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장 18~25절말씀

   조준안 여주교회


신천지 이단에서 강조하는 계시록을 모르면 지옥에 간다는 말이 어패가 있는 것은 열두 제자 중에 사도요한만 계시록에 계시를 받고 대부분의 열한제자는 그 전에 순교 당한다. 그렇다면 그들이 지옥에 갔다는 말인가? 결코 그럴 수 없다. 또한 하나님께서 어떻게 사람의 몸으로 오셨는가? 이단들은 이것을 악용하지만 실제 예수님은 하나님으로서 사람의 몸을 입고 역사 속에 오셨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은 인간의 죄를 해결하는 방법은 점이나 흠이 없는 제물이 필요 했다. 죄의 삯은 사망이므로 피 흘림을 통해서만이 죄 사함이 있으므로 온전한 몸을 필요로 했던 것이다. 예수님께서 누구신가를 모르면 죄용서의 길이 없다. 역사적으로 많은 이단들이 예수님의 신성을 부인한다든지 또 인성을 부인함으로 어떤 한 쪽을 강조할 때 이단이 된다. 어떻게 한 사람 안에 신성과 인성이 들어있는가는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다. 어떤 교회에서 이단으로 규정하는 것이 이단이 아니라 성경의 가르침을 부정할 때 이단이 된다. 교회에 다닌다고 다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다. 주님과 개인적인 관계가 분명해야 한다. 삼위일체는 이성과 지식으로 알 수 없다. 우리는 성경의 가르침을 믿을 뿐이다. 하나님의 일을 사람으로 알 수 없다. 다만 하나님의 영으로 알 수 있다. 우리가 바른  믿음 안에 거하기 위해서 성경을 계속 봐야한다. 그리하여 진리를 알 때, 우리가 평안과 자유를 누릴 수가 있다.

창세기 2장18절
하나님께서 인간이 독처하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 중에 좋지 않다는 표현이 처음 나온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은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하였다. 아담이 홀로 있는 것은 완전한 창조가 아니었다. 하나님은 삼위로 계셨다. 사회를 이루고 관계를 이루고 서로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는 관계였다. 하나님의 형상에는 영성, 인격성, 성품성, 사회성이 있다. 그래서 사람이 둘이상이 되어야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할 수 있다. 영안에서 생각과 사랑을 나눌 수 있는 관계여야 한다.


창세기2장19절
하나님께서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새를 지으시고 아담 앞으로 오게 한다. 그리고 아담이 무엇이라 부르는지 보시려고 그에게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그 이름이 되었다. 이 당시의 지혜와 지금 우리의 지혜는 비교할 수 없다. 범죄 후에 이러한 능력이 떨어졌다. 그는 동물들에게 이름을 주고 그 이름을 잊지 않았다. 지금보다 지혜가 상상할 수 없이 뛰어났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인정하시고 틀렸다고 하지 않고 태클이나 반박을 하지 않으셨다. 하나님과 인간의 친밀한 교제가 이루어졌다.


창세기2장20절
아담은 덩그러니 자기 혼자였다. 다른 모든 동물은 다 짝이 있어서 암수로 있었다. 통계에 보면 혼자 사는 사람이 빨리 죽는다고 한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돕는 베필을 지을 것을 계획하시고 실행하신다.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시고 반드시 지키시는 분이시다. 하나님께서는 인생이 아니니 식언치 않으신다고 하셨다.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말씀하시는 바를 지키신다. 어떤 대가와 희생을 치루더라고 지키신다.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과 그 말씀이 신실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이것을 확인할 수 있다. 하나님의 계획과 뜻 가운데 인류 역사가 이루어졌다. 하나님은 말씀하시고 지키지 않으시는 것이 없다. 성경은 우화나 신화가 아니다. 성경을 읽기 시작하면 자신이 바뀌기 시작한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깨닫게 된다.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은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 나는 어떤 것을 결심하고 하루에도 몇 번 바뀐다. 나는 믿을 수 없는 존재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천지가 없어져도 없어지지 않는다. 내 감정과 기분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을 의지한다. 하나님 말씀은 대부분 이루어지고 다시 오실 약속만 남아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불신자들도 지금은 종말이 왔다고 말한다. 지구 환경이 어떻게 돌아가는가? 과학자들이 이런 것을 경고한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다 예언하신 말씀들이다. 기근과 지진, 전염병, 기후 온난화 등이 있다. 인간은 이런 예언을 할 수 없다. 하나님의 말씀만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창세기 2장21절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셨다. 지금으로 말하면 마취한 상태와 같다. 하나님은 놀라운 능력을 가지고 계신다. 그가 고통 없이 깊이 잠들게 하신 것이다. 수술을 해도 고통을 느낄 수 없게 하셨다. 갈비뼈 하나를 빼내셔서 그것으로 여자인 하와를 만들게 된다. 사람으로는 이해할 수 없고 어떻게 그 갈비뼈가 사람을 만들 수 있을까라고 하지만 하나님에게는 쉬운 일이다. 마치 부모가 정상이다가 교통사고로 손가락을 잃거나 팔을 잃었을 때 태어날 자식이 그런 것이 없을 것이라고 걱정하는 부모는 없을 것이다. 지금은 과학이 옛날 맘모스가 멸망해서 얼음에 냉동된 것을 세포를 취해서 그것을 살려낸다고 할 정도가 되었다. 영화 쥬라기공원은 그런 과학을 배경으로 만든 것이다. 인간이 이렇게 할 수 있는데 하나님에게는 어려운 일이 아니다. 사람의 이름을 누가 지었는가? 사람보다 높은 관계가 이름을 짓는다. 동물들의 이름도 사람이 지었다. 부모가 아이의 이름을 지어준다. 이름 없이는 살 수 없다. 하나님과 인간은 친밀하고 스스럼없고 허물이 없는 관계였다. 왜 사람이 우울과 슬픔, 분노, 걱정, 근심, 두려움, 불안을 안고 살게 되었는가? 그 원인이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떠나기 전에는 이런 것이 없었다. 하나님의 뜻에 사로잡혀 하나님의 뜻과 생각이 일치됨으로 갈등이 없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즐거워하는 뜻을 따라 살기 원했다. 그러나 인간을 로봇으로 만들지는 않으셨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주셨다.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 즐거워하는 것을 자유롭게 할 수 있도록 하신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이 자유의지를 이용해서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보다 하나님을 대적하고 무시하고 멸시함으로 불순종하였다. 그래서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길로 감으로 그 길에 고통, 슬픔, 두려움, 저주와 죽음이 따르게 된 것이다. 우리는 마땅히 하나님을 기뻐하시고 즐거워하게 하시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러나 인간이 하나님을 배반하였다. 개를 키운다면 개를 좋아함으로 먹을 것을 주고 그들을 잘 돌보아 준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주인을 외면하고 나보다 다른 사람을 따르고 쫒아간다면 당장 죽일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 인간이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필요한 모든 것을 주시고 사랑하시는데 사람이 하나님을 등지고 온갖 죄악을 짓고 하나님을 싫어한다면 하나님은 우리를 어떻게 하시겠는가?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하사 인간을 구속할 계획을 가지시고 때가 차매 아들을 보내사 우리의 구속을 완성시키시고 부르시고 계신다. 하나님은 타락한 인간을 보면서 그 인간을 멸종시키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새로운 종의 인간을 창조하실 수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인간은 타락하자 각자 소왕국을 만들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런 인간을 무력이나 강압이나 억압으로 하지않고 그렇게 하실 수 있지만 사랑으로 온유와 인내로 참아오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어떤 존재인가를 아시면서도 그 은혜와 사랑으로 우리를 굴복시키기를 원하신다. 하나님께서는 매일 죄로 분노하시는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셨다. 우리의 죄는 크던 작던 숨길수가 없다. 변명할 수 없고 심판받을 수밖에 없다. 우리 목숨으로 죄를 해결할 수 없다. 인간이 용서를 구해도 회개할 수 없다. 우리 죄는 딱 한가지 밖에 없다. 죄의 삯은 사망이므로 죽음밖에 없다. 육신으로 죽고 지옥에서 하나님과 인간이 영원히 분리되는 둘째 죽음을 당해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죄없는 아들을 보내사 피 흘려 죽게 함으로 우리를 향한 속죄와 대속을 이루셨다. 벧전1장18~19절 은과 금으로 죄를 속하지 않고 점도 흠도 없는 보배로운 피로 하였다. 출12장에 보면 유월절이 나온다. 하나님께서 애굽의 모든 장자들을 치실 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흠없는 양을 잡아 문인방좌우 설주에 바르면 천사가 그 피를 보고 넘어간다고 하셨다. 그래서 유월절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예수님께서 우리가 받을 저주와 심판을 피를 흘리심으로 당해주셨다. 그 피를 마음에 믿으면 하나님의 심판이 지나간다. 할머니의 아들이 빚을 졌는데 감옥에 갈 수 밖에 없는 상황에 할머니가 그 많은 빚을 은혜로 다 갚아 주었다. 그렇다면 이 아들은 빚을 갚을 필요도 감옥에 갈 필요도 없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우리의 빚을 다 갚아주셨다. 이제 주님께서 이끄시는 대로 따라가면 된다. 이런 주님의 은혜를 아는 자들이 주님의 이름으로 모이는 일에 힘쓰고 주님의 선한 일에 힘써야 한다. 우리는 매 순간 결단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길을 열어주신다. 내가 구원받기 전에 내 인생의 주인이었다면 구원받은 후의 주인은 예수님이시다. 주님께 내 인생을 맡기고 주님의 결정에 따르고 주님중심으로 우선순위를 정하고 살아야 한다. 어떤 고난과 희생이 따라도 순종해야 한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책임져 주신다. 그렇지 않은 삶은 힘들고 고달프고 살 가치가 없는 것이다. *

Posted by 행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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