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해봅시다]
시몬 베드로(3)
- C. H. 매킨토시
우리는 지난 호에서 이와 같은 함축적인 말로 마쳤다. "그들은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으니라." 의미심장한 말이다. 시간과 물질적인 것들로부터 분리되어 그리스도와 그분의 관심사에 마음을 다하여 즉각적으로 헌신했음을 말한다.
이 둘을 베드로에게서 본다. 게네사렛 호수에서 그의 영혼 속에서 일어난 깊고 복된 역사가 있었다. 그는 하나님의 임재의 빛 가운데서 자신을 볼 수 있었고, 거기에서 홀로 자신을 발견하고 죄를 진정으로 자각하게 되었다. 인간의 관점에서 보면 시몬이 그의 이웃보다 더 나쁘다고 추측할 이유는 없다. 오히려 그의 외적인 삶은 그의 주변의 많은 사람들보다 선할 가능성이 더 많다. 그는 위대한 이방인의 사도(바울)처럼 그리스도와 그분의 목적에 반대하여 광적으로 대적하다 극한의 상태에서 포로가 된 것이 아니었다. 그에 대하여 영감 받은 역사학자에 의하면 그는 어부로서 조용히 정직함을 추구하다 주의 제자로 부름 받았다고 우리에게 소개한다.
그러나 그 후에 성경은 우리에게 의미심장하게 알려준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차별이 없느니라" (롬 3:22-23). 같은 서신서 10장에서 또 다른 기초에 근거하여 다시 반복한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주(same Lord)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주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당신은 정말로 이 가장 중요한 진리를 이해하고 있는지 살펴보라. 인간들 간에는 도덕적, 사회적 관점에서 차별이 없는 것은 아니다. 아주 분명히 말하지만 그러한 것이 있다. 예를 들면, 밤마다 집에 실려 오는 짐승보다 못한 비참한 술고래(그의 아내는 마음이 무너지고 비참하며, 자녀들은 더러운 옷을 입고 굶어 죽어가고 있다)와 술도 안 마시고 부지런해서 남편과 아버지로서 책임을 인지하고 그러한 관계에 따르는 의무를 다하려고 애쓰는 사람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이와 같은 큰 차이를 무시한다면 그것은 정말 매우 대단한 실수라고 판단된다. 우리가 믿기로는 하나님께서도 그분의 도덕적 세계 통치에서 그것을 인정하신다. 잠시 술고래의 가정과 술을 마시지 않는 사람의 가정을 대조해 보자. 그렇다. 그들의 전 생애, 사회적 신분, 진로, 성격을 대조해보자. 그 둘의 놀랄만한 차이를 누가 부인할 수 있겠는가?
현재 하나님의 통치를 본다면,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정말 매우 심각한 차이가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인간들은 그들이 심은대로 거둔다. 술 취한 탕자는 그가 심은 대로 거둔다. 정신이 맑고 근면하고 정직한 사람도 심은대로 거둔다. 하나님의 도덕적 정부의 법은 이생에서도 그들의 삶의 결과를 인간이 피하는 것은 불가능함을 인정한다.
이것이 다는 아니다. 하나님의 현재정부는 이 땅에서도, 인간이 심은 대로 그 보상을 받도록 인간의 행위를 감독할 뿐만 아니라 성경은 여러 곳에서 두려운 심판이 올 것을 보여준다. 성경은 "책들이 펴져있다" (계 20:12)고 말한다. 또한 "모든 사람이 그 행위대로 심판을 받더라"고 기록하고 있다. 요약해서 우리는 자세하고 정확한 차별화된 심판을 받으며, 아무렇게나 되는대로 처리되지 않는다.
더 나아가, 기억할 것은 하나님의 말씀은 형벌의 등급을 말씀하신다. 성경은 많은 것을 말씀하신다. 거기가 여기 보다 " 더 견디기 쉬우리라"는 표현을 사용하신다. 심판의 다양한 근거, 다양한 책임, 죄악의 다양한 정도, 심판의 다양한 등급이 없다면 이 말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인간들은 이의를 제기 하지만 "만물을 심판하시는 분은 바르게 심판하신다. " 인간이 변론하고 토론해도 소용없는 일이다. 사람마다 그의 행위를 따라 재판받고 형벌 받게 된다. 이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다. 인간은 이에 대항하여 이의를 제기하기보다는 굴복하는 것이 훨씬 더 잘하는 것이고 안전하다.
회개를 거절하는 죄인들은 재판을 받고 그들의 행위대로 처벌을 받는다. 그리고 그의 모든 피조물이 정죄를 받고 지옥에서 영원히 형벌을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이 사랑이라는 생각과 맞지 않는다고 믿는 체하지만 죄는 심판받아 마땅하다. 그 형벌에 대하여 반대하는 자들은 단지 하나님의 본질과 성품에 대해서 일방적인 견해를 가졌기 때문이다. 그들은 죄에 대해 묵인하는 그들 자신의 신을 만들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성경의 하나님,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 기독교의 하나님은 의문의 여지없이 그분의 아들을 거절하는 모든 사람을 심판하신다. 그 심판은 모든 사람의 행위대로 되며, 그 심판의 결과는 "불과유황으로 영원히 타오르는 불못" 이다.
우리가 마음을 두어온 모든 진리에 심혈을 기울이는 것은 극히 중요하다. 차별이 없다는 실제적인 진리는 전적으로 다루지도 않은 채 남아있다. 사물을 극단적으로 일방적인 방식으로 서술하는 것을 피하는 것은 항상 잘하는 일이다. 그것은 진리를 손상시키고 영혼을 실족하게 한다. 그것은 갈망하는 사람들을 당황하게 만들고 트집쟁이들에게 도피처를 제공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완전한 진리는 항상 공개되어야 하고 그렇게 해야 모든 것이 옳게 될 것이다. 진리는 인간과 만물을 그 바른 위치에 놓이게 하고, 거룩하고 도덕적인 균형을 유지하며, 이것은 무한한 가치가 있다.
그렇다면 그 주장은 차이가 있다는 것인가? 하나님 앞에서 위의 문제에 관한한 그렇지 않다. 이것을 근거로 해서는 차이의 그림자도 볼 수 없다. 이는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라고 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영광의 빛에 비추어보면 모든 인간의 차이는 없어진다. 모두가 타락했고, 죄인이며 정죄되었다. 도덕적 최하위 계층의 사람들로부터 최상위 계층의 사람들까지 하나님의 영광의 빛에 비추어 보면 철저히 절망적으로 타락했다. 그들은 모두 똑같은 처지에 있으며, 모두 다 황폐화되었다. 이뿐 아니라 그들의 도덕성, 인격수행, 정통성, 종교를 자랑하는 자들이 가장 타락한 사람들보다 천국에서 훨씬 더 멀리 있다. 이것은 이미 우리 주님께서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말씀하신 바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기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 (마 21:31).
이것은 인간의 자만심과 위선을 심하게 낮춘다. 시몬 베드로가 하나님의 면전에서 자신을 직접 본 것처럼 그들 자신을 볼 때까지 아무도 이 진리에 복종하지 못할 것이다. 거기에 있었던사람들은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라는 자기 정죄의 말을 충분히 이해할 것이다. 이 말은 참으로 참회하고 뉘우치는 영혼의 마음 깊은 데서 흘러 나왔다. 그 말 속에는 우리가 감히 말하는 아름다운 역설이 있다. 시몬에게는 그분이 떠날 것이라는 생각은 없었다. 우리가 확신하기는, 그에게 그러한 말씀을 하시고 은혜를 보여주신 찬양받으실 분이 마음이 부서진 가련한 영혼을 떠날 수 없다는 분능적인 직감을 시몬은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판단은 옳았다.
예수께서는 그분을 필요로 하는 영혼에게 등을 돌리려고 하늘로부터 내려오신 것이 아니었다. "그분은 잃은 자들을 찾아 구원하러 오셨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내게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 쫓지 아니 하리라." 구주 하나님께서 세상에 오신 것은 진실로 길 잃은 죄인에게 등을 돌릴 수 없으시다. 그를 구원하고 그에게 "두려워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고 복을 주신다.
이것이 시몬 베드로의 영혼에 비춰진 은혜였다. 그 은혜는 그의 죄를 없이 하셨고 그의 두려움을 물리쳤으며, 믿음 안에서 기쁨과 평화로 그를 채웠다. 이와 같이 모든 경우에 하나님의 용서는 인간의 자백에 뒤따르며 놀랍도록 신속하게 "내가 내 허물을 주께 자복하리라 하였더니, 주께서 나의 죄과를 용서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용서 하시기를 기뻐하신다. 우리 죄과를 없이하시고 우리 영혼을 그분의 복된 평화로 채우시며 그 은혜를 다른 사람에게 전하는 자로 삼는 것이 그분의 사랑의 마음이다.
우리가 사도 베드로처럼 다 같은 방식으로 부름 받거나 같은 일에 부름 받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확실히 우리는 주님을 마음으로 따라가고 그분께 충성하도록 부름 받았다. 이것이 이 땅의 모든 구원받은 영혼의 복된 특권이며 신성한 의무이다. 우리는 세상과 결별하고 그리스도를 따르도록 명령으로 부름 받았다.
우리는 시몬의 경우와 같이 삶에서 우리의 합당한 직업을 포기하는 문제가 아니다. 그러한 행동의 과정이 정당한 경우는 우리 중에는 거의 없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이 이것을 시도하다가 좌절되었는데 그것은 그들이 그 일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지 않았거나 하나님의 지지를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확신하기는 일반적으로 모든 사람은 자기 손이나 머리로 어떤 생업에 종사하면서 은사가 있다면 복음 전도와 가르침에 봉사하는 것이 더 좋다. 물론 규칙에는 예외가 있다. 어떤 이들은 명백하게 합당하게 부름 받고 쓰임 받으며 하나님의 보호를 받아서 그들의 생애의 과정에 어떠한 실수도 없었다. 그들의 손은 일로 가득 차 있다. 그들은 매순간 설교와 저술, 공적으로나 집집에 다니며 가르치는 일에 전념해서 소위 세속 일(우리는 이러한 표현을 싫어하지만)에 종사하는 것이 정말 불가능할 정도이다. 그러한 모든 일꾼들이 하나님만 바라보면서 하나님과 동행하면, 하나님께서는 실수 없이 끝까지 그들을 보호하실 것이다.
규칙에 예외를 인정하지만, 여전히 우리가 확신하기는 사람들은 모든 면에서 신세지지 않고 전도하고 가르치는 것이 더 좋다는 것을 원칙으로 제안하는 바이다. 그것은 기독교계의 비참한 삯꾼 목자들에 대항하는 훌륭한 간증을 나타내는 도덕적 무게를 부여한다. 삯꾼 목자들 때문에 모든 면에서 그리스도의 목적에 손상을 주며 영혼들을 도덕적으로 타락시켰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합법적인 부르심을 포기하는 것과 세상과의 결별을 구분해야 한다. 전자는 매우 잘못된 것이다. 후자는 우리의 피할 수 없는 의무이다. 우리가 부름 받은 것은 마음의 영이 확고한 마음의 목적에서 모든 마음의 짐을 벗고 복되신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이다. 우리가 이 세상에 존재 하는 이유는 완전히 절대적으로 그분을 위한 것이다. 그것은 그분이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위해서 계신 목적과 같다. 이것이 정말로 우리에게 사실일진대 우리가 대륙을 건너서 복음을 전하는 것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다. 모든 것이 그분께 달려있다. 이것이 위대한 요점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마음에 합당한 위치에 계시다면 모든 것은 바르게 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면 옳은 것은 무의미하다. 마음이 부차적인 목적이나 세속적 동기나 육신적인 목적 같은 저의가 있다면 진보는 있을 수 없다.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영광만이 우리의 열중하는 목적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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