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신자 양육]


                                                                 그리스도인 생활

                                        이정표들(8)

                                                                                                                                            - D. 힌튼

    8. 구혼


   우리 중 다수가 그 다음에 도착하게 되는 이정표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특정한 이성에게 끌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상대방을 인생의 반려자로 삼고 싶은 소원을 갖게 됩니다.

   만약 우리가 이렇듯 누군가에게 구혼하려 한다면 매우 진지하게 절차를 밟아나가야 합니다. 믿는 자가 장난삼아 연애를 하거나 여러 사람에게 구혼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이러한 행동을 한다면 그것은 정서적으로 해악을 끼칠 뿐 아니라 하나님 자녀의 합당한 품행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영적인 문제들에서 우리를 주관합니다. 뿐만 아니라 그 말씀은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서 결정적인 요소가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자가 불신자에게 구혼하는 것은 성경에 위배되는 일임을 명확히 알아야 합니다.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고후 6:15).

   우리의  신앙고백은 진실된 것인가요? 그렇다면 우리는 불신자와 더불어 진정한 사귐을 갖지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불신자와는 인생의 가장 중요한 것들을 공유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혼했는데 이전 배우자가 살아 있는 그런 사람에게도 구혼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는 그가 믿는 자라 하더라도 그렇습니다. 결혼관계는 일평생 지속되며 이것은 이혼에 의해서 깨어질 수 없습니다. 국가의 법이 이혼을 허용한다 해도 말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이런 사람은 자유롭게 또 다시 결혼할 수 없는 자입니다. 그는 원래의 결혼관계에 여전히 구속받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자를 결혼상대자로 선택한다 해도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두 사람은 자신들이 성경의 권위에 대해 비슷한 관점을 갖고 있는지를 반드시 확인해야 하는 것입니다. 만약 두 사람이 서로 다른 원리들을 가지고 교회생활을 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런 가운데서 어떻게 같은 교회에서 떡을 떼면서 참된 하나됨을 이룰 수 있을까요? 과연 하나님을 나타낼 수 있을까요?

   또 한 가지 주의사항이 있습니다. 그것은 청년 형제들이 자신의 배우자가 될 자매가 누구인지에 늘 촉각을 곤두 세우면서 교회생활을 하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상대방과 결혼하기 원하는 자신의 소원에 대해 잘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상대방에 대한 참된 마음에서 비롯된 것인가요? 아니면 다른 사람들도 다 그렇게 하기 때문에 또는 결혼하지 못할까봐 조바심이 나서 구혼하는 것인가요? 독신으로 사는 것은 전혀 실패한 삶이 아닙니다. 고린도전서 7장 30-35절이 그것을 명확히 말해주고 있습니다.

   "...장가가지 않은 자는 주의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주를 기쁘시게 할꼬 하되 장가 간 자는 세상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아내를 기쁘게 할꼬 하여 마음이 나누이며, 시집가지 않은 자와 처녀는 주의 일을 염려하여 몸과 영을 다 거룩하게 하려 하되 시집 간 자는 세상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남편을 기쁘게 할꼬 하느니라."

   모든 사람이 결혼하는 것은 결코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사도가 선명하게 밝혀주었듯이, 배우자가 장애물이 되는 섬김의 영역들이 존재합니다. 그러나 결혼하지 않은 자들은 이러한 주님의 일들에 대해서 자신들의 나누이지 않은 관심을 쏟아 부을 수 있습니다. 만약 바울이 결혼을 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절대로 주님을 섬기는 데에 그만큼 완전하게 자신을 드리지 못했을 것입니다.

   또 한 가지의 주의사항이 있습니다. 그것은 상대방의 육체적인 매력에 주된 관심을 갖지 말아야 한다는 점입니다. 이는 육체 안에 있는 영혼이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이뿐 아니라, 재산이나 직업적인 유망함도 결정적인 요소는 아닙니다.

   보아스는 룻을 반려자로 삼고자 했습니다. 그 이유는 이삭을 주워 모을 때  그녀가 보인 태도 때문이었습니다. 또한 그녀가 시어머니인 나오미에게 충성됨을 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자신의 배우자가 될 가능성이 있는 이성에게서 무엇을 기대해야 하는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누가 자신의 배우자가 될지를 어떻게 해야 알 수 있을까요? 우리가 이러한 질문을 던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다른 모든 문제들과 같이, 우리는 이 문제 역시 아버지께로 가져가야 합니다. 하나님께 그분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를 물어보십시오. 그러면서 합당한 배우자를 예비해 달라고 구하십시오.

   혹시 우리는 특정한 대상을 마음에 두고 있나요? 그렇다면 그 사람이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이인지를 물으십시오. 우리는 아브라함의 종이 했던 이 말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여호와께서 길에서 나를 인도하사" (창 24:27). 따라서 우리는 자신을 하나님의 손에 맡기고 그분의 인도하심을 받을 준비를 갖춰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절대로 이 문제를 스스로 밀고나가려 해서는 안 됩니다. 만약 우리의 소원이 하나님의 뜻과 일치한다면 그분께서 확실한 길로 인도해주실 것입니다.

   이제 두 사람이 만나게 되면 이 문제든지 아니면 다른 어떠한 문제이든지 서로 간에 허심탄회하게 의논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즉 우리는 완전한 정직함을 가지고 서로를 대해야 합니다. 당신의 진짜 생각과 확신을 숨기려 하지 마십시오. 호감을 갖고 있는 이의 마음을 상하지 않게 하려고 그렇게 할 수 있는데 이는 무익한 일입니다. 시작할 때부터 완전히 정직하게 서로를 대하는 것이 필수적입니다. 만약 이렇게 하지않는 미래에 큰 불행을 겪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영원히 숨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는 자신의 몸을 거룩하고 순결하고 구별되게 보존해야 합니다. 현시대의 부도덕한 기준들이 우리에게 영향을 미쳐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만약 그런 영향을 받는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한 기준들을 떠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기준들은 우리의 유익을 위한 것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최대한의 관심을 거기에 쏟아야 하겠습니다.

   신자의 몸은 "성령의 전" 입니다(고전 6:19). 따라서 지역교회 안에서 어떤 모습으로든 섬김을 행하려 한다면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께 자신의 몸을 "거룩한 산 제사로" 드려야만 합니다(롬 12:1). 또한 우리는 다음의 말씀도 상기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 함이라. 곧 음란을 버리고" (살전 4:3).

   구혼과 관련하여 우리가 절대로 걸려들면 안 되는 사단의 덫은 무엇인가요? 그것은 불신자와 사귀는 것입니다. 실상 그는 우리가 하나님의 쓰임을 받아 구원으로 인도해야 하는 자인데 말입니다. 이것은 여러 가지 결과들을 낳는데 대부분의 경우 믿는 자가 신앙을 버리는 쪽으로 귀결됩니다. 어떤 자들은 여기서 고린도전서 7장 12-14절을 인용합니다. 자신들의 행동을 뒤받침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러나 이 구절들은 두 불신자가 결혼한 후 어느 한쪽이 구원을 받은 경우에 해당합니다.

   "...만일 어떤 형제에게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있어 남편과 함께 살기를 좋아하거든 저를 버리지 말며 어떤 여자에게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있어 아내와 함께 살기를 좋아하거든 그 남편을 버리지 말라.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아내로 인하여 거룩하게 되고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남편으로 인하여 거룩하게 되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너희 자녀도 깨끗지 못하니라. 그러나 이제 거룩하니라."

   제일 처음부터 우리는 자신이 어떠한 기준을 따라서 선택할지를 결정해 놓아야 합니다. 당신은 청년 형제인가요? 그렇다면 참된 영적 돕는 배필로 성장할 수 있는 자매를 찾으십시오. 그녀는 당신과 영적인 활동들을 함께 하고 당신을 격려하여 성경 연구 및 주님 섬기기에 많은 시간을 내도록 격려해 줄 것입니다. 심지어 둘이서 함께 하는 시간을 희생하면서까지 그렇게 할 것입니다.

   당신은 청년 자매인가요? 그렇다면 하나님의 것들을 첫번째로 추구하며 모든 결정을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하여 내리는 그런 형제를 찾으십시오.

    우리는 "사랑" 이라는 단어의 현대적인 사용에 현혹되지 말아야 합니다. 사랑은 겉모습이 매력적이거나 감정적으로 흥분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이보다 훨씬 더 깊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사랑은 상대방에게 최상이 되는 것을 소망하는 것입니다. 비록 이를 위해 우리 자신이 커다란 대가를 치러야 한다 해도 말입니다.

   "좋아하다" 와 "사랑하다" 의 현저한 차이점이 무엇인지 아나요? 사랑은 우리의 온 인격이 상대방에게로 다가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그 사람을 위해 기꺼이 희생하면서 말입니다.*

Posted by 행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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