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기 칼럼] 누구의 말을 듣느냐가 인생을 결정한다
이정기 목사(신나는교회) l 등록일:2016-03-15 18:45:16 l 수정일:2016-03-15 19:51:40
           
 ▲이정기 목사

전래 동화 중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아버지와 아들이 나귀를 팔기 위해 시장에 가고 있었다. 그러다 나물캐던 처녀들 곁을 지나가게 되었다. "어! 저것 좀 봐."하고 처녀들 중 하나가 말했다. “나귀는 편히 걷게하고 힘들게 걸어가고 있네.” 듣고 보니 그 말이 맞았다. 타라고 있는 나귀인데 말이다. 그래서 아버지는 아들을 태우고 나귀의 고삐를 붙잡고 시장을 향해 갔다. 그런데 그 모습을 보고 노인들이 혀를 차며 쑥덕거린다. “세상에 나이든 아버지가 나귀를 끌고 가고, 어린 아들이 나귀를 타고 가고 있네. 저런 불효막심한 놈.”

듣고 보니 맞는 말이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아들이 나귀 고삐를 붙잡고 아버지가 나귀를 타고 가는데, 지나가던 아낙네들이 고개를 흔들며 말한다. “세상에 어린 아들에게 나귀 고삐를 붙잡게 하고 아버지는 편하게 나귀를 타고 가네. 진짜 아버지 맞아?” 그래서 이번에는 아버지도 아들도 함께 나귀를 탔다. 아버지와 아들은 속으로 생각했다. “이제는 더 이상 아무도 뭐라고 말하지 않겠지?” 그런데 이번에는 사람들이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말을 한다. “저 나귀 좀 봐. 얼마나 힘들까? 아무리 말 못하는 짐승이라도 그렇지 해도 너무하네. 인정머리 없는 사람들.”

아들도 아버지도 얼굴이 빨개져 나귀에서 얼른 내려왔다. 이래도 뭐라고 하고 저래도 뭐라고 하고 참 답답했다. 그런 상황을 들은 한 나그네가 “그러면 두사람이 나귀를 어께에 매고 가면 어떻겠소” 그 말을 듣고 아버지와 아들은 나귀를 짊어지고 가기로 결정한다. 긴 막대기에 나귀의 앞다리와 뒷다리를 묶고 아버지는 앞에서 아들은 뒤에서 나귀를 메고 개울을 건너는데, 개울에서 놀고있던 아이들이 그 모습을 보고 배꼽을 잡고 웃는다. 그 바람에 놀란 나귀가 버둥거리자 그만 나귀를 강물에 빠뜨리고 결국 두 다리가 묶인 나귀는 물에 빠져 죽고, 아버지와 아들은 귀한 재산을 잃고 만다.
 
어리석은 아버지와 아들이라고 웃으며 그냥 넘길 수 없는 이야기이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의 말을 듣고 자신의 소중한 인생과 행복을 강물에 빠뜨리고 있기 때문이다. 믿음의 사람도 예외는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귀기우리지 않고, 이 사람 말 듣고, 저 사람 말 듣고 시험에 들고, 신앙을 강물에 빠뜨리는 안타까운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누구의 말을 들었는가? 여호수아와 갈렙의 믿음의 말보다, 열 명의 불신의 말을 들었다. 그 결과는 불행이었다. 그러므로 아무소리나 다 들어서는 안된다. 믿음의 말을 들으면 믿음의 사람이 되지만, 불신의 말을 들으면 불신의 사람이 되기 때문이다.
 
어느 시골에 사생아로 태어난 한 소년이 있었다. 사람들은 그 소년의 아버지가 누구일까 하며 수군거렸다. 가까이 지내는 친구도 없었다. 소년은 학교에서도 따돌림을 당해 너무 외롭고 부끄러워 견딜 수 없었다. 그러던 그 소년이 교회에 나가게 되었는데, 교회에서도 사람들이 자기를 사생아라고 할까봐 숨어 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 소년의 어깨를 잡으며 "넌 누구의 아들이지?" 하는 소리가 있었다. 목사님의 소리였다. 목사님의 질문이기에 이제는 꼼짝없이 탄로나게 되었구나 긴장하고 있었다. 그런데 목사님은 “아 그렇지, 하나님 아들이지, 하나님 아버지 많이 닮았네”라고 어께를 두드려 주었다.

이 말에 소년은 변화되었고, 그 인생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는 미국 테네시 주에서 주지사를 두 번이나 했고, 사회와 교회에 큰 업적을 남긴 사람이 되었다. 그 소년의 이름은 벤 후퍼다. 그는 사생아라는 소리를 물리치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소리를 붙잡았다. 그리고 인생이 바뀌었다. 누구의 말을 듣느냐가 인생을 결정한다. 여러분은 누구의 말을 듣고 있는가?
 
필자도 목회 초기에는 하나님의 음성보다 사람의 소리를 듣고 괴로워한 적이 있다. 저녁에 걸려온 전화 한 통 때문에 잠을 자지 못하고 끙끙거리기도 했다. 이불 뒤집어 쓰고 펑펑 울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은 사람의 소리에 상처받지 않는다. 아니 상처를 거부한다. 그리고 사람의 소리보다 성령의 음성을 들으려고 힘쓴다.

때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이 목사야, 그 사람이 받은 상처가 얼마나 컸으면 그렇게 말하고 행동했겠니?”, “아무 염려하지 마. 하나님의 교회는 하나님이 지키신다.” 이렇게 말씀하실 때도 있다. “기도가 살아있으면 교회는 승리한다. 기도에 더욱 힘쓰라.” 이렇게 성령의 음성을 들으면 마음이 평안해진다. 억울한 마음도 사라진다. 확신이 생긴다.
 
사단은 우리의 생각과 마음에 부정적인 말을 심는다. ‘이제는 어렵다. 이제는 불가능하다. 이제는 끝났다. 포기해라.’ 그러나 하나님은 소망의 말씀을 주신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 내가 너와 함께 한다. 두려워 말아라. 놀라지 말아라. 절대 포기하지 말아라. 나는 결코 너를 떠나지 않을 것이고, 버리지 않을 것이다. 반드시 내가 너를 축복하리라.’ 사탄의 말을 들으면 절망하고 포기하게 되지만,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면 처한 환경이 아무리 힘들고 어렵더라도 다시 일어서게 된다.
 
사도행전 4장 13-22절을 보면 베드로와 요한이 예수님의 이름을 전하는 것 때문에 붙잡혀 공회앞에 서게 된다. 당시 공회는 로마 통치 하에서 입법권과 사법권을 가지고 있던 최고의 권력기관이었다. 그 공회원들이 베드로와 요한을 위협하며 다시는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고 한다. 그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 생명까지도 빼앗길 수 있었다. 그런데 공회원들 앞에서 베드로와 요한이 이렇게 대답한다.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의 대답은 죽음을 각오한 대답이었다.
 
필자는 신앙의 생명력이 이 베드로와 요한의 고백에 있다고 믿는다. 그들은 담대했다. 그들은 용기가 있었다. 그 담대함과 용기가 어디에서 나온 것인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기 때문이다. 산상수훈의 말씀도 들었고, 천국 복음도 들었고, 수많은 비유를 통해 하신 말씀을 들었다. 무엇보다 예수님이 승천하시면서 분부하신 말씀도 들었다. 그래서 생명 걸고 담대하게 복음을 전한 것이다. '죽으면 죽으리라'였다. 누구의 말을 듣느냐가 인생을 결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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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행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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