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등대]
아버지의 가족
- W. E. 바인
에베소서 1장은 특히 그리스도의 영광 및 교회와 그분과의 관계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말해준다. 2장은 교회의 형성에 있어서 하나님이 하신 일에 주안점을 둔다. 즉 현재에 교회가 형성되는 과정과 교회에 대한 궁극적인 계획을 말해준다.
3장에서 사도는 자신의 사역을 이야기한다. 이 장은 삽입구적이면서 2장에서 나온 비유들에다가 또 하나를 추가해준다. 그런 동시에 그는 몸이라는 주제를 상기한다. 여기서 그는 "비밀" 인 그리스도 및 교회와 관련하여 자신에게 맡겨진 특별한 청지기직을 언급하면서 그 비밀에 대해 이렇게 정의한다. "이는 이방인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후사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예하는 자가 됨이라" (엡 3:6). 즉 이방인들은 동일한 상속인이 되었고, 동일한 공동체의 일원이 되었고, 동일한 공유자가 되었다. 여기서도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생각은 한 몸에 관한 것이다. 왜냐하면 같은 몸에 속해 있다는 것은 공동 상속보다 더 친밀한 연합이기 때문이다. 세 번째 표현인 "함께... 참예하는 자"는 단지 처음 두 표현을 포함하는 의미로 추가되었다. 종류와 정도에 있어서, 유대인 신자들과 이방인 신자들이 다같이 공유하지 못하는 축복이나 특권은 존재하지 않는다.
3장에서 추가된 비유는 가족의 비유이다. 사도는 이미 교회와 관련된 하나님의 현재의 목적을 말했다. 또한 하늘의 정사들과 권세들에 대해 말했다. 그런 다음 이제 그는 믿음을 통해 누리는 '나아감'을 말한다.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하나님께 당당히 나아감을 얻느니라." 또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분'에게 무릎을 꿇고 기도한다. 여기서 "각 족속"은 "모든 가족"(흠정역)이라고 옮기는 것이 적절하다고 보인다.
파트리아
"이는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가족에게 이름을 주신 분이시니"(엡 3:15). 여기서 "가족"이라는 단어의 원어는 파트리아이다. 이 단어는 신약성경의 다른곳에서는 겨우 두 차례만 등장한다.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개정역에서는 '가족')인 고로"(눅 2:4). 이것은 다윗의 후손으로 여겨졌음을 의미한다. "땅위의 모든 족속(개정역에서는 '가족들')"(행 3:25). 그러므로 이 단어는 공통된 아버지를 둔 집안을 의미한다.
이제 문맥을 살피도록 하겠다. 사도는 에베소서 2장 18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이제 그는 3장 12절에서 그 말을 되풀이한다.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하나님께 당당히 나아감을 얻느니라." 그러면서 그는 "아버지"를 무릎을 꿇을 수 있는 대상으로 이야기한다. 이 두 구절에서는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이 강조되고 있다. 그리고 이 두 구절이 말해주는 핵심은 이 아버지로부터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가족이 이름을 얻었다는 것이다. "이는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가족에게 이름을 주신 분이시니." 어떤 이들은 이 구절이 교회와 천사들과 유대인들과 이방인들로 이루어진 온가족을 의미한다고 보기도 한다. 그러나 사도는 이러한 의미를 담지 않은 듯 하다.
"모든 가족"
원어상 이 어구는 2장 21절의 "그의 안에서 모든 건물이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흠정역)와 흡사하다. 거기서는 교회를 성전으로 말한다. '모든 건물'이라는 어구는 '모든부분을 지닌 건물'을 의미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모든 가족"이라는 어구도 동일한 종류의 의미를 갖는다. 즉 '모든 구성원을 지닌 전체 가족'을 의미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것은 하늘과 땅의 모든 이들이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그 관계를 즐거워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교회를 볼 수 있다. 왜냐하면 교회는 그것을 이루는 모든 구성원들이 하나같이 이러한 관계를 즐기고 있기 때문이다. 이미 주님과 함께 거하는 이들과 지금 지상에서 각 지역교회에 속한 이들이 다 그러한 것이다. 이것은 에베소서의 전체적인 목적에도 부합되는 사실이다.
모든 가족은 각각 아버지로부터 이름을 얻었다. 이는 아버지이신 하나님께서 각각에게 그 참된 성격을 정해주신다는 것을 말해준다. 사도 바울은 신자들이 이 사실을 실제적으로 깨닫기를 원했다. 그래서 이어지는 구절들의 기도에서 즉시 그러한 소원을 표현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 및 그것이 영적인 관계와 경험에서 의미하는 모든 것이 실질적인 효력을 발휘할 수 있을까? 이는 오직 우리가 힘을 얻을 때에만 가능한 일이다. 즉 다음과 같을 때에만 가능하다.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오직 이러할 때에만 우리는 이와 같이 된다.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결과는 필연적으로 이러하다.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을 우리의 아버지로 모신 결과이다.
아버지
이제 우리는 에베소서 3장 16절 이하의 기도를 살펴보려 한다. 이것은 특히 하나님의 가족과 관련된 기도이다. 에베소서 1장 17절에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이라고 불렀다. 뿐만 아니라 그는 그분을 "영광의 아버지"라고도 불렀다. 이제 그는 기도를 올리면서 다시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 (엡 3:16)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지금부터 드리는 기도의 주제는 능력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분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셨다. 이 결과 그분은 우리를 향해 큰 능력을 나타내신다. 또한 3장에 와서 사도는 사랑이라는 주제에 대해서도 사로잡혀 있다.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야만 한다. 또 우리는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야만 한다. 사랑이라는 부제는 가족과 관련하여 더욱더 적합성을 갖는다.
하나님은 영광의 아버지이시다(1장). 그분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셨다. 또 그리스도를 하늘 보좌의 우편에 앉게 하셨다. 그러면서 그리스도를 그분의 몸이자 만물 위에 있는 교회의 머리로 주셨다. 이제 영적인 가족의 아버지로서(3장) 하나님은 어떠한 계획을 갖고 계신가? 그것은 이 가족의 구성원들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체적으로 드러나고 표현된 그분의 사랑을 반드시 아는 것이다.
첫 번째 기도에서 교회는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으로 나타난다(엡 1:23). 이것은 영광이 능력으로 나타난 것이다. 이제 두 번째 기도에서도 충만이 언급된다.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그러나 이 충만은 1장 23절에서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모든 구성원들을 모든 것으로 채우시는 능력을 가리키지 않는다. 그렇다면 여기서 아버지께서 계획하신 바는 무엇인가? 자기 가족의 구성원들이 그리스도의 사랑을 확실히 알아서 하나님의 모든 충만으로 채워지는 것이다. 하나님의 능력은 그리스도의 몸에 속한 모든 구성원들을 충만케 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의 가족 구성원들을 그분의 충만함으로 채워준다.
송영
사도의 기도는 지극히 탁월한 주제를 가졌다. 그 결과, 그의 영혼은 감동을 받았고 마음은 고양되었다. 이에 그의 기도는 송영으로 이어진다.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무궁하기를 원하노라 아멘"(엡 3:20,21). 여기서 우리는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란 어구 속에서 나타나는 조화를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의심의 여지없이 이것은 올바른 표현이다. 교회 안에는 영광이 있고 이것이 하나님께 올라간다. 그러나 교회는 그 머리이신 그리스도 없이는 결코 구성원들을 충만케 할 수 없고 그들의 사랑어린 찬미를 이끌어낼 수 없다. 에베소서는 이러한 조화를 커다란 주제로 삼아 그에 대해 계속 아름답게 묘사한다. 즉 그리스도와 그분의 교회의 하나됨을 말해준다. 지상에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해드렸던 이 아들은 아버지께서 하라고주신 일을 완성하셨다. 또한 그분은 이 일을 늘 행하실 것이며 그분의 보배로운 피로써 구속을 얻어 그분과 연합된 교회를 통해서 그렇게 하실 것이다. 바로 이 하나됨 및 그리스도와 더불어 나누는 교제로 인해 교회는 영광의 아버지께 영광을 올려드린다. 이와 같은 영광은 하나님 자신의 성품과 능력과 속성이 흘러내려갔다가 다시 그분께 돌아온 것이다.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타난 인정과 표현을 통해서 말이다. 또한 이 영광은 대대로 영원무궁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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