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여   성


                                            제 11 과


                            진정한 의미의 여성 해방


   여성 해방 운동을 주장하는 사람들 중에는, 사회 생활, 일상 생활, 가정 생활과 관련된 여성의 역할에 대해서 각기 다른 입장을 취하는 두 부류가 있는 것 같습니다.

   불신 여성 해방 운동자들은 성서적인 견해를 전혀 무시합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노예 제도 폐지론' 과 '부인 참정론' 을 주장하던 시대를 여성 해방 운동의 초기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 운동의 근본적인 목적은 노예에게도 인간적인 권리를 부여하는 것과, 정치적으로는 여자들도 남자와 다름없이 선거권을 갖는 것이었습니다. 이 목적이 달성되자 이제는 여성들이 동등한 교육과 취업의 기회를 획득하는 데 집중하게 되었습니다. 이 운동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모든 여성들도 모든 남성들과 마찬가지로 지성적임을 인정하고, 이를 계발하고, 사용할 기회를 제공해 주기를 원했습니다.

   아울러, 여러 가지 여건들이 여성 해방 운동을 부채질했습니다. 즉 남자들이 군에 입대하게 되어 일손이 달리게 되자 회사들은 여성들을 채용하게 되었습니다. 또 경제적인 위기가 오자 가정의 궁핍을 면하기 위해서는 여성을 통한 부수입이 절대적으로 필요했습니다. 어떤 창의적인 여성들은 출판을 하기 위해서 가명을 쓰기도 하며 예술을 통해서 자기 표현을 하게까지 되자, 정치적인 압력이 입법자들에게 가해지게 되었습니다.

   한편 이 운동이 대중의 인기를 끌게 되자, 여성들은 직장을 가진 가정 주부의 역할을 비롯하여 그들의 생활 전반을 재검토하게 되었습니다. 여자들은 "만일 내가 남편과 똑같은 시간을 일하게 되면 남편이 퇴근할 때와 마찬가지로 나도 피곤하게 되므로 가사도 분담해야 되지 않겠느냐?" 라고 이의를 제기했습니다. 그래서 남편들에게 장보기, 부엌일, 아기보기, 집안청소 등의 가사의 균등한 분담을 요구했습니다. 이로써 결정에 있어서나 책임에 있어서 부부의 임무를 구분하지 않는, 이른바 결혼생활의 평등사상을 초래하게 되었습니다. 가장 중심의 가정이라는 개념은 해방적인 여성들에게 굴레처럼 느껴졌습니다. 이제 여성들은 자신이 갖고 싶은 직장을 마음대로 갖게 되었고, 가정 주부의 역할에서 자유롭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여자를 경시하거나 가정 주부로서만 제한하려는 남성들을 가리켜 '남성 옹호주의자' 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물론 어떤 여성 해방 운동자들의 목적은 바람직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남녀간 같은 일을 했을 때, 동일한 임금을 받아야 한다는 데에는 여러분도 모두 동의하실 것입니다. 이처럼 여성의 지위를 향상시킬 목적에서 추진되고 있는 것도 많이 있습니다.

   반면 기독교 여성 해방 운동자들은 불신 운동자들의 많은 견해를 수긍하면서, 이에 대한 성서적 근거를 제시하려고 합니다. 어떤 이들은 성경에서 남녀평등 사상을 옹호하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는 아전인수격(我田引水格)으로 어떤 성구를 제시합니다. 또 어떤 이들은 성경은 다만 기본적인 원칙을 제시할 뿐, 이것들은 현대적인 상황에 맞게 해석 적용해야 하며, 주후 1세기의 교회나 성도에게 주신 명령을, 상황과 문화가 다른 20세기의 성도들에게 적용할 필요는 없다고 주장합니다. 그들은 때때로, 성경은 점진적이어서 바울과 같은 저자도 여자들에 관한 생각이 '성숙함' 에 따라 바뀌어졌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이 성경의 영감에 관해서는 침묵을 지키고 있으니 이상한 일입니다(딤후 3:16).

   기독교 여성 해방 운동자들은 여성들에게 교회에서의 설교를 허락하지 아니하기 때문에 여성의 은사 활용의 기회가 없다고 불쾌해 합니다. 이들은 여성인 자신들이 교회에서 소외되고, 차별대우를 받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성경이 영적 은사에 있어서 남녀를 차별하지 않는다고 말하는데, 그것은 참으로 옳은 말입니다. 성경 어디에도 신령한 은사와 관련해서 어떤 은사도 남자에게만 주셨다는 대목은 없습니다(고전 12장 참조). 그러나 교회의 주인이신 주님께서는 주의 자녀들이 모이는 곳에서의 은사 사용에는 남녀의 구분을 두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주인이시기에 그렇게 하실 권리가 있으십니다. 신령한 은사에 관해서는 12과에서 보다 상세하게 다루게 되겠기에 그 때까지 설명을 보류하기로 하겠습니다.

   기독교 여성 해방 운동의 대변자들은 가부장적(家父長的)인 결혼 제도 하에서 아내에게 순종이 강요되는 것을 특별히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이들은 남성 우위를 반대합니다. 그들은 모든 성도간 상호 복종하는 것 이외의 복종은 비성서적이라고 주장합니다. 결국 그들은 에베소서 5장 21절은 받아들이면서도 22절은 거절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현행 결혼제도를 일방통행로처럼 보고 있습니다. 여자란 언제나 남자에게 주기만 하고, 복종하기만 하고, 양보만 하며, 자기의 권리는 포기하는 것으로 봅니다. 그들은 결혼이든 사업이든 직업이든 목회이든 생활의 모든 분야에서 동등을 부르짖고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최근에는 여자의 성직 안수를 요구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모든 여성 해방 운동자들의 일반적 주장은 소년 소녀들이 어려서부터 남녀 유별을 배워 왔고, 또 그렇게 처신하도록 세뇌를 받았기 때문에 남녀가 다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남녀에 대한 이러한 가르침은 유행에 뒤떨어진 견해에 근거하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즉 여성은 우아하고, 정서적이며, 모성적이고, 남성세계에 대해서는 다소 무력해 보이는 반면에, 남성은 가족의 부양자로서 스포츠에 있어서나, 기계에 있어서나, 재정적 안목에 있어서 강인하고 우세하고 탁월하다는 견해는 고루하고도 인공적인 견해라는 것입니다. 과연 그럴까요? 그렇다고 해서 실질적으로 생리적인 차이점까지 해소되는 것일까요?

   '해방' 은 그 의미를 신중하게 검토해야 할 어휘입니다. 여성들은 구태의연한 남녀유별에서, 남성의 지배에서, 전형적인 주부의 임무에서 해방되어야 하며, 여성들은 생활의 모든 분야에서 '천부적 능력' 을 자각해야 한다며, 기독교 여성 해방 운동자들은 이에 대해서 성서적 근거가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들은 바울이 남성 옹호론자요 유대식 교육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갈 3:28)고 한 말씀을 보면, 그가 점차 남녀의 차별이 없다는 생각으로 기울어졌다고 주장합니다.

   어떤 이들의 주장대로 과연 사도 바울이 심경에 변화가 있어서 이 편지에는 이렇게 쓰고, 다른 편지에는 다르게 쓴 것일까요? 아니면 그가 성령의 감동하심으로 기록한 것일까요? 여성 해방 운동자들이 어찌 바울의 말을 취사 선택하여 이것은 인정하지만, 이것은 인정할 수 없다고 말할 수가 있을까요? 어느 누가 감히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어떤 말씀은 하나님께로서 왔고, 어떤 말씀은 바울에게서 왔다고 분별하거나 비판할 권리가 있겠습니까? 성경 전체가 신뢰할 만한 것이 아니라면, 그 성경은 우리의 인생의 토대로  삼을 만한 권위가 없습니다. 여성 해방 운동자들이 인용하고 있는 구절들을 문맥적으로 주의 깊게 상고해 보면, 사도 바울의 가르침에는 일관성이 있으며, 모두 주님의 말씀임을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고전 14:37).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여성 해방은 성경 말씀 전체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명령을 문자 그대로 따르기를 힘쓰는 여성이 발견하게 되는 자유입니다. 참된 해방은 순종에 따른 결과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명령에 이의를 제기할 권리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마침표를 찍으신 곳에 물음표를 할 수 있는 권리가 없다는 말입니다.

   중국에는 예로부터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져 오고 있습니다. 두 사람이 강둑을 거닐다가 한 사람이 유난히 아름다운 나무 한 그루를 보았습니다. 그는 '이 자리에서 꼼짝할 수 없는 이 나무가 참으로 불쌍하다." 고 탄식했습니다. 이에 또 다른 사람도 '이 나무에게도 자유가 있어야 해!' 라고 동의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함께 이 나무를 뽑아 나무에게 자유를 주었다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교훈해 주려는 바는 너무나도 분명합니다. 나무는 정해진 장소에 있었을 때 자유로왔고 아름다왔지만, 뽑힌 후에는 말라 죽었습니다. 우리에게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계획을 따르고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소임을 감당하게 될 때,, 참으로 자유로울 수 있는 것입니다. 열차가 선로를 따라서만 제 기능을 효과적으로 발휘할 수 있으며, 돛단배도 바람의 원리에 순응할 때에만 영광스러운 자유를 보장받게 됩니다.

   남녀의 경우에도 동일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무한하신 지혜로 남자를 지도자로, 여자를 돕는 배필로 정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남녀 각자에게 적합한 임무를 구상하시고 계획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모든 면에 있어서 우리로 하여금 만족하게 임무를 완수할 수 있도록 그 내용을 정해 놓으셨습니다. 전지전능하시며 사랑 그 자체이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계획하신 것 중에 불완전한 것이 있을까요? 결국 우리가 완성되는 비결은 하나님의 경륜을 받아들이는 데 달려 있습니다. 만족하는 심령이야말로 참된 자유가 무엇인지를 알게 됩니다.

   그렇다면 여성에게는 창의력이 없다는 뜻일까요? 그리고 여성의 소임이 가사에만 국한된다는 뜻일까요? 그저 가정에서 여성의 존재가 문 앞에 놓여 있는 흙털이개와 같은 것일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이미 살펴본 대로 신구약 성경은 한결같이 여성의 활동이 가사에만 국한되어 있지 않은 것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잠 31장 참조). 하나님을 앙모하며, 말씀을 경청하며, 순종하는 여성은 비록 최악의 극한 상황에서도 측량할 수 없는 만족을 누립니다. 무한하시고 영원하신 창조주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막막하고 답답한 일을 당하게 할 필요가 있다고 하신다면 어찌 이를 사양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기를 힘쓰는 여성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를 기뻐하며,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께 초점을 맞춘 삶을 살기에 하나님께서는 그의 심령의 소원을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시 37:4).

   요컨대, 자기 자신만을 위해서 자아 완성을 도모한다면 반드시 어떠한 목적도 달성할 수도 없을 뿐더러, 독선적인 이기주의에 빠지게 되고 맙니다. 진정한 행복과 자아 완성에의 길은 이기적인 추구가 아니라 사랑의 자아 희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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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여        성

                                

                              제 9 과

                                    


                                가정에서의 여성의 역할


                                            남편에 대한 도리


   우리는 이미 에베소서 5장 22절과 25절에서 남편과 아내의 도리를 상고해 보았습니다.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

   골로새서 3장 18절과 베드로전서 3장 1절에서 성경은 아내들이 남편에게 순복할 것을 훈계하고 있습니다. 순복한다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사전에서는 '권위나 다른 사람의 뜻에 자신을 굴복시키는것' 으로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성경이 아내된 자들에게 순복을 강요하는 것은 아닙니다. 단순히 하나님의 명령으로서 인간의 행복을 위해 제정하신 경륜입니다.

   이에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남녀 간의 구별을 무시하려는 현대의 경향은 결혼 생활이나 사회 생활의 위협이 되고 있습니다. 이는 남녀 간의 구별을 전제한 결혼이 건전한 사회의 기초가 되기 때문입니다. 아내들에 대한 하나님의 명령은 어디까지나 순복이지 맹종은 아닙니다. 남편들은 우리를 위해 친히 희생하신 그리스도를 본받은 권위를 가져야 합니다. 결국 가장 이상적인 것은 부부가 사랑 가운데서 서로의 입장을 생각해 주고, 상호 존경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태도는 서로 마음을 터놓고 고락을 함께 함으로써 점점 향상되어갈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평생의 공동 목표를  가지고, 규칙적으로 성경을 읽고,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로 알아" 함께 기도하는 남편과 아내에게는 권위와 순복에 관한 가르침이 별로 문제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부부가 다 주님께 순복하고 있다면, 다른 모든 관계는 합당하게 제자리에 들어 맞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결혼은, 가치에 있어서 동등하고 임무에 있어서 서로 보충하여  조화를 이루는 남녀의 결합입니다. 그리고 이런 관계는 두 사람이 평생에 하나님을 으뜸으로 모심으로 가능합니다.

   한편 부부 생활에서, 남편이 비록 에베소서 5장 25절에 명하신 대로 책임을 이행하지 않을 경우에도 아내는 에베소서 5장 22절에 명하신 아내의 임무에 순복해야 합니다. 반대로 아내가 자신의 소임에 소홀할 때일지라도 남편은 자신의 책임에 충성해야 합니다. 책임은 개별적으로 주신 것이기에 품앗이하듯 해서는 안됩니다. 각자에게 주신 명령이 분명하므로 상대편의 처신에 무관하게 본분을 다 함으로써 주님께 순종해야 합니다.

   어떤 이는 "만일 왕같이 대접 받기를 원하는 남편이 있다면 그 사람은 그의 아내를 왕비같이 대접해야 한다. 만일 그가 그의 아내를 왕비같이 대접한다면 아내도 쉽게 남편을 왕처럼 대접할 수 있을 것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결혼 생활이란 상호 존중하며(엡 5:33), 상호 배려하며(고전 7:3~5), 상호 신뢰하는 것입니다(고전 11:8~12).

   아내는 그의 남편이 매일 직장에 출근하는 만큼 충성스럽게 가사를 꾸려가는 책임을 이행해야 합니다. 잠언 14장 1절에서 지혜로운 여인은 집을 세운다고 말씀했습니다. 당신에게는 자질구레한 살림살이 속에서 그것을 창조적으로 꾸며나가야 할 과업이 주어져 있습니다. 살림살이란 되풀이되는 일이 많고, 그리 하고 싶지 않은 일들도 적지 않은 법이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것들은 결코 하찮은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손수 일하는 것을 보람으로 여겨야 합니다(살전 4:11; 엡 4:28). 우리 주님께서도, 사도 바울도 손수 일하셨습니다. 마지못해 하는 일이 아닌, 사랑으로 하는 일이라면 살림살이라는 짐도 꽤 가벼워질 것입니다.


                                            자녀에 대한 도리


   현모양처가 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어린 자녀는 양친에게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배우게 되거니와 그중에서도 어머니의 영향은 특별히 큽니다. 특별히 취학 전의 시기는 인성과 지성의 형성기로서 이 시기의 경건한 가르침과 솔선수범의 중요성에 관해서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칠 수 없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이미 한나와 요게벳의 아들들을 통해 볼 수 있었습니다.

   다행히 유아와 청소년의 전인적인 성장에 있어서 사랑이 중요하다는 인식이 점점 증가되어 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뉴스는 여전히 학대를 받고 소홀히 취급되는 어린이들의 비극적 사건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낙태나 피임들의 서글픈 이야기도 계속 들려옵니다. 이에 믿는 여성인 우리는 우리의 사랑을 우리의 자녀에게 뿐 아니라, 우리가 대하게 되는 모든 어린이에게 사랑을 베풀어야 합니다. 주 예수님은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마 10:42; 막 9:37)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날 많은 여성들이 바깥 일에 종사하고 있는데, 우리가 이에 대하여 한 번쯤 진지하게 검토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됩니다. 흔히 있듯이 경제적인 궁핍에서라면 의문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러나 단지 가족이나 가정이 좀더 여유를 갖기 위해서라든가 더 나은 수준에서 생활하기 위한 것이라면, 얻는 것보다는 잃는 것이 더 많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어떤 가정부나 탁아소의 교사도 어머니처럼 어린애를 사랑해 주며 길러줄 수는 없을 것입니다. 취학전의 시기는 짧지만 아주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어머니는 어린 아이와 산보도 하며 노래도 하고, 기도도 하며 함께 놀이도 하고, 연도 날리며, 온 세상에서 날이면 날마다 제딴엔 새롭게 깨닫고 놀라워 하는 것들을 들어주기도 하며, 설명해 주기도 해야 합니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가를 가르쳐 주어야 하며, 또한 그가 하나님이 지으신 중요한 존재이며, 하나님께서 귀히 여기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어야 합니다. 청소년이 되었을 떄에도 자녀들과 대화를 지속하려 한다면, 취학전의 이 시기에 자녀와 함께 지내는 것이 긴요합니다. 가능한한 어머니는 어린애가 집에 있는 동안엔 집에 있어야 합니다.

   어떤 이는 "가정은 과자와 빵을 구울 때처럼 구수한 사랑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가정에는 위로와 사랑과 온화함과 반가움이 있어야 합니다. 한마디로 가정은 아늑한 보금자리이어야 합니다. 이는 사랑이 모든 것을 아름답게 만들어 주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자녀들이 일생을 살아가는 동안 갖게 될 가정에 대한 추억은 어떤 것이어야 할까요? 단언컨대 집안 살림을 해 나가는 일은 어떤 여성에게든지 가장 창조적이며 만족할 수 있는 직업이 될 수 있습니다.

   어머니로서 제일 중요한 일은 자녀를 훈련하고 징계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부모의 공동책임이긴 하지만, 대부분 아버지는 낮에 집에 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대부분의 책임이 어머니에게 주어지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유일한 안내자로 삼으시고, 오직 기도를 통하여 주님을 의지함으로써 어머니로서의 책임을 해 낼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라" (신 6:6,7)는 교훈은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말씀이지만, 오늘날에도 동일하게 다음과 같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첫째로, 말씀이 우리의 심령에 거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야 한다고 교훈하신 대로입니다(골 3:16). 어머니로서 주님과 함께 하는 묵상의 시간, 매일 성경 말씀을 읽으며 기도하는 시간을 거르지 마십시오. 자녀에게 주님에 관해 가르친다는 것은 어머니로서 커다란 특권입니다. 그리고 이 일은 유아기에 시작해야 하며, 신명기 6장의 말씀대로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걸어다닐 때에든지, 아침에 일어났을 때에든지 하나님에 관해 이야기해 주는 것을 일과로 삼아야 합니다. 매일 온 가족이 함께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시간도 꼭 있어야 합니다. 아침 식사 전후나 저녁 식사 전후나 또는 그외 다른 적절한 시간을 정하시면 됩니다. 다만 규칙적인 일과로 계속할 수 있도록 조심스럽게 계획하고 실천해야 할 것입니다.

   둘째로, 징계라고 하면 으례 위축시키는 것으로 생각되기 쉬우나, 실은 자녀들에게 한계를 지어주는 것을 가리킵니다. 만일 아이가 일부러 그 한계를 범했을 때에는 벌이 따르게 됩니다. 규칙을 알면서도 불순종할 때에는 언제나 벌을 받게 되리라는 것을 알게 되면, 아이들은 오히려 안정감마저 갖게 됩니다. 따라서 에베소서 6장 4절에서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대로 아이들을 비난하거나 잔소리를 함으로써 기분을 상하게 하거나 화가 치밀어 오르도록 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조심스럽게 그리스도인으로 가져야 할 가치 체계를 설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에 따라 그들이 이미 배운 것에 기초하여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기까지 가르쳐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그들을 위한 우리의 과업입니다.

   셋째로, 우리는 우리의 자녀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이에 대한 본보기로 우리는 아브라함(창 17:18)과 다윗(대상 29:19)을 들 수 있습니다. 한 아이를 다른 아이보다 더 사랑하는 편애에 관해서는 이삭과 리브가의 경우와(창 25:28) 야곱(창 37:3)에게서 불행한 실례를 볼 수 있으며, 이로 인해 일어난 가정불화는 우리에게도 경종이 되고 있습니다. 또한 엘리가 "자기 아들들이 저주를 자청하되 금하지 아니하였음" ( 삼상 3:13)으로 그 가정에 일어났던 비참한 결과는, 우리 자녀들의 방종과 잘못을 바로잡아 주지 못할 때 초래될 불행을 경고해 줍니다.

 

                                          이웃에 대한 도리


   믿음의 가정의 영향력은 담을 넘어 퍼져 나가야 합니다. 우리의 생활 양상이 이웃집이나 다를 바 없습니까?  아니면 그들이 우리 가족을 볼 때 우리를 부러워하며 우리처럼 되기를 갈망하고 있는지요?  믿음의 가정이 지닌 특유의 분위기가 자주 드나드는 자녀의 친구들에게나 어쩌다 방문하는 이웃들에게 별천지에 온 듯한 느낌을 자아내게도 해야 할 것입니다. 사랑으로 연합된 이런 행복한 가정은 요즈음에도 그리 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런 가정에 관한 말들이, 이 단원의 초반에서부터 현모양처에 관해 상고해 보았기에 미혼 여성에게는 무관한 것처럼 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미혼 여성에게도 역시 그리스도의 사랑을 보여주어야 할 가정과 이웃이 있습니다. 참된 우정과 남을 돕고 섬기려는 마음 가짐은 혼인 여부에 관계없이 언제나 칭송을 받을 것입니다.


                                        여성의 품위와 의상


   믿음의 여성의 품위에 관한 말씀은 디모데전서 3장 11절과 디도서 2장 3~5절 등 두 곳에 있는데, 단정하며, 절제하며, 근신하며, 순전하며, 순종하며, 사랑하며, 신뢰받는 여성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옷차림에 관해서는 베드로전서 3장 3,4절에서 겉치레에 중점을 두지 않고, 오히려 심령의 미덕에 치중하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디모데전서 2장 9,10절에는 화려해서 우리 자신에게 이목을 집중시키는 옷을 입지 말고 아담한 옷을 입으라고 교훈하십니다. 범사에 그렇듯이, 이 일에 있어서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기를 힘써야 하겠습니다. 겉치레보다는 내적이고 인격적인 미를 계발하는데 더 많은 시간을 바칠 수 있도록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을 위한 가정의 사용


   접대하는 일은 주님과 주의 자녀들이 아주 귀하게 여기는 봉사입니다(벧전 4:9 ; 히 13:2). 접대하기 위해서 꼭 크고 잘 꾸며진 집이 필요한 것도 아니며, 음식을 으리으리하게 차려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단칸 방에 혼자 사는 사람도 접대할 수 있습니다. 사랑으로 영접하고 조촐한 음식으로 접대할 때 손님에게 기쁨을 주게 되며, 접대를 계속하는 독신 여성 자신도 아주 풍성한 삶을 누리게 합니다. 이러한 접대야말로 가정에서 할 수 있는 바람직한 신앙 봉사입니다. 여기에 몇 가지 제안을 하고 싶습니다.

   1. 어린이 집회 : 많은 어린이들이 가정 집회를 통해서 그리스도께로 돌아왔습니다. 자신이 직접 가르칠 수 없다고 생각되는 경우에는 간접적인 방법으로 일 주일에 하루, 오후 몇 시간 동안 자기 집을 제공하거나 그 밖의 다양한 방법으로 교사들을 도울 수 있을 것입니다.

   2. 차 한잔의 사귐 : 이 방법은 믿지 않는 사람들을 사귈 때에나 초신자들의 성장을 도와주는 데 아주 효과적입니다. 자신이 가르칠 수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자기 가정을 개방하여 이웃을 초대하고 음료를 제공하며 기도함으로써 이모임의 인도자들을 도울 수 있습니다.

   3. 부부 생활 연구회 : 여러 부부들이 저녁에 모여 성경을 공부하거나 대화하게 될 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지식이 더해 갈 것이며, 우정이 점점 깊어져 갈 것입니다.

   4. 기타 : 아마 어떤 분들은 이상 말씀드린 일들을 할 시간이 없다고 생각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 밖에도 가정에서 하실 수 있는 일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1) 외로운 분들이나 병중에 있는 분들에게 전화를 한다든가,

   2) 도움이 필요한 가족이나 친구에게 음식을 장만해 준다든가, 그렇지 않더라도 실제적인 방법으로 당신이 그를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든가,

   3) 바느질, 뜨게질과 같은 솜씨를 이용해서 다른 사람을 위해 무엇인가를 만든다든가,

   4) 선교사들, 또는 가족이나 친구들 중에 외출하지 못하고 집에만 계시는 분들에게 편지를 해준다든가,

   5) 기도 등의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기도야말로 모든 것 중에 가장 중요한 일임에도 가장 경시되고 있지 않나 생각됩니다. 아무튼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고전 10:31)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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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           성

                                                F. 스마아트  &   J. 영


                           제 2 과


                         여성의 범죄와 그 결과(창세기 3장)


   창세기 3장을 공부하기에 앞서 2장 16,17절을 다시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이 구절에서 우리는 '이것은 해도 좋지만, 저것은 해서는 안된다' 하신  하나님의 분부가 아주 분명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울러 하나님은  불순종에 대한 형벌을 경고하셨습니다. 도덕적 존재로서 창조된 최초의 인간은 순종과 불순종이라는 선택에 부딪히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이들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순종할 수도 있었고, 불순종하며 제멋대로 할 수도 있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그러했듯이 우리도 일상 생활에서 얼마나 많은 선택을 해야 하는지 모릅니다.

   최초의 남녀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거처로 주셨던 아름답고 풍요로운 동산에서, 얼마 동안이나 평화스럽고도 의좋게 살았는지 알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그 평화는 깨어졌고, 대신 비극이 찾아오게 되었는데, 그것은 바로 여자 때문이었습니다. 하와는 동산 중앙에 있던 금단의 과실 나무 가까이에 있었을런지도 모릅니다. 그 과실을 따먹으면 어떻게 될까를 이리저리 궁리하면서 서성 거렸는지도 모릅니다. 만일 그랬다면 유혹하는 자에게 있어서 이는 안성 맞춤의 기회였으며, 이러한 기회를 노리고 있던 사단이 이를 놓칠 까닭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유혹에서 가능한한 멀리 떨어져 있어야 하며, 죄의 유혹을 받을 만한 일에는 섣불리 접근하지 말아야 합니다.


                  유    혹


   뱀은 교활한 질문과 거짓말로, 여자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과 사랑을 모두 의심하도록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너에게 손대지 못하도록 금하신 것이 있지 않느냐? 왜 그러셨는지 아느냐? 네가 그것을 먹는다고 해서 도대체 무슨 불행이 닥쳐오겠니! 하나님께서는 다만 네가 하나님처럼 위대해지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실 뿐이야! 이 과실이 얼마나 맛있는데 그래! 보라구, 보기에도 얼마나 아름다우냐! 이것만 먹으면 넌 지혜롭게 될거야!'

   이처럼 뱀은 욕심과 교만에 호소하며 하와에게 접근해 왔습니다.


                        죄


   하와는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하와가 뱀의 그 모든 제의에 대해 잠깐만 깊이 생각해 보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하나님께서 말씀하셨거늘 어찌 감히 하와가 하나님의 말씀을 판단할 권리가 있단 말입니까? 그러나 불행하게도 하와는 하나님의 말씀을 젖혀놓고 사단의 말을 믿는 그 순간에 범죄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정녕 죽으리라" 고 말씀하셨지만, 뱀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하와는 하나님의 음성보다 다른이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으며, 하나님의 금령에도 불구하고 지나치게 욕심을 부렸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와는 마침내 하나님이 베푸시는 모든 자비를 외면했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신뢰를 저버린 채 금단의 열매를 따먹고, 남편까지도 이 일에 끌어들였습니다.

   한편 주 예수님이 광야에서 유혹을 받으셨던 때의 사단의 접근 방법이 하와가 당했던 경우와 너무나 유사했음을 유의해 보십시오(마 4:1~10). 사단은 세 차례나 주님을 시험하면서, 하나님께서 주님께 주시지 않았던 권세와 명예와 재물을 주님 스스로 취하라고 유혹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세 번 모두 하나님의 말씀만을 인용하고 의롸하심으로 단호히 거절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단과 어떠한 논쟁도 하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사단은 오늘날 우리를 유혹하는 데에도 이와 똑같은 수법을 사용합니다. 세상에 반짝이는 것들을 우리 앞에 흔들어서 우리로 그런 것에 욕심을 내도록 합니다. 사도 요한은 이에 대하여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 육신의 정욕과(하와에게는 그 과실이 먹음직스러워 보였습니다.) 안목의 정욕과(하와에게는 그 과실이 보암직스러워 보였습니다.)  이생의 자랑이니(하와에게는 그 과실이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워 보였습니다.)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요일 2:15,16)고 경고했습니다. 우리가 이 유혹을 물리칠 수 있는 힘은 오직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본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아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일 때 생깁니다.

   결론적으로 하와는 하나님께 범죄했을 뿐 아니라, 아담을 무시하고 행동함으로써 아담에게도 범죄하였습니다. 이렇듯 하와는 아담이 행사하게 되어 있는 지도권을 남용함으로써 비극적인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습니다. 이렇듯 우리가 하나님의 질서를 파괴하고 우리에게 부여해 주신 본분에서 이탈하게 되면, 우리는 무질서와 근심외에 다른 아무것도 기대할 수가 없습니다.


                          범죄의 결과


   하와의 범죄는 즉각적으로, 이전에 가졌던 순수한 상태가 수치감과 죄책감으로 대치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이 죄로 인한 최초의 증세는 부부 관계에서 나타났습니다(창 3:7). 곧 이 죄는 창세기 2장 23~25절에 나타난 부부 일체의 원리를 파괴한 것입니다.

   뱀이 그들에게 선악을 알게 되리라고 꾀었던 대로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이 선을 알게 되기는 했지만 이를 실천할 힘은 없었으며, 그들이 악을 알게 되기는 했지만 이를 물리칠 힘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죄의 궁극적인 결과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죽음이었습니다.

   이 죽음에는 세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첫째,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즉시로 이들은 하나님과의 교제가 단절된 영적 죽음을 당하였습니다.

   둘째, 세월이 지난 후에 그들은 육체적인 죽음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셋째, 하나님의 구원을 거절하는 자들에게 임하게 될 하나님과의 영원한 분리, 곧 영원한 죽음입니다.

   사람은 자기를 높여 하나님과 같이 되려 했으나(창 3:5), 도리어 죽음과 더불어 흙으로 돌아가야 하는 운명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빌립보서 2장 5~11절에서는 이와 대조적인 사실을 보게 됩니다. 주 예수님은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책을 공부하시는 여러분도 하나님의 강하신 손 아래 스스로 겸손하십시오. 때가 되면 그가 여러분을 높이실 것입니다(벧전 5:6).

   이렇듯 죄가 들어오게 되자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행복한 관계는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이제 이들 최초의 남녀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하나님을 피해 숨으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후부터 지금까지 그들의 범죄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은혜로 도우시며, 축복해 주시려고 우리 인간들을 찾고 계십니다.


                    범죄로 인한 형벌


   하나님께서는 이 범죄 사건에 관련하여 세 가지 대상들 즉, 뱀과 남자와 여자를 각각 다루시되, 뱀과 땅은 저주하셨지만(창 3:14,'17) 남자와 여자를 그렇게 하시지는 않았습니다. 먼저 하나님께서는 옛 뱀(계 12:9)이라고 불리우는 타락한 사단의 상징으로서, 뱀을 보다 하등한 돔물로 격하 시키셨습니다. 그리고 사단의 최후 운명에 대해서는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 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창 3:15).

   또한 남자에게 내리신 형벌은 그가 평생토록 가장 보람을 가지고 해야 할 근로가 이제는 고통과 수고와 피로를 수반하게 되었으며, 결국에는 그의 몸이 흙에서 지음을 받았던 대로 흙으로 돌아가게 되리라는 형벌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여자에게 내리신 형벌은 근본적으로 아내와 어머니로서의 본분과 관련되어 있습니다(창 3:16). 즉, 여성으로서의 특유하고도 축복된 기능, 곧 어머니로서의 본분을 다하는 데에 고통과 슬픔이 따르게 되었습니다. 예로부터 여성들은 언제나 자녀를 갖고자 하는 강한 갈망이 있습니다. 여성으로서의 그의 소원을 성취할 수는 있었지만, 그 때마다 죄로 인해 당하게 되는 고통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고, 슬픔을 당해야만 했습니다.

   남편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변화가 와서, 이제는 남편의 권위에 복종하며, 다스림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죄를 지을 때에는 하와가 지도자였고 아담이 하와를 따랐으나, 이제는 하와가 아담에게 복종해야만 했습니다. 창조의 질서에 있어서 아담에게 지도적 권위가 부여되어 있긴 하였지만, 그렇다고 하와가 아담에게  복종해야 한다고 말씀하시지는 않았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께서는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고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그리하여 타락한 이래로 결혼에 대한 갈망, 그리고 결혼에 의한 종속이 여성 대부분의 숙명처럼 되어왔습니다. 여성사, 특히 비 기독교 국가에서의 여성사는 굴종과 멸시, 천대의 기록으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기독교가 들어와서 남성을 변화시키고 사회를 변화시킴으로, 이러한 굴종과 멸시의 역사가 근본적으로 변화된 것입니다.

   이러한 형벌의 선언 가운데 16절에서의 고통, 수고라는 낱말과 17절에서의 수고라는 낱말은 한가지로 정신적이고도 육체적인 고통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이로 보건대 형벌이 내려졌다는 점에 있어서는 남녀간 다를 바가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즉 피로와 고통을 견디면서 처절하리 만큼 수고하는 것이 남녀 모두의 운명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처럼 암담한 상황 속에서도 어떻게 하나님의 은혜가 비취어오고 있는가를 유의해 보십시오. 비록 여자가 먼저 범죄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여자에게 구속 사업의 일익을 담당하는 영예를 안겨 주셨습니다. 여인의 후손, 곧 사단의 희생 제물이 되었던 하와의 씨가 바로 그 사단을 멸망시키도록 되어 있었습니다(창 3:15). 우리는 이 약속의 성취를 히브리서 2장 14절의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셨다는  말씀에서 보게 됩니다.


                         현대 여성의 지위


   죄악이 가득한 인간 본성에 의하여 살아가고 있는 타락한 세상 사람들에게는 권위가 확립되고 유지되는 것이 절대로 필요합니다. 이는 가정에서도, 사회에서도, 국가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진리입니다. 남자가 가정의 머리가 되어, 그 가정의 안녕과 질서에 대한 권위와 책임을 져야 한다는 원리는 궁극적으로 결혼 생활과 사회 생활 전반에 걸쳐 유익을 주기 위한 것입니다. 따라서 성공적인 결혼 생활을 해보겠다는 여성이라면  누구나 이에 유의해서 처신해야 할 것입니다.

   신약 성경에서는 믿는 아내에게 이러한 여성의 지위에 대해 더 상세하게 교훈해 주십니다.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 그가 친히 몸의 구주시니라 그러나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그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엡 5:22~24) 이에 대해서는 앞으로 더 상세히 상고하게 될 것입니다. 다만 여기에서 지적하려는 것은 이것이 영구적인 원칙으로서 복종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고, 우리의 축복을 위해서 그렇게 계획하셨다는 점입니다.

   여성 중에 몇 사람이나 참으로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전 가족을 양 어깨에 짊어지고 완전히 책임을 지겠노라고 결단을 내리고 그 길을 선택 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체질'(시 103:14)을 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여성으로 하여금 조력하도록 계획하셨고, 조력하는데 알맞게 하셨을 뿐, 한 가정의 가장으로 계획하셨거나 세우시지 않았습니다.

   결혼하지 않은 여성에 관한 한, 창세기 첫머리에서는 아무런 기록이 없습니다. 결혼한다는 것은 여성에게 있어서 예나 지금이나 정상적인 일입니다. 폐일언하고, 여자를 창조하신 순서에서 보나 여자를 창조하신 목적에 대해 말씀하신 것을 볼 때, 여자의 본분은 남자를 '돕는 배필' 로서의 역할, 곧 후원적이고 보조적인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엘리사벳 엘리오트(Elisabeth Elliot)는  "나는 모든 남성이 아주 강인하고, 지성적이고, 유능하고, 덕망이 있고, 거룩해서 남성 우위가 마땅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다만 남성 우위란 그들의 훌륭함과 무관한 천부적인 지위임을 알고 있다" 고 술회했습니다.

   아직도 복종의 개념이 좀체로 깨달아지지 않으십니까? 복종하라신 하나님의 명령에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고 계시진 않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명령을 깨달을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일상 생활에서 평안을 누리며 사는 비결은 오로지 하나님의 뜻에 순복하는 것입니다. 주 예수께서는 친히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마 26:39)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주님께서는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마 11:29) 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모든 번뇌가 그치기까지


                                                 주님의 평온을


                                                 새벽 이슬처럼 내려 주소서 !


                                                 우리의 심령에서


                                                 긴장과 초조를 제하여 주소서 !


                                                 그래서


                                                 우리의 단정한 생활로



                                                 아름다움을 나타내게 하소서 !


                                                                                          J. G. Whittier

Posted by 행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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