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 확신

                                   갈망하는 이들에게

                                                         H. A. 아이언사이드                               

                                제9장

                       생각해볼 문제들(2)



18. 내가 구원받았다는 증거를 얻을 때까지 계속 기도해야 하지 않을까요?


   성경 어디에도 기도해야 구원받는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물론 기도는 영적인 문제로 고민하는 영혼의 자연스런 표현입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구원받기 위해 "계속해서 기도해야 한다"는 말씀이 일절 없습니다. 정작 필요한 것은 복음을 믿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당신이 지치고 주린 몸으로 집에 들어가 아내에게 "가급적 빨리 밥상 좀 차려줘요"라고 말했다고 가정해 봅시다. 아내가 즉시 대답하고 상을 차린 다음, 이제 와서 준비한 음식을 먹으라고 당신을 불렀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가서 먹지는 않고 계속해서 밥을 달라고 간청합니다. 그러면 아내가 당신을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주린 죄인들을 위해 복음 잔치를 배설하시고 "와서 먹으라"고 모든 사람들을 초청하셨는데, 사람들이 그분의 음성에 순종하는 대신 무릎을 꿇고 그분의 은혜와 자비를 계속해서 구하기만 하고 그분의 초청을 받아들이고 그들의 구원을 위해 준비된 산 떡을 먹지 않는다면 그분이 어떻게 생각하시겠습니까?

   성령의 증거는 성령께서 하신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자들만 소유할 수 있습니다. 믿는 자는 하나님 말씀에 주어진 그에 대한 증거를 받아들인 자들입니다(히10;15). 그는 그 마음에 진리가 받아들여진 까닭에 자기 안에 증거가 있습니다(요일 5:10). 믿는 순간 성령께서 안에 들어 오실 때 그는 성령께서 그의 영으로 더불어 증거하시는 것을 맛봅니다(롬 8;16). 그 증거는 기쁜 감정이 아닙니다. 그것은 성령께서 말씀을 통해 주시는 증거입니다. 물론 이 증거를 믿을 때는 당연히 기쁨과 즐거움이 따라옵니다. 내가 구원받은 줄 아는 것은 기쁘기 때문이 아닙니다. 다만 내가 구원받은 줄 알기 때문에 나는 기뻐합니다. 내가 아는 한 전도자는 어린 시절 "믿음은 뿌리, 감정은 열매"라는 찬송을 즐겨 불렀다고 하는데, 아주 적절한 표현입니다.


   "내 구주께서 주시는 평안은

   예전엔 몰랐던 평안이라.

   그분을 더욱 의지하는 법을 배울수록

   앞길은 더욱 밝아지리."


19. 나는 때로 죄를 범하여 구원 얻을 기회를 아주 잃어버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오랫동안 주님을 찾았는데도 만나지 못했거든요.


   구원받기를 원하는 사람은 죄 때문에 구원 얻을 기회를 잃지 않습니다. 구원받기를 원하는 마음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마음입니다. 만일 당신이 하나님을 찾고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당신을 찾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당신이 주님을 찾았는데 만나지 못했다는 말은 무슨 뜻인지요? 그분은 자신을 숨기시지 않습니다. 그분은, 선한 목자가 잃어버린 양을 찾듯이 사랑 때문에 죄인들을 찾아오셨습니다.

   한 어린 소년이 하루는 "얘, 넌 예수님을 발견했니?"라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그 소년이 놀란 표정으로 올려다보며 말했습니다. "예? 발견했냐구요? 예수님이 길을 잃은 게 아니라 내가 길을 잃었어요. 그리고 예수님이 나를 찾으셨어요." 얼마나 놀라운 고백인지요!

   구약시대에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를 통해서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사 55:6). 이 말씀은 여전히 유효합니다만, 그러나 복음의 완전한 진리를 전해주지는 않습니다. 예수께서는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눅 19:10). 당신은 잃어버린 자인가요? 그렇다면 그분이 당신을 찾고 계십니다.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출 14:13).

   지금 그 위치에 서서 그분께 당신의 마음을 아뢰십시오. 회개하는 죄인의 모습으로 나아가십시오. 그러면 그분이 당신을 기다리고 계셨으며, 기꺼이 당신을 받아주시는 분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죄 때문에 구원 얻을 기회를 잃었다고요? 주님께서 "누구든지 내게 오는 자는..."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나요? "누구든지"라는 말에 당신도 포함되지 않았나요? 만일 당신이 그 말씀이 당신을 포함하지 않는다는 증거를 보여주지 못한다면 당신은 여전히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이 미칠 수 있는 영역 안에 있는 것입니다. 당신이 절망적인 상태에 빠졌다고 속삭이는 영혼의 대적의 거짓말에 귀기울이지 말고 길과 진리와 생명 되신 분의, '그 이름을 믿으라'는 부드러운 초청에 귀기울이십시오.


   만일 내가 지금 그분을 찾고 있다면

   그것은 그분이 사랑으로 나를 찾으신 까닭이라.

   그분을 멀리 떠나 죄 가운데 헤맬 때

   그분이 내 귀를 열고 그분의 초청에 귀 기울이라 하셨네.

   그분이 나를 찾고 그분이 나를 발견했으니

   오, 그리스도께서 모든 것을 행하셨네."


20. 하지만 내 믿음이 내 영혼을 구원할 만큼 강한지 어떻게 알 수 있나요?


   영혼을 구원하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믿음의 대상으로 보내신 자가 영혼을 구원합니다. 물론 우리는 믿음을 통해 의롭다 함을 얻습니다. 그러나 실은 그분의 피로 의롭다함을 얻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은 아무리 약한 믿음일지라도 영혼을 구원합니다. 자기 자신이나 선행이나 교회나 종교의식에 대한 믿음은 아무리 강할지라도 당신을 여전히 버림받은 상태에 머물게 합니다.

   한 전도자가 병원을 찾아갔는데 한 간호사가 흰 커튼이 쳐진 침대를 가리키며 귀띔해 주었습니다.

   '가엾은 사람이 죽고 있어요. 신부님이 방금 오셔서 마지막 성사(聖事, 종부성사)를  마쳤어요. 이제 얼마 살지 못해요."

   전도자가 허락을 받고 커튼을 제치고 침대로 다가갔습니다. 그 사람 가슴에 십자가가 놓여 있었습니다. 전도자는 십자가를 집어 들었습니다. 병자가 눈을 뜨고 언짢은 표정으로 읊조렸습니다.

   "다시 갖다 놓으세요. 가슴에 놓고 죽고 싶어요."

   전도자가 십자가에 새겨진 그림을 가리키며 힘주어 말했습니다.

   "놀라운 구세주시지요!"

   "그래요, 그래요, 나는 십자가를 사랑해요, 다시 갖다 놓으세요. 아마 편안히 죽게 해줄 거예요."

   전도자가 대답했습니다.

   "십자가가 아니라 십자가에서 죽으신 주 예수님, 그분이 당신을 위해 죽으셨어요."

   병자는 놀란 표정을 하더니 얼굴이 환해졌습니다.

   "아, 그래요, 십자가가 아니라 십자가에서 죽으신 분이에요. 그분이 나를 위해 죽으셨어요.  알아요. 알아요. 그걸 깨닫지 못했네요."

   믿음이 그의 영혼에서 샘솟듯 우러나왔습니다. 전도자는 십자가를 치우고 짤막한 기도를 올리고 자리를 떠났습니다. 몇분 후 전도자는 그 병자의 몸이  병실에서 나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후에 전도자는 그 때 일을 회상하면서 이렇게 외쳤습니다.

   "나는 알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의 사역을 너무 소중히 여기셔서 하늘에 데려가 달라고 청하는 사람은 누구나 다 데려가십니다!"

   그것은 복스럽게도 사실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을 바라보는 믿음은 아무리 미약한 믿음일지라도 영혼을 능히 구원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을

   바라보는 시선에 생명이 있네.

   그 순간 당신에게 생명이 있네.

   죄인이여, 그분을 바라보고 구원을 얻으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분을 바라보고 구원을 얻으라."


21. 하지만 구원을 받으려면 율법을 지켜야 하지 않을까요?


   율법을 지킨다고요? 당신은 이미 그 거룩한 계명들을 셀 수 없이 많이 범했습니다. 십계명을 곰곰이 생각해보십시오. 그 중에 당신이 문자 그대로든 마음으로든 범하지 않은 계명이 있나요? 그 계명들을 하나 하나 살펴보고 그 계명들을 주신 하나님 앞에서 정직히 자신을 점검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이를 행하면 그로 인하여 살리라"고 말씀하셨을 뿐 아니라(레 18:5), 또 한편으로는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실행치 아니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27:26). 이제 그 계명들을 신중하게 살펴보겠습니다(출 20:3~17)


   (1)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하나님은 절대적으로 배타적이십니다! 그분은 유일한 예배 대상이셔야 합니다. 그런데 당신은 삶에서 그러한 위치를 그분께 드렸습니까? 다른 여러 신들이 당신의 사랑과 공경을 받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마음과 성품과 뜻과 힘을 다해 사랑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당신은 그 명령을 항상 지켰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첫 번째 게명을 범했음을 시인하십시오.


   (2)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새긴 우상 앞에 실제로 절하는 문제에 관한 한 당신은 아무 잘못도 없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에서 마음에 우상을 둔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들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나무나 돌이나 철로 만든 우상과 똑같이 가증스럽습니다. 그 우상들은 어떤 것들일까요? 자아, 재물, 명예, 쾌락 등등 많은 우상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거짓 신들에 빠진 자들은 나무나 철로 만든 신상에게 절하는 이교도들과 다를 바 없는 우상 숭배자들입니다. 당신은 그런 잘못된 숭배에 빠지지 않았습니까? 만일 그렇다면, 홀로 참되고 살아 계신 하나님 앞에 겸손히 엎드려 "내가 범죄하였나이다"라고 다시금 부르짖으십시오.


   (3)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는 이 악한 행위는 얼마나 널리 만연한지요! 성경은 "맹세하지 말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러나 이 계명을 범하지 않는 사람은 얼마나 찾아보기 힘든지요. 꼭 악한 말을 해야 주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것이 아님을 기억하십시오. 그 이름을 합당한 공경심과 경외심 없이 경솔하게, 가볍게 사용하는 것도 맹세와 저주로 사용하는 것과 똑같이 그 계명을 범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저주로 입술을 더럽히지는 않지만 생각으로 맹세를 합니다. 당신은 이 세 번째 계명 앞에서 "아무 잘못도 없다"고 정직히 말할 수 있습니까?


   (4)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하나님은 인간의 시간의 7분의 1을 요구하십니다.6일은 노동과 합법적인 즐거움을 위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루는 하나님 자신을 위해 따로 구별해둘 것을 요구하십니다.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막 2:27).

   그러나 이 날에 사람들은 얼마나 배은망덕한 품행을 드러내는지요! 하나님의 거룩한 날을 무시하는 것은 곧 하나님의 모든 권위를 거역한다는 증거입니다. 이에 대해 당신은 뭐라 말하겠습니까? 당신은 죄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영원한 공의의 법정 앞에서 답해보십시오!


   (5) '네 부모를 공경하라.'

   말세의 두드러진 죄악 중 하나는 "부모에 대한 불순종"입니다. 사람마다 다 자기중심적입니다. 한결같이 부모를 공경하고 깎듯이 모시는 자식은 정말 찾기 힘듭니다. 부모에게 무관심한 것은 더 이상 죄로 간주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땅에서 그 부모에게 복종하신 주님께서 우리의 본이십니다. 우리는 그분이 보여주신 완전한 본에 얼마나 미치지 못하는지요! 자신과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십시오. 만일 당신이 불순종하고 무관심한 자녀였다면 그 잘못을 합리화하려고 하지말고 회개하는 마음으로 죄인의 위치에 서서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십시오.


   (6) '살인하지 말지니라.'

   당신의 손은 아마 사람의 피로 물든 적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일서에서는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라고 했습니다(요일 3:15). 그 높고 거룩한 표준에 비추어 볼 때, 누가 정죄를 당치 않겠습니까?


   (7) '간음하지 말지니라.'

   자기 몸을 순결하게 보존하여 이 두려운 죄를 멀리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생각이 순결한 사람은 얼마나 적은지요.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는 하나님 보시기에 간음을 범한 것이라고 주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마 5:28). 이 말씀에 비추어 보면 아마 간음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만일 부정한 행동이나 생각으로 당신의 영혼이 더렵혀진 적이 있었다면 이 타락한 시대의 심리학자들이 하는 것처럼 변명하려 하지말고 누가복음 7장의 여인과 요한복음 8장의 간음한 여인과 함께 예수님 발아래 엎드려 자신의 죄를 자복하고 "네 죄사함을 얻었느니라"(눅 7:48),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라"는 그분의 음성을 들으시기 바랍니다(요 8;11).


   (8) '도적질하지 말지니라.'

   우리는 도적질을, 많은 돈이나 귀중한 물건을 훔치는 것으로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작은 것을 훔친 자도 집을 털거나 거액의 돈을 빼돌린 자와 똑같이 도적입니다. 자기 것이 아닌 것을 임의로 쓴 적이 전혀 없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요?


   (9)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지니라.'

   "악인은 나면서부터 곁길로 가며 거짓을 말한다"고 했습니다(시 58:3). 아이들은 진실을 말하도록 가르쳐야 할 필요가 있다고 모두들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거짓은 가르칠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하기" 때문입니다(마 12:34). 그리고 마음은 "만물보다 거짓됩니다"(렘 17:9). 그러기에 거짓된 말과 행동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 점에 있어서 "나는 죄가 없다"고 말할 자 누구겠습니까? 그렇게 말하는 것은 여러 가지 거짓말에 또 한 가지 거짓말을 추가하는 것입니다.


   (10) '탐내지 말지니라.'

   이것은 스스로 의롭게 여기던 다소의 사울에게 그의 죄를 깨닫게 한 명령이었습니다. 외적인 의식에 관한 한 아무 잘못이 없다고 주장할 수 있었던 그가 하나님이  금하신 것을 탐하는 욕심에 노예된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음"을 발견했습니다(롬 7;10). 죄가 계명을 통해 기회를 타서, 탐욕, 음욕, 악한 정욕 등 각양 탐심을 마음 속에 일으켰습니다. 그는 자신이 그 자신을 속박하는 사슬을 스스로 끊을 수 없는 무력한 노예임을 깨달았습니다. 당신도 동일한 사슬에 매인 자신을 발견하지 않는지요? 그렇다면 탐내지 말라는 율법의 소리를 들으십시오. 그리고 그 권위를 인정하고 당신이 그 정죄 아래 있음을 시인하십시오.


   하나라도 범하면 죄를 짓는 것이다.

   혹시 당신은 이상의 내용을 주의 깊게 살펴보고, 자신이 그 십계명 모두를 범하지는 않았다고 생각할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야고보서 2장 8~11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음을 기억하십시오.

   "너희가 만일 경에 기록한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의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거니와, 만일 너희가 외모로 사람을 취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죄자로 정하리라.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간음하지 말라 하신 이가 또한 살인하지 말라 하셨은즉, 네가 비록 간음하지 아니하여도 살인하면 율법을 범한 자가 되느니라."

   사슬은 그 연결고리만큼만 강한 법입니다. 당신이 열 개의 고리로 연결된 사슬에 달린 채 벼랑에 매달려 있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당신이 저 아래로 떨어지려면 얼마나 많은 고리가 끊어져야 할까요? 그와 같이, 만일 당신이 십게명 중 하나만 범했다 하더라도 당신은 율법을 범한 것이며 따라서 율법의 저주 아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이 주어진 것은 사람을 구원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율법은 죄를 드러내고, 죄를 더욱 죄 되게 하고, 죄에 그 범법적인 특성을 부여하기 위해서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 3;20).

   그러나 하나님을 찬미하게도,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 3:13). 그분은 사람이 되셨으며, 율법 아래 나셨습니다. 그분은 그 율법을 완전히 지키셨으며, 그 형벌을 당할 운명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십자가로 나아가 우리를 위해 율법의 저주를 당하셨습니다. 그분을 믿는 우리를 율법의 공의로운 정죄에서 영원히 해방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요 3;18).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롬 8:1).


   "율법에서 해방되었네.

   얼마나 행복한 상태인가!

   예수께서 피를 흘리셨네.

   거기 죄 사함이 있네.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저주를 받고 죽으사

   영원히 우리를 속량했네."


   22. 하지만 그리스도께 나아가 죄 사함을 받기 전에 내가 다른 사람에게 저지를 모든 잘못을 먼저 보상해야 하지 않을까요?


   당신이 다른 사람에게 저지른 잘못 때문에 마음을 쓴다는 것은 잘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 어디에도 먼저 잘못을 보상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물론 구원받은 후에는 다른 사람에게 잘못한 모든 일을 바로 잡기 위해 최대한 노력해야 합니다. 이미 구원받은 자들에게 사도 바울은 이렇게 권했습니다.

   "도적질하는 자는 다시 도적질하지 말고 돌이켜 빈궁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하여 제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엡 4:28).

   십자가에 달린 회개한 강도를 생각해 보십시오. 분명 그는 과거에 사람들에게 많은 잘못을 저질렀을 것입니다. 그러나 돌이켜 예수님을 믿은 순간 그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는 그 동안 저지른 많은 잘못을 보상하기 위해 손을 쓸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 십자가에 달리신 거룩한 분의 공로를 통해서 그는 값없이 온전히 죄 사함 받고 낙원에 들어갈 자격을 얻었습니다. 만일 그가 그 저주의 나무에서 내려와 더 살도록 허락받았다면, 의심할 바 없이 남은 생애를 그가 행한 잘못을 보상하는데 드리며 회개의 참된 증거를 보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런 일과 전혀 상관 없이,주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근거로 구원받은 것입니다.

   당신도 동일한 방법으로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일단 구원받은 후에는 그리스도 안의 새 사람으로서, 그분의 영광을 위해 이타적이고 헌신적으로 살기를 힘씀으로 그분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증명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만일 사람들에게 잘못한 일을 바로잡을 수 있다면, 그렇게 함으로써 당신 자신의 마음을 기쁘게 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구원의 능력을 증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과거를 청산하려는 이 모든 노력은 당신의 영혼을 구원하는 문제와는 하등 관계가 없습니다. 당신은 하나님이 당신을 구원하시는 일을 도울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사역만이 그 일을 이룰 수 있습니다.


   "당신의 죽은 행실을 내려 놓으라.

   예수님의 발 앞에 내려 놓으라.

   그리고 그분 안에 서 있으라,

   다 이루신 그분 안에 굳게 서 있으라."


23. 나는 그리스도인이 되고 싶어요. 하지만 심판 날까지는 아무도 자신이 확실히 구원받았는지 알 수 없지 않을까요?


   그러나 심판 날까지 기다리면 너무 늦습니다! 만일 그 날이 오기 전에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면 당신은 분명 버림당할 것입니다. 아마도 당신은 그 백보좌 심판의 목적과 그 때에 심판 받을 대상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 날은 죄인들이 심판 받는 날입니다. 그곳에는 그리스도인들이 심판 받기 위해 서 있지 않습니다. 그들에 대해서는 우리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24).

   "정죄에 이르지 아니하나니"가 아니라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입니다. 여기에 놀라운 진리가 계시되어 있습니다! 주 예수님을 믿는 자는 자신의 죄 때문에 심판 받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그를 위해 이미 심판을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그 까닭에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구주로 믿고 영접하는 모든 이들을 값없이 완전히 의롭다 하십니다. 위에 인용된 구절을 다시 살펴보십시오. 그분의 말씀을 듣고 그분을 믿는 모든자는 영생을 얻었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현재 영생을 소유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었으므로 영생을 얻기를 희망한다"고 말하는 것은 불신앙적인 말입니다. '겸손히' 그렇게 말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겸손'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말씀하신 그대로 믿고, 영생이 당신의 것임을 확실히 믿으십시오.


   '비록 무가치한 자이지만 나는 의심치 않네.

   그분께 나아오는 자는 내어쫓지 않겠다고 하셨네.

   그 복된 소식을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다고 외치네."


24. 내가 구원받은 줄 알기 전에 먼저 침례를 받아야 하지 않을까요?


   침례를  받는다는 것은 물론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침례가 영혼의 구원을 가져다줄 수는 없습니다. 베드로가 말했듯이, 노아의 구원이 방주 안에서 이뤄졌듯이, 침례는 구원을 상징해줍니다. 그러나 우리는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말씀을 분명히 듣습니다(엡 2:8).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라고 분명히 물은 빌립보 간수에게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구원을 얻으리라"는 분명한 답이 주어졌습니다(16장). 침례는 믿음 뒤에 왔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구주와 주로 시인하는 하나님이 정한 방법이었습니다. 구원받은 많은 사람들이 침례를 받지 못했습니다. 회개한 강도의 경우를 다시 한번 생각해보고, 하나님께서는 죄인을 구원하는 두 가지 방법을 갖지 않으셨음을 확신하십시오. 당신이 오직 그 피로 모든 죄를 깨끗케 하신 예수님을 믿을 때, 회개한 강도를 구원한 그 동일한 은헤가 당신을 구원할 것입니다.

   침례에 관한 조금 혼란스러워 보이는 구절들이 적지 않게 있습니다. 그러나 은혜로 말미암은 구원을 말하는 분명한 말씀들을 확고히 의지하십시오. 그리고 당신이 성경을 공부하면 할수록 그 혼란스런 대목들이 성령님의 인도 아래 더욱 선명해질 것입니다. 우리가 죽음에서 구원받는 근거는 그리스도의 죽음의 침례입니다.


   "주 예수님, 당신의 영혼의 고난을 우리가 기억합니다.

   그 깊은 사랑 까닭에 파도에 삼키우고

   죽음의 어두운 물에 잠기울 때,

   우리를 위해 그 피를 흘리시고

   우리를 위해 영광의 주께서

   죽은 자와 함께 헤아림을 입으셨을 때

   그 깊은 고난을 기억합니다."


25. 내가 올바른 교회에 속했다는 확신만 있다면 안전 할텐데요. 하지만 너무 많은 교회들이 있어서 아주 혼란스러워요.


   교회는 안전을 보장하는 방주가 아닙니다. 교회는 주 예수님을 믿고 성령 세례를 받아 한 몸을 이룬 모든 이들의 집합체입니다. 아무리 역사와 전통이 있다 하더라도 교회는 단순한 조직체가 아닙니다. 만일 당신이 올바른 교회(어떤 이 땅의 조직체)에 속했다고 믿고 그것을 구원의 근거로 의지한다면 당신은 영원히 버림받을 것입니다! 당신의 믿음의 대상은 교회의 머리되신 부활하신 그리스도입니다. 그분이 유일한 구주입니다. 모든 교회적인 자랑과 허세는 헛되며, 교회의 일원 됨을 의지하는 것은 스스로를 속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만이 모든 심판의 폭풍을 안전하게 지나게 하는 방주입니다. 어떤 교파를 의지하든 당신은 그것으로 구원 얻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께로 나오면 그분의 백성들과 사귐을 갖도록 마음이 준비될 것입니다.


   "주여, 당신의 나라를 사모하나이다.

   그곳은 당신이 거하시는 집이요

   우리의 복스런 구원자께서

   그 보배로운 피로 구원하신 교회니이다."


26. 나는 예수께서 나를 위해 죽으셨음을 믿어요. 하지만 구원받았다고 말하기가 주저돼요. 하나님을 마땅히 사랑할 만큼 사랑하지 못하기 때문이죠.


   과연 어느 누가 하나님을 마땅히 사랑할 만큼 사랑할까요? 사랑을 당신의 마음에서 찾으려는 것은 큰 실수입니다. 그보다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표현된 당신을 위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이제까지 당신에게 베풀어진 그분의 모든 돌보심을 생각하며 즐거워하십시오. "사랑이 사랑을 낳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문제에도 잘 적용됩니다. 그분의 사랑에 사로잡힐 때 당신의 마음은 그 사랑에 반응하여,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고 고백할 수 있게 됩니다(요일 4:19). 확신의 근거를 당신의 마음에서 찾으려는 것은 닻을 배 안에 던지는 것과 같습니다. 닻을 배 밖에 던져 내려뜨리십시오. 찰랑이는 파도 속 깊이 내려뜨려 반석 되신 그분께 걸리게 하십시오. 그리스도만이 반석이시며, 그분은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을 몸소 나타내신 분입니다.

   아래의 시는 저자를 알 수 없지만 참으로 동감이 가는 훌륭한 시입니다.


   "바다를 먹물로 채우고

   모든 풀잎을 붓 삼고

   온 땅을 종이 삼고

   모든 사람이 필객이 되어

   하나님의 사랑을 기록하여

   온 바다를 다 말리고

   온 지면을 다 채우고

   온 하늘을 가득 메운다 해도

   그 사랑을 다 기록할 수 없으리!"


27. 때로는 잘 믿었다는 생각도 들지만 때로는 실수하지 않았나 두려운 생각도 들어요.


   실수하다니요? 무엇을 실수했다는 말이지요? 만일 당신이 예수께서 당신을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것을 믿었다면 거기에는 실수가 있을 수 없습니다. 만일 당신이 그분을 말씀하신 그대로 믿고 평안과 죄사함을 얻기 위해 그분께 나왔다면, 거기에는 실수가 있을 수 없습니다. 만일 당신이 그분께 마음을 열었다면, 당신은 그분이 당신 마음에 거하기 위해 들어오셨음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이 친히 그렇게 하겠다고 말씀하셨으며 그 말씀에는 실수가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두려운 마음이 그런 근본적인 사실들을 바꾸지 못합니다.

   폭풍우가 몰아치는 어느 날 밤 어떤 배가 해안 가까이에 있는 암초에 부딪쳐 파선하고 말았습니다. 모두 죽고 한 소년만 파도에 밀려 떠내려가다 불쑥 튀어나온 해안의 바위 끝자락에 걸려 목숨을 구했습니다. 거기서 그는 피난처를 발견한 것입니다. 아침이 되어 해안 경비원들이 망원경으로 난파현장을 둘러보다 그 소년을 찾았습니다. 그래서 배를 타고 소년이 있는 곳으로 갔습니다. 소년은 밤새 추위로 거반 죽게 된 몸으로 조심조심 배에 실려 해변으로 옮겨졌습니다. 몸이 좀 회복된 후 사람들이 물었습니다.

   "얘, 그 폭풍우 속에서 밤새 바위 위에서 두려워 떨지 않았니?"

   소년이 밝은 얼굴로 대답했습니다. "두려워 떨어요? 예, 두려워 떨었어요. 하지만 아저씨들도 알 듯이 반석은 밤새 떨지 않던데요."

   만일 당신이 그리스도를 믿었다면 당신은 반석 위에 있는 것입니다. 혹 당신이 두려워 떤다해도 그것이 하나님의 구원을 무효화시키지는 못합니다. 반석은 여전히 견고하고 안전합니다. 자신에게서 눈을 돌려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십시오.


   "어두움이 그분의 사랑의 낯을 가리울 때

   나는 그분의 변치 않는 은혜를 의지하리.

   거친 폭풍이 일 때마다

   나는 닻을 휘장 안에 던지리.

   나는 든든한 반석 되신 그리스도 위에 서 있으리.

   다른 모든 것은 모래와 같이 사라지리."


28. 한 때 구원을 확신했지만 지금은 그런 확신이 없어요. 왜 이런 어두운 시기가 오는 거지요?


   그런 어두운 시기가 오는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습니다. 훌륭한 성도들도 때로는 그런 시기를 경험합니다. 아마 정신적으로 몹시 지쳤거나 육체적으로 쇠약해졌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 영혼의 대적은 항상 그런 상태를 이용하려고 기회를 노립니다. 그 틈을 타서 우리가 건강하고 평안할 때는 든든히 의지하던 하나님의 분명한 약속들을 잊도록 만듭니다.

   한 연로한 하나님의 종이 있었습니다. 그는 오랫동안 대중 사역을 하면서 능력있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이따금씩 역경을 치를 때면 의심과 불확실함에 마음이 사로잡혔습니다. 그 일을 아내에게 말하자 아내가 요한복음 5장 24절을 상기시켜주었습니다. 그는 그 보배로운 말씀을 다시 읽어봤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그는 즐거이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습니다.

   "내가 이런 말씀을 잊어버릴 수 있다니 참 이상해. 수년간 직접 전하던 말씀인데."

   얼마 후 그의 아내가 방에 들어갔는데 그 연로한 남편이 침대 옆을 들여다보며 그 아래로 성경을 펴서 보이고 있었습니다. 아내가 소리질렀습니다.

   "대체 뭘 하시는거죠?"

   남편이 대답했습니다.

   "사단이 또 나를 괴롭히고 있어. 그는 어두움의 왕이야. 나는 그가 이 방 가장 어두운데 있다고 생각해. 그곳이 침대 밑이야. 그래서 요한복음 5장 24절을 그에게 보여주고 있었어. 그 말씀을 보는 순간 나를 괴롭히기를 멈췄어."

   우리는 이 이야기에서 말하는 정신적인 허약함을 십분 이해 할 수 있습니다. 그 이야기는 아주 중요한 원리를 말해줍니다. 당신의 영혼의 대적이 당신의 믿음을 무너뜨리려고 다가올 때 그에게 하나님이  하신 말씀을 보여주십시오.

   그러나 당신이 전에 누리던 그 복스런 확신을 잃은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을 수 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그의 두 번째 서신 1장 9절에서 그것을 밝히고 있습니다. 앞 절에서 그는 영적인 성장의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신자는 그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는데 열심을 내라는 가르침을 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것들이 그 안에 있어 흡족하면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반면에, 만일 신자가 그런 것들을 소홀히 하면, 신령한 축복이 그에게 머물 것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이런 것이 없는 자는 소경이라. 원시치 못하고 그의 옛 죄를 깨끗케 하심을 잊었느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매우 엄숙한 경고가 있습니다. 그는 옛 죄가 깨끗이 씻어졌으나 방종과 부주의함으로 말미암아 그 사실에 대한 확신을 잃고 만 것입니다. 지난 시절의 축복이 그의 기억에서 사라져버린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정적(靜的)인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은혜 안에서 성장하던가, 아니면 침체와 타락에 빠지던가 둘 중 하나입니다.

   "마음이 패려한 자(침체에 빠진 자)는 자기 행위로 보응이 만족하겠고"(잠 14;14).

   하나님과 동행하지 않고 임의로 행하는 자는 거의 틀림없이 구원의 기쁨을 잃습니다. 이 점에 대해 자신을 점검하십시오. 만일 성경공부에 무관심하고, 기도를 등한히 하고, 하나님의 주신 자원을 사용하기를 게을리 하는 자신을 발견한다면, 그 모든 잘못을 하나님께 자백하고 날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데 열심을 내어 보다 강건한 그리스도인의 성품을 개발하시기 바랍니다.

   끝으로 당신에게 상기시키고 싶은 한가지는, 당신의 삶 가운데 범한 모든 알려진 죄는 당신에게서 구원의 기쁨과 확신을 빼앗아간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내 마음에 죄악을 품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리라"(시 66;18).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얼마간은 주님과 동행하는 즐거운 삶을 살다가 죄를 가지고 장난침으로써 올무에 걸리고 하나님의 성령을 심히 근심시키는 죄에 빠져 결국 구원의 기쁨을 상실합니다. 당신의 삶 가운데 자백하지 않은 죄가 일절 없도록 하십시오. 당신에게서 영적인 능력을 고갈시키고 하나님과의 사귐을 훼방하는 은밀한 죄를 용납하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세속성과, 육신적인 방종과, 영적인 의무들을 등한히 함과, 지나친 경박함과, 다른 사람에 대해 악의를 품는 것 등 모든 것은 구원의 확신을 빼앗는 적들입니다. 만일 이 모든 것들이 잘못임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서 정직히 시인했다면,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십시오(요일 1:9).

   당신이 연약해서 악한 습성들을 물리칠 수 없다고 속삭이는 마귀의 꾀임에 넘어가지 마십시오. 그것은 당신 자신의 능력의 문제가 아님을 기억하십시오. 당신이 잘못을 정직히 뉘우치고 주님께 그 죄를 물리쳐달라고 도움을 요청할 때 주님께서 당신 대신 그 일을 떠맡으실 것입니다. 당신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에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 때, 성령께서 당신 안에서, 또 당신을 통해서 역사하사 그러한 악한 성향을 물리치고 당신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승리의 삶을 살게 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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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보서


제 3 과

차별하지 말라(야고보서 2:1-13)


   2장 1-13절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는 행위에 대해 비난하고 있습니다. 편애는 주님의 본이나 신약성경의 가르침과는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참된 기독신앙 속에는 속물적인 것이나 차별대우가 있을 수 없습니다.


차별을 금함(2:1)


   우선적으로 그런 행동은 명백하게 금지되었습니다(1절).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이러한 훈계가 신자들에게 주어진 점인데, 이는 "내 형제들아" 라고 한 인사말에서 알 수 있습니다. "취하지말라" 는 말은 "품지 말라" 또는 "행하지 말라" 는 말로도 볼 수 있습니다. "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은 그리스도인의 믿음을 가리킵니다. 이 믿음은 주님의 신실하심이나 미쁘심에 의심을 갖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진리의 실체를 믿는 것입니다. "사람을 외모로 취하다" 라는 구절은 차별대우하는 불신자들의 행동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들을 묶어보면, 야고보는 "내 형제들아 너희가 그리스도인의 믿음을 행하면서 사람을 차별대우하지 말라" 고 말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속물근성이나 카스트의 차별 등은 참된 기독신앙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것입니다. 사람의 위대함에 굴종하는 것은 영광의 주님 앞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며, 다른 사람을 태생이나 인종, 성 또는 재산 때문에 멸시하는 것은 믿음을 부인하는 행위입니다. 물론 이러한 명령이 신약성경의 다른 곳에서 관원들이나 장로들 그리고 부모를 공경하라는 가르침과 모순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거기에는 인정해야만 하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롬 13:7). 또한 이 구절에는 어떤 사람들이 좋은 옷을 입거나 또는 다른 인위적인 구별을 갖고 있음으로 인해 그 사람들에게 아첨하여 섬기는 문제도 들어있습니다.


차별에 대한 예(2:2-4)


   야고보가 2-4절에서 제시한 생생한 예화에 의해 그러한 모습이 분명해집니다. 가이 킹은 이 단락의 제목을 "짧은 안목을 가진 안내인" 이라고 멋지게 붙였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의 지역교회의 모습입니다(개역 성경은 "교회" 라고 하지 않고 "회당" 이라고 하였지만 "회당" 의 곤본적인 의미는 사람이나 사물을 함께 모은다는 것입니다. 여기서는 사람들이 모인다는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이 단어가 꼭 사람들이 모이는 건물을 의미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어떤 화려한 옷을 입고 금반지를 낀 우아한 신사로 보이는 사람이 막 도착하자 안내인이 허리를 굽히고 손을 비비며 그 귀한 손님을 앞자리의 훌륭하고 잘 드러나 보이는 곳으로 안내를 했습니다. 그리고 그 안내인이 문으로 다시 돌아오자 또 한 손님이 도착했습니다. 이번에는 소박한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었습니다(2절의 "더러운 옷" 으로 번역된 말은 그 사람이 누더기 옷을 입었다든지 세탁을 해야 할만큼 더러운 옷을 입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는 그의 삶을 나타내는 단순하고 소박한 옷을 입었다는 것입니다). 그 안내인이 이번에는 그 사람을 뒤쪽에 세워놓든지 자기 자리 앞의 바닥에 앉도록 함으로써 회중들을 당황케 하지 않을 방법을 교묘하게 찾았습니다. 이러한 일을 행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믿을 수 없게 보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예화를 좀 과장된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우리의 마음을 들여다보면 우리가 얼마나 우리 가운데서 인위적으로 차별하고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지 깨닫게 됩니다.

   아마도 현대의 교회에서 가장 분명한 예는 다른 민족과 인종에 대한 차별일 것입니다. 흑인 신자들은 많은 경우에 배척을 당하거나 적어도 달갑지 않은 느낌을 주게 됩니다. 회심한 유대인들은 늘 진심으로 영접되지 않습니다. 동양의 그리스도인들은 여러 가지 면에서 차별대우를 맛보았습니다. 이러한 일들은 민족적인 관계에 대한 모든 영역에서 막대한 사회적인 문제를 초래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거룩한 원리에 진실해져야 합니다. 모든 신자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라는 진리를 실제적으로 나타내야 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책임입니다.


차별의 악함을 드러냄(2:5-11)


   차별은 그리스도인의 믿음과 전혀 조화되지 못하는 것으로 야고보는 5-13절에서 그에 대해 나타내고 있습니다. 야고보는 신자들이 부자에게는 호의를 보이고 가난한 자는 업신여기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지 그 네 가지 이유를 강하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첫째, 그것은 하나님께서 귀히 보시는 사람을 괄시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5, 6상). 하나님께서 세상에 대하여는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하셨습니다. "가난한 자들은 하나님께 선출된 자요, 하나님께 선택된 자며, 하나님의 후사요,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들이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인 자들은 부자가 아닌 가난한 자들임을 우리는 성경에서 반복적으로 보게 됩니다. 우리 주님께서도 친히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11:5). 주님의 말씀을 즐겁게 듣는 이들은 부자나 귀인이 아닌 평민들이었습니다(막 12:37). 귀인들보다는 어리석고, 약하고, 천하며, 경멸받고, 무시당하는 자들이 부르심을 받았습니다(고전 1:26-29). 부유한 자들은 대개 믿음이 약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주님을 의지하기보다는 자신들의 재물을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가난한 자들은 믿음에 있어서 부유한 자로 하나님께 택하심을 받았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시민들을 조사해보면 아마도 대부분이 가난한 자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나라에서는 그들이 부유하고 영광스러운 지위를 차지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느 날 우리의 주 곧 구주의 나라에서 높임을 받을 자들을 모욕하는 것은 너무도 어리석고 위험한 일입니다.

    부자에게 특별 대우하는 것이 어리석은 두 번째 이유는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압제하는 특징을 가진 자들이기 때문입니다(6절 하). 이 점에 대해서는 논쟁과 약간의 혼란이 있습니다. 이 장의 앞부분에 나오는 부자가 신자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6절에 나오는 그 부자가 신자라는 것은 아닙니다. 야고보가 말하고 있는 것은 단순히 "왜 그들이 부자라는 것으로 편애하느냐? 너희가 그런일을 한다면 너희를 압제하고 법정으로 끌고 가는 자들을 존경하는 것이 아니냐?"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칼빈(Calvin)은 "어찌하여 너희를 죽이는 자들을 존중하느냐?" 라고 말하며 이러한 논쟁을 일축하였습니다.

   부자에게 특별한 대우를 하는 것이 어리석은 세 번째 이유는 그들은 습관적으로 그리스도의 이름을 나쁜 말이나 욕으로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신자들이 그리스도인 또는 그리스도를 좇는 자들이라고 불리는 것은 명예로운 이름입니다. 주님을 대적하여 욕하는 것이 부자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이 가난한 자들을 핍박할 때 구세주에 대한 가장 악한 말로 핍박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왜 신자들은 어떤 사람이 부자라는 이유만으로 그를 특별 대우합니까? 부자들은 대개 주 예수님을 존중하지 않는 특징을 가지고 있는 자들입니다. "너희에게 대하여 일컫는바 그 아름다운 이름" 이라는 말을 어떤 사람은 그리스도인의 침례에 관계하여 봅니다. 신자들은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습니다. 바로 이 이름이 부자들이 습관적으로 망령되이 일컫는 이름입니다.

   야고보의 네 번째 주장은 부자에게 특별한 대우를 하는 것이 사랑의 법에 저촉된다는 것입니다(8절). 사랑의 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실로 우리의 이웃을 우리 자신처럼 사랑한다면 우리는 우리가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그들을 대접할 것입니다. 분명히 우리는 가난하다는 것만으로 멸시받고 싶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다른 사람을 그러한 이유로 멸시하지 말아야 합니다.

    "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는 말씀은 신약 성경의 모든 가르침 가운데 가장 혁명적인 말씀일 것입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생각하십시오! 이는 우리가 우리 자신을 돌보듯 다른 사람들을 돌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물질을 나보다 못한 사람들과 나누어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들이 우리의 복되신 구주를 알게 되도록 모든 힘을 기울여야 합니다. 사람들은 늘 자신의 행동이 자신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칠 것인지에 따라 결정을 하는 매우 자기 중심적인 존재들입니다. 사람들은 부자에게서 사회적으로든지 물질적으로든지 보상을 기대하기에 그들의 비위를 맞춥니다. 반면에 가난한 사람들은 그들에게 유익을 끼칠 가망이 거의 없기에 그들을 무시합니다. 이 최고의 법은 다른 사람들을 그렇게 이기적으로 이용하는 것을 금하고 있습니다. 그 최고의 법은 우리 이웃을 사랑하기를 내 몸과 같이 하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만일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라고 묻는다면 우리는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어떤 사람이든지 우리의 이웃이 될 수 있다고 하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에서 교훈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눅 10: 29-37). 이 사랑의 법은 왕에게 속한 법이며, 모든 율법의 왕이기에 최고의 법이라고 불립니다. 사람을 외모로 취하는 것은  이 최고의 법에 저촉되므로(9절) 죄와 범법이 됩니다. 죄는 하나님의 뜻에 적합치 못한 모든 것이며, 하나님의 기준에 못 미치는 것입니다. 범법은 알고 있는 법을 어기는 것입니다. 어떤 행동이 죄라는 것은 그것이 처음부터,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이기 때문이지만, 범법은 그 죄된 행동을 금하는 특별한 법이 주어질 때 이루어 지는 것입니다. 사람을 외모로 취하는 것이 죄라는 것은 그 자체가 본질적으로 잘못된 것이기 때문이며, 또한 범법하는 것도 되는데 그것은 그것을 금하는 법이 있기 때문입니다. 율법의 하나를 어기면 모두를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10절). 율법은 10개의 고리로 된 사슬과 같기에 한 고리만 끊어져도 그사슬은 끊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다른 계명은 어기면서 지킬만한 것들만 지키는 것은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간음하지 말라 하신 하나님이 또한 살인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11절). 어떤 사람이 간음죄는 짓지 않을 지라도 살인죄를 지을 수 있습니다. 그가 율법을 어긴 사람입니까? 분명히 그렇습니다. 율법의 정신은 우리의 이웃 사랑하기를 우리 몸과 같이 하는 것입니다. 간음이 분명히 이 율법을 어기는 것이지만 살인도 역시 그러합니다. 또한 속물근성과 외모로 취하는 것 역시 이 율법을 어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죄 중 어느 하나에 걸리더라도 율법의 명한 것을 범한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러한 야고보의 주장으로 인해 일어난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 잠시 멈추어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 문제는 "그리스도인이 율법 아래 있는가? 그렇지 않은가?" 라는 것입니다. 지금 야고보는 믿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분명히 십계명을 강요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분명히 그는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는 여섯 번째와 일곱 번째 계명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또한 그는 십계명 중 후반 다섯 계명을 "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는 말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신자들을 생활규범으로서 율법 아래 놓는 것은 신약성경의 다른 부분과 모순이 됩니다. 로마서 6:14에서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 고 말씀하며, 로마서 7:6에서는 "우리가....율법에서 벗어났으니" ; 로마서 7:4에서는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해 죽임을 당하였으니"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갈라디아서 2:19; 3:13; 3:24,25; 디모데전서 1:8, 9; 히브리서 7:19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3:7-11에서는 그리스도인들이 십계명 아래에 있지 않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야고보는 이 은혜의 시대에 율법의 요소들로 그리스도인들을 압박하고 있는 것입니까? 첫째, 그리스도인은 생활규범으로서 율법 아래 있지 않습니다. 신자들의 모범은 율법이 아니라 그리스도이십니다.  율법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형벌이 있습니다. 율법을 어긴 것에 대한 형벌은 죽음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율법을 어긴 형벌을 갚고자 죽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율법과 그 형벌로부터 벗어난 것입니다. 그러나 율법의 원리 중 어떤 것들은 그 가치가 영구적입니다. 이러한 교훈들은 모든 세대의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됩니다.  우상숭배, 간음, 살인, 도적질 등은 처음부터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입니다. 이러한 행위는 신자들에게만 아니라 불신자들에게도 동일하게 잘못된 것입니다. 더욱이 십계명 중 한가지 계명을 제외한 아홉가지 계명이 여러 서신서에서 반복되고 있습니다. 그 한가지 반복되지 않은 것은 안식일에 관한 것입니다. 그 계명은 도덕적인 계명이라기 보다는 의식적인 계명이기 때문에 안식일이나 한 주의 일곱번째 날을 지키도록 그리스도인들에게 말씀한 곳은 없습니다. 한 유대인이 일곱째 날에 일을 하는 것 그 자체가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이 아니라 그 날을 하나님께서 구별되게 하셨기 때문에 잘못된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서신서들에서 반복된 아홉 가지 계명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율법으로 주신 것이 아니라 의로운 교훈으로 주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도적질하는 자는 사형에 처한다" 또는 "부도덕한 행동을 하는 자는 구원을 잃어버린다" 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내 은혜로 너희를 구원하였으니 이제 너희가 나를 사랑함으로 거룩하게 살기를 원한다. 내가 얼마나 너희를 바라고 있는지 알고자 하면 신약성경을 통해 알 수 있을 것이다. 신약 성경에서는 너희가 십계명 중 반복되고 있는 아홉가지 계명을 보게되겠지만 실제적으로 율법이 요구하고 있는 것보다 더 높은 수준의 행동을 요구하고 있는 주 예수의 가르침을 보게 될 것이다" 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실 야고보는 신자들을 율법과 그 저주 아래 놓은 것이 아닙니다. 그는 "너희가 사람을 외모로 취한다면 율법을 어기는 것이요 따라서 너희는 저주를 받아 죽게 된다" 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말한 것은 "너희 신자들은 더 이상 율법의 속박아래 있는 것이 아니라 자유의 율법 아래 있으니 옳은 일을 행함으로 자유하라. 모세의 율법은 네 이웃을 사랑하라고 요구하지만 그것을 행할 힘을 주지도 않고 그 계명을 어긴 너희를 저주한다. 은혜 아래 있는 너희는 네 이웃을 사랑할 힘을 받았으며, 또한 그것을 행하면 상을 받게 된다. 너희는 이것을 형벌에 대한 두려움으로 행하지 말고 너희를 사랑하사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신 주님을 사랑함으로 행하라. 너희가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설 때, 이러한 기준에 의해 너희가 상급을 받게 되든지 해를 입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구원의 문제가 아니라 상급의 문제이다" 라는 것입니다.


편파적인 자가 되지 말라(2:12-13)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하라" 는 말은 말과 행동을 나타내는 것입니다(12절). 말과 생활은 일치해야 합니다. 신자들은 말과 행동에 있어서 편파적인 것을 피해야 합니다. 이러한 자유의 율법을 어기는 것은 그리스도의 심판대에서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13절은 문맥에 비추어 이해해야 합니다. 야고보는 지금 신자들에게 말하고 있기에 이것은 죄의 영원한 형벌에 관한 문제가 아닙니다. 그 형벌은 갈보리 십자가에서 단번에 완전히 치루어졌습니다. 여기에서는 하나님께서 주님의 자녀인 우리를 이 세상에서 어떻게 다루시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만일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과 교제 가운데 행하지 못할 것이며, 타락된 상태가 초래할 고난을 맞게될 것입니다.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징계하시기보다는 인애를 나타내신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하나님께는 심판이 "부자연스러운 일" 이십니다. 이는 아마도 다른 사람에게 긍휼을 나타내었다면 심판에 임할 때 자랑할 수 있으나, 혹 우리가 올바르게 비난했을지라도 다른 사람에게 긍휼을 나타내지 않았다면 우리도 긍휼을 얻지 못할 것이라는 의미일 것입니다. 또는 긍휼은 언제나 심판보다 위대하다는 의미에서 긍휼이 심판을 이긴다는 의미일 수도 있습니다. 일반적인 견해로는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면 심판은 우리를 넘어뜨릴지라도 긍휼로 말미암아 다시 회복된다는 의미로 보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편파성에 대한 중요한 주제로 우리 자신을 점검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와 다른 부류의 사람들보다 우리와 비슷한 사람들에게 더욱 친절하게 대하고 있지 않습니까? 나이든 사람들보다는 젊은 사람들에게 더욱 친절하게 대하려고 하지 않습니까? 평범하고 못생긴 사람보다는 멋진 사람들과 사귀려고 하지는 않습니까? 비교적 알려지지 않은 사람보다는 유명한 사람들의 편을 들려고 애쓰지 않습니까? 신체적으로 장애를 갖고있는 사람들은 피하면서 건강하고 튼튼한 사람들과는 함께 하려고 하지는 않습니까? 가난한 자보다 부자에게 더 호의를 보이지 않습니까? 우리와는 다른 "이방인들" 에게 냉대하지는 않습니까? 이러한 질문에 대답하면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가 가장 하찮은 신자를 대하는 방법이 곧 우리가 주님을 대하는 방법이라는 것입니다(마 25:40).

Posted by 행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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