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도

                  말씀하시는

                    하나님

                                                       윌리암 맥도날드

                                           4장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한 버트


   버트는 처음 클라우디아를 만났을 때 그리스도인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그 마음과 양심에 역사하셔서 하나님 나라에 아주 가까운 마음 상태가 되었습니다. 클라우디아는 전혀 믿을 마음이 없었습니다.


   그녀는 버트를 처음 만났을 때 마음이 끌렸으며 버트 역시 그러했습니다. 그녀를 평생의 반려자로 삼는 것은 멋진 일이라고 버트는 생각했습니다. 그는 둘이 함께 구원받고 함께 주님을 섬길날을 고대했습니다. 그녀는 쉽게 그를 따라 교회에 갔고 그리스도인들과 쉽게 어울렸습니다. 버트는 그녀와의 관계가 원만하게 진전되는 것을 기뻐했습니다. 모든 일이 아주 순조로웠습니다.


   여러 주가 지나면서 버트의 마음에는 죄에 대한 각성이 생겼습니다. 그는 더 이상 그런 상태로 머물 수 없었습니다. 어느 주일 복음을 듣다가 버트는 마음에 결정을 내려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그는 집회 후에 전도자를 찾아가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고백했습니다. 클라우디아가 그 일을 보고 자기도 구원받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여러 자매님들이 그녀에게 몰려와  이제 두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어 함께 주님을 섬기게 되었다고 기뻐했습니다.


   버트는 원래 열정적인 기질의 소유자였습니다. 그는 말씀을 파고들고 열심히 전도했습니다. 클라우디아는 한 동안 열심을 내다가 이내 시들어버렸습니다. 버트는 그녀가 성경을 읽는데 아무 관심이 없는 것이 마음에 걸렸으나 일시적인 상태로 넘겨버렸습니다. 버트가 장로들에게 침례상담을 청하자 클라우디아도 함께 침례 받겠다고 자청했습니다. 장로들은 그녀와 상담하기 위해 여러 번 시간을 마련했지만 번번이 그녀의 시간에 맞출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장로들은 그녀의 경우를 예외로 인정하고 그녀를 버트와 함께 침례를 주었습니다. 그러나 침례식 자리에서 버트는 그녀의 간증이 허술하다는 것을 알아차렸습니다. 회개를 했다든지 그리스도께서 유일한 천국 소망이 되었다든지 하는 말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얘기뿐 주 예수님에 대한 얘기는 거의 없었습니다.


   버트는 의심을 애써 무시하고 약혼과 결혼을 위한 준비를 해 나갔습니다. 사랑이 문으로 들어오자 이성(理性)이 창문으로 나가버렸습니다. 그는 자신이 하나님의 뜻 안에서 행동하고 있다는 확신은 없었으나, 만일 클라우디아가 참 신자라면 주님께서 결국 구원해주실 것이라는 확신은 있었습니다.


   어느 날 아침 그는 경건의 시간에 이사야 30장 1,2절을 읽었습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화 있을진저 패역한 자식들이여, 그들이 계교를 베푸나 나로 말미암지 아니하며 맹약을 맺으나 나의 신으로 하지 아니하였음이로다. ...애굽으로 내려갔으되 나의 입에 묻지 아니하였으니 죄에 죄를 더하도다."

   주님께서 버트에게 직접 말씀하고 계셨습니다. 그는 주님께 여쭙지 않고 계획을 세우고 있었습니다. 그는 믿지 않는 자와 결혼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면 결혼을 막아달라고 하나님께 구했습니다. 버트는 결혼하고픈 소망이 남달리 강했습니다. 그는 혼자 될까봐 두려웠습니다.


   3개월 후 어떤 형제가 버트에게 고린도후서 6장 14절을 보여주었습니다.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 버트는 결단을 못 내리고 우물쭈물거렸습니다. 그 말씀은 그가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행동을 멈추도록 계속 경고했습니다. 적신호가 깜박거렸습니다.

   클라우디아가 버트를 위해 생일파티를 준비했습니다. 원하는 사람들을 위해 술도 준비한 아주 떠들썩한 파티였습니다. 그녀의 친구들도 왔고 교회 사람들도 왔습니다. 분위기가 이상했고 모두들 어색해했습니다.


   파티가 끝나자마자 또 다른 형제가 버트와 차를 마시면서 고린도후서 6장 14~18절을 간략히 설명해주었습니다. 버트는 이번에는 주님께서 확성기로 그의 주의를 깨우고 계신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마침내 버트는 계속해서 그런 식으로 갈 수 없다고 결단을 내렸습니다. 클라우디아의 삶에는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삶에 이루시는 변화의 증거가 거의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녀의 생활 모습은 그리스도인의 간증을 전혀 나타내지 않았습니다.


   그런 얘기를 편지로 쓴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관계는 이제 끝나야 했습니다. 버트는 가능한 부드럽고 다정하게 쓰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는 왜 자신이 그런 갈등을 불러오는 행동을 그만두어야 하는지 이유를 설명했습니다. 그는 그녀의 마음에 상처를 주게 된데 대해 미안함을 표하고, 복음을 받아들이라는 호소의 글로 편지를 끝맺었습니다.


   불행히도 클라우디아는 그 일을 회개의 기회로 삼지 못하고 완전히 불신앙의 길로 나갔습니다. 버트는 그녀가 얼마 후에 다른 남자와 결혼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녀도 그녀의 배우자도 주님을 시인하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버트는 하나님의 법을 사랑하는 자들이 누리는 큰 평화를 경험하고 믿음이 급속히 성장했습니다. 그는 모든 감정적인 혼돈을 극복하고 주님을 삶의 첫째자리에 놓고 그분 안에서 만족을 발견하는 법을 배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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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ood News       세가지 중요한 사실

 

 

   인문학자이자, 인문주의자인 마르가니타 라스키(Marganita Laski)는 영국의 공영 방송인 B.B.C.에서 특별 연설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 그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습니다. "우리 모두는 유죄성의 죄책을 가지고 있는 죄인입니다. 우리는 외롭고도 고독한 존재이며, 우리 모두는 결국 다 죽습니다. 우리는 이 엄숙한 세 가지 사실을 지금 당장 직면해야 합니다."

 

   지금 당장 당면하고 있는 이 세 가지 중요한 사실을 우리 모두 함께 직시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첫째, 우리 모두는 유죄성의 죄책을 가지고 있는 죄인입니다.

 

   "이 세상에 완전무결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라고 우리는 말합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위대한 인물도 죄를 범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나는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아"라고 말하면서 죄에 대한 생각 자체를 없애버리거나 아예 잊어버리고 인식조차 하지 않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종교적 열심을 내거나 선을 열심히 행함으로서 유죄성 있는 죄책을 외투로 덮어버리듯이 덮어버리려고 합니다. 그들은 이런 일들이 자신들로 하여금 하나님과 좋은 관계 속에 있게 해 줄 것이라는 희망을 갖고 덮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후자의 경우에도 그들이 하나님을 생각해서라거나 하나님을 염두에 두고 있어서가 아니라, 단지 세상을 살아가는데 자신의 것과 다른 의견과 태도도 공존공영을 위하여 서로 받아들이고 사는 게 좋다는 생각과 태도로 그와 같이 행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죄에 대하여 그리고 유죄성이 있는 우리의 죄책에 대하여 어떠한 태도를 가지고 있든지간에,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이 세상에 우리가 살고 있는 한 우리는 하나님의 법에 순종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한 우리는 죄책을 가지고 있는 죄인인 것입니다.

 

   죄책에 대한 해결책은 사면 곧 용서입니다. 이것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많은 사람을 위한 몸값(속량)으로 자신의 생명을 주시기 위하여 이 세상으로 내려오셨습니다(마 20:28). 이 말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을 때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죄를 담당하셨다는 말입니다(벧전 2:24). 그리고 성경은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 53:6)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죄가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께서 죄 있는 모든 인류를 위하여 죽으셨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무죄하신 분께서 유죄성이 있는 죄책을 가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2. 둘째, 우리 모두는 고독한 존재입니다.

 

   사람이란, 죽음이 우리의 친지나 친척을 갈라놓는 이별로 인해서 고독할 수도 있고, 군중 속에서도 고독할 수 있습니다. 억굴에 환한 미소를 짓고 있는 사람 중 많은 사람이 미소로 자신의 아픈 마음을 감추고 있습니다. 그러나 구약에 나오는 인물 중 시편기자는 하나님께서 늘 함께 하심을 경험한 사람으로서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라고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시23"4).

    제프리 불(Geoffrey Taylor Bull)은 중국 선교사로 1950년대에 티베트가 공산국가였던 중국에 점령당하고 독립을 상실했을 당시 티베트 국의 멸망을 목격한 증인의 입장에 있었습니다. 이 당시 스파이라는 누명을 쓰고 독방에 홀로 감금되어 극한의 고독 속에서 있었던 제프리 불(Geoffrey Taylor Bull)의 경험처럼, 21세기인 오늘 날 우리에게 있어서도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임재는 얼마나 생생한 현실 속에 실존하는 사실입니까? 그는 독방 속에서 공산국가에서 있을 수 있는 엄청난 세뇌 교육을 받았지만, 그와 함께 하고 계시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이와 같은 무시무시한 세뇌교육으로부터 자신의 정신세계가 완전히 파괴되는 것을 막아낼 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독방에서 3년 동안 고독과 싸워 이기고 난 후에야 홀콩에 있는 영국 정부 당국으로 인도되었습니다.

 

   이보다는 훨씬 덜 두려운 환경 속에 있지만, 우리 역시도 그리스도께서는 그분을 개인의 구주로 영접한 모든 거듭난 그리스도인과 함께하시며 영원한 친구가 되신다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함께하시는 한 그리스도인은 결코 외롭거나 고독하지 않습니다.

 

   3. 셋째, 우리 모두는 결국 다 죽는다는 사실입니다.

 

   인생이 걸어가는 수많은 길에서 죽음으로 가는 이 길이 우리가 직면하게 될 문제들 중 가장 큰 문제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흔히 문제를 직면하기보다는 무서워하고 뒷걸음질하다 멀리 도망을 치고 맙니다. 혹자는 무덤에 관해 다음과 같은 글을 썼습니다. "나는 죽음을 기다려왔다 그러나 아직 죽음을 기대하고 있지는 않다."

 

   다음 이야기는 영국출신의 저널리스트이자 토크쇼 진행자였던 데이빗 프로스트가 담당했던 TV 쇼 프로그램에서 소개된 적이 있었습니다. 그 곳 강당에 참석하고 있던 많은 청중 가운데서 1/3은 죽음을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1/5은 죽음 이후에도 우리의 생명이 계속된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죽음 이후를 생각해본 사람은 고작 10명밖에  되지 않았고, 죽음 이후의 생을 고대하고 기다리는 사람은 단 한 명에 불과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고전 15:56)라고 하는 성경의 말씀 속에 물음에 대한 답이 나와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양심은 우리 모두를 죽음에 대한 겁쟁이로 만든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우리 모두가 죽음에 대한 분명한 해답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대체로 우리 인생 앞에 놓여 있는 모든 중요한 문제에 관하여는 정면으로 부딪치지 않아야 문제가 더 쉽게 느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한 해결책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죄를 용서하실 수 있고, 또 우리에게 존재하는 유죄성의 죄책을 말끔히 없애버릴 수 있으십니다. 그리하여 위에 있는 그분의 아버지의 보좌 앞에 흠이 없는 존재로 우리를 세우실 수가 있습니다. 단순히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고 그분을 개인의 구주로 영접하는 사람 누구에게나 예수님께서 이일을 행하여주십니다.

 

   이제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위의 세 가지 문제를 직시 해본 후, 우리 모두는 하나님 앞에서 유죄성이 있는 우리의 죄책을 인정합니다.

 

   우리는 십자가 위에서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로부터 우리를 깨끗하게 하여 주시기를 간구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우리의 삶 가운데서 주님과 주인으로 구주와 친구로 모십니다.

 

   모든 시대에 걸쳐 가장 탁월한 지성인 가운데 한 사람인 사도 바울도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이러한 사도 바울의 경험과 고백이 우리 모두의 고백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MMAUS

Posted by 행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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