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연구]

                                     신랑친구

                              침례 요한의 생애 묵상(13)

                                   [전파자의 음식]

                                                                                                                                                        -  R. H. 샤익스

   메뚜기


   이 전파자의 의복과 함께 그의 음식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그의 첫 번째 메뉴는 메뚜기였습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이것은 별로 매력적이지 않은 음식일 것입니다. 그러나 중동이나 아프리카에 사는 이들은 메뚜기나 여치를 먹습니다. 잡을 수만 있다면 말입니다. 그들은 이것들이 단백질의 훌륭한 공급원임을 알고 있습니다. 오늘날조차 많은 사람들이 건강을 유지할 만큼의 단백질을 충분히 섭취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메뚜기나 여치 같은 곤충들을 잡아먹습니다. 그들은 그것들을 끓여먹기도 하고, 구워먹기도 하고, 기름에 볶아 먹기도 하고, 소금에 절여 먹기도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메뚜기를 먹도록 허락을 받았습니다. "곧 그중에 메뚜기 종류와 베짱이 종류와 귀뚜라미 종류와팟종이 종류는 너희가 먹으려니와" (레 11:22). 그러므로 메뚜기를 먹었다고 해서 요한이 하나님의 율법을 불순종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어느 지역에 바람이 불어오면 정말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메뚜기 떼가 몰려왔습니다. 이러한 메뚜기 떼에 대해 구약성경은 빈번하게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우리는 몇 가지 교훈을 받습니다.

   첫 번째로, 메뚜기 떼는 심판과 연관 될 때가 많습니다. 어느 나라가 범죄하면 하나님은 때로 메뚜기 떼를 보내어 모든 나무들과 식물들과 농작물들을 먹어치우게 하셨습니다. 그러면 그 백성이 먹을 것은 하나도 남지 않았습니다.

   출애굽기 10장에 보면 하나님은 애굽 왕 바로를 메뚜기 떼로 벌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하나님의 말씀  듣기를 거절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놓아주지 않은 까닭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애굽 전역에 메뚜기 떼의 심판이 내리는 모습을 봅니다. "메뚜기가 애굽 온 땅에 이르러 그 사방에 내리매 그 해가 심하니 이런 메뚜기는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없을러라. 메뚜기가 온 지면에 덮여 날으매 땅이 어둡게 되었고 메뚜기가 우박에 상하지 아니한 밭의 채소와 나무 열매를 다 먹었으므로 애굽 전경에 나무나 밭의 채소나 푸른 것은 남지 아니하였더라' (14-15절). 시편 78편 46절 역시 이에 대해 말해주고 있습니다. 저희의 토산물을 황충에게 주시며 저희의 수고한 것을 메뚜기에게 주셨으며"(시 78:46). 또한 요엘 1장과 2장은 미래에 임할 하나님의 심판을 메뚜기 떼가 모든 것을 먹어치우는 것에 견줍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심판을 말해주는 이 메뚜기가 요한의 매일의 음식이었습니다. 나중에 가서 우리는 이것이 그의 전파에 있어서 중요한 부분임을 확인해볼 것입니다.

   두 번째로, 메뚜기 떼는 또한 겸손의 교훈을 전달합니다. 아마도 이것을 음식으로 삼아 먹으면서 요한은 민수기 13장의 이야기를 생각했을 것입니다. 거기에 보면 열두 명의 정탐꾼이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 그곳을 살폈습니다. 그런 다음 귀환한 이 정탐꾼들 중 열명은 슬픈 소식을 전했습니다. 그것은 그 땅의 사람들이 거인들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자기들 열두 명은 그들 앞에서는 메뚜기와 같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그 탐지한 땅을 악평하여 가로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탐지한 땅은 그 거민을 삼키는 땅이요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거기서 또 네피림 후손 아낙 대장부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의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 (32-33절). 그러나 다른 두 명은 믿음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어떠한 거인들보다도 훨씬 더 크신 분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승리를 주실 수 있는 분으로 알았습니다. 우리가 작고 연약함을 아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그런 다음에 우리는 하나님을 더욱더 신뢰해야만 합니다. 그러면 그분께서 우리를 도우실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오직 여호와를 거역하지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 밥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 말라" (민 14:8-9).

   물론 요한은 자신의 부르심 및 전파의 권위를 말해주는 이사야 40장 3-5절을 기억했을 것입니다. 그 동일한 장에서 12-17절과, 21-22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누가 손바닥으로 바다 물을 헤아렸으며 뼘으로 하늘을 재었으며 땅의 티끌을 되에 담아 보았으며 명칭으로 산들을, 간칭으로 작은 산들을 달아 보았으랴? 누가 여호와의 신을 지도하였으며 그의 모사가 되어 그를 가르쳤으랴? 그가 누구로 더불어 의논하셨으며 누가 그를 교훈하였으며 그에게 공평의 도로 가르쳤으며 지식을 가르쳤으며 통달의 도를 보여주었느뇨? 보라. 그에게는 열방은 통의 한 방울 물 같고 저울의 적은 티끌 같으며 섬들은 떠오르는 먼지 같으니 레바논 짐승들은 번제 소용에도 부족하겠고  그 삼림은 그 화목 소용에도 부족할 것이라. 그 앞에는 모든 열방이 아무 것도 아니라. 그는 그들을 없는 것 같이 빈 것 같이 여기시느니라. ...너희가 알지 못하였느냐? 너희가 듣지 못하였느냐? 태초부터 너희에게 전하지 아니하였느냐? 땅의 기초가 창조될 때부터 너희가 깨닫지 못하였느냐? 그는 땅 위 궁창에 앉으시나니 땅의 거민들은 메뚜기 같으니라. 그가 하늘을 차일같이 펴셨으며 거할 천막같이 베푸셨고." 여기서 하나님은 땅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메뚜기와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위대함과 능력과 지혜와 비교할 때 그렇다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인간은 지극히 작은 존재이며 마치 메뚜기와 같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교만하지 않았고 자신을 높이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위대하신 분의 종으로서 진정한 겸손을 보여주었습니다. "요한이 말려 가로디, 내가 당신에게 침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마 3:14). "곧 내 뒤에 오시지만 나보다 앞서신 분이시라. 나는 그의 신들메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하더라" (요 1:27). "요한이 대답하여 가로되,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 나의 말한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을 증거할 자는 너희니라.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이 충만하였노라.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 (요3:27-30). 특히 요한복음 3장 30절을 주목해 보십시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세 번째로,나훔 3장 16-17절에서 또 다른 생각이 제시됩니다. "네가 네 상인을 하늘의 별보다 많게 하였으나 황충이 날개를 펴서 날아감과 같고 너의 방백은 메뚜기 같고 너의 대장은 큰 메두기 떼가 추운 날에는 울타리에 깃들였다가 해가뜨면 날아감과 같으니 그 있는 곳을 알 수 없도다." 그것은 인생의 짧음입니다. 선지자는 밤에 수많은 메뚜기 떼가 관목 숲에 앉았다가 이른 아침이면 즉시 다 날아가 버리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들의 꽃과 같이 그것들은 오늘은 여기 있지만 내일이면 사라져 버리는 것입니다."'인생은 그 날이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도다. 그것은 바람이 지나면 없어지나니 그 곳이 다시 알지 못하거니와" (시 103:15-16). 이 두 경우에서 그것들은 아주 짧은 시간만 존재하다가 신속히 없어집니다. 모세는 이에 대해 시편 90편 10절에서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우리의 년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년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시 90:10). 이는 엄숙한 생각입니다. 아마도 요한은 이러한 구절들도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주님을 섬길 수 있는 시간이 그리 많지 않음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이 사실은 우리의 마음도 휘저어놓고 있나요?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우리는 이 땅에서 자신이 긴 인생을 살 거라고 생각하고 있나요? 그것은 그렇지 않습니다! 영원에 비해서 지극히, 짧은 삶을 우리는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세와 더불어 이렇게 기도합시다.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하소서' (시 90:12).


오직 한 번의 생애,

그것은 금방 지나갈 것입니다.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 행한 것만

남게 될 것입니다!

오직 한 번의 생애,

그것은 너무나 짧은 세월입니다.

우리 각자는 때로는 소망 속에서

때로는 두려움 속에서 삽니다.

우리 각자의 선과 악은 기록됩니다.

나 자신을 기쁘게 할 것인가,

그분의 뜻에 순종할 것인가

오직 한 번의 생애,

그것은 금방 지나갈 것입니다.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 행한 것만

남게 될 것입니다!


   석청


   요한은 또한 석청을 먹었습니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꿀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벌들이 꽃들에서 모으는 단 것이며 건강에 아주 좋은 자연식품입니다. 팔레스타인에서 이것은 매우 풍부했습니다. 그래서 그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출 3:8,17)으로 묘사되었습니다. 이것은 심지어 벌들이 저장해놓은 땅속의 틈이나 구멍에서도 발견될 정도였습니다. "반석에서 꿀을 굳은 반석에서 기름을 빨게 하시며" (신 32:13). "그들이 다 수풀에 들어간즉 땅에 꿀이 있더라" (삼상 14:25). "반석에서 나오는 꿀로 너를 만족케 하리라" (시 81:16). 이스라엘 백성은 여호와께 드리는 소제물에는 꿀을 넣지 말아야 했습니다(레 2:11). 그러나 땅의 소산을 처음 드릴 때에는 다른 것들과 함께 꿀을 가져왔습니다(대하 31:5).

   꿀은 몸에만 좋은 음식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우리 마음에 공급되는 영적인 양식을 상징하기도 했습니다.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하니이다" (시 119:103). 다윗 역시 이것이 사실임을 발견했습니다. "금 곧 많은 정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 (시 19:10). 또한 에스겔도 그것을 발견했습니다. 내가 먹으니 그것이 내 입에서 달기가 꿀 같더라" (겔 3:3).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의 40년 동안 만나를 공급받았는데 그것도 꿀처럼 달았습니다(출 16:31).

   우리 역시 하나님의 말씀을 먹어야만 합니다. 그분의 말씀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것들을 제공해줍니다.


   (1) 힘과 영적인 건강

   좋은 음식을 먹지 않으면 우리의 몸은 건강을 유지할 수 없고 강할 수 없습니다. 먹지 않는다면 우리는 아주 오랫동안 육체적인 활동을 할 수가 없습니다. 굶은 상태에서는 하루 종일 고된 일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와 동일한 원리가 영적인 삶에도 적용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먹어야만 합니다. 만약 이렇게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곧 영적으로 연약해질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의 일을 감당할 수 없게 됩니다.


   (2) 마음의 만족과 기쁨

   우리는 이미 시편 119편 103절을 통해 주님의 말씀이 꿀보다 달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이 말씀을 읽고 먹는 것이 당신의 기쁨이 되고 있나요? 그분의 말씀은 지극히 순결합니다. "주의 말씀이 심히 정미하므로 주의 종이 이를 사랑하나이다"(시 119:140) 그 말씀은 우리를 죄로부터 지켜줍니다. "내가 주께 범죄치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 (시 119:11). 그 말씀은 빛과 깨달음을 줍니다. "주의 말씀을 열므로 우둔한 자에게 비취어 깨닫게 하나이다" (시 119:130). 그 말씀은 즐거움을 줍니다. 사람이 많은 탈취물을 얻은 것처럼 나는 주의 말씀을 즐거워하나이다" (시 119:162). 그 말씀은 평안을 줍니다. "주의 법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큰 평안이 있으니 저희에게 장애물이 없으리이다" (시 119:165). 전 세계의 어떠한 책도 이 성경에 견줄 수 없습니다. 요한은 날마다 꿀을 먹으면서 그 황홀한 달콤함을 즐겼습니다. 우리 역시 성경을 통해서 그러한 달콤함을 즐기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서 이러한 특별한 달콤함을 얻으려면 우리는 성경의 각 페이지에서 우리 주 예수님을 발견하고 그분을 묵상해야만 합니다. "나의 묵상을 가상히 여기시기를 바라나니 나는 여호와로 인하여 즐거워하리로다" (시 104:34). 꿀을 먹는다는 것은 바꾸어 말하면 우리 주 예수님을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위격을 즐거워합니다. "그 전체가 사랑스럽구나" (아 5:16).

   우리는 주님의 열매를 즐거워합니다. "그 실과는 내 입에 달았구나" (아 2:3). 즉 그분의 구속의 결과는 우리에게 보배롭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입술과 입을 즐거워 합니다. "입은 심히 다니" (아 5:16).

   우리는 주님의 아름다움을 즐거워합니다. "왕은 인생보다 아름다워" (시 45:2).

   우리는 주님의 이름을 즐거워합니다. "네 이름이 쏟은 향기름 같으므로' (아 1:3).

   우리는 주님의 지위를 즐거워합니다. "나의 사랑하는 자는 희고도 붉어 만사람에 뛰어난다" (아 5:10).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서 발견되는 우리 주님은 매력적이시고, 사랑스러우시고, 아름다우십니다. 사랑하는 독자여, 당신은 이 진짜 꿀을 즐기고 있나요? 하나님의 말씀에서 이 꿀을 먹고 있나요? 하나님 아들을 기뻐하고 있나요? 그분은 이러한 분이십니다.*


   만 사람에 뛰어나신 그분은

   으뜸으로 아름다우십니다.

   전체가 사랑스러우신 그분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으십니다.

   모든 피조물의 주님이면서도

   갈보리에서 매달렸던 그분은

   나를 사랑하사 자신을 내어주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 A. P. 깁스

Posted by 행복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