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연구]
신랑의 친구
침례 요한의 생애 묵상 (9)
[어두운 때]
- R. H. 샤익스
이제 우리는 요한이 살던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의 상태는 어떠했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사회적인 측면
당시의 사회는 불안했습니다. 평안이 별로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나마 존재하는 평안도 오직 표면적인 얇은 평안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므로 그 백성은 이방인의 통치로부터 건짐 받고 싶은 깊은 갈망을 가졌습니다. 오, 그들은 자신들을 로마인들로부터 구해낼 수 있는 강한 사람을 원했습니다!
부당한 세금이 부과되었습니다. 세금 징수원들은 납세자들에게 손실을 안기면서 자신들의 이익을 취했습니다. 속여서 빼앗는 일과 횡령 사건은 흔하게 발생했습니다. 당시에 백성들은 로마 군대의 강철군화 아래 놓였고 이로 인해 그들은 두려워했습니다. 그런 반면에 로마 시민들은 다른 사람들이 갖고 있지 못한 특권들을 즐겼습니다. 곳곳에 노예들이 넘쳐났고 그 만큼 불만과 불행이 가득했습니다.
정치적인 측면
일부 통치자들은 교만하게 또 공개적으로 악을 자행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들은 스스로가 법인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사치에 빠져들었습니다. 즉 그들은 아주 호화롭게 살았습니다. 그런 반면 그들은 도덕성이 닞았습니다. 이는 그들의 마음이 썩었고 죄악이 가득함을 보여주었습니다. 어떤 자들은 뇌물을 받아서 거대한 부를 축적했습니다. 특히 정치적인 이유에서 돈이 건네지곤 했습니다.
종교적인 측면
종교적인 측면에서는 훨씬 더 슬픈 상황이 전개되었습니다. 구약시대의 제사장제도가 변질되어 커다란 악이 나타났습니다. 대제사장은 이제 더 이상 아론의 혈통을 따른 하나님의 거룩한 제사장이 아니었습니다. 대신에 로마의 통치자가 대제사장을 임명했는데 그의 선택은 엄청난 뇌물에 의해 좌우되었습니다. 이때의 결정적인 요소는 신앙심이나 경건이 아니라 정치적인 방침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대제사장은 오직 돈을 목적으로 일하는 사람일 뿐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는 고용된 하인과 같았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그분을 나타내는 대신에 이 제사장은 그저 정부의 손에 휘둘리는 도구에 가까웠습니다.
역사가들은 대제사장 안나스가 수리아 총독인 구레뇨에 의해 임명되었다고 말합니다. 안나스는 교만했고, 권력을 탐했고, 매우 부유했습니다. 그런데 그의 재산 중 대부분은 성전 제물 매매의 독점권을 행사하여 취득한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그는 대제사장의 직책을 얻기 위해 통치자에게 막대한 뇌물을 쉽게 제공할 수 있었습니다. 또 다른 대제사장인 조셉 가야바는 안나스의 사위였고 그는 차가운 피를 가진 악한 자로 알려졌습니다.
종교적인 파당들이 출현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위선자들이었습니다. 사두개인들은 구약성경의 근본적인 가르침들 중 몇 가지를 더 이상 믿지 않았습니다. 그 시대에는 교만과 투쟁이 만연했습니다. 그리고 가장 나쁜 것은 자기만족이 가득했다는 점입니다. 이러한 종교인들은 독선적이었고, 자기만족적이었고, 자신들은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는 그들이 자신들은 위대한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생각한 까닭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한 모든 것이 괜찮았습니다!
의문의 여지없이 이 모든 상황은 변화를 절실히 필요로 했습니다!
오늘날의 세상은 많이 다른가요? 우리 역시 병든 사회를 보고 있지 않나요? 위정자들은 부패해 있지 않나요? 모든 분야에서 온갖 부정과 속임과 범죄가 만연해 있지 않나요? 지금도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잔인하고 부당한 압제 하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많은 부유한 자들은 더욱더 부자가 되어가는 반면 많은 가난한 자들은 더욱더 빈자가 되어갑니다.
또한 우리는 공허하고 무력한 종교계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것은 밖에서 보면 종교의 형태를 띠고 있는데 내적으로는 힘과 실체를 상실한 상태에 있습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딤후 3:5).
틀림없이 오늘날은 커다란 변화가 요구되는 때입니다. 요한의 시대와 같이 말입니다. 그러나 어떠한 종류의 변화가 필요한 것일까요? 요한이 살던 어두운 때에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요한을 통해서 주신 메시지는 무엇이었나요?
그것은 임금 체제를 더 나은 방향으로 변화사키는 메시지였나요? 그것은 그러한 상황에 대한 해결책으로 주어진 메시지였나요? 오늘날 노동조합과 파업은 모든 문제들을 해결해내지 못합니다.
그것은 정부를 더 나은 방향으로 변화시키는 메시지였나요? 그러나 죄악된 사람을 끌어내리면 도 다른 죄악된 사람이 그 자리를 차지합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일은 무슨 소용이 있나요?
그것은 시민들의 불순종을 더 나은 방향으로 변화시키는 메시지였나요? 그것은 항의 행렬을 멈춰 세우는 데에 도움이 되었나요?
그것은 더 나은 교육을 통해서 변화를 이끌어내려는 메시지였나요? 오늘날 교육 수준이 높아져도 감옥에 들어가는 자들의 숫자는 줄어들지 않습니다.
그것은 총과 폭탄을 가지고 혁명을 일으켜 변화를 이뤄내려는 메시지였나요? 피의 숙청이 죄를 씻어낼 수 있나요?
모든 질문들에 대하여 그 대답은 언제나 "아니오" 입니다! 요한이 살던 시대에 필요했던 변화는 사람들의 외적인 측면의 변화가 아니었고 환경의 변화도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의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 요구되는 변화는 마음의 변화입니다! *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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