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신자 양육]
그리스도인 생활의
이정표들 - 질문편(2)
- 데이비드. 뉴웰
교제가 왜 필요한가요?
젊은 신자들은 때로 지역교회의 교제에서 왜 이토록 많은 활동이 이루어지고 있는지에 의문을 갖습니다. 이와같이 질문을 던진다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단, 우리를 지으시고 구원하신 하나님만이 우리를 위한 최상의 길을 알고 계신다는 사실을 인식할 때에만 그렇습니다. 다른말로 하면, 우리가 던지는 물음은 오직 우리가 성경의 진리를 순종할 때에만 답변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교제를 필요로 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인간이 창조될 때부터 그러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 대하여 하셨던 이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창 2:18).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의 사귐을 통해 얻는 유익을 갈망하도록 지음을 받았습니다. "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저희가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 혹시 저희가 넘어지면 하나가 그 동무를 붙들어 일으키려니와 홀로 있어 넘어지고 붙들어 일으킬 자가 없는 자에게는 화가 있으리라. 두 사람이 함께 누우면 따뜻하거니와 한 사람이면 어찌 따뜻하랴.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능히 당하나니 삼겹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 (전 4:9-12).
또한 은혜로 구원을 받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과 교제해야 할 새로운 필요성을 느꼈습니다. 이뿐 아니라 우리는 제자들이 한 무리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사실도 주목합니다. "또 산에 오르사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부르시니 나아온지라.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막 3:13-14). 구주께서 이들을 부르신 이유는 훈련시키고, 보살피고, 그분의 메시지를 전할 사명을 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마28:18-20).
또 한 가지의 의미심장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신약성경의 대부분의 서신서는 개인들이 아니라 교회들에게 씌어졌다는 점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하나님은 "함께 함"의 전문가이십니다. 이런 까닭에 자기 아들의 보배로운 피로 죄인들을 구원하신 후에 그분은 그들을 즉시 구속받은 자들의 영광스러운 무리 곧 그리스도의 몸에 속하게 하십니다.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침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고전 12:13).
하지만 그분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이들에게 참된 명령을 내려 무리들을 이루어 함께 모이게 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지역교회들 혹은 모임들입니다. 마태복음 18장 17-20절과 사도행전 2장 41-42절과 히브리서 10장 25절을 읽어보십시오. 이 모든 구절들은 인식 가능한 신자들의 무리가 존재함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상호간의 축복을 위하여 정기적으로 모이는 무리입니다.
강조하고 싶은 바는, 교제에 대한 성경의 개념은 지역교회에 관한 진리와 분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날은 새로운 "기독교" 조직들과 단체들과 선교회들이 계속 생겨나는 시대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모든 영적인 활동과 성장은 지역교회에서 이루어져야 함을 확실히 말하고 있음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오직 이것만을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청년들은 대학의 선교단체들이 그럴 듯하게 권유한다 해도 반드시 지역교회에서만 교제해야 합니다.
나는 우리 중 많은 이들이 성경의 단어들을 그에 대한 참된 이해 없이 사용하고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렇다면 "교제"라는 단어가 지닌 의미는 무엇인가요?
그것은 '나눔' 혹은 '참여'의 의미를 갖습니다. 이 교제를 "동업"으로 본다면 이는 아주 적절합니다. 즉 특권들을 즐기고 엄숙한 의무들을 이행하는 것입니다. 특권들을 즐기는 것은 대부분의 성도들이 누리고 있는 바입니다. 그러나 의무들을 이행하는 것은 종종 무시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주님을 향하여 또 주님의 백성을 향하여 엄숙한 의무를 갖는다는 것을 포함합니다.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로 더불어 교제케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 (고전 1:9). "이 은혜와 성도 섬기는 일에 참여함에 대하여 우리에게 간절히 구하니" (고후 8:4).
그러므로 기억하십시오. 성경이 말하는 교제는 동업입니다. 모든 신자들은 필수적으로 여기에 참여해야 하며 지역교회와 뗄 수 없는 관계로 연결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일까요?
1. 일
동업 관계를 맺을 경우 뒤에 앉아서는 아무 것도 안 할 수 없습니다. 나는 일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또 참으로 나와 멍에를 같이 한 자 네게 구하노니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부녀들을 돕고 또한 글레멘드와 그 외에 나의 동역자들을 도우라.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느니라" (빌 4:3). 여기서 바울은 지역교회의 일에 진정으로 헌신하면서 바친 수고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참으로 나와 멍에를 같이 한 자" 와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부녀들"을 "동역자들"로 말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열정적인 모습을 발견합니다! 형제들과 자매들 모두 주님의 교회 안에서 행해지는 일들에 희생적으로, 충성스럽게, 지속적으로 참여하도록 부르심을 받고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는 것이 필요할지 모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두신 그 교회에 얼마나 귀중한 기여를 하고 있나요? 우리는 자신이 속한 지역교회를 세우고 있나요, 아니면 무너뜨리고 있나요? 다음의 말씀이 우리에게 해당되기를 소망합니다. "이는 백성이 마음 들여 역사하였음이니라" (느 4:6).
2. 따뜻함
추운 날에 따뜻한 불을 쬔다는 것은 참으로 위로가 되는 일입니다! 교제가 서로를 기운 나게 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요? 만약 형제자매들을 사랑으로 격려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계속해서 함께 가는 것이라고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중 많은 이들은 지속적인 교제의 가치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즉 그들은 자신들의 연약함이 치료되고 잘못들이 교정되는 것을 보면서 그 가치를 느낍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보여준 특징은 상호 간에 사랑하는 것이었습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요 13:35). 그리고 이러한 모습은 분명 초기의 지역교회들에서도 나타났습니다.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사"(빌 1:9).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너희의 믿음과 모든 성도에 대한 사랑을 들음이요"(골 1:4). 물론, 이러한 따뜻함을 경험하려면 우리는 정기적으로 형제들과 만나야만 합니다. 당신은 계속해서 이러한 온기를 느끼고 있나요?
3. 예배
하나님은 제자들을 찾으십니다.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요 4:23). 구원받은 자들이 누리는 놀라운 특권들 중 하나는 우리를 위하여 행하신 많은 일들에 대해 하나님을 찬미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개인적으로 주님을 찬양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고 또 그렇게 해야만 합니다. 하지만 구약성경과 신약성경 모두 집합적인 예배의 특별한 가치를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드로아의 제자들은 어떻게 했나요? 그들은 일주일의 첫 날에 모였습니다. 그 주된 목적은 바울의 말씀 강론을 듣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그 목적은 구주를 기념하면서 떡을 떼려는 데에 있었습니다. "안식 후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 바울이 이튿날 떠나고자 하여 저희에게 강론할 새 말을 밤중까지 계속하매" (행 20:7).
이것은 "예배 집회" 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에 대한 이 단순한 기념이 신자들의 최상의 의무임을 인식해야만 합니다.
4. 전도
신약성경이 말하는 전도는 언제나 지역교회를 세우는 데에 그 목적을 두고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어떤 이들은 대규모의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집회들을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봅니다. 그러한 집회들이 열린다는 사실은 우리가 복음 사역에 있어서 실패했다는 슬픈 증거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지역교회를 복음 전파의 중심지로 삼아 끊임없이 전도에 힘써야 하겠습니다. 어떤 신자들은 큰 소리로 주님을 잘 증거하는 것을 어려워합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그들은 다른 신자들을 도와줄 수 있고 복음 안에서 교제하는 전율을 즐길 수 있습니다.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에서 너희가 교제함을 인함이라" (빌 1:5). 만약 이것을 상실한다면 우리는 모든 것을 상실하는 것입니다.
5. 싸움.
젊은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이 지금 게임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님을 곧 발견합니다. 즉 자신이 영적인 대적들과 격렬한 싸움을 벌이는 전쟁터에 나와 있음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엡 6:12). 이처럼 사단과 맞서 싸우기 위해서 모든 그리스도인 군사는 필요한 모든 지원을 얻어야만 합니다. 사도들은 유대인들 권력자들에게 위협을 받았습니다. 그런 후에 그들은 이렇게 했습니다. "사도들이 놓이매 그 동류에게 가서 제사장들과 장로들의 말을 다 고하니" (행 4:23). 그런 다음 그들은 진리를 계속해서 담대히 전할 수 있게 해달라고 성도들과 함께 기도를 올렸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두려움과 패배에 대한 최고의 치료책은 기도집회입니다. 이 집회에서 주의 백성은 일치단결하여 자신들을 지키고 대적을 이길 수 있게 됩니다.
우리 모두는 지역교회를 참으로 필요로 합니다. 또한 지역교회 역시 우리를 필요로 합니다.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마 18:20).
누군가가 이 구절을 인용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지역교회의 가장 신실한 참석자는 주 예수님이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그 자리에 있는 것이 마땅하지 않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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