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와 종교로부터의 자유
저주 아래 있는 거짓 기독교인들이여!
"무릇 율법의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갈라디아서 3:10).
하나님께서 아담을 저주하셨는가? 그렇지 않다. 자비로우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아담을 저주하시겠는가? 만약에 인생에 저주가 있다면 그것은 인생이 스스로 저주 아래로 걸어간 것으로 보아야 한다. 어리석은 인생들이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을 저버리고 자기의 고집과 욕심에 잡혀 저주 아래로 뚜벅뚜벅 걸어가고 있는 모습을 필자는 수없이 보아왔다.
한 영혼도 멸망의 지옥에 빠지기를 원치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눈물겨운 사랑의 모습을 생각할 때 저주를 스스로 취하는 어리석은 인생들을 생각하며 가슴 아픈 심정을 억제할 수 없다.
'저주'라는 단어가 창세기 3장 17절에 최초로 사용되고 있다.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이 때 하나님은 아담을 저주하지는 않으셨다. 그러나 저주받은 땅에서 살아야 하는 인생에게 고통은 시작되었다.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를 위하여 만드신 그 아름다운 동산과 좋은 과일들이 화염검에 의해 막혀진 채 그들은 떠나야 만 했다. 내보내는 하나님이나 쫓겨나는 인간이나 얼마나 슬프고 안타까웠겠는가! 슬프다 인생이여! 하나님의 사랑의 계명을 스스로 범하고 고통의 길로 들어서고 말았으니... .
창세기 4장에 보면 가인에 대한 기사가 있는데 가인의 경우는 저주 아래 있는 죄인의 모습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가인은 저주 아래 있었다. 그는 저주를 받은 바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이 선한 사람을 한두 번 잘못했다고 저주하시므로 죄인이 회개할 길을 막으셨는가? 그렇지 않다. 가인을 자세히 분석해보면 쉽게 그 사실을 알 수 있다.
첫째, 가인은 아벨과 함께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는 받으셨으나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아니하셨다. 이에 대해 어떤 설교자는 가인의제사가 하나님께 대한 열심과 사랑이 부족한 제사여서 하나님이 받지 아니하셨다고 말하는데 이 얼마나 우매한 소경 목자인가! 이러한 소경들에 의해서 오늘날 기독교는 점점 더 썩어 가는 것이다. 그러면 왜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아니하셨는가? 그것은 가인의 제사는 하나님의 방법, 즉 진리와 관계없는, 진리를 떠난 제사였기 때문이다.
가인이 알아야 했던 진리는 무엇이었는가?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가죽옷을 지어 입히신 기록이 창세기 3장 21절에 나온다. 사실 이 때까지 아담, 하와는 무화과 나뭇잎으로 자신들의 수치를 가려보기 위하여 몸부림치고 있었다. 그러나 햇빛만 나면 말라버리는, 무화과 나뭇잎으로는 수치를 가릴 수 없었다. 그러한 아담에게 주어진 가죽옷은 지독한 가뭄에 소나기만큼이나 기쁜 일이었다. 이것은 신약의 구속의 복음인 바 가죽옷을 짓기 위하여 죽은 양은 예수님의 속죄를 가리킨다(요한복음 1:29 ; 히브리서 9:12). 이제 양을 잡아서 제사를 지내므로 인간의 죄는 가려지고(용서) 하나님 앞에 경배의 제사를 드릴 수 있는 진리가 그의 아들에게도 전수되었다.
아벨은 이러한 가르침을 순종하고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피 흘림)으로 제사를 지냈으나 가인은 자기의 생각대로 진리를 거스르고 피 없는 제사를 지냈던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진리를 불순종한 가인의 제사를 외면할 수 밖에 없었다. 이 상황에서 가인은 즉시 하나님께서 왜 자신의 제사를 받지 아니하셨는지 깨닫고 회개했어야 했다.
아벨의 제사의 의미는 피로 말미암은 구속의 진리를 말하고 있다. 이 복음의 진리를 거스르고 다른 구원받을 길은 없다(사도행전 4:12). 피 흘림이 없은즉 죄 사함이 없는데(히브리서 9:22) 피 흘림의 진리를 거부하고 뉘우치지도 아니한 자에게 무슨 구원의 길이 있겠는가!
가인은 오히려 안색이 변하고 불만을 품었다. 하나님은 이러한 가인에게 안색이 변함을 지적하고 두 번째 회개할 기회를 주셨다. 그러나 가인은 아벨을 쳐죽이므로 이 하나님의 충고와 깨우침을 정면으로 거부했다. 하나님이 가인에게 "동생 아벨이 어디 있느냐" 물으시며 회개할 기회를 주셨으나 그는 아벨의 일을 모른다고 말하면서 하나님을 속이려 했다. 이제 가인은 모든 회개할 기회를 다 버리고 끝까지 거역한 죄인의 길을 걸어가므로 저주 아래로 들어 간 것이다.
하나님은 11절에서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라고 하심으로 "저주받은 가인" 을 말씀하셨다. 우리는 이와 같은 사실을 살펴보면서 다음 말씀을 생각하게 된다.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케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풍성함을 멸시하느뇨? 다만 네 고집과 회개치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로마서 2:4,5).
회개를 거부한 죄인이 저주 아래 들어가는 것은 당연하다.
성경에는 저주에 해당되는 단어로 표현된 죄인의 모습들이 여러 군데 나온다. 그중 몇을 살펴보자.
첫째,이사야 1장 4절에 "행악의 종자요" 하는 말씀이 있다. 이것은 돌이키지 않으면 저주받을 수밖에 없는 죄인을 가리키고 있는 것임에 틀림없다. 요한복음 8장 44절에 보면 인간은 누구나 마귀의 자식으로 출생하였음을 명백히 가르치고 있다. 그러므로 마귀 자식은 마귀를 따라서 지옥으로 갈 수밖에 없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날 때 저주 아래서 빠져 나오게 된다. 이 사건을 성경은 "거듭남" 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십 수년을 거듭남의 경험 없이 예배당 문턱만 밟고 다니며 교회에서 시키는 대로 열심히 행한다 하여도 근본적으로 종자가 바뀌는 것이 아니다.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이 죄악의 씨앗이 그대의 영혼을 주관하고 있는 한 저주 아래 있는 것이며, 구원받지 못한 지옥 자식임이 분명하다. 그러한 사람들 가운데는 교회의 중책을 맡고 있는 이들도 많다. 신앙은 흉내내는 것이 아니다. 근본적인 문제의 해결에 있는 것이다. 본질적으로 행악의 종자요 사단에 속한 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으로 말미암아 말미암아 새 생명(새 종자)으로 새롭게 출생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으므로 그와 함께 장사 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로마서 6:4).
필자는 수많은 기독교인 중 열심인 사람들이 새 생명으로 태어난 경험이 없이 하나님의 자녀 행세를 하느라고 고생하고 있는 모습을 수없이 목격하고 있다. 그들을 상담하여 보면 대부분 예수 믿는 것을 힘들어하고 있으며 계명과 조직과 사람(목사)의 권위에 눌려 겁먹은 표정으로 억지로 끌려가고 있다. 힘들어하는 이유는 흉내내는 것 자체가 힘든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마음에는 "분명 이것은 아닌데", "무엇인가 오늘의 기독교가 잘못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은 하지만 달리 묘책이 없으니 어쩔 수 없이 끌려가고 있다. 그들은 자신의 신앙 상태에 대해서도 무엇인가 문제가 있다는 것을 느끼지만 문제의 핵심을 진단할 수 없으니 포기한 상태로 현실에 적응하면서 끌려가고 있다.
오, 불쌍한 죄인들이여! 하나님의 긍휼하심은 입으라. 근본적인 변화를 입으라.
둘째로 저주로 표현된 죄인의 모습은 이사야 1장 4절에 기록된 대로 "행위가 부패한 자식" 이다. 행악의 종자가 근본적으로 변하지 않으니 당연히 그들의 생활의 변화도 기대할 수 없다. 그러므로 그들은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 되는 것이다.
행위의 부패함은 두 가지 면에서 생각할 수 있는데, 첫번째는 하나님의 말씀을 겸손히 순종하고자 하는 양심이 없다는 것이다. 진리의 말씀을 그대로 순종하고자 무릎을 꿇기보다 사람의 가르침과 교훈만 맹종하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금세기의 기독교가 천주교에서 개혁하였다고는 하나 그들의 생각과 가르침을 비슷하게 따르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성경은 특정인, 즉 사제들만 보고 풀어야 하는 것이며, 일반인들은 함부로 성경을 풀거나 가르치면 안되는 것" 으로 생각하는 사상을 이어받아 그것을 답습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성경은 특정인(목사, 전도사)에게만 가르침 받아야 하는 것이며 평신도가 해석하면 큰 일 나는 것처럼 가르친다(금일에 변화된 교회들도 늘어나고 있는 추세이긴 하지만). 물론 성경 내용 중 풀기 어려운 부분이나 함부로 해석하기 위험한 부분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성경 전체가 그런 것처럼 가르침으로 마땅히 읽고 깨닫고 순종해야 할 성경을 교인들과 떼어놓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 그 결과 오늘날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입으로는 주님을 따르나 실제는 사람을 따르며, 더 분명하게 말하자면 사단을 따르고 있는 것이다.
두 번째로 행위가 부패함은, 사단을 따르는 그들에게서는 자동적으로 부패한 행위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필자는 오늘날 기독교인 중에서 차라리 믿는다고 말하지 아니하는 편이 나을 것 같은 사람도 수없이 만나 보았다. 필자뿐만 아니라 이 글을 읽는 독자들도 길거리나 가게나 직장에서나 "믿는 놈들이 행실이 틀렸다", "신자가 욕심은 더 많다...더 나쁘다" 는 등 비판의 소리를 귀가 따갑게 들었을 줄 안다. 왜 이와 같은 소리를 들을 수밖에 없는가!
그렇다면 필자는 본래 행실이 훌륭하고, 태어날 때부터 성품이 온화하여 여러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훌륭한 기독교인이겠는가? 슬프게도 그렇지 못하다. 필자도 성격적으로나 인격적으로나 기타 여러 면에서 너무도 허물이 많고 문제가 많은 사람임을 자인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도 필자는 이웃에게 "몹쓸 사람" 이라는 소리를 듣지 않고 살고 있다면 그것은 필자가 훌륭해서가 아니라 주님의 십자가의 보혈로 말미암아 죄 용서받은 십자가 사랑에 감격하여 변화된 때문이다. 또한 그 십자가 구속으로 말미암아 성령이 내안에 거하심으로 성령님에 의해 다스림을 받은 삶이 필자를 죄악의 구렁에서 건지고 허물의 거름더미에서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여기서 한가지 의문이 생길 것이다. 분명히 "오늘날 성령을 받았다고 말하는 수많은 사람들도 변화되지 못하고 비방의 대상이 되고 있지 않습니까?" 하고 말할 것이다. 맞다. 필자도 그런 경우를 수없이 목격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거짓 성령은 사람의 인격을 변화시킬 수 없다는 것이다. 거짓 영이 사람의 생각과 생활을 일시적으로 변화시키므로 그리스도인처럼 꾸며서 한때는 훌륭한 그리스도인처럼 행세하게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사람의 인격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능력은 주님에게만 있는 것이다(고린도후서 5:17).
세상에 못되고 더러운 죄인의 생활을 청산하고 주님을 섬기노라고 간증했던 많은 자칭 그리스도인들이 결국 세상의 죄에 다시 빠진 경우를 보아왔다. 중생의 경험 없이 거짓 성령을 받아들일 수도 있다. 그들은 하늘나라의 의와 관계도 분깃도 없는 거짓 영을 받은 거짓 신자들일 뿐이다.
이러한 거짓 신자가 대부분인 한국의 교회들을 슬퍼하는 필자가 지나친 염려를 하는 것인가? "믿는 놈들" 소리를 들을 수밖에 없는 거짓 교인들을 세례교인 삼을 뿐 아니라, 시키는 대로 열심히 맹종하고 물질적으로 잘 헌신하면 중요한 직책도 서슴없이 맡기는 기독교를 개탄하지 않을 수 없다. 중심의 신앙심이나 변화된 생활보다 외모를 취하는 이러한 잘못은 반드시 시정되어야 한다.
행악의 종자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을 낳을 것이요 그들은 저주의 자식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며, 그들을 위하여 저주의 지옥불이 기다리고 있으니 우리는 슬퍼할 수밖에 없다.
필자는 이제 본문 서두에 있는 갈라디아서 3장 10절을 중심으로 잘 믿는다고 하면서 어째서 저주 아래로 들어가는가 하는 근본적인 원인을 생각해 보고자 한다. 10절 말씀을 잘 분석해 보면 그들은 율법의 행위에 속하였기 때문에 저주 아래 있다고 말하고 있다. 도대체 율법의 행위로 완전할 수 있는 사람이 세상 어디에 있단 말인가! 인간이 자기 노력으로 의로워지고 천국 갈 수 있다는 말씀이 성경 어디에 나오는가? 성경에 행위의 완전함으로 천국에 갈 수 있다고 가르친 곳이 어디 있는가? 그런데도 오늘날 필자가 만나본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행위가 부족한데 대해서 그토록 떨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가 주님을 닮아가고 주님의 거룩한 삶이 우리 삶에서 나타나기를 소원하며 사는 것은 지당하다. 그러나 그 행위가 우리의 구원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필자는 교인들을 만나 상담할 때 "마태복음 25장의 열 처녀 비유 중 어리석은 처녀가 기름을 준비하지 못하여 잔치에 참여하지 못하였는데 집사님은 기름 준비를 다하셨습니까?" 하고 물으면 열 명 중 아홉은 "제가 부족해서..." 하고 말끝을 흐리고 있으니 울분이 터지지 아니할 수 있겠는가! 도대체 기름 준비도 안된 사람에게 무슨 세례를 주며, 집사, 장로의 직분을 맡긴단 말인가! 기름 준비가 되지 못하였으면 지옥의 형벌이 눈앞에 있으니 이 문제부터 해결해야 할 것이 아닌가!
도대체 부족해서 구원받지 못하였다는 것이 무슨 궤변인가! 부족하니까 구원받아야 하는 것 아닌가! 수영을 잘하는 사람은 잘하니까 물에 빠져도 구원(구출)이 필요 없겠지만 수영을 못하는 사람(부족한 사람)은 그렇기 때문에 구원이 필요한 것이 아니겠는가! 이러한 웃지 못할 희극이 기독교인들에게 만연된 것은 바로 수많은 한국의 교회들이 행위로 구원받는 것처럼 가르치고 있다는 증거일 뿐이다. 이것은 수많은 사람들을 지옥의 저주 아래로 몰아넣고 있는 것이다.
이제 하나님의 음성은 무엇인가? 죄로 말미암아 죄의 늪에 빠져서 헤어나올 수 없는 절망적인 죄인을 향해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태복음 11:28)고 하셨다. 예수님은 이제 그대의 죄 짐을 다 지셨다. 그대가 책임져야 할 죄는 아무 것도 없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대신 책임을 지셨기 때문이다(요한복음 19:30). 이것을 대속(代贖:대신할 '대', 죄속할 '속')이라하며, 그대의 죄를 대신 갚으셨다는 뜻이다. 그대가 할 수있는, 해야할 일이 있다면 그것은 "주여 감사합니다. 나의 죄를 이미 용서하셨으니 나는 오늘부터 죄인이 아닙니다" 이 한 마디를 외치는 것이다. 만약 그대가 중심으로부터 이렇게 깨닫고 외쳤다면 그대는 구원받은 것이요 거듭난 것이며 기름을 준비한 것이다. 그대가 지옥에 가야할 이유가 온전히 사라진 것이다.
다시 말하거니와 그대의 종교적인 노력과 열심으로 죄를 해결하려는 것은 그대 스스로를 저주 아래로 끌고 가는 것이요, 예수님의 거저 주시는 속죄의 십자가를 순순히 받아 들이는 것은 그대를 저주의 지옥에서 건지는 것이다(갈라디아서 3:13). 문제는 그대의 선택에 달려 있다. 그대의 행위를 의지하고 지옥에 가는 것과, 예수님의 행위(십자가 속죄)를 의지하고 천국에 이르는 길이 그대 앞에 놓여 있다. 가인은 자기 행위(자기 생각대로의 제사)를 선택하였으나 아벨은 피(예수님의 피)를 선택했다.
"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요한복음 6:47).
'좋은 책을 읽고' 카테고리의 다른 글
죄와 종교로부터의 자유 - 초등학문 아래 갇혀 있는 불쌍한 기독교인들이여! (0) | 2015.12.11 |
---|---|
죄와 종교로부터의 자유 - 몽학선생 아래서 착각하고 있는 기독교인들이여! (0) | 2015.12.10 |
죄와 종교로부터의 자유 - 율법의 행위에서냐, 듣고 믿음에서냐? (0) | 2015.12.08 |
죄와 종교로부터의 자유 - 성령으로 시작하여 육체로 마치려느냐? (0) | 2015.12.06 |
죄와 종교로부터의 자유 - 죄인도 의인도 아닌 기독교인들이여! (0) | 2015.12.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