍휼과 자비에 대해 마음 깊숙한 데서부터 감사하였기 때문에, 그는 진실로 마음이 낮아져 있었습니다.

 

   그가 계속해서 뒷걸음치며 추락하고 있을 동안에는, 주님께서 그 모든 사실을 다 알고 계셨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전에 베드로는 "(모든 사람이 다 버릴지라도 나는 그리하지 않겠나이다."(막 14:29)라고 말하였던 사람입니다. 지금 베드로는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요 21:17)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사랑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 단지 내가 주님을 좋아합니다라는 뜻을 의미하는 '필레오' 사랑을 사용함으로써, 주님이 말씀하신 '아가페' 사랑보다 더 약한 의미의 사랑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였습니다. 베드로는 주님 앞에서 두려움 때문에 더 강한 단어인 '아가페' 사랑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수가 없었습니다. 베드로는 인간이란 한 없이 나약한 존재에 불과하구나하는 사실에 대하여 중요한 교훈을 배웠습니다. 돌이켜 다시금 주님과의 교제를 나누는 중에, 비로소 베드로는 그 전에는 자신이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주님을 진정으로 믿지 못한 존재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게 되었습니다.

 

   주님은 어떻게 베드로를 실제로 회복시키셨습니까? 첫째는 온유한 표정으로 그렇게 하셨습니다.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눅 22:61), 두번째로는 온유한 말씀으로 그렇게 하셨습니다. "가서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르기를 예수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거기서 뵈오리라 하라 하는지라"(막 16:7), 세 번째로는 그의 온유하신 행동으로 그렇게 하셨습니다. "와서 조반을 먹으라."(요 21:12) 우리 주님은 얼마나 놀라울 정도로 위대하신 목자이십니까! 하나님 진정 감사합니다! 우리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도 이와 동일하신 주님이십니다. 우리 믿는 자들 가운데서 연약에 빠져 심하게 추락하고 형편없이 타락한 사람들조차도 주님께서는 버리지 아니하시고 회복시키시며 다시 한 번 사용하시기를 주저하지 않으십니다. 아! 이 때 우리는 시편 기자와 함께 "(주께서)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시 23:3)라고 노래 부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님의 대적들이 피워 놓은 불가에서 베드로는 불을 쬐고 그 자신을 따뜻하게 하였지만, 그 자신의 몸만 따뜻하게 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주님의 불가에서는 베드로는 그 자신의 마음도 따뜻하게 할 수 있었습니다.  비록 베드로가 이 세상의 숯불 가에서 그 자신의 육체를 따뜻하게 하였을지라도 그 온기는 계속되지 못하였고 오래 가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숯불 가에서 베드로의 마음이 따뜻해졌을 때에는 그 온기는 계속되었고, 이 온기로 인하여 베드로는 하나님에 의하여 쓰임을 받되 능력 있는 사도로 크게 쓰임을 받았습니다. 그러고 나서 얼마 있지 않아서, "베드로는 열한 사도와 함께 서서, 삼천 명이 한 번에 구원을 받을 만큼 능력과 축복을 경험하는 복음말씀을 전하였습니다.(행2:14 ,41) 

 

   베드로는 주님의 임재 가운데 서서, 주님의 말씀을 들었고, 주님이 공급해주시는 음식을 먹을 때에, 비로소 회복이 되었고 마음에 큰 감동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자신의 남아 있는 전 생애를 통해서 베드로 자신에게 영감을 주며 전 생애동안  그를 지도하였던 주님의 명령을 받앗습니다.

 

   사랑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이여, 이번에는, 우리 각자에게 우리가 불을 쬐고 있는 숯불이 어디에 속한 숯불인지 물어 보도록 합시다. 오! 우리 모두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서 우리의 시간을 보내도록 합시다 우리 모두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에 귀를 기울입시다. 우리 모두 하나님께서 공급해주시는 음식을 먹도록 합시다. 오직 우리가 그렇게 할 때만 우리 모두의 마음이 하나님의 숯불 가에서 따뜻함을 입게 될 것입니다. 오직 우리가 그렇게 할 때에만 우리 모두는 거듭난 그리스도인으로서 섬기고 봉사하는 중에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명령을 받아 순종하는 삶을 살며 승리하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벤 F. 파머(Ben F. Parmer)

                                                                          EMMA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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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요 15:5). 따라서 '그리스도의 가지' 란 말은 그리스도인을 일컫는 신약성경의 많은 칭호 가운데 하나로 볼 수 있습니다. 신약교회 진리 안에서도 그리스도인의 놀라운 신분을 가장 잘 표현한 말 중의 하나가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의 지체라는 것을 생각해 볼 때 그리스도인을 의미하는 이 '가지' 라는 칭호에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묵상해볼 만한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 나무에 붙어 있는 생명 있는 가지는 성장하는 것입니다. 생명을 소유한 그리스도인은 마땅히 자라야합니다. 생명이 있다고 말하면서도 성장하지 않는 가지는 죽은 가지입니다. 또 만일 가지가 살아있긴 하지만 자라지 않는다면 이는 어딘가 잘못된 기형적인 가지에 불과한 것입니다. 따라서 생명있는 그리스도인의 생활에는 믿음에도, 믿음의 삶에도 또 말씀을 먹고 분별하는 깊이에도 항상 성장이 있어야합니다. 그러므로 성장이 없는 가지가 기형이듯이 성장이 없는 그리스도인은 기형적인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인의 믿음의 성장을 방해하는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자만심 곧 교만입니다. 자만심을 가진 그리스도인에게서는 신앙의 건전한 성장을 기대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불행하게도 자만심이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대개가 거의 처음 그리스도인으로 들어올 때의 영적으로 어린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들은 영적인 어린아이의 상태로 오랜시간이 지난 후에도 여전히 그렇게 영적으로 어린 아이와 같은 모습으로 살아갑니다. 그들은 생명에 자양분이되고 생명을 양육시킬 수 있는 생명의 진리의 말씀에 눈을 감고 귀를 막습니다. 나아가 다른 앞선 성도들의 경험이나 가르침을 전혀 받아들이지 않고도 스스로 높은 수준의 성숙한 신앙 생활을 해나갈 수 있다고 믿고 그렇게 살아 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바울의 서신서들을 읽을 때 참다운 그리스도인의 생각이 어떻게 성장하였으며 어떻게 꽃을 피웠으며,어떻게 발전하였는가를 알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바울이 2차 전도여행중이라도 그리스도교를 전파하는 자로서의 전도의 일을 시작한 초기에 쓴 데살로니가전후서는 주로 주의 오심에 대한 성도들의 오해를 바로잡기 위해 쓰여 졋습니다. 그렇지만 비교적 그의 심오한 이신칭의(以信稱義)에 대한 복음(福音)에 관한 진리(眞理)나 신약의 교회의 본질인 그리스도와의 한 몸 연합에 관한 신약교회진리(敎會眞理)등의 진리체계와 그 실행 등에 대하여는 충분히 소개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3차 전도여행 중에 이신칭의(以信稱義)에 관한 심오한 진리체계를 로마서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전도 생활이 막바지에 다다랐을 때 옥중에서 쓴 에베소서나 골로새서 같은 책에서는 하나님의 경륜 가운데 감추어진 비밀인 그리스도와 머리되신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敎會)에 대하여 가장 심오한 진리체계인 신약교회진리(新約敎會眞理)가운데서도 핵심 진리인 한몸 연합에 대하여 그리스도교 신앙의 중심 진리를 잘 기록해주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의 지혜와 그 키가 자라났듯이 모든 그리스도인의 지혜와 키도 자라나야합니다(눅2:52).

둘째, 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는 열매를 맺어야합니다. 나무의 본분은 열매를 맺는 것인데, 그 열매는 몸 된 나무에 잘 붙어 있는 가지에서 잘 자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에 한 몸으로 연합되어 있는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에 잘 붙어 있으면서 신앙생활을 영위할 때 그 때 성령의 열매를 풍성하게 잘 맺을 수 있는 것입니다(갈5:22-23). 그리스도와 한 몸으로 연합되어 있는 그리스도인은 결코 그 주인에게 열매를 제공해주지 못하고 버림받는 미운 가지와 같은 삶을 사는 일은 없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한 몸으로 연합되어 있는 자로, 한 몸 지체로, 형제의 우애가 있고, 형제 사랑이 있는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면 우리는 결코 열매 맺지 못하는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우리가 건강하고 온전한 믿음을 소유한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은 포도나무인 그리스도의 몸에 잘 붙어 있음으로 인해서, 가지된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나타난 우리의 잘 익은 성령의 열매로서 판단을 받기 때문입니다(마7:16).

셋째, 나무에 잘 붙어 있는 가지도 살다가 겨울이 오면 죽음과도 같은 시련을 겪습니다. 그러나 그 가지가 나무에 튼튼하게 잘 붙어 있는 한 시련의 겨울은 결국은 지나가고 맙니다. 그리고 어느덧 다시 봄이 찾아오게 되면 끝까지 나무에 잘 붙어 있는 가지는 또다시 움을 틔우는 것입니다. 끝까지 나무에 잘 붙어 있는 가지는 봄이 되면 마침내 푸른 잎을 내놓습니다. 여름엔 녹음을, 드디어 가을엔 열매를 내놓습니다. 그렇지만 겨울이라는 세파와 환란과 역경과 핍박에 부딛치면 가지는 벌거벗은 채 마치 죽음과 같은 혹독한 겨울을 보내고서도 살아있는 나무에 잘 붙어 있는 살아 있는 가지는 자신의 앙상한 삶에서 또다시 열매를 맺는 풍요로운 삶으로 옮겨집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온전히 연합된 그리스도인의 생활도 포도나무에 온전히 잘 붙어 있는 포도나무의 가지와 같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온전히 연합된 그리스도인은 포도나무 가지처럼 죽음 같은 시련을 겪을지라도 그 몸의 머리 되시는 주님께로부터 사랑으로 돌보심을 받음으로 인하여 이 세상의 어떠한 무서운 세파에서도 온전히 보존되는 생활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죽음 같은 시련을 겪고 있을 때, 땅에서 우리와 동일한 시련을 체휼하신 주님께서 우리의 고통을 돌아보시고 동일한 고통을 느끼시며 우리를 위해 중보해주시기 때문입니다. 추운 겨울이 되면 잎을 모조리 떨어뜨리고 거무스름한 빛깔로 벌거벗은 채 서 있는 앙상한 가지들의 모습은 마치 죽은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계절이 지나 봄이 오면 그 몸통의 뿌리로부터 수액과 자양분을 풍성히 공급받음으로 그 앙상했던 가지들이 생명이 온전히 보전되어 있다는 사실을 우리 모두는 잘 알고 있습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들 또한 하나님의 섭리로 그리스도의 몸에 연합된 자이므로 삶에서 죽음 같은 겨울이 오나 머리되신 주님의 보호하심으로 영원한 생명을 소유한자로서 영원히 안전한 자들임을 또한 믿습니다.

넷째, 나무에 잘 붙어 있지 않은 가지는 나무에서 떨어질 때 곧 죽습니다. 가지는 나무에서 생명의 원천을 찾습니다. 그래서 나무에서 떨어지면 살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로부터 생명의 원천을 찾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께서 주신 그리스도의 생명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자라는 성장의 능력도 그리스도에게서 나옵니다. 모든 믿는 자들의 착한 행실이라는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하는 능력 또한 내주하시는 그리스도의 성령으로부터 나옵니다. 진실한 그리스도인은 연합된 그리스도의 몸에서 결코 떨어져 나가 살 수 없습니다. 참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교제권에서는 떨어 나가 살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면서도 교회의 교제권 밖에서 살 수 있다고 믿고 그렇게 살면, 이때의 그리스도인은 가지가 나무로부터 수액과 자양분을 받지 못하는 것처럼 거의 죽은 자와 같은 삶을 살게 되어 믿는 자로서 장차 그리스도의 심판대에서 부끄러운 구원을 받을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생명의 원천이신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로서 나무에 잘 붙어있어 열매를 많이 맺는 온전한 그리스도인은 나무이신 그리스도로부터 현재의 삶을 살 수 있는 생명과 힘을 얻는 자입니다. 이런 그리스도인은 그날에 그리스도 심판대 앞에서 그리스도로부터 풍성한 상을 기대하며 이 놀라운 주님의 오심을 참 유일한 소망으로 주님을 기다리는 자인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포도나무요, 우리는 그 가지입니다. 우리가 그에게 붙어 있어야지만 살수가 있으며 그리고 영원히 살 수 있는 것입니다.

EMMAUS

Posted by 행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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