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과 함께 - 3월 31일
마태복음 5장 46-48절; 누가복음 6장 32-36절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세리들은 사회에서 증오를 받았고, 경멸을 당했고, 배척되었습니다. 이는 그들이 헤롯 일가나 로마에다 세금을 바친 까닭이었습니다. 또한 그들은 일하는 방식도 파렴치하고 악명 높았기에 멸시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도 사랑을 베푼다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너희가 만일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뇨? 죄인들도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느니라. 너희가 만일 선대하는 자를 선대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뇨? 죄인들도 이렇게 하느니라."
자연인은 친구는 사랑하지만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결코 하지 못합니다. 해를 당할 때 그의 본능적인 반응은 앙갚음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는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주님께서 이러한 명령을 내리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는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주님께서 이러한 명령을 내리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이처럼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속성입니다(롬 5:8,10). 하나님은 그분을 미워하는 자들을 사랑하십니다. 이는 주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땅에 계실 때, 주님은 그분을 저주하는 자들을 축복하셨고 그분을 무시하는 자들에게 선을 행하셨습니다. 또 주님은 그분을 모욕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는 과정에서 주님은 그분에게 고통을 가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를 올리셨습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어느 정도로 이같이 행해야 할까요? 기억하십시오. 사랑은 필요한 것보다 더 많이 행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내주하시는 성령님의 능력으로만 가능합니다. 즉 성령님이 우리의 마음을 변화시킴으로 인해 우리는 인간적인 좋은 성품이 아닌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인간적인 사랑은 그것이 최상의 경지에 올라도 절대로 자기유익을 추구함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원수를 사랑하도록 부르심을 입었고 이런 사랑은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은혜를 힘입지 않으면 이런 사랑을 베풀 수 없습니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여기서 "온전하다" 라는 단어는 이웃을 사랑한다는 문맥에서 사용되었기에 우리는 그런 의미로 해석해야만 합니다. 여기에다가 누가는 긍휼에 관한 생각을 포함시켰습니다. 그리고 마태는 사랑을 관련시켰습니다. 즉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은 보답을 얻지 못할자에게도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희생적이고 나눠주는 사랑을 나타내십니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사랑을 말과 행동으로 나타낼 때 신자들은 진정으로 온전해지고 성숙해집니다. 하나님처럼 사랑한다면 그것은 도덕적인 완전함이며 주님은 우리에게 그러한 완전함을 추구하라고 하십니다. 이런 사랑은 오직 하나님에게서만 비롯되며 이 사랑은 성령님을 통해서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되었습니다.(롬 5:5). 우리는 완전함과 성숙한 사랑을 베풀어야 합니다. 친구들과 형제들 뿐 아니라 대적들까지 끌어안음으로써 말입니다. 그것은 도덕적으로 성숙하게 해주며 우리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자녀임을 참되게 입증해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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