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
사도행전 17장 묵상(행 17:16-34)
J. N. 다비
아테네가 온통 우상숭배에 빠진 것을 보자 사도의 영은 무겁게 눌렸습니다. 그는 회당에서는 유대인과 논쟁을 하고, 장터에서는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과 논쟁을 했습니다. 아테네는 예술의 영광과 철학 학파들로 유명한 도시였습니다. 비록 로마사회에 지도자들이 공부한 곳이지만, 로마의 지배를 받아 그 중요성을 잃고 나테함 가운데 지냈으며, 여전히 새로운 것을 추구하며 철학을 했습니다. 아테네는 이방 철학에서 알렉산드리아와 바울이 교육을 받았던 다소의 철학보다 뛰어났던 옛 영광을 기억하며 자랑했습니다. 이 헛되고 무익한 도시에서 사역의 열매는 크지 않았지만, 우리에게 귀중한 가르침을 줍니다.
아레오바고에서 사도의 강화(講話)는 복음을 선포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고대 재판소 앞에서 행해진 변호였습니다. 이 재판소는 옛날에 중요한 판결을 내렸던 곳으로서, 지금도 여전히 존재하고 있지만, 더이상 옛날의 중요성을 지니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사도는 어쩔 수 없이 재판소 앞에 서야 했던 기회를 하나님의 영을 통하여 그가 소유한 지혜와 은혜를 나타내는 기회로 삼았습니다. 앞에서 보았듯이 사도는 비시디아의 안디옥에 있는 회당에서 복음을 선포했습니다. 철학자들과 도시 사람들이 함께 모이는 장터에서 사도는 예수님과 부활과 그분의 인격과 사망을 이긴 승리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희생을 받아주셨고 그분 안에서우리가 새 창조(아담이 무죄할 때조차 갖지 못한 지위) 안으로 들어가게 되었다는 증거와 둘째 아담이자 마지막 아담의 왕국을 선언했습니다.
필자는 사도가 이러한 점들을 모두 드러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는 이 모든 진리가 세워지는 위대한 터를 선언했습니다. 사도는 청중의 필요와 능력에 따라 말씀을 전했습니다. 철학자와 그들의 영향 아래 있는 자들과 어떤 존재에 대한 헛된 생각을 가지고 행하는 자들처럼 무능한 자들은 없습니다. 바로 이것이 아테네인들의 특성이었습니다.
지식은 현혹시키는 것입니다. 인간의 지성은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알리고자 말씀하실 때 양심 안으로 들어가십니다. 양심은 지성에 대한 인간 마음의 허세에 비례하여 굳어버리고 활동력을 잃습니다. 그것은 마치 죽어 있거나 아무 것도 소유하지 않은 사람과 같습니다. 따라서 그는 하나님을 아는 진리를 받을 능력이 없습니다. 이들 지혜로운 자들은 예수님과 부활을 신들로 생각했으며, 따라서 진리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습니다. 사람의 마음과 지성의 활동은 도덕과 하나님에 관한 문제에 관해 아무것도 할 수 없으며, 다만 하나님으로부터 더욱 더 멀어지게 할 뿐입니다. 그는 도덕에 관한 아무런 기초를 찾지 못하기 때문에 참된 규칙을 발견하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지각 안으로 종속될 때 그분은 더 이상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어떠한 자가 되어야 하는지를 알려주시기 위해 나타나시지 않습니다. 양심과 믿음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알게 하며, 하나님과의 참된 관계에 있게 합니다. 이같은 일은 말씀으로 가능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 안에서 자신을 계시하시며 사람이 어떠한 존재인지를 보여주십니다.
몇몇 사람이 "이 말쟁이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느냐?" 라고 말하며 사도를 조롱했습니다. 조롱은 종종 대적이 영혼을 진리로부터 돌이키게 하는데 사용하는 방법입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자신이 다른 사람들이 멸시하는 바와 동일하게 간주되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양심과 도덕적 용기는 사람의 마음에서 가장 나중에 발견됩니다. 은혜는 양심을 깨운 후 양심을 따르도록 힘을 줍니다. 아테네인들은 여전히 새로운 것을 추구했습니다. 그들은 존재의 허무감으로 인한 피곤한 마음을 새로운 것을 추구함으로 충족시켰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사도가 전하는 새 교리가 무엇인지를 알기 위하여 한 때 유명했던 아레오바고로 데리고 갔습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하찮은 철학적 의견일지라도, 그들은 진리 혹은 그리스도를 순순히 인정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의견은 매 한가지일 수 있지만, 하나님에 관한 증거는 양심에 역사하며, 마음에게 요구합니다.
아레오바고에서 바울은 성령님의 가르침을 받아 뛰어난 지혜와 온화한 사랑으로 대답합니다. 그 사랑은 그들이 사도가 나누기를 원했던 진리를 붙잡게 하는 유일한 것입니다. 사도의 눈은 자신들의 진정한 위치를 알도록 인도할 수 있는 진리의 작은 자취(역자 주 : 알지 못하는 신에게 라고 새긴 글이 있는 제단)를 주시했습니다. 사도의 강화는 단순히 영혼의 구원에 관해 밝히 말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이미 회당과 장터에서 그의 마음은 점유했던 것이었습니다. 이제 사도는 우상 종교의 진정한 특성을 매우 섬세하게 설명합니다. 그리고 대적이 파괴할 수 없었던 진리의 자취를 보다 확실한 진리와 예수님의 이름과 양심에 호소하는 것들과 묶으려고 합니다.
오직 새로운 어떤 것을 말하고 듣는 것으로 허비하던 회의적인 아테네인들은 우상숭배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들은 신들의 범위를 철저히 살피며 알지 못하는 신에게 제단을 바쳤습니다. 이전에 아테네에 치명적인 질병이 유행한 적이 있었습니다. 주민들은 모든 신들에게 그 역병을 제거해 달라고 기도 했으나 응답이 없자 한 사제에게 도움을 요청하였고, 사제는 알지 못하는 신에게 제단을 바치라고 지시했습니다. 그러나 특별한 경배의 대상을 찾는 것은 불필요한 것입니다. 모든 우상숭배의 근원에는 하나님에 관한 개념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개념은 부패하고 사탄에 의해 사로잡혀 있어서 사람들로 하여금 마귀를 경배하게 합니다. 이 개념은 사람의 마음에서 근절될 수 없습니다. 이교도는 마음에서 이 개념을 제거하려고 하지만, 그들의 온갖 노력에도 불구하고 항상 마음의 근저에 남아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의 출생과 함께 마음에 있게 되었습니다. 창조는 마음으로 하여금 만물이 무(無)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고 믿도록 분명하고 강력하게 증거합니다. 그리고 양심은 그 증거에 귀를 기울이도록 큰 소리로 말합니다. 사람은 하나님을 원치 않으며 그분을 잊으려고 애씁니다. 사람은 변론하며,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을 구합니다. 그러나 생각은 항상 되돌아 옵니다. 그리고 그것을 느낄 수 있게 합니다. 사람은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그 생각을 제거하려고 애쓰지만 그것은 항상 마음의 근저에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에 관한 생각은 항상 우리가 죄인임을 느끼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우상 숭배 가운데서 무시되거나 잊혀진 채 발견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신화 가운데 계시며, 두려움으로 깨어난 양심 가운데서 발견됩니다. 사람들은 고통 가운데 있을 때 '오 불멸의 신들이요!" 라고 말하지 않고 " 오 하나님!" 이라고 합니다. 그들은 크고 작은 신들을 만들었고, 샘과 숲과 자연이 역사하는 곳마다 신(神)이나 여신(女神)을 두었습니다. 그러나 그들 마음 가운데는 만물의 배후에 오직 한 분의 전능하신 하나님이 계시다는 깊은 느낌이 남아있습니다. 따라서 인도의 브라만, 이집트, 사바, 스칸디나비아에 끝없이 신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경배를 받지 못했지만. 만물의 근원으로 인정받는 한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이 하나님은 만물의 창시자로서 어둠 가운데 안식하셨습니다. 인도에서는 단 한 개의 성전도 그분께 드려진 적이 없지만, 여전히 그분은 존재하시며 만물의 근원이 되십니다. 시바인과 고대 페르시안들 가운데 선신(善神) 아후라 마르다와 악신(惡神) 아리만으로 알려진 이방 종교가 있었습니다. 이 종교에서 하나님은 불 가운데 경배를 받으시며 우상을 갖지 않았습니다. 이들의 근원으로 다른 신이 있었습니다. 필자가 근원을 말하는 이유는 이교도는 창조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11:3을 보십시오.
사탄의 영향 아래 있는 인간의 상상은 모든 곳에서 신들을 창조했습니다. 그러나 그 근본에는 하나님에 관한 개념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참되신 하나님은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이는 하나님을 빼앗긴 인류의 비참한 상태로서, 그들은 하나님에 관한 깊은 필요 가운데 있으면서 하나님의 참된 지식을 대적합니다. 마음은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양심이 정죄하는 것들을 원하며, 책임을 느끼게 하는 양심은 그분의 임재를 견딜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은 자신들의 정욕을 채우기 위하여 자신들을 돕는 신들을 만들었습니다. 사람은 자신을 충족시킬 수 없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두려워합니다. 사람의 마음은 자신보다 더 타락했습니다. 그는 자신을 타락시키는 대상을 이용해서 마음의 필요를 채우려고 하지만 실패합니다. 그는 스스로 하나님을 잊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생각은 그의 마음에 고통이 됩니다.
이제 알지 못하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십니다. 사도는 제단에 새겨진 것을 생각하며 큰 기쁨에 젖어 그들이 알지 못했던 참되신 하나님을 선언합니다. 이것은 복음이 아닙니다. 사도는 이미 예수님과 부활에 관한 복음을 전하면서 선포했던 하나님을 그들이 갖고 있는 진리와 동일한 것으로 간주하며, 그것을 변호하고 양심에 호소하고 있습니다. 알지 못하는 하나님께서는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예수님에 의해 세상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사도는 이 진리를 멍에 아래 있는 그들의 양심과 우상 숭배에 적용하고 있습니다. 사도는 자신 안에 계신 성령님의 권능에 의해 그들이 하나님에 관한 생각을 왜곡하고 그분의 영광과 유일하신 창조주의 영광을 부인한 것을 고발하고 유죄를 선고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단지 그분을 알지 못하는 분으로만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도는 그들에게 이 참되신 하나님을 분명하게 선언했습니다. 그분은 생명과 생명을 보존하는데 필요한 것들을 주시면서 자신을 밝히 드러내셨습니다. 그분은 양심을 통하여 그들 각자로부터 멀리 떨어져 계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무지하던 때에 눈감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심판을 하지 않고 그들을 너그럽게 대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모든 곳에서 모든 사람에게 회개하라고 부르십니다. 왜냐하면 세상을 심판하는 한 날을 정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날에 정하신 그 사람을 통하여 이 땅을 의(義)로 심판하실 것을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셔서 그 일에 대한 확신을 모든 사람에게 주셨습니다. 사람들은 대적에 의해 우상숭배로 미혹되었습니다. 사탄은 사람의 정욕을 이용하여 자신을 하나님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성령님의 권능에 의해 참되신 창조주 하나님, 만물의 보존자, 우상숭배의 어리석음 가운데서 잃어버린 그분에 관한 지식을 계시하십니다.사도는 예수님, 곧 부활하신 사람에 의해 이 세상에 임할 심판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은혜는 하나님의 인내 안에서 모든 사람들은 회개하라고 초대했습니다.
이것이 사도의 변호였습니다. 사도는 결코 자신에 대해 변호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단지 청중들을 하나님의 앞으로 데리고 가서 양심이 부인할 수 없는 것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들이 알아야만 했던 것이었습니다.(롬 1:19,20). 그리고 사도는 무엇이 새로운 것인지를 계시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다가오는 심판입니다. 그 심판은 하나님이 세우신 그 사람에 의해 집행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으로, 이 땅에서 인자의 길을 끝내고 사탄의 권능을 무너뜨린 그분의 길과 권능에 관한 공적인 증거로 확신을 주셨습니다. 참소자들은 사형선고를 받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죽은 자들의 부활에 관한 개념을 조롱합니다.
그러나 사도의 강력한 말씀은 이 경박한 사람들 가운데서도 역사해서 몇몇 사람들의 마음을 만집니다. 사역의 수확의 작지만, 하나님은 결코 증거 없이 떠나시지 않습니다. 복음을 믿는 몇몇 사람들이 하나님의 종에게 합류합니다. 그러나 증거가 주어지자 사도는 더 이상 그곳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항상 그러하듯이 철학과 유치한 원리들은 자아를 높이 평가합니다. 이들은 은혜가 자랄 수 없는 나쁜 땅이며, 하나님께서 오래 기다려야 할 만한 가치가 없는 것들입니다. 은혜는 어느 곳에서든지 효과적으로 역사합니다. 그러나 이 장에서는 철학과 사람들의 허식에 대해 증거하며 심판을 내립니다.(Meditations on the Acts of the Apostles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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