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해 봅시다]


                                                엘리야 시대 생애 (2)

                                                                                                                                                    C. H. 매킨토시


   2. 숨어 있는 선지자(1)


   우리의 선지자가 그의 증언을 마치자마자 그는 다시 대중의 시야에서 떠나 홀로 숨어 있으라는 명령을 받았다.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너는 여기서 떠나 동으로 가서 요단 앞 그릿 시냇가에 숨고" (왕상 17:2-3).

   이 말씀은 깊은 교훈으로 가득하다. 엘리야는 이스라엘 앞에서 매우 뛰어난 위치를 차지했다. 그가 그렇게 된 것은 전에 은거하면서 하나님의 임재 속에서 훈련 받은 결과였다. 그러나 아직도 섬기는 분을 위해서 그는 다시 한번 숨는 것이 필요하다고 여기신 것인데 그것은 그가 형제들 앞에서 높은 위치를 차지하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이 모든 것은 우리를 위한 교훈으로 가득하다. 우리는 낮은 위치를 지켜야한다. 육신은 부서져야한다. 은밀한 중에 훈련 받는 시간이 공적으로 행동하는 시간보다 훨씬 많아야 한다. 말하자면 엘리야는 공적인 증언을 할 때 잠시 동안 서 있었고 홀로 하나님과 있은 후에 즉시 3년 반 동안 숨어있도록 인도되었다.

   아! 사람은 정말 믿을것이 못된다. 우리는 명예로운 자리를 지키기에 얼마나 미숙한가! 우리는 얼마나 쉽게 우리 자신과 하나님을 잊어버리는가!  이리하여 우리는 곧 우리의 선지자가 숨어 지내는 것이 대단히 필요함을 보게 될 것이다. 주께서는 그의 성정을 알고 계셨고, 그의 상태에 합당하게 그를 다루셨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공적으로 증거하는 도구로서 우리 자신이 얼마나 신뢰할 수 없는 존재인가를 생각하면 정말 부끄럽다. 우리는 육신으로 가득 차 있다. 우리는 우리가 상당한 존재인 것처럼 착각하며,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서 많은 일을 할 것이라는 망상을 한다. 여기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의 선지자처럼 "우리 자신을 숨기라"는 말을 듣고 대중을 떠나서 우리 아버지의 거룩하고 고요한 존전에 나아가 우리가 아무것도 아님을 배워야 한다.

   영적인 사람은 이 모든 것이 중요함을 즉시 알아차린다. 사람의 눈에는 그것은 항상 결코 충분하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어떠한 피조물도 그것을 감당할 수 없다. 하나님의 아들 그분 자신이 소란하고 번잡한 도시를 떠나 한적한 곳을 찾으셨다. 그분은 조용히 물러가 거기에서 기도하셨고, 은밀히 하나님과 교통하셨다. "새벽 오히려 미명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 (막 1:35).

   그러나 그것은 그분이 자신을 숨길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찬송 할지어다. 지상에서 그분의 행로 전체가 자신을 숨기는 것이었으니! 그분의 섬김의 정신은 이러한 말로 표현되었다. "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니라" (요 7:16). 모든 주의 종들이 이것을 좀 더 깨닫기를! 우리 모두가 자신을 우리가 원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숨기기를 원한다.

   악마는 그렇게 가련하고 어리석은 마음에 역사해서, 우리의 생각이 우리 가까이에서 그렇게 결정하도록 역사한다. 그렇다. 아주 빈번히 우리는 우리의 섬김과 하나님의 진리를 우리 자신의 영광을 보여주기 위한 근거로 삼는다. 그러므로 우리가 별로 쓰임 받지 못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주께서 주님 자신에게 영광을 돌리지 않는 사역자들을 어떻게 쓰실 수 있겠는가? 어찌 계속 자기 이름을 내려는 이스라엘 백성을 사용하실 수 있는가? 우리의 은혜로우신 주인의 이름을 위하여 우리는 진정으로 좀 더 겸손해지고 자기를 낮추기를 기도하자. 그리고 자신을 죽은 개나 벌레, 만물 중에 찌끼요 아무것도 아닌 자로 여기자.

   엘리야는 홀로 그릿 시냇가로 물러가서 여러 날 동안 체류했다. 그러나 그의 필요한 생계에 관해서 이스라엘의 주 하나님으로부터 놀라운 약속도 없었다. 다만 "내가 거기서 까마귀들을 명하여 너를 먹이게 하리라" (왕상 17:4) 는 은혜로운 약속이 있었다. 주께서는 대중의 시야에서 떠나 숨어 사는 사랑하는 그의 종을 돌보셨고, 까마귀를 통해서 그의 필요를 채우셨다. 얼마나 기이한 공급인가! 게걸스럽게 먹기를 좋아하는 까마귀가 매일 방문하기를 기대하는 것이 포함된 그의 지속적인 믿음의 훈련은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 그러나 엘리야를 살린 것은 까마귀들이 아니라 하나님이다. 그의 영혼은 보배로은 말씀, "내가...명하여" 였다. 그가 숨어있는 곳에 하나님이 함께 하셨고, 그는 믿음으로 살았다. 이렇게 동요하지 않는 단순함 속에서 하나님의 약속에 매달리는 영혼은 진실로 얼마나 행복한가!

   하나님의 돌보심과 임재 속에서 환경의 힘을 초월하여 영혼이 고양되는 것은 얼마나 복된 일인가! 엘리야는 사람을 떠나 자신을 숨기고 있었고, 하나님께서는 그동안 하나님 자신을 엘리야에게 보여주셨다. 이러한 일은 늘 그러할 것이다. 자신을 버리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그분 자신을 능력으로 우리에게 계시하심을 확신하게 될 것이다. 엘리야가 공적으로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고 고집했다면 그는 아무 공급도 받지 못하고 버려졌을 것이다. 그는 숨어야만 한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공급과 회복의 강물은 오직 숨어서 자기를 낮추는 데서 흘러나오기 때문이다. "내가 까마귀들을 명하여 거기서 너를 먹이게 하리라." 그 선지자가  '거기' 가 아닌 다른 곳에 있었다면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아무것도 얻지 못했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치는가? 우리의 영혼은 어찌하여 그렇게 빈약하고 무기력하게 되었는가? 왜 우리는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회복케하는 강물을 마시지 못하는가? 우리가 충분히 자신을 숨기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능력과 회복을 기대할 수 없는 것은 지상의 자기 과시를 목적삼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자신을 위해서 우리에게 능력을 주신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좀 더 깨달을 수만 있다면 우리는 좀 더 영적인 능력을 발휘하게 된다.

   그러나 "거기서" 라는 작은 단어에는 많은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엘리야가 하나님의 공급을 받기 위해서는 다른 곳 말고 바로 "거기에" 있어야 하며 이것은 오늘날 신자들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신자는 하나님께서 그를 어디에 두기를 원하시는지 알고 반드시 거기에 거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가 있어야할 곳을 선택할 권리가 없다. 이는 주께서 "우리의 거할 곳을 명하시고." 우리가 이것을 알고 그분의 지혜로우시고 은혜로우신 명령을 순종하는 것이 행복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릿 시냇가에 홀로 있는 것이다 거기서 까마귀들을 명하여 선지자에게 떡과 고기를 공급하도록 하셨다. 그는 다른 곳을 다니기를 원했는지도 모르지만. 그렇게 했다면 그는 스스로 필요를 공급해야 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공급하도록 맡기는 것이 얼마나 더 행복한 길인가!  엘리야는 그렇게 생각했기 때문에 그릿 시냇가로 갔다. 주께서는 "까마귀를 명하여 거기서 그를 먹이셨다." 하나님의 공급은 하나님이 지정하신 곳에서만 얻을 수 있.

   이와 같이 엘리야는 한적한 곳에서 한적한 곳으로 이동했다. 그는 이스라엘의 주 하나님의 메시지를 가지고 길르앗 골짜기에서 와서 이스라엘의 왕에게 그는 다시 하나님의 손에 의하여 방해받지 않는 한적한 곳으로 보내졌고 거기에서 영적인 훈련을 받고 하나님 앞에서 새 힘을 얻었다. 누가 은밀히 배운 거룩하고 소중한 저 교훈 없이 지내기를 바라겠는가! 누가 아버지의 손으로 받는 훈련의 결핍을 원하겠는가! 누가 사람의 눈에서 멀리 벗어나서 세상과 자연적인 영향을 떠나 하나님의 순전한 임재의 빛 속으로 인도되는 것을 원치 않겠는가! 거기에서는 육신과 주변의 모든 것이 거룩한 판단에 따라 나타나고 평가된다. 한마디로, 누가 하나님과 홀로 함께하기를 원치 않겠는가! 홀로라는 말은 단순히 감상적인 표현이 아니라 실제적으로 경험적으로 홀로임을 의미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산에서 모세와, 지성소에서의 아론과, 우리의 선지자의 홀로됨과 같고, 밧모섬에서의 요한과 같으며, 무엇보다도 그 산위에 계셨던 주님의 경우와 같다.

   여기에서 홀로 하나님과 함께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탐구해보자. 그것은 자신과 세상을 부인하는 것이며, 영(靈) 을 하나님의 생각과 그분의 완전함과 뛰어남이 차지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것은 그분의 선하심이 우리 앞을 지나게 하는 것이며, 그분이 우리를 위하여 우리 안에서 행하시는 위대한 분으로 보는 것이다. 또한 육신과 그 논리, 세상과 그 방법, 사탄과 그의 고소를 초월하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를 통하여 단순하게 모든 것을 배제하고 이 거룩한 한적한 곳으로 우리가 인도되는 것을 느끼는 것이다.

   이것들은 우리가 홀로 하나님과 함께함으로 되는 어떤 결과이다. 그러나 사실 이것은 다른 사람에게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이는 영적인 마음을 가진 성도 각자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적어도 우리가 갈망하는 것은 우리 아버지의 은밀한 임재 속에서 발견되는 것이며, 우리의 성격을 유지하려고 힘쓰는 지루함과 가련함을 처리하고, 기쁨, 자유, 평화 그리고 성소의 완전한 단순함을 아는 것이다. 그 성소에서는 하나님의 다양한 속성과 완전함이 우리 영혼 앞에서 떠올라서 말할 수 없는 축복이 우리를 충만케 한다. 그 휘장 안에서 나의 거할 곳을 찾는 것과 하나님이 나의 소유임을 아는 것에 실패할 수 없으며, 이는 말로 할 수 없는 하나님의 기쁨의 샘이다.

   이렇게 엘리야는 행복하게도 그릿 시냇가에 홀로 있었지만, 믿음의 삶에 계속되는 격한 훈련이 면제된 것은 아니다. 사실 까마귀들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선지자를 매일 찾아갔고, 그릿 시내는 조용히 방해받지 않고 흘러갔다. 그리하여 선지자에게 떡이 주어졌고, 그에게만은 식수가 보장되었기 때문에 그는 심판의 채찍이 계속 그 땅에 퍼져나간 것을 잊었을 것이다.

   그러나 믿음은 시험을 치러야한다. 믿음의 사람은 그의 그늘에 정착하는 것이 허락될 수 없다. 그는 그릇을 비워야한다. 은혜를 통하여 자기의 곤란을 극복해 왔고, 다른 사람의 곤란과 싸우려고 부름 받았다. 그러므로 그 선지자는 시험을 치르는 것이 필요한데 그것은 그가 그릿 시냇물을 의지하는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의지하는지를 알아보기 위한 시험이다. "얼마 후에 시내가 마르니라."

   육신의 연약 때문에 우리는 믿음이 환경에 좌우될 위험에 처해있다. 환경이 좋을 때는 우리 믿음이 강하다고 생각하고 역으로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믿음은 결코 환경을 보지 않는다. 그것은 하나님을 직시한다. 그것은 오로지 하나님과 그분의 약속과만 관계있다. 엘리야는 하나님만 의지 했다. 그릿 시내가 계속 흐르든지 말든지 그것은 그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그는 이렇게 말할 수 있었다.


   헛되이 그 시내는 흐르다가 마르나, 나는 여전히 샘을 소유하고 있노라.


   하나님은 여전히 그의 불변의 마르지 않는 샘이었다. 그 시내는 두루 퍼진 가뭄의 영향에 글복했지반 어떠한 가뭄도 하나님께 영향을 줄 수 없으며, 선지자는 이것을 알았다. 그가 알기로는 하나님의 말씀은 그의 확실한 분복이었다. 그리고 그 말씀이 그릿 시내가 마르는 확실한 원인이었다. 그 사건은 그가 그 언덕을 방황하는 동안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리고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너는 일어나 시돈에 속한 사르밧으로 가서 거기 유하라. 내가 그곳 과부에게 명하여 네게 음식을 주게 하였느니라" (왕상 17:8-9).

   엘리야의 믿음은 여전히 동일한 "내가...명하여" 라는 흔들리지 않는 말씀의 기초에 두어야했다. 진실로 얼마나 복돤 일인가! 환경은 변하고 인간의 일은 실패한다. 피조물의 흐름은 고갈되지만,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히 동일하다. 선지자는 위에서 온 신선한 명령으로 조금도 흔들리지 않은 것 같다. 결코 그럴 수 없었다. 이는 옛 이스라엘이 그러했던 것처럼 그는 구름이 이동하는 대로 장막을 치고 거두는 법을 배웠기 때문이다. 옛날의 이스라엘 진영은 안식의 땅을 향하여 계속 진군하는 하늘 병거의 움직임에 주목하도록 부름 받았다. 광야 여기저기에서 그들이 쉬는 곳에서 멈추는 것을 볼 수 있다. 엘리야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주의 말씀" 에 벗어나지 않고 순종하여 그릿 시내 외로운 언덕에 자리를 잡고, 시돈 사렙다로 가는 고단한 길을 밟기도 했다.

  옛날 이스라엘은 그들의 어떠한 계획도 허락되지 않았다. 여호와께서 그들의 모든 것을 계획하고 조정하셨다. 여호와께서 그들이 언제 어디서 진행하고 멈출 것을 말씀하셨다. 여러 기간을 두고 그들 위에 구름의 움직임에 의해서 그의 기뻐하시는 대로 그들에게 지시하셨다."이틀이든지 한 달이든지 일 년이든지 구름이 성막 위에 머물러 있을 동안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진영에 머물고 행진하지 아니하다가 떠오르면 행진하였으니 곧 그들이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진을 치며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행진하고 모세를 통하여 이르신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여호와의 직임을 지켰더라" (민 9:22-23).

   이것이 애굽에서 가나안까지 가는 동안 구속 받은 주의 백성들의 행복한 상태였다. 그들을 자기들의 움직임에 관한한 결코 그들 자신의 길을 선택할 수 없었다. 구름이 이동하고 멈출 때에 어떤 이스라엘 백성이 움직이기를 거절했다면, 광야에서 아사했을 것이다. 그들이 여호와를 따르는 동안 반석과 만나가 그들을 따랐다. 다른 말로 하면 음식과 마실 것은 단순한 순종의 길에서만 찾을 수 있었다. 그것은 엘리야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에게는 그 자신의 의지가 허락되지 않았다. 그는 그릿 시내로 갈 때나 사렙다로 갈 때에도 자기 뜻대로 그 시간을 결정할 수 없었다. "여호와의 말씀"이 그의 모든 것을 결정했고 그 말씀을 순종할 때그는 생명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 모든 것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얼마나 놀라운 교훈인가! 순종의 길만이 행복의 길이다. 우리가 육신을 제어하는데 성공할수록 우리의 영적 상태는 훨씬 더 활기차고 강건할 것이다. 순종 만큼 영혼의 건강과 활력에 도움이 되는 것은 없다. 순종에 힘씀으로 힘을 얻는다. 이것은 모든 경우에 사실이며, 특히 주님의 사역의 능력 안에 거하는 사람들에게 특별히 그러하다. 쓰임 받기를 원하는 사역자들은 순종 가운데 걸어야 한다.

   후에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 여호와가...하나님이면 그를 좇고" 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은 놀라운 일이다. 그의 길이 자의적이고 반역적인 정신을 드러냈다면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종의 길은 순종의 길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종이기를 포기한 한 것이다. 종이라는 말은 순종과 분리할 수 없는 말이다. 이것은 일과 일군을 분리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종" 도 다른 사람이 주시한다고 생각하며 벨이 울리면 움직여야 한다.

   우리 주님의 벨소리에 좀 더 민감한다면 우리를 호출하시는 주님의 부름에 더 잘 준비된 것이다. 그것은 " 주여 말씀하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라는 대답이 합당하다. 주의 말씀이 우리를 우리 형제들 가운데로 부르시든지 아니면 형제들로부터 불러내어서 은퇴하게 하시든지 우리의 대답은 항상 "주여 말슴하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라고 해야 한다. 주의 말씀과 종의 예민한 귀가 우리의 모든 필요를 채우는 것이며 우리를 안전하고 행복한 길로 안내할 것이다.

   순종의 길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지속적인 자기를 부인하고 눈을 주님께 고정되고 우리 양심이 그의 진리의 영향 아래 있을 때만 추구할 수 있는 길이다. 거기에는 순종할 때마다 풍성한 보상이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육신과 혈기가 배제되어야 하며,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의 선지자의 길이 이것을 증거한다. 그는 먼저 그릿 시내로 가서 머물러 까마귀의 돌봄을 받으라는 명령을 받았다. 어떻게 혈과 육이 이것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

   그 후에 다시 시냇물이 말랐을 때, 멀리 있는 시돈 땅으로 부름 받았고, 거기에서 거의 굶어 죽을 처지에 놓인 궁핍한 과부가 먹여 살렸다. "너는 일어나서 시돈에 속한 사르밧으로 가서 거기 유하라. 내가 그곳 과부에게 명령하여 네게 음식을 주게 하였느니라" 는 명령이 있었다.

   그가 그곳에 도착했을 때 외관상 엘리야는 어떤 확증을 얻었는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그가 주변 상황을 주목했었다면 그에게는 모든 것이 의심과 두려움으로 찻을 것이다. "그가 일어나 사르밧으로 가서 성문에 이를 때에 한 과부가 그곳에서 나뭇가지를 줍는지라. 이에 불러 이르되, 청컨대 그릇에 물을 조금 가져다가 내가 마시게 하라. 그가 가지러 갈 때에 엘리야가 그를 불러 이르되, 청컨대 네 손의 떡 한 조각을 내게로 가져오라. 그가 이르되,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의 사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떡이 없고 다만 통에 가루 한 웅큼과 병에 기름 조금 뿐이라. 내가 나뭇가지

두엇을 주어다가 나와 내 아들을 위하여 음식을 만들어 먹고 그 후에는 죽으리라" (왕상 17:10-12).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곳에 이르렀을 때 선지자의 눈에 보이는 것은 바로 이것이었다. 정말로 육신적으로는 우울하고 실망스런 것이었다. 그러나 엘리야는 혈육과 의논하지 않았다. 그의 영은 변하지 않는 여호와의 말씀으로 지탱되었다. 그의 확신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근거를 두었고, 그는 그의 주변의 상황의 도움이 필요 없었다. 유한한 인간의 눈에는 어둡고 심각하게 보였는지 모르지만, 믿음의 눈에는 구름을 뚫고 그 모든 것을 초월하여 볼 수 있었다. "여호와의 초월적인 말씀 안에서 믿음으로 세워진 확고한 기초."

   하나님의 말씀은 얼마나 보배로운가!  시편 기자는 잘 표현했다. "주의 증거로 내가 영원히 기업을 삼았사오니 이는 내 마음의 즐거움이 됨이니이다" (시119:111). 순전하고, 썩지 않는 영원한 진리! 빼앗길 수 없는 고귀한 복을 주신 우리 하나님을 찬앙하자! 이 땅의 사물이 사라지고, 세상과 그 정욕이 지나가며, 모든 육체가 마른 풀 같이 소멸되어도 그것은 영원하고 믿을만한 실제로 남게 될 것이다. "할 수 없는 그의 은사를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고후 9:5).

   선지자가 사렙다에 도착했을 때 그의 눈에 보이는 환경은 어떠했는가? 굶어 죽어가는 한 과부와 그의 아들, 땔감 나무 두어 개, 그리고 한줌의 밀가루가 다였다! "그곳 과부에게 명하여 네게 음식을 주게 하였느니라." 이 모든 것이 어려운 시련이며 얼마나 진실로 기이한 일인가! 그러나 엘리야는 불신하여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았고 오히려 믿음이 강해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그는 하늘과 땅의 주인이신 지고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이 그의 필요를 채우실 것을 알고 있었다. 기름도 밀가루도 없었지만 그에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그는 환경 너머에 환경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바라보았다. 그는 과부를 보지 않았고 하나님을 주목했다. 그는 한줌의 가루를 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을 주목했다. 그리하여 보이는 대로 하면 좌절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도 그의 영은 지극히 평온했고 안정을 유지했다. 그는 의심의 그림자도 없이 이렇게 말할 수 있었다.

"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나 여호와가 비를 지면에 내리는 날까지 그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그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왕상 17:4). 여기에 불신의 말에 대한 믿음의 답이 있다.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것이 모든 것을 확정한다. 영이 하나님의 약속을 깨닫는 순간에 불신의 논쟁을 끝낸다. 불신은 영혼과 하나님 사이에 환경을 놓는다. 믿음은 영혼과 환경 사이에 하나님을 모신다. 이것이 매우 중요한 차이점이다. 우리가 믿음의 에너지와 능력 가운데 걸으며 믿음으로 영광을 받으시는 하나님을 찬양하기를 기도한다!

   그러나 특히 주목할 아름다운 이 장면에서 도 다른 요점이 있다. 그것은 믿음으로 걷지 않는 사람의 영혼 주변에 죽음이 감돈다는 것이다. "우리가 그것을 먹고 죽을 것이다" 라는 과부의 말이다. 죽음과 불신은 서로 분리할 수 없게 연결되어 있다. 영은 믿음의 에너지로만 생명의 길을 따라 걸을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에너지원이 없는 믿음은 생명도 없고 능력도 없고 성장도 없다.

   과부가 이러한 상태였다. 그녀의 삶의 희망은 한줌의 가루와 곧 떨어질 기름에 있었다. 이것들밖에는 그녀에게 생명의 원천도 삶의 희망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녀의 영혼은 죽음을 다스리시는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교제의 참된 축복을 아직 알지 못했다. 그녀의 소망은 눈에 보이는 것뿐이었다. 아, 한줌의 가루와 곧 고갈될 약간의 기름만 의지하는 소망이 얼마나 가련하고 연약하고 흔들리기 쉬운가! 피조물 만을 의지하는 기대감이 얼마나 부족할 것인가!

   우리는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한줌의 가루만큼 하찮고 초라한 어떤 것을 의지하는 것이 너무 쉬운 것은 아닌가? 우리는 정말로 그렇다. 그리고 영혼이 하나님을 이해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반드시 그렇게 될 것이다. 그것은 믿음에 관하여 하나님이거나 무(無)이다. 하나님의 손 안에서 믿음의 관점으로 보면 한줌의 가루가 있으면 충분할 것이다. 그것은 언덕 위에 천 개의 가축의 경우만큼 충분한 양이다. "여기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졌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삽나이까?" (요 6:9). 이것이 인간의 마음의 소리이다. 그러나 믿음은 결코 "이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느냐"고 말하지 않는다. 불신은 우리가 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믿음은 하나님은 능히 하신다고 말한다.

   우리의 주제에서 흥미 있는 요점을 바꾸기 전에 이 원칙을 가련하고 양심의 가책을 받는 죄인에게 적용하는 것은 잘못하는 것이 아닐 것이다. 그러한 사람은 그의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그리스도의 공로를 의지하기보다는 얼마나 자주 헛된 근거에 매달리는가! 그리스도의 공로만이 하나님의 의의 요구를 영원히 만족시켰고, 그로 인하여 죄책에 고통 받는 영혼의 갈망을 참으로 만족시킨다.,

   "물이 동할 때 나를 못에 넣어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요 5:7). 간의 모든 도움을 벗어나 바로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것을 배운 적이 없는 사람들의 고백이다. "나를 도와줄 사람이 없나이다"는 가련한 죄인의 불신의 말이다. 그러나 신자는 "나에게 예수께서 계신다" 고 말하며, 주께서 도우신다고 말한다. 그 보혈의 효력은 없어지지 않을 뿐 아니라 그 소중함이 감소되지 않는다. 그것은 주께서 그의 구속받은 자들이 하늘 집에서 영원히 안전하게 거할 때까지 계속된다. 이 글이 불쌍하고 머뭇거리며 두려워 떠는 죄인의 요구를 만족시킨다면, 그리고 그가 하나님의 증거를 믿기만 하면, 하나님의 고귀한 진리로부터 오는 위로를 받도록 나는 그를 초대할 것이다. 신자는 그리스도를 그 자신과 죄 사이에 두고, 불신자는 그의 죄를 그 자신과 그리스도 사이에 둔다. 이것이 그들의 커다란 차이점이다.

   신자에게는 그리스도가 온통 마음을 빼앗는 목적이다. 그가 알기로는 하나님께서는 지금 심판의 보좌에 계시지 않고 자비의 자리에 계시다면 그의 생각은 죄의 문제로 차 있을 것이다. 그러나 주께서 자비의 자리에 앉아 계시다는 것을 안다면, 그의 생각은 단순히 보혈로 차게 되어서 그의 이름을 찬양할 것이다. 아, 하늘의 마음과 더 단순하게 계속 교제하고, 세상의 생각과 환경에서 벗어나 완전히 몰두하기를! 주께서 그의 모든 성도들에게 이 두 가지 축복을 더욱더 허락하시기를!*

Posted by 행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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