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
하나님과 함께 사는 자의 복이여!
허윤욱
"야곱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베개하였던 돌을 가져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 그곳 이름을 벧엘이라 하였더라. 이 성의 본 이름은 루스더라' (창 28: 18-19)
단정코 말하고자 하는데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인간으로서 최고의 삶을 사는 줄을 알아야 한다. 이번호의 말씀을 끝까지 읽으신다면 그 이유를 알게 될 것이다.
사람이 세상에 살면서 누구와 함께 사느냐 하는 문제는 너무도 중요한 문제다. 누구와 사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일생이 전혀 변화될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에디슨이 대단한 인내와 지혜의 어머니를 만나지 않았어도 발명왕이 될 수 있었을까. 헬렌 켈러가 설리번을 만나지 못했어도 성공할 수 있었을까. 평범하게 살다가 평범하게 사라져갈 사람이 놀라운 삶을 살다가 간 이야기는 수없이 많은 것이다. 열거하지 않아도 독자들도 잘 알고 있지 아니한가. 함께 사는 사람은 함께 사는 사람에게 영향을 미칠 수 밖에 없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므로 누구와 함께 사는 것이 중요한 것이며, 그러기에 친구를 잘 사귀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과 한집에 살면서 그분의 영향을 받은 사람은 어찌 되겠는가. 며칠 전에 어떤 구도자가 구원받고 제일성으로 대박 터졌다고 외치는 것을 보았다. 멸망의 지옥에서 구원받아 천국에 가게 되니 대박이요. 천지를 창조하신 창조주의 자식이 되어 한집에 살게 되었으니 대박인 것이다.
서두의 야곱이 꿈에 하나님을 만나고 나서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하고 놀라서 외쳤다. 그리고 그는 "두렵도다 이곳이여, 다른 것이 아니라. 이는 하나님의 전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고 외치기에 이른 것이다. 또한 그는 서두에 기록한 말씀처럼 기름을 부어 예배를 드리고 그곳 이름을 벧엘이라 불렀다. 이번호에는 야곱의 일을 생각하면서 하나님을 섬기는 참 도가 무엇인가 깨닫게 되기를 바라는 바이다
앞의 글들에서도 살펴 본 것처럼 야곱은 슬픔과 낙심과 두려움 가운데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하란을 향하여 가고 있다. 자신은 하나님에게 버림받았거나 저주 받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힘없이 가다가 하나님을 만나고 얼마나 놀랐겠는가. 얼마나 기뻤겠는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그 때 야곱은 놀랍고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첫째는 자신은 죄 가운데 있었으며 하나님과 부모와 형에게 죄를 지었다. 또한 그로 인하여 집에서쫓겨나는 신세가 되었다. 자신은 버림받았다고 생각할 만큼 심각하게 낙심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하나님은 달랐다. 하나님은 그를 버리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그를 찾아오셨고 그를 기다리고 계셨다.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은 죄가 많아서 하나님께 돌아갈 수가 없다고 말한다. 자신의 죄는 죄질이 나빠서 하나님도 용서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막연하게 생각하기를, 나같이 죄 많고 험악하게 살아 거칠고 다듬어지지 못한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을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 하나님 앞에 나오기를 꺼려하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교회를 다니는 사람은 타고나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천성이 착하며 행동이 겸손, 온순하여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리고 말도 교양미 넘치게 할 뿐만 아니라 성실하고 착한 생활인이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나같이 함부로 살아온 사람은 기독교와 맞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다.
심지어 필자가 만난 사람 중에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하였다. "아! 선생께서 나의 과거를 아신다면 나 같은 놈에게는 전도 안하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얼마나 나쁜 삶을 살아온 줄 아십니까? 나의 어머니가 몇 년 전에 돌아가셨는데 나 때문에 돌아가셨다고 생각합니다. 나의 어머니는 화병으로 돌아가셨어요. 내가 얼마나 속을 썩였는지 화병으로 돌아가셨습니다. 나는 나쁜 놈입니다. 나는 안 됩니다. 다른 사람에게 전도하세요."
이와 같은 넋두리를 늘어놓는 사람을 필자는 수없이 만난다. 그러나 이와 같은 생각은 얼마나 잘못되었는지 아는가. 만약 어떤 사람에게 목욕탕에 가자고 하니 "나는 때가 많아서 갈 수 없다. 때 좀 밀고 깨끗하게 하면 그때에 가겠다." 말하는 것과 같다. 혹은 병원에 가지고 말하니 '나는 병이 있어서 병원에 갈 수 없다. 병고치고 건강해지면 가겠다" 고 말하는 것이나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성경은 왜 쓰여졌는가. 예수님은 왜 세상에 오셨는가. 죄 많은 인생들이 죄로 말미암아 지옥 형벌을 받게 되는 것을 불쌍히 여기사 저들의 죄를 씻어 지옥 형벌을 면하게 하심이 아닌가.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가야 할 이유는 오히려 죄가 많아 절망적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절망적인 사람에게 가까이 하신다. 낙심하고 마음이 상하고 슬픈 자에게 가까이 하신다. 자신의 죄 때문에 자책하고 고통하는 사람에게 가까이 하신다.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시고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 (시 34:18).
사랑하는 여러분! 마음이 상하고 자책하며 "나는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없는 죄인" 이라고 절망하지 말고 하나님 앞에 나와서 그분의 긍휼을 힘입어 구원을 받으시라. 하나님은 깨끗하고 의롭게 살았다고 자부하는 교만한 사람을 내치시고 자신의 죄를 깨닫고 주님 앞에 엎드리는 자에게는 긍휼과 자비를 베푸신다. 우리가 우리끼리 비교하면 착한 사람과 타락한 사람으로 구분되지마는 하나님 보시기에는 별 차이가 없음을 알아야 한다. 마치 190cm 키와 160cm 키를 가진 사람이 큰 차이가 있어 보이지만 옥상에서 내려다보면 같아 보이는 것과 같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착한 것이 무슨 차이가 있으랴. 오히려 자기를 선하다고 생각하는 교만 때문에 망하는 것뿐이다.
두 번째는 야곱이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 있어서 자기를 사랑하고 도와주며 자신과 평생에 동행하시는 약속을 깨달았다. 참으로 그는 놀라고 놀란 것이다. 그러므로 즉시 그곳에 단을 쌓고 에배를 드리며 하나님께 서원을 하게 되었다.그리고 말했다. "여기가 하나님이 계신 집이로다" 하나님이 함께계시는 곳이 하나님의 집인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집이라는 뜻의 "벧엘" 이라는 지명으로 불렀던 것이다. 본래 이 지역의 이름은 "루스" 라고 불리웠던 것이다. 루스는 분리라는 뜻이다. 야곱은 하나님과 분리되어 살아왔다. 이때까지 개인적으로 하나님을 만난 적이 없는 야곱은 여기서 하나님을 만나고 지명까지 바꾼 것이다. 이후로 야곱이 어디를 가든지 그곳이 하나님의 집이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함께 있는 그곳이 하나님의 집인 것이다. 하나님이 평생에 야곱을 떠나지 않는다 하셨으므로 이제 야곱이 머무는 어디든지 그 장소가 하나님의 집인 것이다. 얼마나 놀라운가.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도 이와 같은 축복을 받고 싶지 않는가? 여러분이 머무는 어디든지 하나님의 집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면 여러분의 생애가 달라질 것이다. 이 집은 편안한 휴식의 공간이요 행복을 만드는 공장이라. 이곳에서 만들어진 행복은 동서남북으로 퍼져 수많은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집 중에서도 하나님이 함께 사는 집이라는 이야기다
사람들이 하나님 영접하기를 싫어하고 반대하는 이유를 필자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하나님을 영접하여 손해 볼 일이 전혀 없는데 왜 거부하였는지 모르겠다. 하나님 없이 살아온 지난날을 생각해보면 끔찍하다는 어떤 이의 고백을 들어본 적이 있다. 그대의 인생에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신 가정을 이루어 가는 모든 곳이 하나님의 집이 되는 축복을 받으시기 바란다.
또한 루스라고 하는 이름에 대하여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잇다. 이 성의 본래 이름은 루스였다. 전술한 대로 이는 '분리'라는 뜻이다. 야곱의 모든 고통과 눈물과 불안은 하나님과 분리된 데 있었다. 세상에서 생각해보자. 분리라고 하는 것은 모든 고통의 시작이며 죽음의 핵심 단어이다. 본래 죽음이라고 하는 뜻은 분리라는 뜻을 담고 잇다. 선악과를 따 먹음으로 인하여 하나님과 분리되고, 아담과 하와도 분리되고, 그 후에 에덴과도 분리되고, 후에 아담과 가인과도 분리되었다. 분리는 인생의 삶에 고통을 가져다주는 시작이요, 모든 단체에도 힘을 약화시키는 시작이 되는 것이다. 인생이 하나님과 분리됨으로 모든 고뇌가 시작이 되었다. 현재 그대가 고통과 번민 중에 살고 있다면 이는 하나님과 분리되어 있는 현실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만약 어머니와 함께 여행하던 아이가 어머니와 분리되어 나갔을 때 그 아이의 형편이 어떠하겠는가. 이와 같이 분리는 슬픔의 시작이요 고난의 시작이 되는 것이다. 인간이 하나님을 떠난 이후 오늘날까지 하나님과 분리된 채로 살면서 하나님께 돌아올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는 것은 얼마나 슬픈 일인가. 인간을 창조하신 여호와 하나님은 지금도 애타는 목소리로 그대를 부르고 계신다. 이제 그 소리를 들어보자.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나아오라. 그가 널리 용서하시리라" (사 55:6-7).
애타게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외면하지 말아야 할지라. 부모와 떨어진 아이가 부모가 있는 집으로 돌아와야 그 방황이 끝나듯이 하나님을 떠난 그대의 방황은 하나님께 돌아와야만 해결되는 사실을 기억하시라. 삶의 고통은 하나님을 떠남으로부터 시작된 것을 억지로 부인하지 말아야 한다. 야곱이 누워잤던 땅이 루스(분리)에서 벧엘(하나님의 집)로 바뀌었듯이 그대의 사는 곳이 루스에서 벧엘로 바뀌어져야 한다. 그대의 삶을, 그대의 환경을 하나님의 집으로 바꿔 하나님과 함께 살게 되기를 바란다. 야곱의 생애에 많은 고난이 있었지만 결국 야곱의 생애는 축복으로 끝남을 잊지 말기를 바란다.
이제 오늘날 하나님이 인간과 함께 하시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그로 말미암아 그대와 함게 있기를 원하셨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또 다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셨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마 1:23).
예수님의 탄생 때에 주의 사자가 일러 준 말씀 중에 한 부분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함은 하나님과 함께 살게 되는 시작이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간이 감히 하나님과 함께 거하게 된 것이다. 얼마나 놀랍고 충격적인 일인가. 그 일은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인간과 하나님과의 사이를 막고 있는 죄악이 제거됨으로 가능하여진 것이다. 에덴동산 선악과 사건 이후로 인간과 하나님 사이가 가로막혔으며, 인간은 마귀에게 종노릇하다가 멸망의 지옥에 던져질 수밖에 없었다. 이 불쌍한 처지에 놓인 인생들을 건지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사 모든 세상 죄를 제거하심으로 막힌 담을 헐어 하나님께 나아갈 길을 열어 놓으셨다.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케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것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 (골 1:21-22).
얼마나 놀라운 말씀인가. 죄악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관계가 이제는 가족으로 변화 되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 사함 받아 구원받는 것의 의미이다. 야곱이 하나님과 함께 살면서 평생에 당하는 모든 환란을 극복하고 지금 주님 나라에가서 안식하는 것처럼 그대도 하나님과 함께 살길이 열린 것이다. 오늘 십자가에 못 박히사 그대의 모든 죄를 용서하신 사실을 받아들여 구원을 받으시라. 그리함으로 구원을 받음은 물론이요 그대의 평생에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살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그분의 십자가 사역을 힙입어 죄인에서 의인으로 마귀의 자식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신분이 바뀌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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