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의 올바른 분별


                              제3과 초림과 재림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얻으실 영광을 미리 증거하여..." (벧전 1:11)

  

   구약의 예언을 조심스럽게 상고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메시야의 오심에 관한 예언이 두 가지 형태를 띠고 있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이 두가지 계통은 상호 대조를 이루고 있으며 심지어는 표면적으로 볼 때 모순처럼 보이기까지 합니다. 한 계통의 예언은 메시야께서 흠모를 받을 만한 모양이나 고움이나 아름다움을 지니지 않은,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와 같은, 그리고 슬픔과 질고를 아는 연약하고 천한 분으로 오시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그의 얼굴은 상함을 받게 되고, 손과 발은 찔리고, 마침내는 사람과 하나님께 버림을 받아 악인과 무덤을 함께 하는 분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 참조요절 : 사 53장 ; 단 9:26 ; 사 7:14 ; 슥 13:7 ; 시 22:1-18 ; 막 14:27


   다른 계통의 예언은 동일한 분에 대해 무서운 심판으로 세상을 정화하고, 흩어진 이스라엘을 다시 모으며, 다윗의 보좌를 솔로몬의 영광보다 크게 회복하여 큰 평화와 완전한 의로 나라를 다스리는 영화로운 불가항력의 절대 주권자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참조요절 : 신 30:1-7 ; 렘 23:5~8 ; 사 9:6,7 ; 11:1,2,10-12 ; 24:21-23 ; 40:9-11 ; 단 7;13,14 ; 미 5:2 ; 마 1:1 ; 2:2 ; 눅 1:31-33


   때가 이르매 메시야에 관한 예언의 성취는 이사야의 예언대로 동정녀의 아들로, 미가의 예언에 따라 베들레헴에서 나심으로 시작되어 메시야의 받으실 굴욕에 대한 모든 예언을 글자 그대로 완전하게 이루는 데 이르렀습니다. 왜냐하면 왕국이 건설되기 전에 죄가 먼저 제거되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겸비하사 나귀 곧 나귀의 새끼를 타고 오신 그리스도를 자기들의 왕으로 영접하지 않고 오히려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습니다.


* 참조요절 : 슥 9:9 ; 마 21:1-5 ; 요 19:15,16


   그러나 사람의 죄악이 하나님의 정하신 뜻을 좌절시켰다고 결론 지어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은 그의 아들의 재림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때에 메시야의 지상 영광에 관한 예언은 그의 지상 고난에 관한 예언이 정밀하게 글자 그대로 성취된 것처럼 그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참조요절 : 호 3:4,5 ; 눅 1:31-33(31절은 이미 글자 그대로 성취 되었다) ; 행 1:6,7 ; 15: 14-17 ; 마 24:27-30


   유대인들은 선지자들이 메시야의 고난관하여 예언했던 모든 말씀을 더디 믿었는데 반해서, 우리는 메시야의 영광 관해서 예언한 모든 말씀을 더디 믿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가 받을 책망이 더 큽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아드님께서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시는 것을 믿는 것이, 그가 베들레헴에서 어린 아이로 태어나서 나사렛의 목수로 오시는 것을 믿는 것보다 당연히 더 쉬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진실로 우리가 다음의 사실 곧 그리스도의 탄생과 고난을 믿는 것은 이미 일어난 사실이기 때문이지 그것이 예언되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는 유대인들의 불신을 더 이상 힐책해서는 안 됩니다. 만약 누군가가 유대인들이 어떻게 그렇게 많고, 그렇게 명백한 예언의 뜻을 깨닫지 못했느냐고 묻는다면, 그 대답은 우리가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도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지상 영광에 관한 예언이 이렇게 많고 또 그 뜻이 너무나 분명한데도, 그 뜻을 깨닫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많은 오류는 성경을 영해(靈解)함으로써 빚어집니다. 다른 말로 하면 옛 서기관들이 메시야의 고난 관한 예언을 글자 그대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쳤던 것과 마찬가지로 현대의 서기관들은 시야의 지상 영광 관한 예언을 글자 그대로 해석해서는 안된다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결국 주님의 재림을 실제로 오시는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오시는 것이라고 해석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재림은 유대인과 마찬가지로 교회에 주신 약속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의 구속사업을 이루시기 전에 번민하며 슬퍼하던 제자들에게 주신 최후의 위로와 권면의 말씀은 이러했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에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요 14:1-3)


   이상의 말씀에서 주님은 그의 떠나심에 대해서 말씀하실 때와 마찬가지로 그의 오심에 대해 분명한 어조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이미 주님께서 친히 실제의 몸으로 떠나가신 것을 압니다. 그런데 왜 주님의 다시 오심은 실제 오시는 것이 아닌 영적인 것이라고 한단 말입니까? 물론 그러한 억지 주장을 할 때에는 그것을 뒤받침할 만한 엄연하고 절대적인 성경 말씀이 있어야만 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성경 말씀은 없습니다.


   우리는 이 중요한 문제에 대하여 의심할 필요도 없거니와, 또 논리적으로 완벽하게 유혹해 온다 할지라도 그것에 좌우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제자들의 눈앞에서 사라져 가시던 바로 그 순간에 "흰 옷 입은 두 사람이 저희 곁에 서서 가로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행 1:10, 11)하신 말씀을 기억해 보십시오. 데살로니가전서 4:16, 17에도 똑같은 취지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살전 4:16~17)

   "복스러운 소망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딛 2;13)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빌 3:20,21)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요일 3:2)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 주리라"(계 22;12)


   이 "복스러운 소망' 위하여 우리는 깨어(막 13:33, 35, 37 ; 마 24:42 ; 25:13), 기다리며(살전 1:10),비하고 있으라(마 24:44)는 가르침을 받고 있습니다.


성경의 맨 마지막의 기도는 주님께서 속히 오셔달라는 기도입니다((계 22:20).


   이상의 인용한 성경 말씀들은 주님이 친히 몸으로 재림하실 것을 충분하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재림은 일부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처럼 신자의 죽음이나, 예루살렘의 멸망이나, 오순절 성령님의 강림이나, 기독교의 점진적인 보급 등이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의 재림은 교회의 복스러운 소망입니다. 그 때에 자던 성도들이 일으킴을 받아, 살아 있는 성도들과 함께 공중에 끌어 올려 주님을 뵙게 됩니다. 그 때에 지금 하나님의 자녀 된 자들은 주님의 형상으로 변화를 받게 될 것이며, 또 구원받은 후에 주님의 이름을 위하여 신실히 행한 성도들은 그 믿음의 행위들에 대해서 상을 받게 될 것입니다.


* 다음의 성경 말씀들은 우리 주님의 두 강림에 대한 대조를 한층 더 잘 나타내주고 있습니다.


                              초 림


"맏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눅2:7)

" . . .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사로 드려 죄를 없게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히 9:26)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눅 19:10)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요 3:17)

"사람이 내 말을 듣고 지키지 아니할지라도 내가 저를 심판하지 아니하노라 내가 온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요 세상을 구원하려 함이로라"(요 12:47)


                               재 림


"그 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마 24:30)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 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히 9:28)

"환난받는 너희에게는 우리와 함께 안식으로 갚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시니 주 예수께서 저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 중에 나타나실 때에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주시리니"(살후 1:7,8)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 . . ."(행 17:31)


   우리는 이상과 같은 비교를 거의 무한정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상의 말씀만으로도 이스라엘과 교회에게 주어진 약속들이 우리 주님의 지상 재림을 강력하게 촉구한다는 사실을 충분히 입증시켰다고 확신합니다.


    *참고 : 그리스도께서 몸소 오시는 인격적 그리고, 육체적인 재림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에 반대하는 여러가지 설들을 간단히 고찰하는 것도 성경을 배우는 초보자들에게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이는 다음부터 설명됩니다.


   물론 이 은혜 시대 말엽에 있을 그리스도의 유형적(有形的) 육체의 재림에 관한 성경 말씀들은 전지(全知) 및 편재(遍在)와 같은 그리스도의 신적 속성에 관한 성경 말씀과 구별 되어야만 합니다. 실제 그리스도는 모든 것을 아시며, 또 무소부재하십니다. 마태복음 18:20과 28:20이 그 실례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리스도께서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항상 함께 계심은 축복된 사실입니다. 그러나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께서 지금 몸소 하나님 우편에 계심은 사도행전 1:9-11의 말씀이 명백하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마치시고 저희 보는 데서 올리워 가시니 구름이 저를 가리워 보이지 않게 하더라 올라 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흰 옷 입은 두 사람이 저희 곁에 서서 가로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 스데반은 그리스도께서 거기 계심을 보고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 (행 7:55, 56)

   ". .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3)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골 3:1)


   예를 들면, 보불전쟁 때 몰트케 경의 몸은 실제 베를린에 있는 자기 사무실에 나와 있었지만, 동시에 그는 전신망을 통해서 전쟁터 곳곳에 나가 있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 주님은 그의 속성을 통하여 지금 그의  교회와 함께 게시기도 하지만 재림 시에는 하나님 우편에 계시던 주님의 몸이 실제로 땅 위에 임재하실 것입니다.


  

   1. 주님의 재림은 성령님의 임재가 아닙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이 해석은 성령님을 단지 그리스도의  현현(顯現)으로만 취급함으로써 결국 삼위일체의 가르침을 부정하는 결과를 낳습니다.


2) 그리스도께서 성령님의 강림을 약속하실 때 성령님을 가리켜 다른 보혜사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셨고(요 14:16), 또 요한복음 16:7에도 ". .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3) 사도행전과 서신서와 계시록을 기록한 사람들이 오순절 이후에 주님의 재림에 관해서 말한 것이 백 오십 번 이상이나 되며, 그것도 언제나 그것을 앞으로 일어날 일로 언급했기 때문입니다.


4)그리스도의 재림과 함께 일어나리라고 예언된 일들이 오순절에는 하나도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즉 잠자던 성도들의 부활(고전 15:22,23 ; 살전 4:13-16)과 생존한 신자들이 썩지 않을 것을 입는 변화(신자들의 낮은 몸이 그리스도의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화된다)와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는 것(고전 15;51~53 ; 살전 4:17 ; 빌 3:20,210과 인자께서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심으로 땅의 모든 족속이 통곡하는 일들이 전혀 일어나지 않았던 것입니다(마 24:29, 30 ; 계: 1:7).


   이상은 우리 주님의 재림의 사건과 관련하여 일어날 현상들입니다. 주님께서 오실 때 이 현상들이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이와 같은 현상들은 오순절이나, 기타 성령님의 임재 가운데 일어난 적이 없었습니다.


   2. 주님의 재림은 죄인의 회심이 아닙니다.


   이 설은 주님의 재림에 관한 예언이 그렇게 많고 자세한 것에 비해 너무 유치해서 심각하게 논의할 필요도 없습니다. 단지 다음과 같이 간단히 말할 수 있습니다.


1) 성경에 의하면 이것은 순서가 정반대로 바뀌었습니다. 회심은 그리스도께서 죄인에게 오시는 것이 아니라, 죄인이 그리스도께로 오는 것입니다(마 11:28 ; 요 5:40 ; 6:37 ; 7:37).


2)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 일어나리라고 예언된 일들 곧 1번 항목에 열거되어 있는 일들은 죄인이 회심할 때 하나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3. 그리스도인의 죽음은 주의 재림이 아닙니다.


1)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제자들 중 한 사람은 머물게 두신다고 말씀하셨을 때, "그 제자는 죽지 아니하겠다"는 말이 형제들 가운데 퍼졌습니다(요 21;22-24). 그래서 어떤 그리스도인이 죽었을 때, 혹시 주의 재림이 있지 않나 생각하는 무리들이 생겨났습니다.


2) 성경 저자들은 신자의 죽음을 가리켜 언제나 '떠난다' 고 말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재림이 그리스도인의 죽음과 관계가 있다는 기록은 성경 어느 곳에도 없습니다(빌 1:23 ; 딤후 4:6 ; 고후 5:8).

   스데반은 죽어가면서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오시는 모습이 아니라 하나님 우편에 계신 것을 보았습니다(행 7:55, 56).


3) 앞서 주님의 재림 때에 일어나리라고 예언된 일들은 그리스도인이 죽을 때 하나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4. 로마인들에 의한 예루살렘의 멸망은 주의 재림이 아니었습니다.


1) 마태복음 24장과 누가복음 21장에는 세 가지의 사건이 예언되어 있습니다. 이는 곧 성전의 붕괴와 주님의 재림과 세상의 끝인데, 이 세 사건은 완전히 구분된 사건들입니다(마 24:3). 그중 한 사건의 성취가 나머지 모든 사건의 성취라는 견해는 근거가 없습니다.


2) 사도 요한은  예루살렘이 멸망한 후에 계시록을 썼지만, 언제나 그는 주님의 재림을 미래에 일어날 사건으로 말하고 있습니다(계 1:4,7 ; 2: 25 ; 3:11 ; 22:7, 12, 20). 성경의 맨 마지막의 약속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라는 것이며, 맨 마지막의 기도는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입니다.


3) 예루살렘이 멸망할 때에는 주님이 재림하실 때 일어나리라고 예언된 일들이 하나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살전 4:14~17 ; 마 24:29~31 ' 마 25:31,32).


   5. 기독교의 보급은 주의 재림이 아닙니다.


1) 기독교의 보급은 점진적인데 반해서, 주님의 재림은 갑자기 생각지 않은 때에 있을 것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마 24:27, 36~42, 44, 50 ; 계 3:3).


2) 기독교의 보급이 죄인들에게 구원을 가져다주는데 반해서 그리스도의 재림은 홀연한 멸망을 가져다 줄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살전 5:2, 3 ; 살후 1:7-10 ; 마 25:31-46).


6. 그리스도는 육체로 재림하십니다.


   이상의 함부로 주장되고 있는 설명과 논리들은 비록 널리 퍼져있기는 하나, 저명한 신학자들의 책에 언급된 것도 아니며, 또 세계적으로 인정을 받는 탁월한 주석학자에게서 제창된 것도 아닙니다. 이 저명한 인사들은 모두 그리스도께서 눈에 보이는 몸을 가지고 오시는, 육체적인 재림을 주장합니다. 그러나 때때로 온 세계가 복음의 전파로 다 변화가 되고, 그리스도의 영적 천년 통치에 순복하기 전까지는 그리스도의 재림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이 견해는 완전히 잘못된 것인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때의 지상의 상태에 대해서 천년왕국의 축복된 상태가 아니라 무서운 죄악의 상태가 될 것이라고 명확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눅 17:26-32 ; 창 6:5-7 ; 13:13 ; 눅 18:8 ; 21:25-27).


2) 성경은 이 시대의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전 과정 중 그 어디에서도 전 세계적인 회심이(전세계가 복음화, 기독교화 된다는 이)있을 것이라는 암시를 주고 있지 않습니다(마 13:36-43, 47-50 ; 25:1-10 ; 딤전 4:1 ; 딤후 3:1-9 ; 4:3, 4 ; 벧후 3:3, 4 ; 유 17-19).


3) 이 시대에 하나님께서 뜻하고 계신 것은 전 세계적인 회심이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위할 백성을 취하시는 것입니다. 그 후에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것입니다. 세상은 그 이전이 아니라 바로 그 때 변화를 입게 될 것입니다.


* 참조요절 : 행 15:14-17 ; 마 24:14(증거되기 위하여) ; 롬 1:5(모든 이방인 중에서) ; 롬 11:14('전부'가 아니라 '얼마') ; 고전 9:22 ; 계 5:9('모두'가 아니라 '가운데서')


4) 어떤 사건이 적어도 천 년 동안에는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도 그 사건을 "깨어서 기다린다" 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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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고보서


                      제10과

                     기쁘게 참으라(야고보서 5:7-12)


   야고보는 이제 압박 당하는 신자들에게로 방향을 바꾸어 그들에게 참으라고 격려하고 있습니다.


곧 오실 예수님(5:7-8)


   주님의 재림이 참는 동기가 됩니다. 이 재림은 휴거일 수도 그리스도께서 통치하시려고 오시는 재림일 수도 있습니다. 신약성경에서는 두 가지 다 참고 견디게 하는 동기로 사용되었습니다.

   인내가 요구되는 예로 농부가 사용되었습니다(7절). 농부가 곡식을 심은 날 거둘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오랜 기간동안 기다려야 합니다. 먼저는 씨앗을 발아시키는 이른 비가 와야합니다. 그리고는 마지막 계절에 알곡이 충실하게 맺어지도록 늦은비가 와야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이른비와 늦은 비를 교회 시대의 시작에 있었던 오순절의 복이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반복되는 것으로 보지만, 신약성경의 전체적인 경향은 그러한 기대를 좌절시키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위해 세계 전도에 열중하는 신실한 남은 신자들을 기대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주님의 재림을 환영하는 보다 나은 방법은 무엇이겠습니까?

   이 땅의 잘못된 것들은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 올바르게 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의 백성들은 농부처럼 참아야 합니다. 그들의 마음은 주님의 확실한 재림으로 굳게 되어야 합니다(8절).


원망하지 말라(5:9)


   핍박과 억압의 시대에는 희생자들이 다른 사람들에 대해 적대감을 갖는 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핍박을 받게 되면 가장 사랑하는 자들에게 분노를 쌓게 되는데 이것은 인간 본성의 알 수 없는 비틀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 고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원망" 이라는 말은 마지못해 허락한다는 뜻보다는 중심에 품고 있는 표현되지 않은 원한을 의미합니다. 이 구절은 어려운 환경에서 함께 일하는 주님의 종들을 위한 음성입니다. 우리는 원한을 쌓아서는 안됩니다. 심판자가 이미 문 앞에 계십니다. 그분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을 다 아십니다. 곧 우리는 회계하기 위해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비판받지 않으려면 비판하지 말아야 합니다.


몇 가지 예(5:10-11)


   구약성경의 선지자들이 고난과 참음의 본으로 제시되었습니다. 고난이 참음보다 앞에 오는 것을 보십시오. "환난은 인내를" 이룹니다.(롬 5:3). 고난은 인내를 낳습니다.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이 신약성경에서 의미하는 인내란 확고함과 견고함입니다. 선지자들은 신실하게 주님의 말씀을 선포했기 때문에 무자비한 핍박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보이지 않는 주님을 바라봄으로 견디었습니다(히 11:27). 히브리서 11:32-40도 함께 보십시오.

   우리는 이사야나 예레미야, 다니엘과 같은 선지자들을 큰 존경으로 회상합니다. 우리는 그들의 열정적인 삶과 헌신으로 인해 그들을 존경합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그들을 "은혜 받은" 자라고 부릅니다. 우리는 그들이 옳았고 세상이 틀렸다는 것에 동의합니다. 우리는 그들이 엄청난 시련과 고난을 통과했지만 그들은 인내로 견뎌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은혜 받은 자가 되기를 원한다면 우리도 그와 같이 해야 한다는 유일하고 합당한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욥은 인내와 참음의 좋은 본입니다. 이 세상 유사 이래 욥과 같이 짧은 시간에 많은 것들을 잃어버리는 고난을 당한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욥은 하나님을 저주하지도 하나님에게서 돌아서지도 않았습니다. 결국 그의 인내는 보상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늘 그러하시듯 자비하시고 긍휼이 많으신 분으로 자신을 계시하셨습니다.

   우리가 만일 "주께서 주신 결말" (주님께서 겪게 하신 최종적인 결말 또는 결론)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면 우리는 악한 질투의 유혹을 받게 될 것입니다. 아삽은 악한 자의 형통을 보게 되었을 때 질투하게 되었습니다(시 73:3-17). 그가 이에 대해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더욱 혼란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에 그가 하나님의 성전에 들어갈 때 그들의 결말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그의 모든 질투를 쫓아버렸습니다. 다윗도 동일한 경험을 하였습니다. 시편 17:14에서 그는 금생에서 경건치 않은 자의 분깃을 나타내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 구절에서는 그와 대조되는 오는 세상에서의 신자의 분깃을 나타내었습니다. 이러한 것에 비추어 볼 때, 그 분깃은 신자들이 견딘 것에 대한 보상입니다. 욥의 경우에서 "주께서 주신 결말" 은 하나님께서 욥이 이전에 가졌던 것보다 두 배로 주시는 것이었습니다(욥 42:1-5).


맹세하지 말라(5:12)


   시련의 시간에 조급해 하는 것은 맹세로도 나타납니다. 이것은 신성모독이나 저주와 같은 근본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또한 법정에서 선서하는 문제도 아닙니다. 여기에서 금하고 있는 실제적인 것은 어떤 사람의 말이 진실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주님의 이름이나 어떤 다른 사람의 이름을 생각 없이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어떤 사람이나 어떤 물건 또는 하늘이나 땅으로도 맹세해서는 안됩니다.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이 그런 것은 그렇다, 아닌 것은 아니라 하는 사실에 근거할 수밖에 없는 자인 것을 압니다.

   물론 이 구절을 "제발" (For the heaven's sake), "맹세코" (By Jove) 등과 같은 쓸데없는 표현이나 예수님과 관련된 "깜짝이야(예수)" (gee), 하나님과 관련된 "어이쿠(하나님)" (gosh), "저런(하나님)" (golly) 등과 같은 저속한 말들을 금하는 데 적용할 수도 있습니다.

   야고보는 "죄정함을 면하라" 고 말하고 있는데 아마도 셋째 계명을 생각한 것 같습니다.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나 여호와는 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자를 죄 없다 하지 아니하리라" (출 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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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마서


                     10과 그리스도인의 생활

                                                (12장 1절 ~ 13장 14절)


   그리스도인들이 의롭다 하심을 받은 사실을 매일의 생활에서 어떻게 나타내야만 하는가? (1)


   이제 로마서에서 실제 생활에 관한 것을 배우고자 합니다. 앞에서 살펴본 말씀(1~11장)들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하신 일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어떻게 헌신과 봉사의 생활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있는가를 배우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은혜로 구원함을 받은 사람들의 임무입니다.


   1. 하나님께 대한 헌신(12:1,2절)


   이 말씀은 본 서신서 중에 가장 중요한 말씀에 속합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묵상하지 않고 그냥 지나쳐 버리면 크나큰 손실을 입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행하신 모든 일들을 기억하면서 신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절실한 호소를 하였습니다. "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 "


   하나님의 자비는 은혜로 구원 받은 자에게 오직 한 가지 합리적인 결론을 주었습니다. 곧 "만약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이 모든 일을 행하셨다면 나 또한 내 몸을 그에게 드리지 않을 수 없다. 만약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죽으셨다면, 나 또한 모든 일에 있어 그를 위해  내가 살지 않을 수 없다" 라고 고백하게 됩니다.

   C.T.스탓(C.T.Studd)은 "만약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으로서 나를 위해 죽으셨다면, 내가 무슨 헌신인들 아낄 수 있으랴"고 고백하였습니다. 또한 찬송가 작가 아이작 와트도 다음과 같이 유명한 시를 남겼습니다. "온 세상 만물 가져도 주 은혜 못 다 갚겠네 놀라운 사랑 받은 나 몸으로 제물 삼겠네"


   이런 고백들은 사실입니다. 사실상 이 세상에서 가장 큰 모순 가운데 하나는 그리스도인이 자기를 그의 피로 사신 주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대신에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기쁘신 대로 우리를 쓰실 수 있도록 우리는 순간 순간 순종하는 생활을 하여야 합니다. 또한 사도 바울은 믿음 안의 사람들에게 이 세상을 본 받지 말라고 힘주어 말합니다. 우리는 세상적(육적)에서 영적으로 변화되어야만 합니다. 우리는 달라져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 사람처럼 사고하는 대신에 하나님이 세상 모든 것을 보시는 것처럼 보아야 합니다. 결국 우리 구주를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은 바로 세상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모든 언행심사에 있어 완전히 달라야 합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우리의 몸을 하나님께 드리고  우리의 마음이 주님의 마음을 향하여 새로워질 때, 우리는 우리를 향하신 주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될 것이며, 우리의 삶은 영원을 향한 소망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2. 은사를 사용할 때의 겸손한 마음(3~8절)


   우리의 모든 은사는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기 때문에, 이를 우리가 사용한다고 할지라도 자랑하지 말아야 할 것이며, 오히려 겸손한 마음으로 주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해야 할 것입니다.


   3. 성도에 대한 사랑(9~13절)


   우리의 사랑은 신실하고 순결하고 이타적이고 친절해야 합니다.


   4. 핍박하는 자들에게 대한 사랑(14~21절)


   그리스도인에게 보복이란 옳지 않습니다. 오직 심판은 주님만의 권한 인 것입니다. 가장 좋은 일은 친절로써 핍박을 대하는 것입니다.


   5. 정부에 대한 순복(13:1~7절)


   국가의 권력은 모두 하나님이 정하신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는 형벌에 대한 두려움으로 대할 것이 아니라, 양심에 따라 순종하는 태도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 성도가 그 누구보다도 충성해야 할 대상은 오직 하나님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과 위배되는 사실을 정부가 강요할 때에 성도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지만, 세금이나 기타 관세의 문제에 있어서는 위의 권세에 순종해야만 합니다.


   6. 이웃에 대한 사랑(8~10절)


   이것은 모든 사람에 대한 우리의 빚입니다. "저로 하여금 주님처럼 눈물로 무리들을 바라보게 하옵시고, 길 잃은 양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주사 주님의 사랑으로 저들을 사랑하게 하옵소서."


   7.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마음(11~14절)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은 주님의 임박한 재림으로 늘 새로워져야 합니다. 이 같은 태도에는 두 가지의 성도의 삶이 있습니다.


   1)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풍성함 가운데 거함으로 그를 경외하면 다른 이들이 성도를 봄으로써 그리스도인의 영광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2) 육신에게 여유를 주지 마십시오. 육신의 충동과 정욕을 버리고, 육신의 비위를 맞추려 하거나 육신을 경솔하게 다루지 마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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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 경  개 요


                          제12과 밖을 보고, 위를 보라!


                                         히브리서


   히브리서의 저자는 확실치 않으나, 본서를 바울 서신 중 하나일 것으로 추측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바울 서신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으므로 바울 서신에 포함시키지 않고 제 12과에 본서를 배치했습니다. 결국 본서의 저자에 대해서는 확실히 모른다고 말하는 편이 가장 무난할 것입니다.

   히브리서가 기록된 배경은 다음과 같습니다.

   최초로 기독교 신앙에 대하여 많은 의문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은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전파되는 복음을 듣고 이에 대해 상당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리스도를 믿노라고 고백한 사람도 더러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기독교는 지극히 단순하여 유대교의 복잡한 예식과는 지극히 대조를 이루었습니다. 그래서 그들 중 대부분은 볼 수 없는 그리스도의 기독교를 버리고, 성전이라든가 제단이라든가 제사장이라든가 제물 등의 볼 수 있는 유대교로 돌아 가고 싶은 유혹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에 히브리서 저자는 이제껏 세상에 있던 어떤 종교보다도 기독교가 우월하다는 사실을 다음과 같이 이들에게 보여 주려 했던 것입니다.

   1. 사람들은 자신들이 만든 장막에서 예배를 드리지만, 우리 성도들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앞에 믿음으로 나아가 예배를 드립니다.

   2. 사람들은 죄인으로서 언젠가는 죽게 될 사람을 제사장으로 섬기고 있으나, 우리들은 거룩하시고 불의가 없으시며 쇠하지 않고 죽지않는 대제사장을 모시고 있습니다.

   3. 유대교는 눈에 보이는 물질적인 것으로서, 일시적이고 불완전하며,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의 그림자요, 모형이요, 그림에 불과합니다. 반면에 기독교는 눈에 보이는 것은 없을지라도 참되고 영원합니다. 기독교는 믿음으로만 깨달을 수 있으며, 이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릴 수도 없습니다.


                                     야고보서


   본서는 우리 주님의 형제로 생각되는 야고보가 당시 세상 끝까지 흩어져 있던 유대인 성도들에게 쓴 서신인데, 서신서 중에서 최초의 편지로 분별됩니다. 아마도 본서는 교회 성도의 대부분이 유대인이었고, 그래서 유대인의 관습이 많이 남아 있던 초대 교회 시대에 씌어진 듯합니다.

   이 야고보서는 아주 실제적인 편지로서, 저자는 계급적인 차별이나 길들이지 못한 혀나 시기나 다툼이나 가난한 자에 대한 압제 등을 책망하고 있습니다. 야고보는 그저 입술로만 믿는다는 믿음과 선한 행실이 동반하는 믿음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고 강조하였습니다. 그렇다고 야고보의 가르침이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다는 사도 바울의 가르침과 상반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믿음이 있으면 선한 행실은 따르게 마련이라고 주장할 따름입니다.

   마지막으로 야고보는 성도들에게 고난 중에 인내하며 서로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권면하면서 본서를 끝맺고 있습니다.


                                     베드로 전서


   베드로 전서는 핍박으로 인하여 말할 수 없이 고난을 당하고 있던 소아시아 지방의 유대 성도들에게 씌어진 편지로서 소망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즉 그리스도인이 고난 저 편에 있는 영광을 바라보게 될 때에는 아무리 현실이 어려울지라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로 만족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어떠한 큰 핍박이 몰려온다 할 지라도 그리스도의 보혈과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누리게 될 성도의 기업은 결코 쇠하지도 아니하고 빼앗아 갈 수도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베드로 사도는 성도들에게 거룩하게 생활하셨던 주님을 본받으라고 강조하고,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운 이 때에 한 국가의 국민으로서, 한 가정의 남편이나 아내로서, 종으로서 충성하라고 강조하였습니다. 또한 장로들에게는 충성할 것을 권면하는 동시에 청년들에게는 순종하고 복종하라고 권면하기도 했습니다.


                             베드로 후서


   베드로 후서는 데살로니가 후서나 디모데 후서와 더불어 완전히 타락하게 될 기독교계의 말세 상태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1장에서는 장차 하나님의 나라가 분명히 임할 것이며, 선악 간에 행한 것을 따라 상급을 받게 될 터이니, 모름지기 성도들은 그리스도인답게 살아가라고 간곡히 부탁하였습니다. 

   2장에서는 거짓 선생들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케 할 것이지만, 필경 그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피할 수 없으리라고 경고하였습니다.

   3장에서는 마지막 때에는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신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자들이 나타날 것이나 주님의 재림과 세상의 심판은 너무나 자명한 진리라고 강조했습니다. 따라서 성도들은 더욱 부지런해야 하고 거룩해야 하며 믿음을 굳게 하고, 주 예수님의 오심을 고대하면서 은혜 주시는 대로 자라가야 한다고 권면하였습니다.


                                            요한 일서


   이 책에서 요한은, 하나님의 가족의 일원으로서 성도가 지닌 특성에 관해 상세히 기록해 줍니다.

   인간적으로도 자식은 부모를 닮게 마련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의 자녀인 우리가 하나님과 닮은 성품은 어떤 것들일까요?

   1. 성도는 어두움 가운데 행하지 않고 빛 가운데 행합니다. 성도라면 습관적으로 계속해서 죄를 짓지는 않습니다.

   2. 성도가 범죄했을 때 단란하고 행복한 가정을 이루기 위해서 그 죄를 자백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3. 성도는 모름지기 하나님의 계명을 준수합니다.

   4. 성도는 성도 상호 간에 형제애로써 사랑합니다.

   5. 성도는 언행심사를 통하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합니다.

   6. 성도는 성령님을 모시고 있습니다.

   7. 성도는 세상을 능히 이깁니다.

   아울러 사도 요한은 주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에 관한 오해를 지적하면서, 예수님은 완전한 하나님인 동시에 완전한 사람이시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와 상관이 없는 신에대한 모든 개념은 이방 종교라고 했습니다.


                            요한 이서와 요한 삼서 


   요한 이서와 요한 삼서는 그 내용이 서로 대조를 이루고 있어 자못 흥미롭습니다.

   요한 이서에서는 거짓 교사들에 대하여 경고하면서 이러한 자들을 용납하지 말라고 충고하는 반면, 요한 삼서에서는 참 신자들에 관해 설명하면서 이러한 자들을 접대하며, 이들에게 친절하라고 권면했습니다.

   요한 삼서에는 세 인물에 관해 기록되어 있습니다. 가이오는 경건하고 손님을 잘 접대함으로 칭찬을 받았고, 디오드레베는 이기적이었기 때문에 책망을 받았으며, 데메드리오는 꾸준한 생활 간증에 대해 칭찬을 받았습니다.


                                         유다서


   유다서에는 진리를 알고 있으면서도 멸시하는 배도의 죄에 관해 기록되어 있습니다. 즉 저자는 타락했던 이스라엘과 타락했던 천사들 그리고 소돔과 고모라 등의 세 가지 사건을 인용하여 배도자들은 반드시 벌을 받게 되리라고 경고하였습니다. 아울러 유다는 구약 인물들을 인용하여 세 부류의 배도자들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1. 가인은 인위적인 종교를 고집하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미워했습니다.

   2. 발람은 신령한 일을 핑계삼아 돈 벌 궁리만 했습니다.

   3. 고라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규칙을 어기고 반역했습니다.

   이러한 자들이 공의의 심판을 받는다는 것은 자명한 일입니다. 따라서 성도들은 주님의 오심을 고대하면서 지극히 거룩한 믿음위에 자기를 건축하고, 성령으로 기도하며, 하나님의 사랑으로 자신을 지켜야 합니다.


                                요한 계시록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 사도 요한이 본 계시는,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경륜이 완성되고 새 하늘과 새 땅이 시작될 미래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분별에 도움이 될까 하여 본서를 몇 부분으로 분류해 보았습니다.

   1 - 3장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보낸 편지로서, 당시의 교회들에게 실제적으로 적용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교회사에 나타나게 될 여러 교회의 모습을 간략하게 묘사해 주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4,  5장에서는 하늘에서 성도들이 보좌를 중심으로 모여 어린 양께 경배하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많은 성도들은 이 사건이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그의 백성들을 데려 가신 후에 일어날 것으로 분별하고 있습니다.

   6 - 19장에는 야곱의 환난의 때요, 대환난으로 알려진 기간에 불신 세상에 쏟아지게 되는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심판은 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의 상징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최후에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러한 심판들로 대적들을 진멸하시기 위하여 친히 오실 것입니다.

   20 - 22장은 그리스도께서 사단을 무저갱에 감금하시고 천 년동안 세상에서 통치하실 것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통치가 끝나게 될 때 주님은 창세 이래의 모든 악인들을 심판하시어 불못에 던지실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새 하늘과 새 땅이 나타나고, 하나님의 백성들은 죄도 없고 죽음도 없는 곳에서 주님과 함께 영원히 행복하게 살게 될 것입니다.

   구약 성경의 마지막이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는 말씀으로 끝나고 있음에 반하여, 신약 성경의 마지막은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 지어다. 아멘" 이라는 말씀으로 끝나고 있음은 주목할 만한 일입니다. 결국 신구약 사이에 갈보리 십자가가 있었음으로 저주가 은혜로 바뀌게 되었던 것입니다.

Posted by 행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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