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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6.02.12 C.H. 매킨토시의 완전한 구원 -1장 영광스러운 진리

        C.H. 매킨토시의

                           완전한 구원

                                                           

                                      1장

                        영광스러운 진리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안위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 (롬 15:4)


   이 구절에는 명백한 한 가지 목적이 있습니다. 즉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광범위한 구약성경을 통해 자신의 영적분량과 영적 필요의 성격이나 깊이에 따라 교훈과 위로를 얻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이를 뒷받침하는 또 다른 신약성경의 구절은 이것입니다.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고전 10:11) 

  

   신약성경을 읽을 때와 같이 구약성경을 읽을 때에도, 성경을 기록하도록 성경기자들의 마음에 감동을 주신 성령님의 직접적인 가르침에 의지하며 게속해서 주의 깊게 자신의 생각을 비우고 읽어야 합니다. 상상을 함부로 할 때, 잘못된 생각이나 제멋대로의 해석을 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유익을 얻기는커녕, 우리 영혼에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해야 할 말씀의 능력을 약화시켜 영적인 성장을 방해할 뿐입니다.


   우리는 또한 로마서 15장 4절에 우리를 위해 기록된 하나님의 뜻, 즉 "무었이든지 전에 기록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 이라는 말씀을 한 순간도 잊어서는 안됩니다. 이 말씀의 능력 안에서, 이제 독자들을 여호수아서의 서론 부분으로 인도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거기에 제시되어 있는 놀라운 교훈들을 함께 상고해보고, 거기에 계시되어 있는 귀한 영적인 가르침을 받고자 합니다. 만일 성령님이 도우신다면, 요단강변에서 몇 가지 고상한 영적인 교훈들을 배우게 될 것이며, 영적인 성장을 위한 건강하고도 상쾌한 길갈의 체험을 갖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다 요단강을 죽음에 대한 모형, 즉 신자의 죽음(이 세상을 떠나 하늘나라로 가는)으로 보는데 익숙해져 있습니다. 독자들은 다음과 같은 찬송가를 읽거나 들어본 일이 있을 것입니다.


모세가 서 있던 곳에 서서

그가 보았던 곳을 내려다 볼 수만 있다면

요단강물이나 죽음의 찬 물결이

우리를 두렵게 하지 못할 것이라네.


   하지만 이 소절에 나타나 있는 생각이나 느낌, 그리고 경험은 참된 기독교의 신앙보다 훨씬 낮은 수준의 것입니다. 성경이 우리 영혼에 비추는 참된 빛 가운데서 잠시만 생각해보아도, 이런 요단강에 대한 대중적인 생각이 얼마나 절대적으로 성경적인 통찰력이 부족한가를 생각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만일 우리가 요단강을 건너는 것을 신자의 죽음으로 볼 때, 그렇다면 신자가 죽어서 천국에 가게되면, 그는 전쟁을 하라는 부르심을 받은 것일까요?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천국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신성하고도 영원한 평안과 안식이 있는 곳입니다. 바다에는 잔물결조차 없고, 그 순결하고 거룩한 곳에는 우리를 놀래킬 만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전쟁이 없기에 갑옷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옷이 편하기 때문에 허리띠도 필요 없습니다. 의의 흉배도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곳에는 신성한 의로움이 항상 머물기 때문입니다. 신발도 필요 없습니다. 그 아름답고 행복한 곳에는 거친 길이나 가시밭길도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곳에는 무서운 화살이 날아다니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방패 또한 필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신성하고 영원한 구원이 우리에게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에 구원의 투구도 필요 없습니다. 그 복되고 햇빛 찬란한 천국의 어느 곳에도 원수나 악한 일은 없을 것이기 때문에 검도 필요 없습니다.


   그러므로 요단강은 신자들이 죽어서 천국에 가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을 건너자마자 전쟁이 시작된 것을 보아도 그렇습니다. 광야에서 아말렉과 싸우기는 했지만 그들의 진짜 전쟁이 시작된 것은 가나안 땅에 들어와서부터입니다. 이것은 조금만 생각해보면 금새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요단강이 죽음을 상징하는 것이 아니란 말인가요? 물론 요단강은 죽음을 상징합니다. 그러면 신자들은 그것을 건너지 않아도 되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반드시 건너야 합니다. 그들이 건너려고 했을 때 그들은 요단강이 마른 땅이 된 것을 발견합니다. 왜냐하면 생명의 주님께서 가장 깊은 곳으로 내려가셔서 자기 백성들을 위해 그들의 영원한 기업으로 인도하는 길을 열어놓으셨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비스가 산꼭대기에 서서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을 내려다보기만 했듯이, 그리스도인들도 그렇게 하나님의 신령한 복을 그저 바라보기만 하고 누릴 수 없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서도, 그리스도의 복음에서도, 또는 신성한 기독교 신앙 전체를 훑어보더라도 찾을 수 없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치리 아래 있는 경륜에 의해서 요단강을 건너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모형적으로 볼 때, 모세는 율법을 상징하기에 율법은 사람들을 영적 가나안으로 인도할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참된 여호수아이신 그리스도는 요단강을 건넜습니다. 그뿐 아니라 구속함을 받은 무리들이 하늘의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도록 마른 땅으로 통과하도록 길을 열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과연 건너갈 수 있는지를 의심하며 죽음의 강둑에 떨며 서 있으라고 부르심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강물은 믿음이 있는 자에겐 마른 땅에 불과합니다. 그 세력은 사라졌습니다. 우리의 찬양을 받으실 주님은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딤후 1:10)" 셨습니다.


   이것은 우리를 자유롭게 해주는 영광스러운 진리입니다! 이것을 인해 주님을 찬양합시다. 우리를 구원하신 그 큰 능력을 인해 주님을 경배합시다. 사망의 쏘는 것을 제하시고 사망의 권세를 가진 자인 마귀를 멸하신 주님을, 생명과 빛과 썩지 않음과 영광으로 충만한 곳으로 우리를 인도하시는 주님을 찬양하는 노래를 부르는데 우리의 온 마음을 다 합시다. 우리의 실제적인 삶으로 주님께 영광을 돌립시다.


   우리는 이제 이 위대한 주제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좀 더 자세히 상고해보고자 합니다. 성령님께서 우리를 친히 가르치시는 교사가 되어 주시길 빕니다.


   "여호수아가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서 이스라엘 사람들로 더불어 싯딤에서 떠나 요단에 이르러서는 건너지 아니하고 거기서 유숙하니라 삼 일 후에 유사들이 진중으로 두루 다니며 백성에게 명하여 가로되, 너희는 레위 사람 제사장들이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언약궤 메는 것을 보거든 너희 곳을 떠나 그 뒤를 좇으라. 그러나 너희와 그 사이 상거가 이천 규빗쯤 되게 하고 그것에 가까이 하지는 말라. 그리하면 너희 행할 길을 알리니 너희가 이전에 이 길을 지나보지 못하였음이니라."(수 3:1-4)


   이스라엘 역사에는 독자들이 깊이 생각해야만 하는 세가지 매우 중요한 요소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애굽 땅에서 집문 좌우 설주와 이방에 바른 피, 둘째로는 홍해, 그리고 세 번째로는 요단강입니다.


   이 세 가지 모두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대한 모형입니다. 각각은 매우 중요한 진리를 담고 있는데, 이는 그리스도의 고귀한 죽음에는 다양한 측면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이 그리스도의 죽음이 가지고 있는 심오한 비밀을 연구하는 것보다 더 유익한 일은 없습니다. 또한 여기엔 엄청난 비밀이 담겨 있기 때문에 우리의 마음을 끄는 다른 일이 있어서도 안됩니다. 이런 비밀은 영원세계에서만 풀릴 수 있는 깊이와 높이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제 성령님의 강력한 역사 아래서, 성경의 완전한 빛 안에서, 우리 속사람을 강하게 하고 안위를 받도록 해주고, 또한 우리 영혼이 새롭게 되는 역사를 기대하면서 이러한 것들을 상고해 본다면, 우리의 기쁨은 넘치도록 충만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유월절 어린양의 피로서 모형화된 그리스도의 죽음을 생각해보도록 합시다. 그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에서 우리를 가려주는 효력을 보게 됩니다.


   '내가 그 밤에 애굽 땅에 두루 다니며 사람과 짐승을 무론하고 애굽 나라 가운데 처음 난 것을 다 치고 애굽의 모든 신에게 벌을 내리리라. 나는 여호와로라. 내가 애굽 땅을 칠 때에 그 피가 너희의 거하는 집에 있어서 너희를 위하여 표적이 될지라.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출 12;12-13)


   굳이 말씀드릴 필요도 없지만, 죄에 익숙하고 의식적으로 죄를 짓는 영혼에게 장차 올 진노와 심판으로부터 하나님이 피난처를 예비하셨음을 아는 가장 의미심장한 순간에 이르렀습니다. 성경적인 복음을 합당하게 잘 배운 사람이라면 단 한 순간이라도,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대한 이런 측면을 과소평가하지 않을 것입니다.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라)"


   이스라엘 민족이 안전한 상태에 있는 것은 하나님이 피에 그 가치를 두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너희가  피를 볼 때에"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심판자가 피를 보았습니다. 심판자는 피의 가치를 알았고, 그 집은 심판을 면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어린양의 피에 의해서 죄가 가려졌고 심판을 면했습니다. 즉 피에 대한 우리의 판단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판단에 의해서 된 일입니다. 이 얼마나 귀한 사실입니까!

   그리스도의 피에 대해 생각 할 때 하나님의 생각보다는 우리의 생각으로 가득차기가 얼마나 쉽습니까! 우리는 그 보배로운 피에 대해 마땅히 귀하게 여겨야 할 만큼 여기지 않는지도 모릅니다. 누가 그 피에 대한 정당한 가치를 산정했습니까? 또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일까요? 슬프게도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한 정당한 평가를 내리는데서, 또 그리스도의 인격에 대한 애정을 품는 일에서 실패하는 우리를 보면서, 과연 우리가 하나님의 심판으로부터 안전한지 의문을 품기 시작합니다.


   만일 우리의 안전이 비록 지극히 적은 정도일지라도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한 우리의 평가나 또는 그리스도의 인격에 대한 우리의 사랑에 달려 있거나, 아니면 율법준수 여부에 달렸다고 생각할 때, 우리는 매우 심각한 위험 가운데 처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이제 중요해지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해 정당한 평가를 해야만 하고, 또 우리가 그리스도를 마땅히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과연 누가 그 사실을 부인할 수 있을까요? 하지만 만일 이 모든 것이 의롭게 되는 것의 근거가 된다면, 그리고 우리의 안전이 그 요구에 대한 우리의 반응에 달려 있다면, 그렇다면 우리가 율법을 범한 터 위에 서 있는 것보다 우리는 더욱 큰 위험 가운데 처하게 되며, 더욱 공의로운 정죄 아래로 떨어지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요구가 모세의 율법의 요구보다 더 높은 만큼, 또 기독교 신앙의 수준이 율법의 수준보다 더 높은 만큼, 우리의 상황은 더 나빠지고, 더 큰 위험에 빠지게 되며, 평안과는 더욱 거리가 멀어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의 안전이 이같이 더 높은 요구에 대한 우리의 응답에 달려 있다면 정말 그렇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그러한 요구에 대해 응답할 필요가 없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 대해서 주목해야 합니다. 우리는 반드시 응답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한 적이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요구에 직면해있는 한, 그리고 우리가 이에 관련되어 있는 한, 우리의 타락과 범죄는 다만 더욱 현저히 드러나게 되며 우리를 정죄하는 정죄는 더욱 공의로운 것이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러한 요구에 응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의 가치에 대한 우리의 판단에 의해서, 그리스도의 요구에 대한 우리의 응답에 따라서, 그리고 그분의 사랑에 대한 우리의 감사여부에 의해서 구원을 받는다고 할 것 같으면, 우리는 모세 율법의 공의로운 요구 아래 있을 때보다 더욱 나쁜 상황에 빠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찬송합시다. 우리는 그런 상황 아래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은혜로 구원받았습니다. 거저 주시는 은혜,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 그리고 신성하고도 영원한 은혜에 의해서 구원받았습니다. 은혜에 대한 우리의 느낌에 의해서가 아닙니다. 피에 대한 우리의 평가에 의해서가 아니라, 피 자체에 의해 보호를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 무섭고 두려운 밤에, 여호와 하나님은 "너희가 피를 볼 때에, 피에 대해 너희가 바른 평가를 할 때에, 너희를 넘어 가리라.' 고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방법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보호하기를 원하셨고 그들이 완전하게, 즉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 문제를 전적으로 신성한 기반 위에 두셨습니다. 하나님은 그 문제를 그들의 손으로부터 취하셔서, 그들로 하여금 그들의 안전이 단순하면서도 전적으로 피에 있으며, 피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에 있음을 확신토록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직접 피난처를 준비할 필요가 전혀 없음을 깨닫도록 하셨습니다. 피난처를 준비하는 것은 하나님의 몫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누리는 것은 우리들의 몫입니다.


   따라서 기념할만한 그 밤에 여호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 피가 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하나님과 이제 예수님을 단순히 믿고 신뢰하는 영혼 사이에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사랑이나 우리의 평가나, 우리의 그 어떤 것에 의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에 의해서 구원받으며, 피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에 의해서 구원을 받습니다.


   피를 바른 좌우 문설주와 인방 안에서 심판으로부터 가려줌을 받고, 심판하는 자의 칼에서 안전하게 되어 불에 구운 어린양을 먹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신자들도 장차 올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완전하게 보호를 받아 모든 위험으로부터 절대적으로 안전하게 되어, 심판으로부터 가려줌을 받고 주님 자신의 모든 귀중함 속에서 안전을 누리며 그리스도로 만족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더 놀라운 것이 있습니다.


   혹시라도 아직까지 장차 임할 심판으로부터 자신이 안전한지에 대한 확신이나 평안을 얻지 못한 독자라면 우리가 지금까지 다루어온 이 주제에 대해 깊이 생각하시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 주제는 그리스도의 죽음이 우리를 위해 이루신 일 가운데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물론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귀중한 것이지만) 또한 아시길 바랍니다. 회심 후에도 우리는 참으로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자기 의(義)라는 누룩이 들러붙어 있는 지에 대해 거의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것이 얼마나 우리의 평안과 은혜에 대한 누림을 방해하는지 모릅니다. 우리가 우리의 행위에 의해 구원받았다는 생각을 버렸을 때 우리는 자기 의를 끝냈다는 착각을 합니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악은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이 모든 것 가운데 우리가 살펴본 대로, 우리가 마땅히 생각해야 할 만큼 피의 가치를 제대로 생각하지 못했다는 느낌 때문에 우리의 안전을 의심하게 되는 것보다 더 교묘한 것은 없습니다. 이 또한 자기 의의 열매입니다. 우리는 자아를 끝내지 않았습니다. 참으로 우리는 우리의 행위가 우리의 구주가 될 수 없음을 알지만 우리의 느낌이나 감정들로는 그렇게 하려고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 그리스도께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명분 때문에 우리에게 무슨 자격이 좀 있지 않을까 하고 우리도 모르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제 이 모든 것은 포기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단지 그리스도의 피와 그 피에 대한 하나님의 증거에만 의존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피를 보십니다. 하나님은 그 피에 합당한 가치만을 인정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만족하십니다. 이 사실이 우리를 만족하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네가 어떻게 행동하는지를 볼 때, 또 내가 무교병과 쓴 나물과 허리에 띠를 띠고 신발을 신은 것을 볼때에, 내가 너희를 넘어가리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확실히 이 모든 것들은 다 합당한 자기 위치가 있습니다. 하지만 하지만 그 합당한 위치는 안전에 대한 근거가 아니라, 교통의 비밀에 대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제 절기를 지키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보호받은 백성으로서 절기를 지키라는 것이지, 그런 백성이 되기 위해서 지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아주 다른 것입니다. 그들이 절기를 지킬 수 있게 된 것은 바로 그들이 심판으로부터 하나님의 보호를 받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더 이상 심판이 없다는 확신을 하나님 말씀의 권위를 통해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그 말씀을 믿는다면, 그들은 평안과 안전 가운데서 절기를 기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믿음으로 유월절과 피 뿌리는 예를 정하였으니 이는 장자를 멸하는 자로 저희를 건드리지 않게 하려 한 것이며"(히 11:28)


   여기에 모든 문제의 깊고도 귀중한 비밀이 담겨 있습니다. 그들이 유월절을 지켰던 것은 믿음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라"고 말씀하셨고, 또 그런 자신을 부인하실 수 없으셨습니다. 그 두렵고 무서운 밤에 이스라엘 백성들의 머리카락 한 개라도 심판을 받았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자신의 인격과 성품을 부인하는 것이 되었을 것이고, 하나님 자신이 계획한 자신의 복된 치유책을 부인하는 것이 되었을 것입니다. 반복하지만 이스라엘의 구원은 이스라엘의 상태나 그들이 그에 합당한 자격을 갖추는 것에서 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그리고 전적으로 하나님이 보시는 피의 가치에 의한 것이었고, 하나님 자신의 말씀의 진실성과 말씀의 권위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바로 여기에 우리의 안전이 있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평안과 안식인지요! 여기에 우리 확신의 견고한 근거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피와 하나님의 말씀! 이 두 가지는 신성한 진리로서 참된 것입니다. 이것을 잊거나 잃어버리지 않도록 합시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수 있고, 또 그리스도의 피를 의지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성령님의 은혜에 달린 것입니다. 또한 다가오는 심판의 문제를 생각 할 때 우리 마음에 평안을 주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과 그리스도의 피에 의한 것이며 다른 것은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바로 심판이 이미 집행되었다는 완전한 증거로서 피가 은혜를 베푸는 보좌인 시은좌(the mercy-seat)에 뿌려져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나무에 달려 나를 위해 심판을 받았네.

이제 죄인이 주님과 함께 자유케 되었네."


   그렇습니다. 모든 찬송을 그분의 이름에 돌려드립시다. 이제 단순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믿고, 또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를 의지하는 모든 영혼에게 하나님은 영원히 함께 하십니다. 그리스도의 피가 자신의 모든 죄를 사했음을 믿고 의지하는 영혼이 심판을 받는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심판받을 수 없는 것처럼 절대로 불가능한 일입니다. 피로써 보호를 받는 모든 사람은 그리스도께서 안전하신 것만큼 하나님께서 안전하게 보호하십니다. 이는 심판받아 마땅한 가련한 죄인조차도 믿음으로 그런 말을 할 수 있음을 생각할 때, 참으로 경이로운 일입니다.


   참으로 복된 사실은 바로 이 방법이 아니면 아무런 방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만일 신자의 안전에 관하여 어떤 문제가 제기된다면 그리스도의 피가 시은좌에 뿌려져 있지 않거나, 아니면 하나님의 심판에서 그 피가 중요치 않은 것이 될 것입니다. 만일 안전이 우리의 상태, 우리의 가치, 우리의 감정, 우리의 경험, 우리의 행함, 우리의 사랑, 우리의 헌신, 그리고 우리의 그리스도에 대한 감사 등에 달려 있다면,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라"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선언은 이제 더 이상 아무 능력도, 아무 가치도, 또한 아무 진실성도 없는 것이 됩니다. 그렇게 된다면 하나님의 말씀은 전적으로 바뀌어야 하며, 어둡고 냉랭한 그림자가 천상세계를 뒤덮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은 "내가 피를 보고 또 거기에 추가하여 (.......)을 볼 때에"와 같이 변해야할 것입니다.


   하지만 구원을 갈망하는 사랑스런 독자 여러분, 결단코 그런 일은 없습니다. 심판자이신 하나님의 요구를 완전하게 만족시켜드렸으며, 하나님이 친히 말씀하셨기 때문에 그것을 단순하게 믿는 모든 영혼을 온전히 보호해주는 보배로운 피에 더하여 아무 것도 더할 것이 없습니다. 깃털하나의 무게만큼도, 머리카락의 넓이만큼도, 심지어는 눈썹의 움직임만큼도 더할 것이 없습니다. 만일 의로우신 재판장이신 하나님 자신이 만족했음을 선언하셨다면, 죄를 범한 죄인 또한 확실히 만족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에수님의 피로써 만족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영혼도 만족될 때, 모든 것이 해결된 것이고, 심판의 문제에 관한한 평안을 가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롬 8:1)


   그리스도께서 이미 죄인을 대신해서 정죄를 다 받으셨는데 어떻게 정죄함이 남아 있을 수 있을까요? 신자가 심판으로부터 면제되었다는 사실을 의심하는 것은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피의 효력을 무효화하는 것입니다.


   독자들은 지금까지 구원의 문제(매우 중차대한 문제인)만 다루어왔음을 주목하실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심판과 진노로부터 자유를 얻는 축복(그 자체로서도 매우 복된 것인)보다 우리를 위해 훨씬 더 많은 다른 축복들이 이루어졌음을 살펴보게 될 것입니다. 비할 데 없는 그리스도의 희생은 심판자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우리를 건진 것보다 더 많은 일들을 이루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잠시 멈추어 서서 다음 장으로 넘어가기 전에, 다음과 같은 엄숙하고도 진지한 질문을 독자에게 드리고자 합니다.


   "당신은 진정 예수님의 피로써 보호를 받고 있는 사람입니까?'


   사랑하는 독자여, 당신이 분명하게 조금의 주저도 없이 "네 그렇습니다." 라고 말할 수 있을 때까지 결코 마음을 놓지 말기를 바랍니다. 당신이 피에 의해 보호를 받고 있든가 아니면 영원한 심판의 두려움에 놓여 있든가 이 둘 중 하나에 속해 있음을 잊지 마십시오. 

Posted by 행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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