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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6.01.29 구원의 확신을 갈망하는 이들에게 -제2장 영원한 안전

                         구원 확신

                                        갈망하는 이들에게

                                                                   H. A. 아이언사이드


                                              제2장

                                       영원한 안전

  

   이사야 32장 17절에는 매우 놀라운 말씀이 있습니다.

   "의의 공효는 화평이요 의의 결과는 영원한 평안과 안전이라."

   "영원한 안전"이라! 놀라운 기쁨이 되는 표현이 아닌가요? 며칠이나 몇 주나 몇 달이나 몇 년 혹은 평생이 아닌 영원한 안전입니다! 하나님께서 구원의 길을 찾는 곤고한 죄인의 모습으로 그분께 나오는 모든 이들에게 주기를 기뻐하시는 것이 바로 그 복스런 안전입니다.

   그 구절에는 밀접한 관련이 있는 두 단어('평안'과 '안전')가 사용되어 있습니다. 세상에는 그 두 단어의 의미를 거의 알지 못하는 종교심 깊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그들은 정직하게 하나님을 찾고 있습니다. 그들은 성경을 읽고, 기도하고, 교회에 나가고, 성찬에 참여하고, 연보를 하는 등 종교적인 의무에 대해 아주 철저합니다. 그들은 인간관계에 있어 정직하고 청렴하며, 시민의 의무를 다하고 또 황금률을 실천하고자 노력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지속적인 평안이 없으며, 구원의 분명한 확신도 없습니다. 나는 그 모든 경우에 그들이 그렇게 불안정한 상태에 머물러 있는 까닭은 하나님의 구원 방법을 밝히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확신합니다.

   이사야는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7세기 전에 살았지만 후에 복음 안에 계시된 하나님의 의(義)를 극히 복스런 방법으로 진술했습니다. 이것은 놀랄 일이 아닌데, 그는 성령께서 감동 하시는 대로 말한 것입니다.

   다섯 번째 복음서로 종종 불리는 그의 위대한 책의 중심 단어는 로마서의 중심 단어와 동일합니다. "의(義)!"

   잠시 이 단어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보시고 또 성경에 그 단어가 어떻게 사용되었는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죽어가는 변호사


   어떤 변호사가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는 평생 교회에 참석했지만 구원은 받지 못했습니다. 그는 흠잡을 데 없는 성실한 사람으로 알려졌습니다. 그러나 그가 병들어 누워 영원을 눈앞에 두고 좌절과 번민 중에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사람들 앞에서는 의로울지 모르나 하나님 앞에서는 죄인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제 곧 그의 창조자를 대면해야 한다는 사실을 생각하니 그의 각성된 양심이 전에는 그다지 가증스러워 보이지 않았던 죄와 불법들을 생각나게 했습니다.

   한 친구가 찾아와 "자네 구원받았는가?"라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습니다. 그는 슬프게 고개를 저으며 구원받지 못했다고 대답했습니다. 친구가 또 물었습니다.

   "구원받고 싶지 않은가?"

   "받고 싶지" 그가 대답했습니다. "너무 늦지 않았다면 말일세. 하지만" 하고 굳은 표정으로 덧붙였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기 위해 잘못된 일을 행하시는 것은 원치 않아!"

   그의 말은 그가 얼마나 철저히 의(義)의 중요성을 존중하도록 배웠는지를 보여주었습니다. 그를 문병 온 그 친구는 성경을 펴들고는 어떻게 하나님이 불의한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 친히 의로운 방법을 마련하셨는지를 설명해주었습니다. 사실 하나님은 그 방법 외에는 사람을 구원할 다른 방법이 없으십니다. 만일 죄인이 구원받기 위해 죄가 대충 얼버무려져야 한다면 그는 영원히 잃어질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시긴 하지만, 어느 누구를 위해 자신의 성품을 타협하기를 거절하십니다.

   마틴 루터가 오랜 세월 동안 어두움에 헤매며 소경을 인도하는 소경된 인도자들이 요구하는 대로 스스로를 구원하려고 헛되이 노력한 후에 그 영혼에 도전을 받고 새로운 빛과 도움을 입게된 것이 바로 그 문제였습니다. 그는 라틴어로 된 시편을 읽다가 "주의 의로 나를 구원하소서"라는 다윗의 기도를 주목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외쳤습니다.

   "이게 무슨 뜻이지? 하나님이 그분의 의로 나를 정죄하신다는 것은 이해가 가. 그런데 만일 그분이 나를 구원하시려면 반드시 그분의 자비로만 가능할 텐데 말이야!"

   그 말씀을 곰곰이 생각하면 할수록 더욱 의아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분께 나아와 회개하고 믿음으로 그분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불의한 죄인들을 의롭다고 하실 수 있는 의로운 방법을 친히 마련해 놓으셨다는 사실이 점점 그의 번민하는 영혼에게 밝아왔습니다.

   이사야는 그의 놀라운 구약의 복음서 전체를 통해 이 위대하고 영광스런 진리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를 떠나서는 인간은 철저히 버림받고 완전히 절망적인 상태에 있음을 신랄하게 묘사해줍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매를 더 맞으려고 더욱 더욱 패역하느냐? 온 머리는 병들었고, 온 마음은 피곤하였으며,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터진 것과 새로 맞은 흔적뿐이어늘,그것을 짜며 싸매며 기름으로 유하게 함을 받지 못하였도다"(사 1:5,6).

   이것은 확실히 달갑지 않은 묘사입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보실 때 구원받지 못한 인간은 바로 그런 모습입니다. 죄는 그 희생물의 모든 생명 활동을 잠식하는 악한 질병입니다. 아무도 그 오염에서 벗어나거나 그 세력에서 스스로를 건져낼 수 없습니다.


   확실한 처방


   그러나 하나님은 처방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되리라"(사 1:18).

   하나님은 그같이 문둥병자를 모든 부정함에서 깨끗케 하고 경건치 않은 자를 모든 죄악에서 의롭다 하실 수 있습니다. 아울러 그분은 의를 희생시키지 않고 온전히 의로운 방법으로 그렇게 하십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어떻게 죄인을 구원하시면서도

   의로우실 수 있는지를 보네.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우리는

   그분의 의로움과 놀라운 은혜를 발견하네

   믿는 죄인이 자유롭게 되어 하는 말,

   '구주께서 나를 위해 죽으셨네.'

   구속의 피를 가리키며 하는 말,

   '그것이 나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했네'."


   이처럼 이사야는 다른 모든 선지서 기자들을 뛰어넘어 십자가의 사역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는 믿음의 눈으로 갈보리를 응시하며, 거기서 그 고난 당하는 거룩하신 분께서 자신의 죄가 아닌 우리의 죄로 인해 죽어 가는 모습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이렇게 외칩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사 53:5,6).

   당신은 위의 놀라운 말씀을 깊이 생각해본 적이 있습니까? 만일 없다면 지금 깊이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영원한 안전


   하나님의 성령께서 이사야의 마음 속에 예수님을 계시하셨습니다. 그 성령께서 당신도 예수님을 바라보게 하기를 원하십니다. 이제 그 말씀의 각 부분을 취하여 그 놀라운 의미를 되새겨보겠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이 말씀을 당신 자신의 것으로 삼으십시오! 당신 자신과 당신의 죄를 대입하여 "그가 찔림은 나의 허물을 인함이요"라고 읽어보십시오. 무리 속에 빠지지 마십시오. 이 세상에 죄인이 당신 한 사람뿐이었다 해도 예수께서는 당신을 위해 십자가로 가셨을 것입니다. 그 사실을 믿고 평안으로 들어가십시오!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이 말씀을 당신 자신의 것으로 삼으십시오! 당신의 불경건과 자아가 그분의 생명을 요구했다는 것을 생각해보십시오. 공의의 지팡이가 막 당신을 내려치려 할 때 그분이 당신과 하나님 사이에 서셨습니다. 다시 한번 간청하지만, 이 말씀을 당신 자신의 것으로 삼으십시오! "그가 상함은 나의 죄악을 인함이라"고 믿음으로 외치십시오.

   더 나아가 보겠습니다.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분은 하나님과 화평을 이루는데 필요한 모든 것을 감내하셨습니다. 그분은 자신의 십자가의 피로써 화평을 이루셨습니다(골 1:20). "우리"를 "나"로 바꿔보십시오.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내가 평화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가 나무에 달려

   내가 당할 형벌을 대신 당하셨으니

   이제 보증인과 죄인 모두 자유케 되었네."


   이제 이 영광스런 구절의 마지막 부분을 주목해보십시오.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이제 깨달았습니까? 당신은 하나님이 옳으시다고 시인하고,

"맞아, 나는 가련한 죄인이고 잃어버린 파산한 영혼이야. 그토록 심판 받아 마땅한 내가 그분이 채찍에 맞음으로 나음을 입었다니!"라고 기쁨으로 환호할 수 있습니까?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네.

   당신은 그 말씀에 뭐라 더하겠는가?

   그가 친히 우리의 의가 되셨고

   하늘의 가장 좋은 옷을 입으라 명하셨네.

   당신은 그보다 더 좋은 것으로 단장할 수 있는가?"


   옛 빚이 청산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죄를 무시하거나 너그러이 눈감아주신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모든 죄를 청산하셨습니다. 이사야 53장 6절에서 그분은 모든 인류의 빚을 청산해주셨습니다.

   채무를 적은 두 줄의 차변(借邊)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그러나 그 채무가 청산된 내용을 적은 한 줄의 대변(貸邊)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첫 번째 차변은 우리가 인류의 타락에 참여한 것을 말해줍니다. 양은 인도자를 좇아갑니다. 한 마리가 담 구멍으로 통과하면 모두 그 뒤를 따라갑니다. 그와 같이 아담이 죄를 범했고 우리 모두가 그의 범죄에 포함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롬 5:12).

   그러나 두 번째 차변은 우리 개개인의 죄악 됨을 말해줍니다. 각 사람이 자기 나름대로 죄를 선택했으며 따라서 우리는 본성상 죄인일 뿐 아니라 실제 행위에 있어서도 죄인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완전히 절망적인 죄인입니다. 그러나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기 위함입니다(눅 19;10). 그 희생적인 죽음을 통해서 그분은 죄인에 대한 모든 정죄를 만족시키는 대가를 지불하셨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완전한 의(義) 안에서 자신의 부활한 아드님을 믿는 모든 이들에게 완전한 용서와 의롭다함을 허락하실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의의 공효는 화평이요 의의 결과는 영원한 평안과 안전"입니다. 곤고한 양심은 이제 안식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 아드님이 이루신 일로 만족해하십니다. 그것을 근거로 하여 하나님은, 회개하고 십자가의 그리스도께로 돌이키는 죄인은 아무리 악한 자라도 값없이 용서하실 수 있습니다.


   "무서워 떠는 죄인은

   하나님이 결코 잊지 않으심을 두려워했지만

   한 완전한 지불이

   그분의 모든 빚에 대한 기억을 지워버렸네.

   그분이 돌아오는 아들들을 입 맞추고

   자기 옷을 입히시네.

   그분의 완전한 사랑이

   우리 마음에서 모든 두려움을 쫓아내네."


   그분은 모든 믿는 영혼에게 이같이 말씀하십니다.

   "내가 네 허물을 빽빽한 구름의 사라짐 같이, 네 죄를 안개의 사라짐 같이 도말하였으니 너는 내게로 돌아 오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음이니라"(사 44:22).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사 43:25).

   당신은 많은 죄로 얼룩진 그 방황하던 시절을 결코 잊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일을 다시는 결코 기억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평안을 줍니다. 그분은 기억의 책에서 그것을 지워버리되 의롭게 지워버리셨습니다. 계산이 다 끝났기 때문입니다. 빚이 청산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안전을 준다


   그리스도의 육체적인 부활은 모든 문제가 처리되어 하나님이 만족하셨다는 신성한 증표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담당하셨습니다. 그분이 우리의 죄에 대해 스스로 책임지셨습니다. 그분이 그 죄를 영원히 없이 하기 위해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분을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키사 그 아드님의 사역을 만족히 여기셨음을 증거하셨습니다.

   이제 그 복스런 주님께서는 하늘에 있는 위엄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십니다. 만일 우리의 죄가 여전히 그분에게 지워져 있다면 그분은 그곳에 계실 수 없습니다. 그분이 그곳에 계시다는 사실은 그 죄가 완전히 제거되었다는 것을 입증합니다. 하나님이 만족하셨습니다!


   "그분은 두 번 지불을 요구하지 않으시네.

   먼저 피 흘리신 보증인의 손에서 요구한 다음

   내 손에서 다시 요구하지 않으시네."


   이 사링이 영원한 평안과 안전을 가져다줍니다. 내 죄가 하나님의 의가 전혀 손상되지 않는 그런 방법으로 처리되었다는 사실을 알 때, 그분이 나를 품에 안고 계심을 알 때, 나는 의롭다함을 얻은 믿는 자로서 완전한 평안을 소유합니다. 나는 이제 그분을 "공의를 행하며 구원을 베푸는 하나님" 으로 압니다(사 45:21). 그분은 "내가 나의 의를 가깝게 할 것인즉 상거가 멀지 아니하니 나의 구원이 지체치 아니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사 46:13). 얼마나 기쁨을 주는 말씀인지요! 그분은 스스로 아무 의도 없는 자들에게 그분 자신의 의를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그분 안에서 완전해지고, 그분의 의로 옷 입은 자신을 발견하기 위해 스스로 의를 이루려는 모든 노력을 버립니다.

   모든 믿는 자는 이사야 선지자와 함께 이렇게 고백할 수 있습니다.

   "내가 여호와로 인하여 크게 기뻐하며, 내 영혼이 나의 하나님으로 인하여 즐거워하리니, 이는 그가 구원의 옷으로 내게 입히시며, 의의 겉옷으로 내게 더하심이 신랑이 사모를 쓰며 신부가 자기 보물로 단장함 같게 하셨음이라"(사 61:10).


   "이 옷을 입으니 얼마나 빛을 발하는지!

   천사가 입은 것도 내 것만 못하리."


   오직 구속받은 자들만이 그 영광의 옷을 입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친히 의의 옷이십니다. 그분을 믿는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우리는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었습니다."(고후 5:21). 그분은 "우리에게 지혜와 의와 거룩과 구속이 되었습니다"(고전 1:30).

   만일 내가 은혜 안에서 성장해야만 받아들여진다면 나는 결코 안전한 평안을 소유할 수 없을 것입니다. 내 개인적인 경험을 근거로 하나님께 만족을 드릴 수 있을 만큼 스스로 거룩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더없이 교만한 처사입니다. 하지만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열납되게 하신" 사실을 바라볼 때 모든 의심이 사라집니다. 내 영혼은 평안에 거합니다. 나는 영원한 평안과 안전을 소유합니다.


   "십자가를 흔들 수 있다면

   십자가가 준 평안도 흔들 수 있네.

   그리스도께서 죽지 않으셨다고 말할 수 있다면

   무덤이 비지 않았다고도 말할 수 있네."


   그 위대한 불변하는 사실이 그대로 남아 있는 한, 나의 평안은 흔들리지 않으며, 나의 확신은 안전하며, 나는 "영원히 안전합니다."

   사랑하는 곤고한 영혼이여, 당신은 그 사실을 보지 못하는지요? 당신은 그 복스런 아드님이 이루신 사역 안에서, 하나님이 안식하시는 그 안에서 안식할 수 없는지요? 만일 그분이 예수님에 대한 믿음으로 당신을 구원하기를 만족하실진대, 당연히 당신도 예수님을 믿는 것으로 만족해야 합니다.

Posted by 행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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