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디아서
제 3 과
바울이 베드로를 책망함
(2:11-21)
이 과는 바울의 사역에 대한 그의 여섯 번째 이자 마지막 변증을 다루고 있습니다(2:11-21).
바울은 그의 사도권에 대한 공격의 마지막 답변으로, 많은 유대 그리스도인들에게 사도 중의 인도자로 여겨지는 사도 베드로를 어떻게 책망하여야 했는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 단락은 베드로가 결코 잘못이 없는 사도 중의 인도자라는 견해를 효과적으로 반박하는 것입니다.)
2:11 베드로가 처음 안디옥에 왔을 때 그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자유를 맘껏 누리면서 이방인들과 더불어 식사를 했습니다. 유대인의 율법 아래에 있었다면 그렇게 할 수 없었습니다. (11 게바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에 책망할 일이 있기로 내가 저를 면책하였노라)
2:12 얼마 지난 후에 예루살렘에서 야고보로부터 온 한 무리가 안디옥을 방문하엿습니다. 그들은 아마도 그때까지 어떤 율법준수에 매여있는 유대인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그들이 야고보에게서 왔다는 사실은 "후에 그가 부인했기 때문에, 그들이 야고보의 권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으며(행 15:24), 다만 그들이 그렇다고 주장한 것일 뿐이다"(스토트). (12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이 이르기 전에 게바가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저희가 오매 그가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가매) 그들이 도착하자 베드로는 예루살렘에 있는 율법주의자들에게 그가 한 행동이 알려질 것을 두려워하여 이방인들과 교제를 중단하였습니다. 이러한 행동으로 그는 모든 신자들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며 민족이 다르다는 것이 교제에 악영향을 미칠 수 없다는 복음의 위대한 진리를 부인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핀들레이는 "베드로가 무할례자들과 식사하는 것을 거절함으로 비록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자들이라도 그에게는 '깨끗한 자와 부정한 자'가 있으며 모세의 의식들이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보다 더 신성하다고 단언한 것이다" 라고 말하였습니다.
2:13 베드로의 본을 따르는 사람들 가운데는 바울과 함께 수고하던 바나바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13 남은 유대인들도 저와 같이 외식하므로 바나바도 저희의 외식에 유혹되었느니라) 이러한 행동의 심각성을 인식한 바울은 단호하게 외식적인(위선적인) 베드로를 비난했습니다. 바울의 책망은 14-21절에 나타나 있습니다.
이방인들도 유대인들처럼 생활해야만 하는가?
2:14 그리스도인으로서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더 이상 민족적인 차별 즉 이방인처럼 사는 것이나 이방인의 음식을 먹는 것 등을 구별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14 그러므로 나는 저희가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로 행하지 아니함을 보고 모든 자 앞에서 게바에게 이르되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을 좇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느냐 하였노라) 최근에 베드로는 이방인과 먹는 것을 거부함으로 그가 유대인의 율법과 관습을 지키는 것이 거룩을 위해 필요조건이며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유대인 처럼 되어야 한다는 것을 암시하게 되었습니다.
2:15 바울은 여기에서 모순을 보게 되었습니다. (15 우리는 본래 유대인이요 이방 죄인이 아니로되) 베드로의 행위는 이방인의 지위는 천하고 유대인은 우수하다는 낡은 신념에 반대 되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베드로는 이방인인 고넬료의 회심을 통해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셨기 때문에 아무도 깨끗하다거나 부정하다고 할 수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행 10장 ; 11:1-18).
2:16 구원받은 유대인들은 율법으로써는 아무도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16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모든 사람은 율법의 거룩한 가르침을 범하기 때문에 율법은 모든 사람에게 저주를 가져옵니다. 구세주께서 믿음의 유일하고 참된 목적으로 이곳에 오셨습니다. 바울은 결론적으로 베드로에게 "우리 유대인들도" 구원은 율법준수가 아닌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다는 것을 상기시켜 주었습니다. 지금 베드로가 이방인들을 율법아래 놓았다고 하는 것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율법은 사람들에게 무엇을 하라고 말하지만 그것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은 주지 않습니다. 율법은 사람들에게 그의죄악을 나타내 주지만 사람의 구원자가 되지는 않습니다.
2:17 바울과 베드로와 다른 사람들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오직 그리스도 안에만 있는 의를 구했습니다. (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 하다가 죄인으로 나타나면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는 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그러나 베드로가 안디옥에서 행한 행동은 그가 완전히 의롭게 된 것이 아니라 그의 완전한 구원을 율법 아래로 가져간 것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만일 그렇다면, 그리스도께서 구세주로서 완전하고 충분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죄사함을 얻기 위해 주님께로 나아가면서도 그밖에 다른 곳으로도 간다면, 그리스도께서 그의 약속을 이루지 못한 죄를 짓게하는 자가 아닙니까? 만일 우리가 의롭게 되기 위해 그리스도를 의지한다고 고백하면서 율법(오직 우리를 죄인으로 선고할 수 밖에 없는)으로 돌아간다면 우리가 그리스도인답게 행동하는 것입니까? 우리가 사실상 주님을 죄를 짓게 하는 자로 만드는 그러한 행동에 대해 그리스도께서 인정하시기를 바랄 수 있습니까? 바울은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고 분노한 대답을 했습니다.
2:18 이 구절에 대한 가능한 또다른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의 대적이 말하는 바는, 만일 의롭게 되기 위해 그리스도 한 분만을 의지한다면 우리는 죄인이다. 왜냐하면 구원의 수단인 율법을 부인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자신을 유일한 길이라고 했기 때문에 비난을 받아야 한다. 주님은 구원을 위한 사역자가 아닌 그러한 죄를 짓게 하는 자인 것이다." (18 만일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내가 나를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이라)
베드로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을 위해 모든 율법제도를 버렸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사랑을 입는데 있어서 유대인과 이방인의 어떤 구별도 부인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는 이방인과 먹는 것을 부인함으로써 자신이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운 것입니다. 그러한 행동으로 그는 자신을 범법자로 증명한 것입니다. 그가 그리스도를 위해 율법을 버리는 것이 잘못이었든지, 아니면 지금 율법을 위해 그리스도를 버리는 것이 잘못인 것입니다.
죽었으나 산 자
2:19 율법을 범한 것에 대한 형벌은 죽음입니다. (19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 함이니라) 나는 율법을 범했기 때문에 죄인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은 나에게 사형을 선고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범한 나 대신 죽으심으로 나의 형벌을 받아주셨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죽으실 때 내가 죽었습니다. 주님께서 율법의 모든 요구를 갚으셨다는 의미에서 율법에 대해 죽으셨기에 그리스도 안에서 나도 율법에 대해 죽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율법에 대해 죽었기에 더 이상 율법으로 행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신자들은 십계명을 어기면서 그가 원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자유를 가졌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는 율법을 두려워하여 거룩한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그를 위해 죽어주신 분을 사랑함으로 거룩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행동의 틀과 같은 율법 아래 있고자 하는 그리스도인들은 그것이 자신들을 율법의 저주 아래 놓게 된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더욱이 그들이 율법의 전체를 지켜야 하는 책임을 갖지 않고는 그 율법의 하나에도 손을 댈 수 없습니다. 율법은 결코 거룩한 삶을 만들어낼 수 없기에 하나님은 결코 율법을 지키는 것을 의도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거룩에 대한 방법은 다음 절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2:20 신자는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서 주님과 동일하게 여겨집니다. (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주님께서 갈보리의 십자가에 못박히셨을 뿐아니라 나도 주님안에서 갈보리의 십자가에 못박혔습니다. 이것이 무슨 의미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나는 더 이상 죄인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더 이상 내 자신의 노력으로 구원을 얻거나 받을만 하게 되려고 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더 이상 거듭나지 않은 옛 성품 안에서 율법의 저주 아래 있는 아담의 자손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옛날의 악한 "나" 는 십자가에 못박혔으므로 율법은 더이상 나의 삶을 주장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 나의 참된 신분이며 이것이 내가 행해야 할 참된 행동입니다.
신자는 자신의 삶이나 개인적인 삶을 살지 않게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죽은 사람으로 보시는 사람은 동일하게 살아가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것은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다는 것입니다. 구주께서는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살게 하려고 나를 위해 죽으신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나를 위해 죽으신 것은 이제부터 주님께서 내 안에서 주님의 삶을 살 수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제 내가 이 육체 가운데 사는 삶은 하나님의 아들 안에 있는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믿음은 신뢰 또는 의지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지속적으로 의지함으로, 주님께 굴복함으로, 자기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주님의 삶을 살 수 있도록 허락함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안에 있는 믿음은 주 예수님께서 갖고 계신 믿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신자들이 주님 안에서 갖고 있는 믿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의 생활 규범은 그리스도이며 율법이 아닙니다. 이것은 노력의 문제가 아니라 신뢰의 문제입니다. 그는 심판을 두려워함으로 거룩한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그를 사랑하사 그를 위해 자기 몸을 주신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사랑으로 거룩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율법의 열가지 채찍 아래에서
아아! 어찌 참된 것을 행할 수 있으랴!
율법은 나를 더욱 죽어야 할 자로 만들어 갔고
그동안 율법은 너! 너!! 너!!!라고 외쳐댔네.
소망없는 싸움을 싸우며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고 외치며
참회를 통한 구원을 갈구하였고
그동안 나의 영혼은 나! 나!! 나!!!라고 외쳐댔네.
그러던 어느날 나의 분투가 그쳐졌을 때
모든 손발이 떨리며
나를 위해 죽어주신 분의 나무 아래에서
나는 주여! 주여!! 주여!!!라고 흐느껴 울었네.
당신은 당신의 육체에 주님의 삶이 나타나도록 기도함으로 당신의 삶을 주 예수님께 넘겨드린 적이 있습니까?
2:21 하나님의 은혜는 주님의 조건없는 구원의 선물로 나타납니다. (21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사람이 그 은혜를 사려고 하거나 대가를 지불하려고 한다면 그는 그 은혜를 무의미한 것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만약 사람이 은혜를 받을만 하다거나 은혜의 대가를 치르려 한다면 그것은 더 이상 은혜가 아닙니다. 바울의 베드로에 대한 마지막 공격은 효과적이었습니다. 만약 베드로가 유대인의 규례를 지킴으로 하나님의 은총을 얻을 수 있었다면 그리스도께서는 무의미하게 죽으신 것이고, 주님께서는 문자 그대로 주님의 생명을 버리신 것입니다. 사람은 어떤 방법으로도-율법준수를 통해서 조차도-의롭다함을 얻을 수 없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것입니다.
클로우는 "교회를 타락시키고, 어리석은 누룩과 같은 신조와 교만으로 우리의 육신의 마음을 부풀리는 가장 깊숙한 이단은 행위로 말미암는 구원으로, 존 러스킨이 기록한 대로 '나는 기독교회를 핍박하는 이단과 모든 분파의 뿌리는 구원을 받기 보다는 구원을 얻으려고 노력하는 것이고, 전도가 전혀 효과가 없는 한가지 이유는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위해 일하신 것에 주목하게 하는 것보다는 더욱 자주 하나님을 위해 일하도록 요구하기 때문이라고 믿는다' 라고 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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