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 믿음에 있는가

                                    시험하고 확증하라


                 하나님을 믿지 않는 신자들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나의 말하는 것을 행치 아니하느냐"(누가복음 6:46).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을 믿는가? 이 말은 심각하게 생각해 보아야 할 주제다. 세상의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위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날마다 외치고, 골방에서 기도하며, 나가서 전도하고, 예배당에서 찬송하고, 직장에서 하나님 때문에 고난당하고, 희생하고, 손해를 보면서도 주님을 찬송하며 감사하고 기쁨으로 살아가는 기독교인들을 향하여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고 한다면 말이나 되는가. 그런데 기가 막힐 이 일이 현실인 것이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국민이 대통령을 아는 것과 대통령이 국민 개인을 아는 것은 차이가 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사랑하지만 하나님을 만난적이 없어 실제로는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삶이다. 기막히고 놀라운 것은 그러한 사람들이 자신은 하나님을 잘 믿으며 천국에 갈 뿐만 아니라 면류관을 받을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다는데 있다. 왜 그런 문제가 왔는가?

   만약 어떤 사람이 아버지를 믿고 아버지를 존경하고 아버지를 사랑한다고 기회만 있으면 주장하면서도 그가 아버지의 말씀은 전혀 순종하지 않고 순종할 의사도 없다면 그가 아버지를 믿고 존경한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오늘날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성경 말씀을 순종하지 않을 뿐 아니라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교파나 그 지도자들을 맹목적으로 좇아가고 있다. 요한복음 1장 1절에 보면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니라"고 하셨다.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말씀을 사랑하는 것이며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은 말씀을 순종하는 것이다.

   필자는 전도하면서 기독교에 목숨을 걸고 있는 모범적인 신자들을 수없이 만나보았다. 그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 말씀을 곱게 순종하여 구원받는 사람들이 혹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성경에 근거하지도 않은 자기주장이나 교파의 주장이나 목사님들의 가르침만 외치면서 분명한 성경말씀을 보여주어도 말씀을 거부했다. 성경말씀을 순종해야지 사람의 생각을 따르면 안 된다는 필자의 말에, 성경이 그럴지라도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끝까지 자기주장을 굽히지 않고 지옥으로 가는 사람들을 얼마나 많이 보았는지 모른다.

   서두의 말씀에 주님께서 "나더러 주여 주여 하면서 나의 말하는 것은 행치 않는다"고 탄식하신 말씀은 이 시대에 이루어졌다.

   어떤 목사님은 성경에 없는 교파의 전통을 지적하며 말하는 필자에게 우리의 신앙도 시대에 따라서 변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도대체 이 시대는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할 의사가 있는가? 수많은 기독교 지도자들이 자기들의 종교적 출세를 위하여 하나님을 이용하고 있지는 않는가? 그를 따르는 수많은 기독교인들은 자기의 행복한 인생을 위하여, 축복받기 위하여, 자신을 위해 하나님을 필요로 하지 않는가? 나의 건강, 나의 행복, 나의 출세, 나, 나, 나! 나를 위해서 하나님을 이용하고 하나님을 필요로 하는 어리석은 기독교인들이 어찌 지옥의 심판을 피할 수 있겠는가? 창조주 하나님이 그대를 꾸미는 액세서리란 말인가?

   구체적으로 이야기해보자. 열정적인 기독교인들을 만나서 신앙의 동기나 과정을 물어보면 하나 같이 말하기를 하나님이 자기를 축복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을 소위 기복신앙이라고 한다. 이 기복신앙은 무속신앙에서 출발하였다. 한국의 기독교는 무속신앙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음을 부인할 수 없다. 무속신앙의 본질은 자기에게 도움이 필요하기 때문에 자기보다 나은 어떤 신을 숭상하는 것이다. 돌이나 나무나 바다나 산에 많은 신을 만들어 숭상하는 것이다. 오늘날 수많은 기독교인들도 자기에게 하나님이 필요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따른다. 무속신앙을 만들어낸 사단이 기독교도 샤머니즘으로 변질시켜 가고 있는 것이다.

   성경을 자세히 보라. 창세기 1장 1절에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라고 기록되어 있지 아니한가.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이유는 복을 주셔서가 아니고, 기도를 들어 주셔서가 아니고, 병을 고쳐주셔서가 아니다. 이것은 마귀도 흉내 낼 수 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기 때문에, 그것이 사실이기 때문에 사실을 사실로 인정하는데서부터 믿음생활의 출발이 있다.

   신앙이 근본주의에 잡혀 있지 않고 현실주의에 잡혀 있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것이다. 왜냐하면 현실은 항상 변하기 때문에, 그런 신앙은 정함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신앙의 근본을 말씀에 두어야 한다.

   다시 본 주제로 돌아가서 생각해 보자. 예수님이 오시기 전 말라기 선지자도 하나님을 믿지 않는 하나님의 백성 유대인들을 크게 책망한 적이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선민이었다. 그들에게는 율법이 있고, 성전이 있고, 성경이 말하는 제사장이 있고, 절기가 있었다. 절기마다 절차를 따라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다. 그들은 어려서부터 성경을 배우며, 철저하게 율법을 지키며, 율법을 따라서 생활하며 그렇게 훈련된 백성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였다. 그들의 제사장들도 지도자들도 따르는 백성들도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였다. 하나님은 이 타락한 사람들을 보기가 역겨워 차라리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하였다(말라기 1장).

   오늘날 기독교인들과 너무나 흡사하지 않는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해서 특별히 만들어놓은 옷을 입혀 목사님들을 제사장처럼 꾸미고, 성가대를 만들고, 예배당을 성전처럼 특별히 만들지만, 그리고 거기에서 온갖 의식이 진행되지만 진정 주님이 거기에 함께 계신가를 심각하게 생각해보아야 한다.

   마르틴 루터가 만인 제사장 주의를 부르짖고 종교개혁을 하여 기독교가 회복되었다. 다시 말해서 구원받은 모든 성도는 다 제사장이며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릴 수 있는 귀한 신분이 되었다. 그런데 오늘의 현실은 목사님을 새로운 제사장으로 성직자로 추대하였다. 이것이 마르틴 루터의 뜻이며 성경의 가르침인가? 실로 슬프지 아니할 수 없다.

   말라기서의 이야기를 다시 해보자. 흠 없는 깨끗한 양으로 제사 드릴 것을 레위기에서 명하셨거늘 그들은 눈먼 것, 저는 것, 병든 것으로 드리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였다. 그들은 하나님을 속이려 하였다. 그들은 율법을 정면으로 거부하였다. 오늘날 기독교가 성경대로 하는 것이 몇 가지나 되는가? 생각해 보아야 한다.

   또 있다. 말라기 시대의 백성들은 성전에 와서 눈물과 울음과 탄식으로 여호와의 단을 가렸다고 말하고 있다(말라기 2:13) 그들은 성전에서 통곡하고 울므로 회개하는 척, 경건한 척, 진실한 척하였던 것이다. 오늘의 기독교인들도 어찌 그리 똑같이 닮았는가. 왜 예배당만 가면 울고 기도만 시작하면 통곡하는가? 그들은 말씀을 순종치 아니하고 하나님을 닮은 삶은 나타내지 아니하면서 통곡과 탄식으로 자기를 포장하고 신앙의 본질을 훼손하는 것이다.

   물론 필자도 경우에 따라서 울며 부르짖는 기도를 하기도 한다. 또 이것이 필요하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예배당에서 통곡과 탄식으로 우는 것과는 본질이 다른 것이다. 성경에 "항상 기 뻐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하였지 "항상 울어라. 범사에 통곡하라" 하였는가? 습관적이고 종교적이고 기계적인 눈물은 하나님의 눈에 눈물을 드릴뿐이다.

   눈물에 관해서 한마디 더 하고자 하는데 성경의 본질은 모든 죄를 다 용서받아서 주체할 수 없는 기쁨으로 흘리는 감사의 눈물이어야 하며, 또 살아가는 가운데 베푸신 은혜를 생각하고 감사함으로 흘리는 눈물이어야 하며, 또 죄를 지었을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원이 사라지지 아니함을 인하여 죄를 자백함과 함께 감사의 눈물을 흘려야 함이 옳다.

   예수님은 세상에 오셔서 하나님을 목숨보다도 더 사랑하는 유대인들과 그 지도자들을 향하여 충격적인 말씀을 하셨다.

   "그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지 아니하니 이는 그의 보내신 자를 믿지 아니함이니라"(요한복음 5:38).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노라"(요한복음 5:42).

   그들은 입으로는 하나님을 높이고 사랑하고 충성을 다하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이었다. 예수님은 그 이유를 그들 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없기 때문이라고 지적하셨다. 오늘날 우리의 기독교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고 있는가?

   이제 개인적인 신앙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마태복음 7장 24절 이하에는 믿음의 두 기초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하나는 반석이요 하나는 모래다. 잘 아시는 대로 모래 위에 지은 집은 비가 오고 창수가 나매 무너졌지만 그러나 반석 위에 지은 집은 큰 홍수가 나도 든든히 서 있었다고 말씀하신다. 반석 위에 지은 집은 무엇인가? 말씀을 듣고 순종하여 말씀의 기초 위에 믿음을 건축한 그리스도인이 아니겠는가!

   어떤 집사님에게 필자가 어떻게 구원받았느냐고 질문하였다. 그는 대답하기를 "예수님을 믿으니 천국 가는 것 아니냐"고 하였다. 다시 묻기를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느냐" 하니 "우리 집이 점쟁이 집이었는데 계속 어려운 일이 있어서 예수님 앞에 나오니 잠잠해졌다"고 하였다. 또 질문하기를 "성경적으로 구원을 이야기해 보라" 하니 버럭 화를 내면서 "왜 그렇게 꼬치꼬치 파느냐? 믿으면 믿는 것이고 천국가면 가는 것이지 그렇게 깊이 파고드는 것은 머리 아프다"고 반박하였다.

   이 글을 읽는 독자들 중에도 이런 경험이 있거나,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으리라고 본다. 생각하여 보라. 자기 영혼의 문제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는가? 시장에서 물건 하나를 사도 얼마나 망설이고 사는가. 하물며 한번 잘못되면 영원한 지옥에서 영원한 형벌을 받는데 집요하게 파고드는 사람이 잘못인가? 대강 믿는 사람이 잘못인가? 구원은 말씀에 기초하여 완성되어지지 아니하면 잘못된 구원이다. 우리의 믿음의 기초는 말씀이요 증거도 말씀이다. 말씀은 하나님이며 말씀은 예수님이며 말씀은 성령님이다. 말씀을 믿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며 말씀을 따르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배척하는 것이다.

   오늘의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모습은 또 있다.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감사하고 그분과 함께 살아가는 모습을 나타내지 못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진정 나를 지옥에서 구원해 주신 생명의 은인이라면, 그것을 깨닫고 경험했다면 그분을 얼마나 사랑하며 기뻐하고 함께 걸어갈 것인가!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신앙생활 따로, 사회 생활 따로 하지 아니한가? 또 교회 생활 따로, 가정생활 따로 하고 있지 아니한가? 그러므로 교회에 가면 경건한 신자인데 집이나 직장에 가면 딴 사람으로 바뀌는 것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도대체가 하나님을 닮지 아니한 자식들이 친자식일까?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른다면 하나님을 닮아야 하지 않을까? 일말의 양심이라도 있다면 하나님 아버지라고 기도하지 말고 의붓아버지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앞에서, 예배당에서 종교적으로 우는 사람들에 대해서 언급한 바가 있다. 그들이 우는 이유를 필자는 잘 안다. 필자도 수없이 울어보았고 또 상담을 통해서도 들었다. 큰 문제는 죄다. 죄를 용서받은 확신이 없기 때문이다. 목사님은 회개하라고 외치고 가슴속을 들여다보면 죄악들이 가득 차 있고 일주일 동안의 삶을 돌이켜보면 온통 죄, 죄, 죄 뿐이다.

   죄를 지은 자신도 밉고, 죄를 짓게 하는 친구도 밉고, 죄를 짓지 않을 수 없는 현실도 밉고, 그렇다고 현실을 탈피할 수 있는 방법은 없고...! 그 마음의 고통을 어찌 다 말로 표현하랴, 나오는 것이 눈물이요 짓는 것이 한숨이라. 탄식은 기도의 주체요 슬픔은 기도의 동력이라. 하염없이 울고 나면 마음은 시원한데 시원함도 잠깐이고 또 다른 걱정이 살아나니 내일부터 지을 죄를 걱정하지 아니할 수 없다. 자신이 위선자 같아서 몇 번이고 교회를 떠나고 싶었지만 하나님의 징계가 무서워서 그렇지도 못함이라. 이런 현실 속에 잡혀 있는 사람이 어찌 하나님을 믿는 사람인가? 그는 믿는 사람이 아니다.

   하나님은 무엇이라 말씀하셨는가? 요한복음 19장 30절에 " 다 이루었다" 즉, "모든 죄를 다 갚았다", "다 용서했다"고 말씀하시지 아니하였는가? 다 용서한 사실을 믿지 않고 죄 때문에 울고 있는 사람이 과연 하나님을 믿는 사람인가? 요한복음 1장 29절에 "세상 죄를 지고 갔다" 하였는데 그러면 과거, 현재, 미래가 다 세상 안에 속하지 아니하였는가?

   죄 용서해 주심에 감사하지는 못할망정 왜 울고 있는가? 이것은 분명히 믿는 사람이 아니다. 거짓 신자다. 그들의 인격이 거짓 신자가 아니고 신분이 거짓 신자다.

   히브리서 9장 12절에 "영원한 속죄"라고 하였는데 영원한 속죄라 함은 과거와 미래로 영원한 속죄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기 때문이다(히브리서 13:8).

   진정 믿는 자는 모든 죄를 용서해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뻐하며, 모든 죄를 용서받은 아들의 신분으로 살아가면서 순간순간 짓는 죄를 자백하고 뉘우치면서, 그러나 죄에 대한 형벌 때문에 고통하거나 지옥에 갈 걱정 없이 평화롭게 살아가는 것이다. 이것이 참 구원 받은 자의 모습이요 진실로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진지하게 자신의 구원 문제를 검토해보길 바란다.

   "저희 죄와 저희 불법을 다시 기억지 아니하리라"(히브리서 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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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03 승리와 시험(3-5장)


요절 : 사도행전 4장 12절, 5장 29절

요점 :

1. 구원은 그리스도께만 있으며 가장 악한 죄인들까지도 구원하십니다.

2.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기도해야 하며 하나님의 응답을 신뢰해야합니다.

3.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그리스도에 대해 말하기 위해 담대함이 필요합니다.

4. 하나님은 거짓말 하는 것을 참으실 수 없습니다(계 21:8).

5. 죄가 사라질 때 복이 오게 됩니다.

6. 하나님께 저항하려고 시도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앉은뱅이가 치유됨


1. 베드로와 요한이 기적을 행함(3:1-10)


어느날 베드로와 요한이 오후 3시쯤 성전으로 들어갈 바로 그 때 몇몇 사람들이 한 거지를 메고 왔습니다. 이 사람은 앉은뱅이로 태어나서 지금은 40세나 되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을 보자 그는 즉시 구걸을 했습니다(1-3절).

   베드로는 많은 돈을 갖고 있지 않았고 그러한 용도로 사용할 아무것도 없었지만 그는 하나님의 능력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날 오후에 성전에 들어가는 모든 부유한 사람들보다 훨씬 더 나은 무엇인가를  줄 수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그 앉은뱅이의 손을 붙잡아 일으켜 세웠습니다. 그는 즉시 힘을 얻어 걷고 뛰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주 예수님을 아는 것이 세상에 있는 모든 돈을 갖는 것보다 훨씬 낫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 사람은 자기가 구걸한 적은 돈 대신에 훨씬 더 나은 것을 얻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어떤 것을 구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것 대신 우리가 원했던 것보다 더 유익이 되는 것을 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의 지혜, 사랑, 능력을 신뢰해야 합니다.


2. 베드로가 모인 사람들을 가르침(3:11-26)


이 큰 기적은 곧 많은 사람들의 주의를 끌었으며 그들은 베드로가 그런 것을 할 수 있을 만큼 매우 거룩한 사람임에 틀림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그들에게 그 사람이 치유된 것은 진정으로 나사렛 예수의 능력으로 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베드로는 예수님에 대해 전했고 그들의 죄를 회개해야 한다고 경고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영화롭게 되셨으며(13절) 다시오실 것이라고 말했습니다(19-21절). 베드로는 그 사람들에게 구약성경의 모세가 오래 전에 이렇게 될 것이라고 예언한 것을 상기시켜 주었습니다.


   베드로가 자신의 영광을 구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생각을 예수 그리스도께로 돌리고 있다는 것에 주목하십시오. 우리가 주위 사람들과 말할 때 잠시 동안은 여러 가지 것들을 말할 수 있지만 주님에 대한 것으로 끌어들일 수 있는 말이나 기회를 찾아야 합니다. 이러한 일을 적절하게 하려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많이 알아야 하고 그러한 것은 성경 속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3. 베드로와 요한이 체포됨(4:1-12)


당신은 앉은뱅이를 고쳐주고 예수님에 대해서 전했다는 것 때문에 베드로와 요한이 체포되었던 것이 이상하게 생각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대제사장들과 사두개인들은 성경을 전혀 믿지 않았으며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기 원했던 자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 예수님을 높히는 베드로는 실제적으로 그들의 잔인한 범죄에 대해서 책망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종교적인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가장 미워하며 주님에 대해서 증거하는 자들을  박해하는 것을 언제나 볼 수 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공회 앞에 고소되었을 때 베드로는 그들이 행한 그 선행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한 것임을 고백하고는 곧 바로 그리스도를 죽인 유대인들을 고소했습니다(10절). 예수님의 이름은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는 유일한 이름입니다. 또한 그들의 흉악한 죄에도 불구하고 만일 그들이 예수님을 영접한다면 하나님은 그들을 용서하실 것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4. 베드로와 요한이 풀려남(4:13-22)


제사장들 조차도 베드로와 요한의 용기에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을 무식하고 학문없는 범인(凡人)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어부였지만 3년 동안 예수님께 가르침을 받았으며 대제사장들 보다 훨씬 더 현명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 재판관들 조차도 그들이 예수님과 함께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13절). 사람들에게 당신은 예수님의 임재하심을 경험한 것을 간증할 용기가 있습니까?

   그들도 큰 기적이 행해졌음을 시인했지만(16절) 여전히 자신들이 잘 못되었다는 것을 시인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제자들을 위협하여 더 이상 주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 말라고 명령했습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려고 시도하다니 얼마나 어리석은 사람들인가요!

   그러나 베드로와 요한은 사람에게 순종하는 것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옳다고 선언했습니다(19절).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에서  부모와 국법에 순종해야 한다고 명령받았습니다. 그러나 부모나 정부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못하게 한다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그들에게 불순종 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와 요한은 그들이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5. 그리스도인들의 기도(4:23-31)


그런 다음 그들이 베드로와 요한은 내보내었고, 베드로와 요한은 자유롭게 되자마자 다른 그리스도인들을 만나로 가서 함께 기도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당신은 자유로운 시간에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있기를 택하겠습니까 아니면 기도하고 찬송 부르는 것을 지루하다고 보십니까? 오직 진정으로 거듭난 자들만이 주님의 임재를 즐거워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이 유대인들의 핍박으로부터 건져달라고 기도하지 않았다는 것에 유의하십시오. 오히려 그들은 계속해서 담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시며(29절) 하나님께서 아드님을 영화롭게 할 큰 일을 해주시도록 기도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구원받은 자들속에서 주님이 하시는 큰 일을 보고 있는데, 이것은 참으로 앉은뱅이와 소경을 치유하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하고 보다 더 예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6. 그리스도인들이 능력을 받음(4:32-37절)


그들이 기도했을 때 집이 진동했고 성령으로 충만해졌으며(그들이 기도했던 대로) 매우 용감하게 증거했습니다(31절). 그렇지만 그들은 자기 재물을 서로 나누는 또다른 방법으로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사랑을 나타냈습니다(32절). 어떤 이들은 심지어 그들의 밭을 팔아 사도들이 주님을 섬기는데 시간을 사용할 수 있도록 그 돈 모두를 내놓았습니다. 바나바는 그들 중의 한 사람이었고 조금 뒤에 그에 관해서 상당히 많이 듣게 될 것입니다.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은 일을 해서 그 물질로 주님의 사역에 모든 시간을 사용하는 주님의 종들을 도와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그들은 주님이 오실 때 주실 상급을 나누게 될 것입니다.


사단에게서 온 반대


1.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거짓말(5:1-11)


우리는 이미 사단이 제사장들과 사두개인들을 이끌어 베드로와 요한을 감옥에 넣음으로써 어떻게 주님의 사역을 방해하려고 했는지 보았습니다. 이 5장에서 우리는 사단이 두 사람을 거짓말 하도록 미혹함으로써 교회 내에서 문제를 야기시키는 것을 봅니다. 그 다음에는 외부로부터 교회를 공격하여 제사장들이 사도들을 다시 감옥에 가두는 것을 보게 됩니다.

   4장의 끝부분에서 우리는 신자들이 다른 사람들을 돕는 것을 보았고 심지어 그들의 밭을 팔아 다른 사람들이 복음을 전할 수 있게 한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사랑했기 때문에 그러한 일을 한 것이지 사람들에게 영예를 얻으려고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두 명은 진정으로 모든 것을 하나님께 드리지 않고 사람들로부터 영예를 얻기 원했습니다. 그래서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그들이 가져온 돈이 그 밭을 판 값의 전부라고 말하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이것을 사람에게만 아니라 성령님께 거짓말 한 것으로 간주했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그 말을 듣자마자 모두 엎드러져 죽었고 장사지내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것으로부터 모든 거짓말이, 하나님의 일과 관련되었을 때는 특히, 끔찍한 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죄로부터 우리를 지키실 수 있습니다.


2. 사도들의 기적(5:12-16)


거짓말에 대한 벌로써 사형은 잔인하게 보이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의 교회가 깨끗하게 보존되고 죄가 없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이 없이는 어떤 복도 있을 수 없습니다. 여호수아 7장 25절에서 아간의 이야기를 기억하십시오.

   교회의 죄가 처리된 후에는 복의 때가 주어집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5장에서도 사도들이 주님으로부터 모든 병을 고치는 특별한 권능을 부여받은 것을 읽게됩니다. 처음부터 사도들의 가르침이 하나님의 것임을 유대인들에게 분명히 알게 하는 것은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사도들에게 이 놀라운 기적을 주셨습니다. 지금 우리들은 그보다 더 다양한 기적과 더욱 놀라운 것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생활이 변하는 기적과, 죄에 드려졌던 사람이 지금은 하나님을 위해서 살아가며, 매일의 삶 속에서 우리를 지키시는 성령님 등. 이런 것들은 기독교가 진실임을 누구에게나 확신시키는데 충분합니다.


3. 한 천사가 사도들을 감옥에서 구출함(5:17-21)


그러나 사단이 다시 개입하자 사도들의 무리가(베드로와 요한뿐만 아니라) 옥에 갇히게 됨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주의 천사가 밤에 옥문을 열고는 그들에게 성전에 가서 복음을 전하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새벽에 가서 백성들에게 "이 생명의 말씀을 모두" 전했습니다. 복음은 생명을 전하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가 없는 자들은 죄와 허물로 죽은 것입니다(엡2:1).우리가 어떻게 구원을 얻는지 알려 주는 것은 그들에게 죽음에서 생명으로 이르는 길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또한 그들에게 구원받는 방법 뿐만 아니라 이 생명에 관한 "모든 말씀'을 알려주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4. 재판(5:21-28)


그때에 대제사장이 공회를 소집하고 관속들에게 죄수들을 데려오도록 보냈습니다. 옥문이 잠겨있었고 지키는 사람들은 밖에서 지키고 있었지만 안에는 죄수가 없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들이 얼마나 놀랐을지 상상해 보십시오! 그후에 어떤 사람이 와서 제자들이  성전에서 다시 전파하고 있다고 보고했습니다. 그러자 관속들이 제자들에게 공회에 오도록 조용히 청하였습니다. 사도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다시 구하실 수 있음을 믿고 있었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고 그들과 함께 갔습니다.

   하나님께서 제자들을 감옥에서 구출해 내신 것과 또 다른 기적들을 통해 제사장들이 더이상 하나님을 대적하려 하지 않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러나 그들은 전에 한 잘못을 시인하기 보다는 이제는 사도들에게 그들의 명령을 어기고 예수님의 죽음에 관한 책임을 그들에게 지우려 한다고 고소했습니다. 기적은 열린 마음을 가진 사람들은 도와주지만  사단에 의해 소경된 자들은 많은 기적을 보더라도 믿지 않습니다.


5. 베드로의 증거 : 하나님께 불순종하지 말라(5:29-33)


베드로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은 것에 대해 대제사장과 유대인들을 책망했던 것은 아주 진실한 것입니다. 비록 자기의 생명을 내놓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배드로는 책망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놀라운 일은 이 끔찍한 범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여전히 모든 사람을 기꺼이 용서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죽음 때문에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의 죄를 용서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한 것에 대한 책임이 있으나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에게 유효한 구원을 이루기 위해 바로 그 죄를 사용하셨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 사람들은 사도들을 죽이려고 시도함으로 그들의 범죄한 마음에 더 큰 죄를 더했습니다(33절). 첫째로 그들은 주 예수님을 못박았고, 그 다음에는 성령님을 통한 하나님의 용서를 거절했으며, 그후에는 하나님의 사자들을 죽이려고 시도했던 것입니다! 그들이 어떻게 지옥의 심판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들 뿐만 아니라 죄가운데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와 똑같은 질문을 하게 됩니다. 결국 죄인에 대한 구원의 마지막 기회가 사라질 때까지 한가지 죄는 언제나 또다른 죄를 불러옵니다. 만일 당신이 주 예수님을 자신의 구주로서 영접지 않았다면 지금 영접하시기 바랍니다.


6. 가말리엘의 증거 : 하나님을 거역하지 말라(5:34-42)


처음에 하나님은 천사를 통해 그의 종들을 구출해 내셨고(19절) 지금은 사도들을 대신하여 공회 가운데 한 사람을 사용하셨습니다 가말리엘은 사도바울을 가르쳤던 현명한 사람이었습니다(22:3). 그러나 그가 그리스도인이 된 것은 결코 아니었으며 지금 말하는 것은 단순한 인간의 지혜였습니다. 그의 요점은 그 단체가 그저 사람에게 속한 것이라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일이 드다와 유다라는 두 사람에게 일어났었는데, 그들은 자신들이 중요한 사람인것처럼 많은 사람들을 모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모두 죽자 그 추종자들은 곧 흩어졌습니다.. 반면에, 이 단체가 참으로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면, 그들은 실제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로 드러나게 되므로 그렇게 되지 않도록 주의하라는 것입니다! 이 충고는 사도들을 도왔지만 그렇다고 가말리엘이 참으로 예수님을 믿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그는 중립을 유지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사단으로부터 하나님 쪽으로 옮기지 않는한 당신은 결코 구원받지 못할 것입니다. 담장 위에 있을 수는 없습니다.


   이제 사도들은 풀려났고, 그들을 위해서 많은 고난을 받으셨던 주 예수님을 위해 고난받을 수 있었던 것때문에 기뻐하면서 떠나갔습니다. 대제사장에게 순종하지 않고, 그들은 공개적으로든 백성들의 집에서든 주 예수님을 전파하고 가르치기를 쉬지 않았습니다. 주여, 우리가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을 받고 매일 주님을 섬기도록 준비시켜 주시옵소서! 

Posted by 행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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