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해봅시다]


                                                            시몬 베드로(2)


                                                                       -  C. H. 매킨토시



확실히 많은 것들이 내포되어있지만, 요한복음 1장에서 사도에 관해 주목할 내용은 매우 간단하다. "안드레가 먼저 그의 형제 시몬을 찾아 말하되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하고(메시야는 번역하면 그리스도라).  데리고 예수께로 오니 예수께서 보시고 가라사대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시니라. 이를 번역하면 베드로(a stone)라." 여기서는 시몬의 영혼에 영적으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아무 기록이 없다. 우리는 그의 출생시의 이름과 새로운 이름을 알 뿐이다. 우리가 알기로 그가 종이 되는 그 때 그의 영혼에 심오한 어떤 역사가 있었다는 그림자도 볼 수 없다.

   이러한 이유로 독자에게 부탁하기는 잠시 누가복음 5장으로 눈을 돌려 거기서 신성의 놀라운 솜씨의 조각을 보자.

   "무리가 몰려와서 하나님 말씀을 들을새 예수는 게네사렛 호숫가에 서서 호숫가에 배 두 척이 있는 것을 보시니 어부들은 배에서 나와서 그물을 씻는지라. 예수께서 한 배에 오르시니 그 배는 시몬의 배라. 육지에서 조금 떼기를 청하시고 앉으사 배에서 무리를 가르치시더니" (눅 5:1-3).

   여기서 특히 나타난 도덕적 은혜를 주목하라. " 그는 시몬에게 배를 육지에서 조금 떼기를 청했다." 모든 피조물의 주인이시며 천지의 주재이셨지만, 그분은 겸손하고 자비한 사람으로서 예의바르게 시몬의 소유권을 인정하고 해변에서 조금 떼는 호의를 요청하셨다. 이것은 도덕적으로 아름다운 것이다. 우리는 시몬의 마음에 그 영향을 끼쳤다고 확신할 수 있다.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시몬은 그의 배 삯을 넉넉히 받게 된다.

     "시몬이 대답하여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가 밤이 맞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그 말씀에는 은혜뿐 아니라 능력이 있었다. "그리한즉 고기를 잡은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이에 다른 배에 있는 동무를 손짓하여 와서 도와 달라 하니 저희가 와서 두 배에 채우매 잠기게 되었더라." 그들의 그물이나 배들은 하나님의 능력과 복을 감당할 수 없었다.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 엎드려 가로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여기서 우리는 은혜와 능력이 합력하여 베드로의 영혼에 일으킨 실제적인 위대한 영향을 본다. 그는 하나님의 임재 아래서 자신을 볼 수 있었다. 거기서 자신을 진실로 보고 판단할 수 있었다. 시몬은 해변에서 무리에게 가르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는 그 자신을 향하는 그분의 진리의 소중한 은혜와 도덕적인 아름다움을 느꼈다. 그는 물고기를 잡는 놀라운 능력을 주목했다. 모든 것이 능력으로 그의 마음과 양심에 말하고 그를 주님의 면전으로 인도했다.

   이것이 소위 순수한 죄의 자각의 역사이다. 시몬은 자신의 참 모습을 발견한다. 이것은 진실로 매우 가치 있는 자리에 도달한 것인데, 그리스도의 사역에 쓰임 받으려면, 또는 진정으로 신성한 생명의 깊이와 불변성을 보여주려면, 모든 사람이 반드시 거쳐야할 단계이다. 양심에 하나님의 성령의 심오하고 견고한 역사가 없다면, 결코 어떠한 참된 능력이나 발전을 추구해서는 안 된다. 소위 재빨리 쉽게 얻은 평안은 곧 쉽게 다시 사라진다.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서 우리 자신을 보게 되는 것, 우리의 과거 역사와 우리의 현재 상태, 그리고 미래의 운명의 진실에 눈 뜨는 것은 정말로 매우 심각한 일이다. 시몬 베드로는 그 날에 그것을 그렇게 받아들였다. 구원에 이르는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소유하게 된 사람들은 모두 그러했다. 선지자 이사야의 말에 귀를 기울여보라. 그는 하나님의 능력 있는 영광의 빛 가운데서 자신을 보았을 때,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사 6:6)라고 고백했다. 욥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한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 하나이다" (욥 42:5-6).

   이 열렬한 고백은 선조와 선지자 안에서 일어난 깊고 순전한 역사(work)를 계시해준다.진실로 사도가 부서진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외쳤을 때 그는 똑같은 도덕적 근거를 이해했다. 시몬이 게바로 부름 받으려면 그는 절저히 부서져서 그 자신의 끝까지 내려가야 했다. 그가 사람을 낚는데 익숙하려면 그는 하나님의 길에서 인간의 참된 상태를 배워야한다. "모든 육체는 풀과 같다"는 사실을 가르치려면 먼저 그 자신의 마음에 이 진리를 적용해야만 한다. 모든 경우에 마찬가지다. 다소의 사울을 보라. 그 눈먼 삼일은 무슨 의미가 있었는가? 그 기간에 그는 먹지도 마시지도 못했다. 이 비범한 인물의 전 생애를 통해서 가장 심각한 시기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 시기에 그는 틀림없이 그의 도덕적 존재와, 그의 생명의 가장 깊은 뿌리, 그의 본질, 그의 인격, 그의 행위, 그의 종교의 가장 깊은 곳으로 내려갔을 것이다. 그는 그의 전 생애가 두려운 실수였으며, 전적인 거짓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종교인으로서 그의생애 자체가 바로 하나님의 그리스도에게 광적으로 대적한 것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을 것이다.

   확신하기는 하나님의 계시로 마음 깊이 각성된 이 사람은 엄숙하게 승복하며 이 모든 것을 회고했을 것이다. 그의 회개는 표면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깊고 철저했다. 그것은 그 후 그의 여정과 인격, 사역 전체에 각인 되었다. 시몬의 경우와 같이 그도 자기 자신의 밑바닥에 도달했고, 거기에서 그는 그의 필요뿐만 아니라 그의 새롭게 된 존재의 모든 갈망과 꿈을 완전히 만족시켰다.

   이제 우리가 고백해야하는 것은 우리가 이러한 영적인 일을 묵상하는 것을 기뻐하는 것이다. 이러한 회개를 묵상하는 것은 진실로 회복하게 하는 일이다. 우리가 크게 우려하는 것은 우리가 일하는 많은 시간이 애석하게도 영적인 깊이와 능력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그 결과로서 기독교인의 인격에서 견고성의 결핍이 있고, 그리스도인의 경주에서 불변성과 깊이가 결핍된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복음전파에  수고하는 우리의 거룩한 삶이 연약하고 깊이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우리가 그리스도께 충분히 가까이 하지 못해서 영혼을 어떻게 대할지 모른다. 또한 하나님의 영광을 확보하고 유지하는 것보다 죄인들의 필요를 어떻게 채워줄지에 대해서 더 열심이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아마도 구도자의 양심에 진리와 거룩함의 요구를 충분히 강조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진리를 제시하는 것도 충분하지 못하고, 한쪽에 너무 많이 치우쳐 있다. 또한 가르침이 맥이없고 따분할 만큼 단조롭다. 그 원인은 샘 근원 가까이 머물지 못해서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 안에 있는 진리와 은혜의 마르지 않는 샘에서 우리 영혼이 충분히 마시지 못했기 때문이다. 또한 그리스도와 그분의 영광보다 우리 자신과 가르침으로 더 채워져 있고, 하나님을 향한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향기가 되기보다는 우리가 행한 일을 과시하는데 더 열심이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복음 사역에 참여하는 모두에 대하여 이렇게 볼 때 그 무게와 심각성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섬김을 언급할 때 하나님의 임재의 필요성이 더 절실하다. 이는 우리 시대의 가르침을 논할 때 열매가 양적으로 적고 질적으로도 빈약하다는 사실을 우리가 도저히 숨길 수 없다. 비록 회개의 방식으로 자랑스럽게 과시된 많은 일을 순수한 것으로 결코 인정할 수 없지만. 우리는 영혼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이 나타남에 대해서 하나님을 찬양하기를 열망한다. 우리가 열망하는 것은 깊고 순전하며 실수할 수 없는 성령의 역사로서, 모든 반대를 초월하여, 생명과 인격 안에 있는 항구적인 결과에 의하여 그 자체를 증명할 일이다.

   회개의 여러 경우를 요약해서 발표하는 것과 이러한 경우를 실제 사실에서 좋게 보는 것은 별개의 것이다. 성령께서는 회개한 영혼의 수를 때때로 영감의 기사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수 있고 말씀하신다. 어떤 경우에 우리에게 회심자 3천명을 말씀하신다. 그는 그것에 대해서 완전히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에 그렇게 말씀하실 수 있다. 그분은 사람의 마음을 읽으신다. 그분은 가짜와 진짜를 구분하실 수 있다. 그러나 사람들이 회심자의 수를 계수해서 발표할 때는 그들의 진술을 신중하게 주의하여 받아들여야 한다.

   의심하려는 의도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금하신 것이다. 그렇다. 영혼의 희망적인 기질을 진지하게 살펴야한다. 모든 경우에 역사(work) 그 자체가 말하도록 하는 것이 더 좋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정말로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온 것이라면 며칠 후에라도 확실히 밝혀질 것이다. 반대로 일꾼과 그의 역사에 대해서 둘 다 급하게 요약해서 그 결과를 발표하는 것은 큰 위험이 따른다.

   그럼 다시 게네사렛 호수로 돌아가서 잠시 주님의 시몬 베드로를 다루심에서 베푸시는 아름다운 은혜를 묵상하자. 죄의 자각의 역사는 깊고 실제적이다. 거기에는 실수가 있을 수 없다. 화살이 심장 속으로 들어가서 중심에 박혔다. 베드로는 그가 죄로 가득한 사람임을 깨닫고 인정했다. 그는 예수님과 같은 분에게 가까이 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세상 어디에도 있을 곳이 없다고 확실히 말할 수 있다. 그는 정말 진지하게 "나를 떠나소서" 라고 말했다. 우리는 그가 내적으로 죄를 자각했다고 믿지 않을 수 없지만 찬양 받으실 주님은 달랐다. 그가 죄의 자각이 있었다면 그는 옳았다. 예수께서는 마음이 부서진 가련한 죄인을 결코 떠나실 수 없다. 결코. 상처받은 영혼에게 그분의 사랑과 은혜의 치료하는 향유를 붓는 것이 그분의 가장 부요하고 깊은 기쁨이었다. 부서진 마음을 치유하는 것이 그분의 즐거움이었다. 그분은 그 일을 위하여 기름부음을 받았고, 그 일을 수행하는 것이 그분의 양식이며 음료수였다. 그분의 거룩한 이름을 영원히 찬양할지어다!

   "예수께서 시몬에게 일러 가라사대, 무서워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하시니." 여기에 죄를 뉘우치고 있는 영혼의 외침에 하나님의 반응이 있었다. 그 상처는 깊었지만 은혜는 더욱 더 깊었다. 구주 하나님의 위로하는 손이 보배로운 향유를 바르셨다. 시몬은 죄를 자각했을 뿐 아니라 회개했다. 그는 자신이 죄로 가득한 사람임을 보았고, 또한 은혜로 가득한 구주를 보았다. 그의 죄가 결코 그 은혜의 범위를 넘는 것은 불가능했다. 아 결코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 그분의 보혈의 능력이 있음 같이 죄인 중에 괴수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서 예수님의 마음속에 은혜가 있다. "무서워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하시니 저희가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으니라" (눅 5:10-11).

   이것은 실제적인 일이었다. 이것은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것이었다. 이것은 죄의 자각과 회개 그리고 헌신이었다.*


Posted by 행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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