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신된 가정]
연보 (7)
-헌금에 대한 격려
- 존 그랜트
이러한 내용들을 읽어왔으나, 당신은 여전히 헌금에 대한 성경적인 가르침을 자신이 따를 수 있을는지 의문을 품고 있을지 모릅니다. 그 요구들이 너무나 부담스럽다고 생각하면서 말입니다. 물론, 그렇게 하면 잘하는 거라고 생각하기는 합니다. 그렇지만 현실적으로, 그것을 실천하고 마땅히 해야 하는 대로 끊임없이 또 변함없이 그렇게 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느낍니다. 그러나 당신이 자신의 그러함을 인정할만큼 충분히 정직하다면, 낙심하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당신보다 앞서간 많은 사람들도 동일한 의심과 두려움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당신을 돕기 위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방식으로 드렸던 다른 이들의 모본 몇 가지를 성경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른 신자들의 본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 (고후 8:1).
마게도냐 교회들은 유대의 가난한 성도들을 구제하고자 아낌없이 연보를 드렸습니다. 이를 바라보면서 당신은 유혹을 받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은 그들의 환경이 더없이 좋아서 그들은 자신들의 모든 필요를 넉넉히 채우고도 돈이 남았고 그래서 다른 이들에게까지 나누어주었다고 생각하고픈 유혹입니다. 그들은 구제가 아주 쉬울 정도로 편안한 삶을 즐겼다는 생각은 하지 맗아야 합니다. 그것은 사실과 크게 다릅니다.
마게도냐 신자들은 엄청난 고통과 박해의 시기를 견뎌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삶은 편안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옆에서 볼 때, 그들은 주는 것보다는 받아야 할 필요성이 더 큰 상태에 있었습니다. 핍박 뿐 아니라, 그들은 혹독한 가난의 괴로움 가운데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필요를 위해 연보할 생각을 가지기에는. 그들 자신의 필요를 채울 자원들조차 거의 없는 실정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드렸고, 그 때 그들은 힘에 지나도록 연보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가진 능력을 넘어선 연보를 행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바울이 그들에게 가졌던 기대를 훨씬 더 뛰어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가난한 그리스도인들이 보여준 모본은 오랜 세월 동안 우리에게 외쳐오고 있습니다. 만일 그들이 드릴 수 있었다면, 당신은 얼마나 더 많이 드릴 수 있겠습니까? 만일 그들이 빈핍한 중에서 또 박해와 고통의 환경 속에서 그렇게 했다면, 이 시대의 물질적인 풍요를 누리는 당신은 얼마나 더 많이 드릴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인들의 헌금은 그들의 신앙 고백의 진실성에 대한 증거임을 고린도후서 9장 13절에서 주목해보는 것은 가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그들의 "진실히 믿고 복종하는 것"이 즐거이 헌금하는 것에 의해 실제적으로 드러났습니다.
주 예수님의 본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 (고후 8:9).
이것은 그동안 보아온 드림의 본 중에서 최고의 본입니다. 다른 가난한 신자들을 돕기 위해 연보하라고 고린도 성도들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바울은 그들의 관심을 주 예수 그리스도께로 향하게 했습니다.
우선적으로 그는 고린도 성도들에게 주 예수님께서 아낌없이 드리신 사실을 각인시켰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그들은 복음 안에서 이 은혜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그들에게 새로운 계시가 아니었고, 그에 대한 반응으로 그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주는 데에 있어서 은혜를 보여주기를 바울은 기대했습니다. 이러한 드리는 행위에 따라붙는 '조건들'은 없었습니다. 그것은 거저 주는 것이었습니다. 후회함도 없었고 불순한 동기도 없었습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은혜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바울은 또한 주 예수님이 얼마나 많이 드리셨는지를 그들이 알게 되기를 원했습니다.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분의 부요함은 그분이 베들레헴에서 이 세상에 들어오신 때 이전에 그분이 즐기신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누가 측량할 수 있으며 누가 이해할 수 있을까요? 주님은 그것을 본래부터 소유하셨고 그분이 가지신 그 부요함은 당신이 도저히 헤아릴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그분은 이 세상에 오시면서 제쳐놓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일부만 " 자기를 비우신" (빌 2:7) 그 분 속에 남아 있었습니다. 그 누구도 그 분만큼 내어준 이는 없었습니다. 따라서 당신이 아무리 많은 연보를 드릴지라도, 그것은 주 예수님의 엄청난 희생에 견줄 바가 되지 못합니다. 그분은 하늘의 부유함을 떠나서 세상에 거하셨고, 여기 이 땅에서 멸시를 받으시며 배척을 당하셨습니다.
그분이 드리신 엄청난 분량은 그분께서 가난해지신 데서 드러납니다. 그분이 부요함의 극치에서 이 세상으로 내려오신 것은 한없는 내리막길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것보다 더 아래로 내려가셨습니다. 그분은 태어나시되, 이 세상의 기준에서 볼 때 부유한 그런 가문에서 태어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세상에서 정말로 보잘것없는 가난한 집안에서 출생하셨습니다. 이렇게 하여 주님은 그분이 본래부터 가지고 계셨던 것을 희생하셨습니다.
그분이 어찌하여 이처럼 풍성하게 내어주셨는지 당신은 물어보고 싶을지 모릅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였습니다. 그분의 가난해지심을 통하여 당신이 부요해지기를 바라심이었습니다. 이기적인 동기 없이 주님은 다른 이들의 축복과 유익을 위하여 그렇게 행하셨습니다.
주님은 자신의 소유를 내어주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분은 그보다 더 나아가셨습니다. 그분은 자신을 내어주셨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기대는 무엇일까요? 그는 다른 이들로 복을 얻게 한 이와 같은 비이기적인 행동에 대해 당신이 생각해 보고, 이로 인해 아낌없이 드리는 일에 격려받기를 원했습니다. 비이기적으로 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타인들을 도우려는 동기를 가지고서 후히 내어주십시오.
착한 일을 하되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갈 6:9-10).
그렇다면 당신의 반응은 어떠합니까?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선을 행하되 결코 낙심하지 말도록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의 소원은 이 일에 있어서 우리가 절대로 피곤해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헌금을 드려도 실질적인 유익을 얻지 못했으며 헌금을 계속 드리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오랫동안 그렇게 느껴왔는지 모릅니다. 지금 현재에 우리가 헌금의 보상을 보지 못할 수 있음은 사실이지만, 우리는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는 사실을 일깨움 받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선을 행할 기회들을 늘 찾아다녀야 합니다.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라고 사도는 기록했는데, 이것은 기회들을 붙잡지 않으면 그 기회들을 영영 놓치게 된다는 점을 상기시킵니다.
우리의 연보는 신자들에게 국한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내어주는 것으로 모든 사람이 유익을 얻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지원을 받기에 적합하지 않은 곳에 도움을 주는 일이 없도록 주의해야 할 필요는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필요가 존재하는 곳이 있으면 우리는 그것을 채워주기 위해서 애써야 마땅합니다. 이것은 우리로 이 시대의 사회적인 문제들에 열중하도록 격려하는 것이 아니며, 중요한 사회 개혁 운동에 우리의 시간을 내어주도록 격려하는 것도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로 지혜로운 자로, 또 성도로서 동정어린 마음을 가진 자로 나타나도록 격려해줍니다.
당연히, 우리는 특히 성도들을 기억하도록 권면을 받습니다. 예를 들면 주의 일에 수고하는 많은 종들과 우리의 연보로 인해 도움과 격려를 얻을 이들을 항상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복지 상태가 열악한 성도들에게 필요한 많은 부분들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사역에서 이 연보의 측면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이것은 가치 있는 일인 것입니다. 우리의 헌금이 " 받으실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 (빌 4:18) 이라고 말해진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모든 연보에서 풍겨나는 향기가 하늘에서 얼마나 그윽할지를 우리 모두 기억합시다. 그 모든 연보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헌신의 마음으로 지상에서 즐거이 바쳐진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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