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등대]
주의 상과
주의 만찬(2)
- W. E. 바인
도덕적인 측면
주의 상은 도덕적인 측면을 말해준다. 여기에는 도덕적인 책임들이 있다. 주의 상에 참여함은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우리 자신이 죽었음, 우리의 죄의 몸이 멸하여졌음, 우리가 세상을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세상도 우리에 대하여 그러함. 세상은 종교적이고 정치적이고 사회적이다. 그리고 이러한 세상의 임금은 하나님의 대적이다. 그는 계속해서 '이 세상 신'으로 있다가 자신의 정해진 운명대로 멸망당할 것이다. 따라서 우리 자신을 그리스도와 동일시하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는 그분의 상에 앉는 특권을 누리며 그분이 우리에게 주시는 모든 것을 즐거워한다. 또한 우리를 위해 그분 안에서 공급되는 충만함을 경험한다. 이와 동시에 우리는 그분에게서 멀리 떨어진 모든 것에 대하여 죽는다. 이는 그분의 십자가를 인함이다.
고린도전서 11장은 무엇을 말해주는가? 주 예수님께서 만찬을 제정하셨고 여기에 참여하는 것은 주님을 기억하고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그분의 죽으심을 선포하는 것이다. 이때에 우리가 기억하는 주님은, 전에 죽으셨지만 지금은 살아 있는 분이시다. 또한 이때에 우리는 그분의 죽으심이 갖는 효력과 목적을 선언한다.
고린도전서 11장은 주의 상과 귀신의 상을 대조하지 않는다. 이 장에서는 주의 만찬이 우리가 일반적으로 행하는 우리의 식사와 다름을 말해준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할 때 주의 만찬을 지키는 것인가? 그분을 주님으로 인정하면서 이것을 제정하신 그분의 명령을 따를 때이다. 이렇게 하면서 우리는 그 의미를 깊이 생각한다.
모든 시대에 해당
고린도전서에서 주어진 주의 상과 주의 만찬에 관한 가르침은 단지 고린도 교회만을 위해 의도되지 않았다. 사도는 고린도교회 뿐 아니라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저희와 우리의 주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 (고전 1:2) 말한 것이다. 사도는 자신이 제시하는 가르침이 모든 교회를 위한 것임을 명확히 밝혔다. "내가 모든 교회에서 이와 같이 명하노라" (고전 7:17). "변론하려는 태도를 가진 자가 있을지라도 우리에게나 하나님의 모든 교회에는 이런 규례가 없느니라" (고전 11:16). 더욱이 주의 만찬은 이러하다.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고전 11:26). 그러므로 주의 만찬은 단지 초대교회들의 증거만을 위해 의도된 것이 아니다.
침례예식의 경우에서 보듯이, 교회의 전통은 그 예식의 성격을 변화시켰다. 전통은 실행방식과 의미에 있어서 다 그러했다. 따라서 조직화된 종교 체계인 기독교계에서 현저하게 나타나는 여러 가지 것들은 신약성경에서 우리에게 전수해준 바를 전혀 닮지 않았다.
기존의 관습을 바꿔서 제정하심
주 예수님께서 제정하신 주의 만찬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다. 떡을 떼고 잔을 마시는 것은 본래 매장식과 연결된 관습이었다. 이와 대조적으로 여호와는 이 행위를 기쁨의 연회로 삼으셨다. 이에 주님을 따르는 자들은 만찬에서 그분의 죽으심이 아니라 그분 자신을 기념한다. "나를 기념하라"(고전 11:25). 물론,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갖는 의미를 깊이 생각한다. 이는 떡과 잔이 말해주는 바이다. 그리고 이러한 참여함을 통해서 그분의 죽으심을 선포한다. 여기서 우리는 "전하는"이라는 단어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보이다'의 의미가 아니라 '선포하다'의 의미를 갖는다. 이 단어 '카탕겔로' 는 메시지를 선포한다는 뜻을 지닌다. 동일한 단어를 우리는 다음 구절에서 본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고전 2:1).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라" (고전 9:16). 여기서 말해주는 바는 설명이 아니라 선포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그분을 사람들에게 증거하는 것이다.
다시 한 번 우리는 주님의 이 말씀을 인용한다.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눅 22:19).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고전 11:24-25). 이것은 없는 사람을 기억하는 그런 것이 아니다. 비록 육체적으로는 옆에 계시지 않지만 우리는 그분의 임재를 생생히 느낄 수 있다. 친히 약속하신 대로 영적으로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이다. 하지만 이때에 우리는 그분이 갈보리에서 행하신 대속적인 희생의 목적과 효력에 근거하여 하나님께 나아간다.
"기념" 이라는 단어의 의미는 신약 성경의 다른 유일한 용례를 통해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제사들은 해마다 죄를 생각하게 하는 것이 있나니" (히 10:3). 모세 시대에 드려진 제사의 결과는 "죄악을 생각하게 하는 것" (민 5:15)이었다. 이와 달리, 떡을 떼고 잔을 마시는 것의 의도는 거기에 참여하는 이들의 마음에 그리스도께서 주님과 구주이심을 또 그분의 구속의 피로 그분께 나아감을 깨닫게 하려 함이었다. 주님께서 만찬을 제정하셨다. 그 목적은 단지 우리로 하여금 잊지 않도록 하는 데에만 있지 않았다. 십자가에서 완성하신 사역의 결과로 그분께서 친히 우리와 교제하시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따라서 우리는 주님의 은혜와 사랑의 신선함을 가지고 그분과 교제할 수 있다.
화체설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을 주시며 가라사대, 받아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시고" (마 26:26). 떡이 실제로 물질적인 요소로 변한다는 주장이 있다. 떡이 주님의 몸으로 변형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주님은 전혀 이러한 의도로 말씀하지 않았다.
첫 번째로, 그 자리에 주님께서 몸으로 계셨다. 식탁에서 제자들과 더불어 몸을 기대면서 계셨다. 주님의 손은 떡을 떼어 그분의 몸의 지체들인 제자들에게 그 떡을 나누어주셨다. 이때에 분명 제자들은 자신들과 함게 있는 주님의 몸 이외에 다른 몸을 그분이 가지시거나 만드실 것을 생각하지 못했다.
두 번째로, 잔에 관한 병행구절을 보면 그것은 화체설을 말하지 않는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의 이유를 제시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잔을 나눠주시면서 말씀하셨다. "이것은...나의 피니라." 또한 이러한 구절들도 대한다.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눅 22:20).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고전 11:25).
다락방에서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사용하신 표현이 어떠하든 간에 분명한 사실은 그분이 잔은 새 언약을 상징한다고 말씀하셨다는 것이다. 의심의 여지없이, 여기서 하신 그분의 말씀은 변형됨이 아니라 상징을 말해준다. "이것은" (마 26:28. 원어에서 중성)이라는 단어는 잔(포테리온, 역시 중성)을 가리킨다. 이때 주님은 방금 전에 그 잔을 취하셨다. "잔을 가지사...가라사대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여기서의 네 표현은 완전히 일치한다. 주님의 표현은 주님께서 잔의 내용물이 변형된다는 생각을 갖지 않으셨음을 보여준다. 잔이 그분의 피로 세워진 새 언약을 상징한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앞 구절 및 병행구절에서 나오는 "이 것이 내 몸이니라" 라는 어구도 결코 떡이 그분의 몸으로 변한다는 뜻으로 해석하지 말아야 한다. 틀림없이, 주님은 이러한 의도로 말씀하셨다. "이 떡은 나의 몸을 상징한다. 그리고 이 잔은 그 내용물과 함께 새로운 언약을 상징한다. 그 언약은 나의 죽음으로 맺어진 것이며 나의 피 흘림으로 확증된 것이다." 잔과 관련하여, 우리는 앞에서 말해진 바를 상기한다.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예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예함이 아니냐?" 이 내용이 고린도전서 11장에서 다시 한 번 확증된다. 잔도 떡도 그것들이 실제의 교제는 아니다. 그것들은 교제(우리가 신자들로서 공통적으로 나누는)를 상진한다. 떡의 경우, 그것이 정확히 상징하는 바는 주님의 몸이다.
세 번째로, "to be" 라는 동사가 쓰인 모든 구절들에서 이 동사는 절대로 어떤 것이 다른 것으로 변함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되지 않았다. 다른 말로 하면, 이 동사는 결코 '기노마이' 곧 "to become"에 해당되는 뜻으로 사용된 적이 없다. 이 모든 용례가 말해주는 바는 둘 중 하나일 것이다.
(1) 그 대상은 말해진 그것이다. 어떤 것에서 다른 것으로의 변함이 전혀 발생하지 않는다. 예를 든다면 이렇다. "요한의 증거가 이러하니라" (요 1:19).
(2) 그 대상은 말해진 바를 상징한다. 예를 든다면 이렇다. "밭은 세상이요" (마 13:38)."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갈 4:24)."그 일곱 머리는 여자가 앉은 일곱 산이요" (계 17:9). 명백히, "이것이 내 몸이니라" 라는 어구는(1)에 해당하지 않는다(화체설은 어떤 것에서 다른 것으로의 변함을 주장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것을 (2)에 해당한다고 볼 수밖에 없다.
네 번째로, 사도시대 혹은 그 이후의 수세기 동안의 저작들을 살펴볼 때 떡이나 포도주가 다른 무엇으로 변했다는 암시를 일절 발견할 수 없다. 그와는 정반대로 사도 바울의 증거는 화체설을 반대한다. 그의 기록은 처음부터 끝까지, 심지어 떡과 잔에 실제로 참여하는 대목에서도, 떡과 잔은 여전히 그대로임을 말한다. 그는 떡과 잔이 몸과 피로 바뀌었다고 말하지 않는다.
다섯 번째로, 잔에 관한 주님의 말씀은 이러하다.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사도들 뿐 아니라 모든 신자들을 위한 말씀이다. 이 사실은 다음 구절에서 명확히 드러난다. "너희가...이 잔을 마실 때마다" (고전 11:26).
여기서 사도는 고린도교회 전체를 가리킨다. 주후 1415년에 뻔뻔스러운 교령(敎令)이 공표되었다. 그것은 주의 만찬때에 평신도들로 하여금 잔에 참여하지 못하게 금하는 내용이었다. 또한 그것은 포도주가 피로 변한다는 가정과 관련되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법은 피를 먹지 말도록 금지했고(레 17:10,14). 이러한 금지령은 폐해진 적이 없었다. 오히려 사도들이 예루살렘의 회합에서 교회들을 향해 선포한 내용으로 인해 더욱더 강화되었다. 이에 따라 교회들은 다음과 같이 해야 했다. "피를 멀리 하라고 편지하는 것이 가하니"(행 15:20). 그러므로 잔에 참여하는 것을 성직자들로 국한시키라는 교령은 그 자체가 잔을 나누라고 하신 주님의 명령을 거스르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것은 화체설을 따르는 종교 조직체의 성직자들로 피를 마시지 말라는 하나님의 금령을 불순종하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의 생각은 터무니없다. 주님은 절대로 하나님의 금지령을 위반하게 하는 예식을 제정하시지 않았다.
여섯 번째로, "죽으심을...전하는 것이니라" 라는 말씀은 떡과 잔이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상징한다는 것을 알게 한다. 다른 말로 하면,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신 주님으로서 하늘에 계시며 높아지신 것을 상징하지 않는다. 지금 그리스도는 몸으로는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신다. 그런 동시에 그분은 자신의 약속을 지키고 계신다. 즉, 자기 백성 가운데 영적으로 거하신다. 이것은 그분께서 상 위의 떡과 잔으로 함께 하심이 아니라 친히 성도들과 함께 하심을 말해준다. "떡을 가지사...또 잔을 가지사." 이것은 성직자가 표현이나 경의를 나타내기 위해 상징물들을 들어 올리는 실행의 근거가 전혀 아니다. 원어는 "가지사" 라는 단어를 강조하고 있지 않다. 여기에 기록한 단어는 단지 일반적인 의미의 행동을 말해줄 따름이다.
일곱 번째로, 요한복음 6장에 대한 해석을 가지고 떡 떼는 것을 설명하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그 장을 정독해보면 거기서는 주의 만찬을 언급하지 않고 그리스도께서 산 떡이심을 말해준다. 이 경우에, 그리스도는 사람들이 영원한 생명을 얻는 방편이 되신다. 이 영원한 생명은 믿음에 근거하여 받는다. 바꿔 말하면, 주의 만찬에서 떡에 참여함에 근거하여 받는 것이 아니다. 더욱이,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그런데 유대인들은 주님의 이 말씀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이는 잘못을 범했다. 이에 그분은 그들을 책망하셨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그러나 너희 중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있느니라." 주님의 이 말씀을 문자적인 의미로 받아들인 이들은 그들뿐이 아니다. 기독교계에서도 그와 같이 함으로써 중대한 오류에 빠졌다. 명백히 주님은 몸을 유지시키는 물질적인 것인 떡과 영혼을 유지시키는 영적인 믿음의 유사성을 비유로 말씀하신 것이다.
신약성경이 말하는 바에 의하면 주의 만찬에 참여함은 관료주의와 완전히 무관하다. 누군가를 임명하여 이 에식을 집전하게 하는 것은 전혀 성경에 근거하지 않는다. 떡과 잔을 떼고 잔을 나누는 모든 일은 모든 성도들을 위한 것이다. 잔은 '우리가 축복하는바 축복의 잔'이다(혹은 고전 14:16에서 의미하는 대로 '감사'이다). 떡은 "우리가 떼는 떡"이다. 문맥상 '우리'라는 단어가 사도들과 그들의 계승자들을 가리킨다는 주장은 맞지 않다. 이는 사도 바울이 연달아 말한 두 구절을 보면 알 수 있다. 우선 그는 이렇게 말했다. "떡이 하나요 많은 우리가 한 몸이니 이는 우리가 다 한 떡에 참예함이라" (고전 10:17). 그런 다음 고린도 성도들에게 어떠한 사실을 지적한다. "너희가 주의 잔과 귀신의 잔을 겸하여 마시지 못하고 주의 상과 귀신의 상에 겸하여 참여치 못하리라" (고전 10:21). 여기서 '너희가' 는 누구를 의미하는가? 그것은 명백하다. 잔에 참여하는 모든 성도들이다.
인간의 전통이 만들어낸 성직제도는 모든 성도들이 참여해야 할 만찬에서 인간 중재자들을 공적 주관자로 억지로 끼워 넣었다. 이것은 주 예수님께서 지정하신 이 예식의 특성을 훼손시켰고 그분이 지니신 의도에서 벗어나게 했다. 그러므로 신자들의 엄숙한 책임과 행복한 특권은 무엇인가? 주 예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다. 또한 그분이 우리를 위하여 진리의 성령에 기록 해놓으신 가르침을 지키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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