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해봅시다] 신약의 복음전도 (4)
교회적인 복음전도
- 잭 헤이
이제까지는 성도 개인이 복음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는 방식, 그리고 부름 받은 개인이 하나님을 어떻게 전적으로 섬기는가에 초점을 맞추어 살펴보았습니다. 그들이 새로운 지역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기 위해 행한 본을 살펴보았습니다. 이제는 이미 세워진 모임이 어떻게 전도를 계속 해가는가를 살피고자 합니다. 이는 우리 모두가 속해있는 상황이기도 합니다. 계시록 1-3장에 보면, '촛대' 가 교회의 상징으로 나옵니다. 이는 분명 교회가 그 지역에서 특히 복음의 빛을 드러낼 책임이 있음을 말합니다.
이상하게도, 사도행전에는 바울과 그 일행이 세운 교회의 성장이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서신서에 보면, 교회가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계속 수고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특히 마케도니아에 있는 교회인 데살로니가가 그러합니다. 빌립보에서 우리의 책임에 대한 교훈이 나와 있고, 데살로니가서에서는 그 예가 나타나 있습니다.
빌립보서 1:27-30
바울은 감옥에서 자신이 행한 개인적인 전도에 대해 말한 후(12-26절), 이제 교회가 복음 전도에 헌신해야 할 필요를 말합니다. 만일 전도 임무를 효과적으로 수행하려면, 많은 요소들이 있어야 합니다.
순수함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우리 모두는 복음은 믿는 자의 삶을 변화시킨다고 말합니다. 즉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고후 5:17)이 되었습니다. 이를 드러내는데 실패한다면, 교회의 간증이 약화됩니다. 성도들의 부정직, 부도덕, 신뢰를 주지 못하는 행동, 그리고 동의할 수 없는 특징들은 그 지역사회에서 모임의 이미지에 반드시 타격을 줄 것입니다. 논쟁을 좋아하는 이웃과 전도에 주저하는 성도들은 전도에 불명예를 끼칠 것입니다. 어떤 전도자가 한 분에게전도하기 위해 오래 동안 관계를 맺어왔지만, 성격이 좋지 못한 그리스도인이 논쟁을 하다 거의 싸울뻔한 사건으로 결국 관계가 깨져버린 경우를 나는 알고 있습니다.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 (롬 12:18).
일치
"너희가 일심으로 서서."
분열된 모임은 "스스로 분쟁하는 집마다 서지 못하리라" (마 12:25)는주님의 말씀처럼 전도에 무기력하게 됩니다. 교회사를 보면, 새로운 전도를 위해 지리적인 근거로 행복하게 모임을 나눌 때, 축복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속적으로 갈등하는 모임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분열하게 되고, 결국 두 모임 다 무기력해지고 마침내 사라졌습니다. 효과적인 전도는 모든 성도의 협력을 필요로 합니다. 이는 중풍병자를 구세주에게 데려가기 위해 4명의 친구가 협력했던 수고를 필요로 합니다. 함께 힘을 합치는 것이 고기가 잡힌 그물을 당기는 데 필수적입니다(눅 5:5-11, 17-26). 어느 한 지역이 복음화 되려면, 모임의 모든 지체가 최대한 자신의 역할을 하고 있어야 합니다. 수고로운 일을 즐겁게 협력하고, 서로 지원해야 합니다.
부지런함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
이 구절은 "협력"의 필요성을 다시 강조하고 있지만, 부지런할 필요성을 덧붙이고 있습니다. 여기서는 "협력"으로 번역된 단어가 다른 곳에서는 "힘쓰다"(4:3) 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4장 3절은 슬프게도, 전에는 행복하고 조화롭게 바울과 협력하여 전도활동을 하던 두 자매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전도가 이제 장벽에 부딪혔습니다. 그 이유는 분열입니다. 무감각이 모임의 활동을 침체시키고 있지 않습니까? 빛이 편안의 침대에 누워 숨어 있지 않습니까? 휴식과 휴가, 방학 때문에 주일 복음집회 외에는, 규칙적인 전도를 그만 두고 있지 않습니까? "너희는 어찌하여 종일토록 놀고 여기 섰느뇨"(마 20:7). 헌신의 수준을 끌어올리려는 성도가 모임 안에 있습니까? 복음 전파를 위해 자신의 에너지와 힘을 끝까지 발휘하는 성도가 있습니까?
용기
"아무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를 인하여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이 일을 듣고자 함이라."
적극적인 모임의 전도활동은 반드시 반대에 부딪히게 됩니다. 성경 시대에 반대는 물리적인 폭력으로까지 나타났습니다. 우리 시대에는 말로 비난하거나 전도를 방해하고자 하는 시도로 나타납니다. 바울은 여기서, 반대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다시 힘을 내도록 격려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에서 바울은 전도활동 중 극도의 긴장과 위험을 고려하여 신중히 물러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전도활동의 방향을 다른 방향으로 바꾸려는 시도일 뿐입니다. 그는 반대에 결코 항복한 적이 없습니다. "빌립보에서 고난과 능욕을 당하였으나 우리 하나님을 힘입어 많은 싸움 중에 하나님의 복음을 너희에게 말하였노라" (살전 2:2) 우리 모두가 그를 본 받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그러므로 우리 주의 증거를 부끄러워말고...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딤후 1:7-8).
데살로니가전서 1:6-10
데살로니가 모임은 전도활동에서 본이 되는 모임입니다. 이는 단지 그들이 바울을 본받았기 때문입니다(6절). 흉내를 내면 본을 따라가게 됩니다.
그들은 전하는 내용에서, 즉 "주의 말씀" (8절)을 전한 점에서 본이 됩니다. 이미 앞에서 말했지만, 말씀을 전파하는 것에는 대체가 없습니다. 사람의 마음에 믿음을 주는 것은 말씀입니다(롬 10:17).
거듭나게 하는 것도 말씀입니다(벧전 1:23). 전도자는 성경을 인용하고 그 진리를 설명해야 합니다. "주의 말씀을 열므로 우둔한 자에게 비취어 깨닫게 하나이다" (시 119:130).
그들은 말씀을 전하는 방식에서도 본이 되었습니다. 주의 말씀이 "들렸습니다"(8절). 이 구절의 의미는 분명합니다. 합당하지 않은 복음말씀은 모임에 부끄러움이 됩니다. 성경 이야기나 성경 진리가 전에는 잘 알려졌었지만, 이제는 성경지식이 있는자가 별로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복음을 전할 때, 이는 거기 모인 성도들을 위한 게 아닙니다. 청중이 아무 것도 모른다고 가정하고 전해야 합니다. 특히 노방전도에서는 이를 명백하게 해야 합니다. 과거에는 노방전도가 전도자를 훈련시키는 장이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모임의 간판과 같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말씀이 명백하게 전달되어야 합니다. 모임을 오래 다녀야만 이해할 수 있는 전문용어는 피해야 합니다. 바로 앞 구절은 그들이 어떻게 전도했는지를 또 다른 시각에서 보여줍니다. 그들의 전도는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3절)였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믿음이 그들로 하여금 아무 것도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생각을 극복하게 했습니다. 사랑이 그들로 하여금 지칠 때까지 수고할 동기를 부여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이 전도활동이 힘들게 될 때에도 변함없이 계속하게 했습니다. 바울이 그들이 본이 되었다고 말한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우리 모임이 이같은 본에 접근해있습니까?
그들은 또한 전도하는 장소에서도 본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바로 근처에서 시작했습니다. "마게도냐." 그리고 이웃 지역인 "아가야"로 갔습니다. 그런 후에야 "각처" 로 확장했습니다. 분명 이는 본이 됩니다. 우리는 먼저 이웃에 대해 책임을 느껴야 합니다. 느헤미야 시대에 제사장들이 성벽을 수리할 때, 그들이 살고 있는 곳에서 일했습니다. "제사장들이 각각 자기 집과 마주 대한 부분을 중수하였고" (느 3:28). 기드온은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자기 집에서 시작했습니다(삿 6:25-32). 삼손에게 성령이 임한 곳도 그의 가정이 있는 지역이었습니다. "소라와 에스다올 사이 마하네단에서 여호와의 신이 비로소 그에게 감동하시니라' (삿 13:25). 거라사 광인에게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집으로 돌아가...네 친속에게 고하라" (막 5:19). 에베소에 있는 "등대'(교회)는 그 성을 밝게 비추었습니다. 서머나 교회도 그 도시를 밝혔습니다. 우리 지역을 충분히 전도한 후에 다양한 개척전도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럴 때 "각처" 라는 단어가 의미있는 넓은 가능성이 열리게 됩니다.
모임이 존재하는 이유를 묻는 사람이 있습니다. 모임은 "하나님의 밭" 입니다(고전 3:9). 이는 모임 안에는 하나님을 위한 무엇인가가 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즉 모임은 하나님을 위해 열매를 맺어야 하는 장소입니다. 이는 단지 "찬미의 제사...입술의 열매"(히 13:15)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모임은 "하나님의 양무리"(벧전 5:2)입니다. 즉 하나님의 백성들이 돌봄을 받고, 꼴을 먹는 곳입니다. 그러나 "금등대"는 모임이 복음의 빛을 필요한 죄인에게 비추는 곳이라는 의미를 갖습니다. 모임에 이같은 요소들이 균형을 취하고 있어야 합니다. 교회적 간증에서 우리 책임을 다하기 위해 일어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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