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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6.01.12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시험하고 확증하라 - 영원한 속죄를 받았느냐?

        너희믿음에 있는가

                                          시험하고 확증하라


                                   영원한 속죄를 받았느냐?


   "...너희가 칠십 년 동안 오월과 칠월에 금식하며 애통하였거니와 그 금식이 나를 위하여, 나를 위하여 한 것이냐?" (스가라 7:5).


   한국의 기독교가 성경의 가르침과 다른 길로 달려가는 현상이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그 중에 예배당에 가서 울며 통곡하는 일이 마치 대단한 신앙생활의 모본처럼 인식되고 있는 것은 슬픈 일이다. 신자들이 이 땅에서 주님을 섬기면서 때때로 울며 기도할 뿐만 아니라 금식하며 기도하여야 하는 것은 기독교가 들어간 곳이면 어디나 어느 나라나 당연한 현상이다. 그러나 습관적이고 종교적인 눈물과 금식은 오히려 주님을 슬프고 탄식하게 하는 것이다.

   여기서는 죄 때문에 우는 사람들의 문제를 파헤쳐서 참된 믿음의 길을 생각해보고자 한다. 이 부분에 있어서 먼저 필자의 경험을 간단히 소개하는 것도 좋을 것 같다.

   필자는 기독교 가정에서 자라나서 초등학교를 기독교 사립학교를 다니고 고등학교도 기독교학교를 다녔다. 중학교부터 고등학교 1학년까지는 기독교에 대하여 회의적인 생각들을 가지고 지냈고 고등학교 1학년 9월부터 어떠한 계기를 통하여 교회생활에 열중하기 시작하였다. 부흥회도 열심히 나가고, 또 새벽기도도 열심히 나가고, 성경도 지나칠 정도로 열심히 읽었다. 주일학교 교사를 비롯하여 교회활동과 학교의 기독학생회 활동도 열심히 하였다. 그러나 열심을 내면 낼수록 내 마음의 텅 빈 구멍은 커져만 갔다. 교회생활에 열심이지 않을 때는 편하게 살았는데 율법을 알면 알수록 더욱 죄에 대한 부담감도 커져갔다. 무엇이 문제인지 알지 못한 채로 힘들게 살아갔다. 그러나 힘들다는 것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였다. 왜냐하면 단번에 믿음이 없다고 정죄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나 역시 믿음이 약한 이유라고 치부하고 더욱 믿음을 견고히 하기 위해 열심에 열심을 내었다. 그러나 열심만으로는 해결될 수 없는 그 무엇이 있음을 알아가면서 방황하는 생각도 싹트기 시작했다. 그런데 의심하는 것은 죄라는 부흥강사님의 말씀을 듣고 그것조차도 두려워 방황의 싹을 마음에서부터 잘라버리기 위하여 몸부림쳤다. 그러니 결국 예배당에 가서 우는 것이 일과가 되고 있었다. 수없이 많은 나날을 예배당에 가서 우는 것으로 보냈다.

   필자는 이와 같은 과거를 회상하면서 우는 자들의 이유와 그 처방에 대하여 집중적으로 조명해보고자 한다. 죄 때문에 우는 자들의 이유는 무엇인가?

   첫째로 한국의 교회가 그렇게 가르쳐 왔다. 부흥회 때마다 죄를 지적하고 말씀과 다른 생활의 위선적인 삶을 지적하므로 사람들로 하여금 회개의 눈물을 흘리게 한다. 그들의 심령을 일시적으로 흥분시켜 기쁨을 누리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켜 열광하게 하며 기뻐하게 하여 그들로 아낌없이 헌금하게 하고 충성을 서약하게 한다. 그러나 조금의 시간이 지나면 그들의 기쁨이 사라지고 공허한 그 무엇이 마음을 짓누른다. 왜 부흥회 때는 믿음이 살아나는데 시간이 갈수록 기쁨이 없어지는가? 왜 믿음이 사라지는가? 참으로 답답할 뿐이다.

   필자는 새벽기도를 하였는데 그 이유는 부흥강사님이 새벽기도 할 사람 일어나라고하여 흥분된 상태에서 일어났다가 그 이후로 한동안 새벽마다 에배당에 가서 울었다. 대부분의 교회에서는 주님 앞에 나와 눈물로 회개하는 것이 대단한 신앙의 표본인 것처럼 가르치고 있다. 그들은 예레미야 33장 3절의 말씀을 곧잘 인용하여 울게 하는 것이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의 말씀은 내면적으로 간절히 기도하라는 주님의 권면이지 외형적으로 울부짖으라는 말씀으로만 해석할 수 없다.

   솔직하게 한국의 교회 지도자들이 회개하여야 할 부분 중 하나는 감정을 자극하여 분위기에 편승하여 부흥을 도모한 것이다. 신앙은 감정 자극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진지한 진리 탐구를 통하여 진리를 깨닫고 내적인 변화를 입어 주님을 인격적으로 섬기고 따라가는 인격적인 삶의 변화이다. 이와 같은 인격적인 변화를 경험한 거듭남의 신앙생활 속에서 때로는 주님 앞에서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고 기뻐 뛰기도 하는 것이다.

   부흥회 때마다 눈이 퉁퉁 붓게 울고 통곡하며 부르짖어, 쉬어버린 목소리로 "은혜 많이 받았습니까" 하는 인사를 주고받는 모습이 성령 충만으로 비쳐지는 현실은 슬픈 것이다. 새벽마다 물 떠놓고 빌던 우리의 선조들은 새벽마다 하나님께 공들이러 가는 새벽기도에 쉽게 익숙해졌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 민족은 한 많고 눈물 많은 민족이라 슬프고 비통한 일을 너무 많이 겪어 울부짖는데도 쉽게 적응한 것은 아닌가. 생각하여 보라. 강단에서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수많은 죄를 샅샅이 지적하며 질책하여 가는데 울지 않을 사람이 있겠는가.

   새벽마다 모여서 울고 통곡하는 나라는 우리뿐임을 알아야 한다. 성경을 잘 풀어 일러서 진리의 말씀을 깨달아 하나님의 사랑으로 우리의 양심에 스며들게 하여 진정한 십자가의 사랑을 통하여 인격적인 변화를 입어 주님을 사랑하되 소리 없이 사랑하게 해야 한다.

   둘째로 오늘의 기독교인들을 울게 만드는 이유는 무엇인가?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이며 은혜의 종교인데 율법을 지나치게 강조하여 가르치므로 자신의 모습이 율법의 높은 수준 앞에서 너무 초라하므로 낙심과 절망만이 엄습할 수밖에 없다. 자신의 연약한 모습을 깨닫고 고통스러움을 상담하면 십자가의 길은 고난의 길이니 이기라고, 주님을 바라보라고 하지만 그러나 버티는 것도 한계가 있다. 생각하여 보라. 똑같은 실수를 수없이 반복하는데 얼마나 낙심이 되겠는가.

    세월이 지나면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할 때가 온다. 그냥 포기하고 죄를 합리화하면서 적응해 나가든지 아니면 신앙을 포기 하든지 해야 한다. 그러나 대부분은 합리화하면서 자주 자주 주님앞에 나아가 자신의 죄를 한탄하며 회개하는 것으로 자신을 위로하고 그냥 그렇게 살아간다. 그리고 교회생활 열심히 하면서 봉사활동에 적극 참여하여 스스로를 위로한다. 또한 헌금을 드리는 것으로 자신을 위로하여 하나님이 잘 봐줄 것으로 착각하면서 종교생활을 유지하여 나간다. 또한 수많은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으며 존경을 받는다. 그 중에는 목사님도 있다. 또한 교회에서 직분도 받았고 선행도 한다. 이와 같은 외적인 요인으로 자기를 포장하는 것 외에 경건한 모습으로 교회에 출석하며 새벽기도에 눈물로 기도하니 이보다 더 잘 포장될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들의 경건한 종교인의 모습에도 불구하고 속에는 시체가 썩어가고 있는 회칠한 무덤이다. 자신의 양심으로 볼 때 자신의 속에 시체 썩는 냄새가 코를 진동하는데 어찌 울지 않을 수 있으랴. 그러나 그것도 세월이 지나가면서 점점 무디어져 그저 그러려니 하면서 포기하기에 이른다. 신앙 자체가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성경지식이 점점 늘어가면서 아는 성경을 자신에게 합당하게 해석하여 그와 같은 현상이 정상이라고 강변하는 데까지 간다.

   필자는 어느 날 어떤 집사님을 만나서 "날마다 같은 죄를 지으며 계속 울고불고 하며 회개만하고 있으면 되는 것입니까? 주님 안에서 기뻐하는 것이 참 신앙이 아니겠습니까?" 하고 물으니 그는 불쾌한 표정으로 항변하기를 "겸손한 신앙을 함부로 판단하지 말라" 고 하였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모습을 깨달아 겸손히 회개하면서 기도하는데 어찌 함부로 말하느냐는 것이다.

   독자 여러분 정말 그러한가? 그들이 겸손하여 울며 기도하는 것인가? 오히려 자신의 못난 모습과 위선적인 모습을 발견하여 통곡하는 것 아닌가?

    혹자는 말하리라. 성경 여러 군데서 죄를 뉘우치고 회개의 눈물로 주님 앞에 나올 것을 외치고 있다고! 그러나 밝히 알아야 할 것은 불신자가 하나님께 회개하고 돌아올 때 눈물로 돌아옴이 합당하며 그 후 구원받게 되면 아버지와 자식의 관계 속에서 오순도순 대화하며 살아가는 그 자체가 신앙생활의 진면목이다.

   세 번째로 우는 신앙의 문제는 무엇인가? 그것은 시원하게 죄용서 받지 못한 까닭이다. 십자가의 도의 본질은 무엇인가? 평생을 따라다니다가 지옥까지 따라와서 괴롭히는 죄, 아무리 몸부림쳐도 떨쳐버릴 수 없는 죄, 아무리 마음을 다잡아도 사라지지 않는 죄책감에서의 해방이 아니던가. 죄로부터 오는 수많은 갈등과 고민, 원망과 시비, 분쟁과 비방과 그로 말미암아 파생되는 문제들, 죄가 주는 낙심과 열등의식과 세상에 대한 허무주의가 삶의 태반을 장식하는데 이 모든 것들로부터 자유를 얻는 것이다.

   주님은 세상에 계실 때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하셨다(요한복음 8:32). 또한 사도 바울은 이 진리의 말씀을 더 확실하게 선언하였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로마서 8 :1,2).

   이 얼마나 놀랍고 힘찬 선언인가! 우리가 죄에서 영원히 해방되었다는 말씀이다. 일시적이거나 한시적으로 해방된 것이 아니고 영원히 해방되었다는 선언이다. 이런 사람에게 어찌 통곡이 있겠는가! 이런 사람에게 눈물이 있다면 다음의 눈물일 것이다.

   첫째는  십자가의 은혜가 너무나 감사하여 눈물흘림이 마땅할 것이다. 찬송가에도 그와 같은 눈물을 노래한 내용이 있다. 찬송가 141장 1절과 4,5절을 옮겨본다.


   웬 말인가 날 위하여 주 돌아 가셨나.

   이 벌레 같은 날 위해 큰 해 받으셨나.


   나 십자가 대할 때에 그 일이 고마워

   내 얼굴 감히 못 뵈고 눈물 흘리도다.


   늘 울어도 눈물로는 못 갚을 줄 알아

   몸 밖에 드릴 것 없어 이 몸 바칩니다.


   이 얼마나 감격스런 찬송인가. 십자가의 참 도를 깨달아 거듭난 그리스도인이라면 이 찬송의 의미를 알 것이다. 슬프게도 오늘의 수많은 기독종교인들이 이 찬송의 참된 의미도 모른 채 종교적인 행사로 이와 같은 찬송을 부르고 있다는 것이다.

   초대교회의 성도들이 핍박을 받아 죽어 가면서도 기쁘게 부르면서 죽어간 찬송가의 내용이 전해 내려오는데 그 내용은 요한계시록 1장 5절 후반부에 나온다.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

   필자는 초대교회 성도들의 이와 같은 모습을 보면서 가슴이 뭉클하고 뜨거워졌던 기억이 있다. 그들은 죄에서 해방되어 영원한 지옥에서 영원한 천국으로 옮겨주신 은혜에 감격하여 죽음도 기쁨으로 받아들였다. 이와 같은 주님의 은혜를 입고도 육신이 연약하여 주님을 잘 따르지 못하고 죄 가운데 빠질 때 죄송하고 낙심이 되지만 그러나 오히려 나의 연약을 통해서 주님의 은혜가 더욱 커 보여 감사하고 죄송하여 뉘우치는 마음으로 흘리는 눈물이다.

   이 글을 읽는 독자 여러분은 어떠한가? 진정 이와 같은 고백이 있는가? 죄에서 해방 받은 확신이 있는가?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에게 더 이상 죄는 공포의 문제가 아니다. 로마서에서도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라"(로마서 6:14) 하지 아니하였는가. 죄를 용서 받은 자의 기쁨이 충만한 만큼 상대적으로 용서받지 못한 자의 고뇌도 큰 것이 당연하다. 실제로 한국의 기독교인들 중 대부분이 이 문제에 걸려 있다. 죄 문제를 분명하게 해결 받지 못하니 천국의 소망이 분명치 않고 믿음의 뿌리가 분명치 못한 사람이 기쁨이 있을 리가 있겠는가.

   신앙은 근본적인 문제가 중요하다. 죄 문제를 분명하게 해결 받지 못한 사람이 천국에 가는 일은 결단코 없다. 그들이 목사라 할지라도 마찬가지며, 장로라 할지라도 마찬가지다. 수십 년 교회에 충성을 다한 열심 집사라 할지라도, 선교사로 나가서 수십 년간 수많은 사람을 하나님께 인도하였다 할지라도 죄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하면 지옥에 떨어질 수밖에 없다.

   이 글을 읽는 분들이 심각하게 생각해 주시길 바란다. 이 글을 읽는 분들 중 혹 기독교 지도자들이 있다면 더욱 신중하게 자신의 문제를 생각할 뿐만 아니라 자신이 인도하고 있는 기독인들이 예배당에 나가서 울며 기도하는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해주기 바란다. 성경을 통해서 말하고 싶다. 히브리서 9장 12절에 보면 "영원한 속죄"에 대하여 나온다. 이 말씀은 우리의 모든 죄, 즉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죄가 다 이미 해결되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이 사실이 나의 문제 해결로 깨달아진 사람은 신분상으로 이미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에 영원한 천국에 갈 수 있는 자격을 얻었으며, 이제는 아들의 자격으로 살면서 실수와 잘못을 저지르는 죄가 있을지라도 죄를 자복하는 삶을 통하여 부자 관계를 원만하게 이끌어가는 신앙생활만 남은 것이다. 이는 죄 때문에 하나님 앞에 가서 용서해달라고 울 필요가 없이 오히려 나의 모든 죄를 단번에 용서하신 주님을 찬송하며 살아가는 감사의 생활이 있을 뿐이다.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 하고 오직 자기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니라" (히브리서 9;12).

Posted by 행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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