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혼, 아들의 죽음과 자폐증, 암 그리고 실명... 다시 태어나다
이민아 변호사가 '땅끝의 아이들'이란 책을 냈다.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넘겼을 때, 그동안 이민아를 대신해주던 많은 수식어를 이제는 내려놓아야 할 때라는 것을 깨달았다.
한 사람의 삶에서 일어났다고 볼 수 없을 만큼, 험난했던 인생의 끝에서 그녀가 다시 태어났기 때문이다.
그녀의 얼굴에는 험난한 인생의 비바람이 할퀴고 지나간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사회적으로 성공한 아버지에게 사랑받고 싶었던 유년 시절의 아픔과 죽도록 사랑했던 사람과의 이혼, 싱글맘의 고통, 세 차례에 걸친 암 수술, 멀쩡했던 26세 아들의 죽음 그리고 둘째 아이의 자폐 진단...
그녀의 고백은 어린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아버지를 실망하게 하기 싫어서 하기 싫은 공부를 억지로 해야 했던 외로운 소녀, 이민아.
늘 아버지 체면과 명성의 그늘에 살아야 했던 그녀는 자신의 어린 시절에 대해 '텅 비어 껍데기만 있는 달팽이와 같았다.'라고 말한다.
바쁘고 피곤한 아버지는 품속에 안기려는 딸을 밀쳐냈고, 늘 아버지의 사랑에 목말랐던 그녀는 아버지가 자신을 미워한다고 철없는 생각을 했다.
중학생 때 밤에 잠이 안 올 때면 아버지 서재에 몰래 들어가 위스키를 훔쳐 먹기도 했다.
“아버지는 내가 아는 사람 중 자기 일을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다. 어릴 때부터 나는 아버지가 참 좋았다. 존경스러운 게 아니라 그냥 좋았다. 일에 대한 무한한 열정이 있었고, 돈을 많이 벌려고 일을 하신 적이 없다. 창조, 새로운 지식을 알고 배우는 것, 가르치는 것을 즐거워하셨다. 아버지와 나 둘 다 완벽주의자다. 아버지처럼 문학을 했고, 글쓰기를 좋아했다. 책도 엄청나게 읽는다. 토씨 하나 잘못된 문장을 견뎌내지 못했다. 그리고 엄마의 집은 언제나 질서가 있고 안전했다. 뭐든지 잘하셨고 빈틈이 없었다. 속옷은 한국 면이 최고라며 지금까지도 직접 딸의 속옷을 사서 부치는 분이다.”
남들이 볼 때 부러울 것 없는 삶이었다.
이어령 교수, 강인숙 건국대 교수의 1녀2남 중 맏이로 태어난 이민아는 이화여대 영문과를 3년 만에 조기졸업한 수재였다.
그런 그녀가 1981년 졸업하자마자 무명의 청년작가 김한길과 미국으로 떠났다.
걱정하는 부모의 눈길도 뿌리친 채 정말 자신을 사랑해줄 남자와 새로운 삶을 꿈꿨다.
"나의 부모님은 한국 부모로서 거의 완벽한 분들이었다. 문제는 사랑에 대한 어른과 아이의 관점이 다르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나는 작가, 교수, 논설위원 등 3개 이상의 직함을 가지고 살며 늘 바쁜 아버지가 집에 들어오시면 그 팔에 매달려 사랑받고 싶은 딸이었는데, 배고프고 피곤한 아버지는 ‘밥 좀 먹자’ 하면서 나를 밀쳐냈다. 아버지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이화여자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조기 졸업하고 죽을 만큼 사랑한 남자, 작가 김한길과 아버지가 반대하는 결혼을 한 후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저는 참, 말을 잘 듣던 아이였어요. 마음이 약해서 반항을 못했어요. 그런데 언젠가는 아이가 부모의 곁을 떠나야 하는 순간이 있잖아요. 그때의 진통을 견뎌내지 못했던 것 같아요. 어른이 되기가 어려울 만큼 마음이 약해서 자신의 영역을 설정하지 못했던 개인적인 문제였던 거죠. 제가 처음으로 제 의지대로 했던 것이 바로 남편을 선택하는 일이었죠."
가진 것 없는 학생 부부의 생활은 빠듯했다.
당시에는 유학생의 공식적인 취업이 금지되던 때라 남들이 다 꺼리는 일밖에 할 수 없었던 그들의 삶은 고되기만 했다.
그 와중에 첫째 아들 유진이가 태어났고, 이민아는 아이를 키우며 헤이팅스 로스쿨에서 공부를 했다.
"먹을 것이 없을 정도로 힘들었을 때도 제가 한 선택이 잘한 것이라는 걸 아버지께 보여 드리고 싶었어요. 그래서 힘들다는 사실조차 이야기할 수가 없었어요. 부부가 있어요. 남편은 주말에 차고를 깨끗이 청소하며 부인의 가사를 돕는 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부인은 주말만이라도 남편과 손잡고 바닷가를 거니는 게 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사소한 어긋남이 쌓여 파경으로 치닫기도 하는 게 인간의 삶입니다. 그걸 몰라서 남편과 힘들었어요. ‘여보 내가 맛있는 거 해놨어.’ 하면 ‘나 지금 밥 먹을 기운 없어.’ 하고, ‘나랑 얘기 좀 해, 나 안 좋아?’ 하면 ‘왜 이렇게 귀찮게 해!’ 하면서 음성이 높아졌어요. 그러면 어릴 때 아버지가 ‘원고 마감시간이야, 얘 좀 데려가!’ 하고 소리질렀을 때처럼 가슴이 찢어졌습니다."
김한길과의 첫 결혼에 실패했다.
책에는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목숨을 걸고 한 사랑이었다’고 썼다.
4년간 지속된 결혼생활이 많이 힘들었나 보다.
"아버지에게서 얻지 못한 사랑을 첫사랑에서 찾았다고 착각했다. 이것만 있으면 딴 건 아무것도 없어도 된다고 믿고 미국으로 왔는데 그 남자의 세계 또한 나와는 단절돼 있더라. 스물두 살, 너무 어리고 철이 없을 때이기도 했다. 말도 안 통하는 미국에서 아이 낳고 공부도 하고 돈도 벌어야 하니 죽을 맛이었다. 흑인들도 마다하는 일자리, 밤을 새우는 주유소 일을 최소 일당을 받으며 했고 낮에는 햄버거 가게에서 일했다. 반대하는 결혼을 했으니 남편은 자존심에 더욱 이를 악물었을 테고 그러면서 서로에게 지쳐갔다."
4년간의 결혼 생활을 끝으로 이혼할 때까지 아버지에게 투정 한 번 안 하던 이민아는 이혼하자마자 아버지 앞에서 무너져내렸다.
결국 아버지를 망신시킨 딸이 된 것 같아 무척이나 괴로웠다.
그런데 이혼하고 돌아온 딸에게 화를 낼 줄 알았던 아버지는 '애가 말랐다. 밥 좀 먹여.'라는 말로 마음을 대신했다.
그때 이민아 변호사는 자신이 지금껏 아버지에 대해 오해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수년간 쌓여왔던 오해와 거리감은 순식간에 사라지는 것이 아니었다.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라는 것은 계속 만들어가는 것 같아요. 아버지가 나를 사랑할 거라는 기본적인 신뢰와 내 딸이 나를 존경한다는 기본적인 토대가 가장 중요해요. 실패 속에서 약해졌던 그때 처음으로 아버지가 저를 사랑한다는 것을 알았어요."
원망은 없었을까?
“전혀. 내가 가장 사랑했던 아들 유진이를 함께 낳았고, 아들에겐 정말 좋은 아버지였다. 유진이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아버지로서 최선의 역할을 다한 사람이다. 나는 결혼이 언약이라는 것을 몰랐다. 많은 젊은이들이 연애지상주의에 젖어 있는데, 나 또한 그랬다. 사랑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지만, 사랑이 식었는데 억지로 맞춰서 사는 것은 위선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문화적인 거짓말에 속았고 자기애도 강했다.”
이혼 후 이민아 변호사는 공부를 계속했다.
아이를 헤이팅스 로스쿨에 부속된 탁아소 겸 학교에 맡겨놓고 공부를 했다.
"저에게는 고아 멘털리티가 있었어요. 싱글맘으로 3년 동안 일하고 공부하고 아이를 돌보는 걸 혼자서 해내야 했거든요. 내가 돈을 안 벌면 우리 둘은 굶어 죽겠지, 내가 잘못하면 우리는 끝나 하면서 저는 유진이만 쳐다보고 유진이도 저만 바라봤죠. 저의 아픔과 짐을 수없이 아이에게 보여주었기에 아이가 힘들어했던 것 같아요."
이민아 변호사는 본인이 모두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에 너무 많은 신경을 쓰다 보니 편두통, 위궤양, 요통, 불면증 등 아프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였다.
그러던 중 유진이가 16세가 됐을 무렵 아이도, 이민아 자신도 더는 버틸 힘이 없었다.
아이가 다시 제자리에 돌아오기까지 1년간 요란한 사춘기를 보냈다.
그 외에는 늘 긍정적이고 밝았던 아이.
버클리 대학을 졸업한 IQ 159의 똑똑하고 멋있는 청년이었던 유진이는 26세 되던 해 여름, 갑자기 쓰러져 코마 상태에 빠진 뒤 19일 만에 병명도 모른 채 세상을 떠났다.
"저에게는 가장 뜨거운 불이었어요. 장례식 이후 꼬박 3년을 울었어요. 1년은 거의 매일 울었고요. 3개월 동안은 아예 침대 밖으로 나오지도 못하고 이불 속에서 울기만 했어요. 하늘을 믿을 수 없었고, 왜 나에게 이런 시련이 닥쳤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죠."
매일 울면서 신을 원망했다.
그렇게 원망 가득한 마음으로 유진이 또래의 비행 청소년들이 우글거리는 곳으로 가게 됐다.
떠밀리듯 그 아이들을 만났다.
신기한 것은 그 아이들을 유진이를 사랑했던 마음으로 돌보게 되더라는 것이다.
이전에도 검사, 변호사로 일하면서 청소년 문제 상담활동을 열심히 해왔지만 내 아이와 다른 아이를 가르는 벽이 내 마음에 있었다.
유진이가 죽은 뒤 그 벽이 엷어진 거다.
아이들을 엄마의 사랑으로 품어주었더니 변하기 시작하더라.
술과 마약을 끊고 부모에게 돌아가더라.
서른 명의 아이들이 나를 '마마미나'로 불렀다.
유진이가 그리워 내가 울면 아이들이 나를 안고 기도해줬다.
유진이의 죽음이 한알의 밀알로 내 가슴에 떨어져 이기적이었던 나를 세상의 어머니로 거듭나게 했다.
그렇게 이민아 변호사는 침대 밖, 세상 속으로 다시 걸어 나왔다.
그녀는 유진이가 떠나던 해인 2009년 목사 안수를 받고 미국, 아프리카, 남미, 중국 등지를 돌며 마약과 술에 빠진 청소년 구제 활동에 전념하고 있다.
지난 2월, 이민아 변호사는 국내에서 백내장 수술을 받았다.
지금은 안경이나 렌즈 없이 밝은 세상을 보고 있지만 사실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세상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살아왔다.
안경으로는 교정되지 않을 만큼 고도근시였던 그녀는 렌즈를 껴도 운전을 겨우 할 만큼 시력이 좋지 않았다.
평생을 렌즈와 함께 살아왔기 때문에 늘 망막 손상의 위험이 있었고, 이미 렌즈에 닳고 닳아 의사로부터 조심하라는 경고도 여러 번 들었다.
자칫 망막이 찢어지면 영구적으로 복구할 수가 없고 점차 앞을 보지 못해 실명한다는 것이었다.
재혼한 후 낳은 둘째 아들이 자폐 진단을 받은 것은 이때 즈음이었다.
열두 살이 되도록 아이는 엄마의 지시를 이해하거나 따를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아이의 치료를 위해 하와이로 건너가 특수 초등학교에 입학시켰다.
이미 초등학교를 다섯 번이나 옮겼고 중학교도 1년을 다니다가 쫓겨난, 사면초가의 상태였다.
재정 상태가 좋지 않던 하와이 크리스찬 스쿨은 개인적인 관리가 필요한 둘째 아들을 받아주는 대신 그녀가 상근 보조교사로 일할 것을 조건으로 내걸었다
"제가 단순한 작업을 잘 못해요. 학교에서 제가 하는 일이 주로 채점이었는데, 자꾸 틀리니까 선생이 보기엔 일부러 그런다고 생각했나 봐요. 변호사라는 여자가 단순한 채점도 제대로 못 할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던 거죠. 저는 일부러 그런 게 아닌데, 제가 괘씸하게 보였는지 점점 일거리가 많아졌어요. 그때 좋지 않은 눈으로 엄청난 양의 채점을 해야 했기에 눈에 큰 무리가 왔어요."
하지만 엄마의 정성이 통했는지 1년이 흐르자 둘째의 자폐 증세가 기적처럼 사라지기 시작했다.
자폐증은 불치병에 가까워 회복되는 경우가 거의 없는데, 둘째 아이는 이제 운전도 하고 일반적인 생활도 가능할 정도다.
하지만 이민아에게는 결국 우려했던 일이 터졌다.
망막박리 현상이 일어나 거의 앞을 보지 못할 지경이 된 것이다.
수술은 불가능한 상황이었고, 이민아는 물론 이어령 교수 부부도 절망에 빠졌다.
이어령 교수는 딸이 볼 수만 있으면 신을 믿겠다는 말까지 했다고 한다.
이민아 변호사는 망막박리 7개월 만에 찢어진 망막이 다시 붙는 기적을 경험했으나 다시 앞이 보이지 않아 병원에 찾아갔을 때 백내장 진단을 받고 현재는 수술한 후 양쪽 눈 시력을 모두 회복했다.
"셋째와 넷째는 첫째와 둘째 탓에 흘리고 뿌린 눈물이 선물로 준 아이들이에요. 둘째가 19살, 셋째가 17살, 넷째가 15살이에요. 첫째가 유난스러운 사춘기를 보낸 터라 아이 셋이 모두 10대가 되는 때를 무척 두려워했는데, 이 아이들은 그런 것도 없어요. 참 착한 아이들이에요."
아이 넷 수월하게 키워보려고 미합중국에서 공무원인 검사를 10년 했는데, 남을 정죄하는 직업이 점점 힘들어졌다.
그 무렵 한인교회 목사님으로부터 급히 연락이 왔다.
갱단 범죄에 연루된 교포 아이가 종신형을 선고받을 것 같은데 이 검사에게 그 소년 변호 좀 해달라고 했다.
그녀는 검사라서 맡을 수 없다고 했더니 사직을 해서라도 맡아달라고 했다.
아이를 한 번만 보고 오자고 했다가 코가 꿰여서 변호사가 된 셈이다.
아이들이 술과 마약에 취하는 것은 사랑의 문제다.
그녀도 처음엔 아이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부모가 대부분 건실한 사람이었고 자식에게 헌신하는 사람들이었다.
나를 변호사로 이직하게 한 K라는 아이만 해도 부모에게서 상처받을 이유가 전혀 없어 보였는데 엄마 아빠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며 뛰쳐나갔다.
그건 ‘사랑의 언어’가 다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사람은 선물을 받아야 사랑받는다고 생각하고, 어떤 사람은 ‘사랑한다’고 말해줘야 사랑받는다고 느낀다.
사랑은 이렇듯 구체적인 것이다.
‘있는 그대로의 너를 사랑한다’고 느끼게 해주면 폭력과 어둠의 세계에 빠져 있던 아이들도 울면서 부모의 품에 안긴다.
사실 이민아 변호사는 세 번의 암 수술로 생사의 기로를 넘나들었다.
갑상선암의 사망률은 극히 낮지만 재발로 심신이 쇠약해진 것이 사실이다.
사랑의 묘약에 취해 아빠 품을 떠났던 꽃 같은 나이 22세 때부터, 실명 위기에 처했던 때까지, 30년 동안 웃는 날보다 우는 날이 더 많았던 이민아 변호사.
하지만 그녀의 웃음은 티 한 점 없이 맑고 순수했다.
"저는 지금껏 살아오면서 자유와 평화로움을 누려본 적이 없었어요. 하지만 이제 저는 죽음이 두렵지 않아요. 죽음에 자유로워지면서 사는 게 더 즐거워지고 무서운 것이 없어졌죠. 저는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과 이야기 나누는 것만으로도 삶에 활력을 얻을 수 있어요."
아프리카 케냐에도 간 그녀는 나이로비에서 비행기로 두 시간을 더 가야 하는 웨브예라는 마을, 그야말로 땅끝인 곳은 샘물이 없고, 오물이 흘러들어온 강물로 밥을 해서 먹는다.
아프지 않은 아이들이 없다.
아이들 배가 다 맹꽁이 배처럼 튀어나왔고, 목욕을 태어나 한 번도 안 했는지 썩는 냄새가 진동한다.
아이들이 끌어안는데 역한 냄새가 진동해서 참기가 힘들었다고 했다.
거기서 사랑의 위선을 보았다고 했다.
"내 생애 가장 기뻤던 순간이 죽을 것 같은 진통 끝에 첫 아이를 낳아 눈을 마주친 순간이었다. 고통 없이 얻을 수 있는 행복은 없다. 불 사이를 지나지 않으면 보석은 나오지 않고, 겨울이 지나야 봄이 온다. 오늘 죽는다면 오늘이 세상을 떠날 완벽한 순간이기 때문이다."
이민아 목사는 인터뷰 다음날 막내딸이 한국에 들어온다며 즐거워했다.
건강상의 문제로 한국에 머물고 있는 엄마의 여정이 길어지자 막내딸이 한걸음에 달려오는 것이다.
아직 확실하진 않지만 막내딸은 잠시라도 한국에서 학교에 다닐 계획이라며 환하게 웃어 보였다.
글 : 진혜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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