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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5.09.20 야고보서 -제4과 믿음과 행함(약2:14-26)

야고보서


                     제4과

                    믿음과 행함(야고보서 2:14-26)


   아마도 이 구절들이 야고보에서 가장 논쟁이 되는 구절들일 것입니다. 루터와 같은 기독교회에서 위대한 인물로 평가받는 사람도 행함으로 의롭게 되는 야고보의 가르침과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바울의 교훈이 조화될 수 없는 모순으로 보았습니다. 이 구절들은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믿음에 행위를 더하여야 한다는 이단적인 가르침을 지지하는데 늘 사용되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주 예수님을 우리의 구세주로 믿어야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고, 주님의 구속사역에 우리의 자선과 헌신이라는 행위를 더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단락은 실제적으로 "행위로 의롭게 됨" 이라는 제목을 붙일 수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행위로 의롭게 되는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칭의에 관한 온전한 진리를 꼭 붙잡기 위해서는 은혜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 사실을 분명하게 깨달아야 합니다(롬 3:24). 이것은 단순히 우리가 의롭게 될만한 가치가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실 우리는 반대되는 가치가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됩니다(롬 5:1).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인간의 응답입니다. 믿음으로 우리는 거저 주시는 선물을 받았습니다. 믿음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이루어 주신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었습니다(롬5:9). 이 피는 우리에게 의로움을 주시기 위해 치러진 대가입니다. 죄의 값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치러졌고, 이제 의로운 행동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경건치 못한 죄인들을 의롭다고 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됩니다(롬 8:33).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고 하시는 분이라는 진리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행함으로 의롭게 됩니다(약 2:24). 행위는 우리의 믿음이 진실하다는 외적인 증거입니다. 이러한 행위는 보이지 않는 것들을 밖으로 드러내어 줍니다. 이것으로 우리는 어떤 사람이 은혜로, 믿음으로, 피로, 하나님으로 그리고 행함으로 의롭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여기에는 조금도 모순이 없습니다. 이러한 주장들은 동일한 진리의 다른 면을 나타내 주고 있는 것뿐입니다. 은혜는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하시는 원리입니다. 믿음은 사람이 그 은혜를 받는 수단입니다. 피는 구주께서 치러 놓으신 대가입니다. 하나님은 실제로 의롭다고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행위는 그 결과입니다.

   헬렌 쇼(Helen Shaw)는 이러한 진리를 아름다운 시로 나타내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가 나를 택하셨네

   하늘나라에 두시기 위해.

   이것이 주님의 기쁜 뜻이었네

   나는 은혜로 의롭게 되었다네.


   그리스도께서 갈보리에서 죽으시는 바로 그 시간에

   진홍 같은 피가 흘러내렸네.

   가장 추악한 것을 눈처럼 희게 만든 피

   나는 피로 의롭게 되었다네.


   하나님이 주를 일으키신 것, 이것이 보증이기에

   악한 의심들은 가라앉아야 한다네

   주님의 부활은 모든 두려움을 잠재운다네

   나는 능력으로 의롭게 되었다네.


   성령께서 나를 인도하시네

   성경에서 말씀하는 곳으로.

   나는 그 진리를 붙잡았다네,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죽으셨다는.

   나는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다네.


   당신이 혹 내가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의심한다면

   혹 누구든 의심이 든다면 숨어 살피시오.

   내가 주님의 것임을 행함으로 보이리라

   나는 행함으로 의롭게 되었다네.


   주님을 찬양하네, 이 모든 것이 주님의 것임을.

   은혜도 믿음도 피도,

   부활의 능력도 행위도,

   나는 하나님으로 의롭게 되었다네.


무가치한 행함 없는 믿음(2:14)


   야고보는 선한 행위가 따르지 않는 믿음은 구원할 수 없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 구절을 깨닫는데 크게 도움이 되는 두 가지 열쇠가 있습니다. 첫째, 야고보는 "사람이 믿음을 가진 것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라고 말한 것이 아니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것은 그 사람이 진실로 믿음을 가진 자인가 아니면 구원받지 않은 자인가 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야고보는 그 사람의 믿음을 가졌다고 하는 고백이 헛된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믿음이 있다고 말하지만 그 사람의 삶에서는 그것을 나타내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유용한 열쇠는 이 구절의 끝에 있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라는 물음에 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그러한 믿음이 구원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야고보가 제시하고 있는 믿음이 어떠한 믿음이냐고 묻는다면 그것은 이 구절의 앞부분에 나오고 있습니다. 야고보는 선한 행위가 뒷받침되 않는 말뿐인 믿음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믿음은 무가치한 것이며, 말만 있을 뿐 아무 것도 아닙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에 대한 예(2:15-16)


   행함이 없는 헛된 말들에 대해 여기에 예를 들었습니다. 두 사람에 대한 소개가 나오고 있습니다. 한 사람은 먹을 것도 입을 것도 없는 사람이며 다른 한 사람은 둘 다 가지고 있지만 그것을 나누기를 원치 않는 사람입니다. 무척이나 관대하다고 말하는 그가 가난한 형제에게 "옷을 좀 입고 다니게나, 그리고 좋은 음식도 좀 먹고." 라고 말하면서도 그 사람을 도와주기 위해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그 말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한 말들은 전혀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들은 전혀 배부르게도 몸을 따뜻하게 해주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행함이 없는 죽은 믿음(2:17)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입니다(17절). 행함이 없는 믿음은 전혀 진실한 믿음이 아닙니다. 야고보는 우리가 믿음에 행위를 더함으로 구원받는다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한 견해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 이뤄 놓으신 사역을 모욕하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믿음과 행위로 구원받았다면 주 예수님과 우리 자신이라는 두 명의 구주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약성경은 아주 분명하게 그리스도께서 유일하신 구주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야고보가 강조하고 있는 것은 우리가 다만 행위의 믿음으로 구원받았다는 것이 아니라 선한 행위의 삶이 수반되는 그러한 믿음으로 구원받았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행위는 구원의 뿌리가 아니라 구원의 열매라는 것이며, 동기가 아니라 결과라는 것입니다.


나뉘어질 수 없는 믿음과 행위(2:18)


   참된 믿음과 선한 행위는 나뉘어질 수 없습니다. 야고보는 이것을 두 사람의 논쟁에서 끌어다 보여줍니다. 첫째 사람은 진실로 구원받은 사람으로 말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두 번째 사람은 믿음이 있다고 고백은 하지만 그 믿음을 선한 행위로 나타내지 않는 사람입니다. 첫 번째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서 대답할 수 없는 말로 도전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대화로 바꾸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첫째 사람이 아마도 바르고도 타당하게 말하였을 것입니다. "그렇습니까? 당신은 믿음이 있다고 말하지만 그것을 나타내는 행위는 없으시군요. 나는 그러한 믿음은 선한 행위로 뒷받침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선한 행위 없이 당신이 믿음이 있다는 것을 나에게 증명해 보십시오. 당신은 그렇게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당신이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나타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삶으로 그것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나는 나의 행위로 내 믿음을 당신에게 보여주겠습니다." 행위를 떼어놓고 믿음을 나타내려고 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충분치 않은 지적인 동의(2:19-20)


   그 논쟁은 계속 됩니다. 첫째 사람이 계속 말을 이어갑니다. 어떤 사람이 고백한 믿음이 그저 잘 알고 있는 사실에 대한 지적인 동의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지적인 동의는 인격적인 신뢰가 전혀 포함되어있지 않으며, 어떠한 삶의 변화도 일으키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믿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참되고 꼭 필요한 것이기는 하지만 이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마귀들도 하나님이 계신 것을 믿고 하나님에 의해 그들에게 임할 최후의 형벌을 생각하므로 떱니다. 마귀들도 그 사실은 믿고 있지만 그분께 나아오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이 진실로 주님을 믿는다면 그것은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완전히 맡긴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신뢰는 삶의 변화로 나타납니다. 행위와 동떨어진 믿음은 머리로 믿는 것이며 황무지와 같습니다.


두 가지 예(2:21-25)


   여기에서는 행위로 말미암은 믿음에 대한 두 가지 예가 구약 성경으로부터 제시되었습니다. 유대인 아브라함과 이방인 라합에 관련된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 행함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얻었습니다. 올바른 시각으로 이 진리를 보기 위해 창세기 15:6을 살펴보겠습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셨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여기에서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그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받은 것입니다. 아직 우리는 아브라함이 그 아들을 드리는 것을 보게되는 창세기 22장까지 나아가지 않았습니다. 그곳에서는 아브라함이 행함으로 의롭다하심을 얻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여호와를 믿자 곧 하나님의 보시기에 의롭게 되었지만 그로부터 일곱 장 뒤에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시험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기꺼이 드림으로 그의 믿음이 진실된 것임을 나타냈습니다. 아브라함의 순종은 그의 믿음이 그저 머리로만 믿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신뢰하는 것임을 보여주었습니다.

   때로 아브라함이 이삭을 드릴 때 다른 어느 누구도 그 자리에 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 누구도 그의 믿음의 실상을 증명할 수 없었다는 반대적인 이야기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과 동행했던 젊은 사람들이 멀지 않은 곳에서 아브라함과 이삭이 산에서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더욱이 그곳에는 이삭이 있었습니다. 또한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자기 아들을 기꺼이 드리려 했던 것을 성경이 기록으로 보존하고 있기에 모든 세대에 아브라함의 믿음의 실상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믿음이 행위를 낳았고 아브라함의 행위로 말미암아 그의 믿음이 완전하게된 것이 분명합니다.  참된 믿음과 행위는 나뉘어질 수 없습니다. 믿음은 행위를 낳고, 행위는 믿음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이삭을 제물로 드리는 것에서 우리는 아브라함의 믿음이 실제적으로 나타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는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는 성경에 대한 실제적인 성취입니다. 아브라함의 선한 행위는 그가 하나님의 벗임을 확인시켜 주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여기에서 결론을 내릴 수 있는 것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 것이지 믿음으로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24절). 다시 말하지만, 이것은 사람이 믿음에 행함을 더하여 의롭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하나님께 대하여는 믿음으로 그리고 사람에 대하여는 행함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믿는 순간 그를 의롭다고 하십니다. 그러나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네 믿음의 진실성을 보여봐라". 그렇게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선한 행위로 말미암습니다.

   두 번째 예는 구약성경의 기생 라합입니다(25절). 라합은 기생이었기 때문에 자신의 선한 행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것이 아님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라합이 사자(정탐)를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아가게 하였으므로 행함으로 의롭게 된 것입니다. 라합은 가나안 족속으로 여리고 성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어떤 전승하는 군대가 그성으로 진군해 오고 있으며, 그 군대에 대항할 자가 아무도 없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라합은 히브리인의 하나님이 참 하나님이라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리고는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자신은 그 하나님과 함께 하리라고 결심했습니다. 그 때 정탐들이 그 성으로 들어오자 그들을 도와주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 라합은 참되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믿음에 대한 진실성을 증명하였습니다. 라합이 정탐들을 숨겨줌으로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 이러한 친절한 행동이 그녀가 참된 신자라는 것을 증명해 준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구절을 가지고 구원이 선한 행위로 말미암는 것임을 증명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말하는 선한 행위란 자선을 베풀고, 빚을 갚고, 진실을 말하며 교회에 나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브라함과 라합에게 이러한 선한 행위가 있었나요? 분명히 아닙니다.  아브라함의 경우는, 기꺼이 자기의 아들을 죽이려 했던 것이었습니다! 라합의 경우에는, 반역이었습니다. 만일 이러한 행위들에서 믿음을 빼 버린다면 그것은 선한 것이 아니라 악한 것입니다. 이에 대해 매킨토시는(Mackintosh) 다음과 같이 잘 말하였습니다. "그 행위에서 믿음을 떼 내어 보라 그러면 그것은 부도덕하고 무정할 뿐 아니라 죄악된 것이리라. 이 단락이 제시하는 것은 율법적인 행위가 아니라 생명의 행위이다. 당신이 아브라함과 라합의 행위에서 믿음을 제거해 보라. 그러면 그 행위들은 악한 행위일 뿐이다. 그러나 그 행위들을 믿음의 열매로 바라보라 그러면 그 행위들은 생명의 행위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선한 행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 사용될 수 없습니다. 그렇게 사용하는 자들은 이 구절을 살인과 반역으로 말미암아 구원받는다고 하는 어처구니없는 가르침으로 전락시키는 것입니다.


행함이 없는 생명 없는 믿음(2:26)


   이 단원은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26절)는 선언으로 끝납니다. 이는 매우 훌륭한 요약입니다. 야고보는 믿음을 사람의 몸으로 비교했고, 행함을 영혼으로 비유했습니다. 영혼이 없는 몸은 생명이 없는 것이며, 쓸데없고, 가치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며, 소용없고, 무가치한 것입니다. 그것은 참으로 구원하는 믿음이 아니라 거짓된 믿음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다음과 같은 질문에 답함으로 우리의 믿음을 시험해 보라고 요약하는 것입니다. 나는 옷이 충분치 못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기 위해 작은 옷장으로 만족합니까? 나는 주린 사람들을 돕기 위해 음식을 절약합니까? 나는 생명의 양식을 갈구하는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경건하게 살고 있습니까? 나는 아브라함과 같이 내 삶에서 가장 아끼는 것을 하나님께 기꺼이 드릴 수 있습니까? 나는 라합과 같이 그리스도께 충성된 자가 되기 위해 세상에 대해 기꺼이 반역자가 될 수 있습니까?

Posted by 행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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