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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5.08.03 갈라디아서 -제9과 율법주의의 위험

         갈라디아서


                                 제 9 과

                             율법주의의 위험(5:2-15)


   바울은 갈라디아인들에게 종이 되기 위해 자유를 버리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보여주었습니다. 이제 그의 음성을 변하여 신자들이 율법에 조금이라도 의지하려는 것은 분명한 죄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5:2 (보라 나 바울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가 만일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으리라) 율법주의는 그리스도를 무가치하게 만듭니다. 유대주의자들은  이방인 신자들에게 구원을 위해 할례를 받는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했습니다. 사도의 권위로 말하고 있는 바울은 할례에 의지하려는 것은 그리스도를 무익한 것으로 만드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의 상황에서 바울에게 할례는 외과적인 수술이 아니며, 더욱이 종교적인 의식도 아니었다. 그것은 선한 행위로 말미암는 구원의 체계를 나타내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제쳐놓은 사람의 노력이라는 복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것은 율법이 은혜를 대신하는 것이며, 모세가 그리스도를 대신하는 것이고, 그리스도에게 무엇을 더하여 그리스도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것이다. 부족한 그리스도는 그리스도를 밀어내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단 하나이시며, 유일하고, 독보적인 구주이시다. 할례는 그리스도에게서 베어냄이라는 뜻이다"(J. 헌터)

5:3 (내가 할례를 받는 각 사람에게 다시 증거하노니 그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라) 율법주의는 사람들에게 온 율법을 지킬 것을 요구합니다. 율법아래 있는 사람들은 쉬운 계명들은 받아들이고 다른 것들은 버릴 수가 없습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할례를 행함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한다면 그는 모든 율법을 다 지켜야하는 의무 아래 있게 됩니다. 그래서 사람은 전적으로 율법아래 있든지 아니면 전혀 율법아래 있지 않든지 하는 것입니다. 그가 전적으로 율법아래 있다면 그리스도는 그에게 아무 가치도 없는 것이 분명합니다. "주님은 단 한분이신 완전한 구주이실 뿐아니라 독보적인 분이십니다." 바울은 이 구절에서 과거에 할례를 받은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완전한 의로움을 위해 필요한 것으로 이 의식을 행하는 사람들인 하나님께 받아지기 위해 율법을 지켜야할 의무가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 대해 말하는 것입니다.

   율법주의는 의로움에 대한 유일한 소망이 되시는 그리스도를 포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5:4 (율법 안에서 의롭다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자로다) 이 구절은 주목할만한 논란을 일으켰습니다. 서로다른 수많은 해석이 제시되었으나 크게 묶으면 다음과 같은 세부류가 될 것입니다.


   1. 많은 사람들은 여기에서 바울이 참으로 구원받은 사람이 죄에 빠지게 되면 은혜에서 떨어지게 되어 영원히 잃어버린 자가 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가르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이 "타락에 대한 교리" 로 알려지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해석이 건전하지 않은 것이라는 것을 다음과 같은 강력한 두가지 이유로 인해 확신합니다. 첫째, 이 구절은 죄에빠진 구원받은 사람을 설명하고 있지 않습니다. 사실 여기에는 죄에 빠진다는 언급이 없습니다. 오히려 이구절은 도덕적이며, 선하고, 정직한 삶과 그것으로 구원받으려는 소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단락은 타락에 대한 교리를 지지하려고 그것을 사용한 사람들에게 부메랑과 같이 되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인이 반드시 율법을 지켜야 하며 구원받은 자로 남기 위하여 완전한 삶을 살든지 그렇지 않으면 죄를 짓지 않도록 억제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율법의 행위로나 자신의 노력으로 의롭게 되려고 하는 모든 사람은 은혜에서 떨어진 자라고 주장합니다.

   둘째, 이 해석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참 신자들은 영원한 구원을 받았다는 의미에 대해 신약성경이 일관적으로 증거하고 있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어떠한 양도 멸망하지 않으며, 구원은 인간의 연약한 노력에 달린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구주의 이뤄 놓으신 사역에 의존된다는 전반적인 것에 모순이 됩니다(요 3:16, 36; 5:24; 6:47; 10:28).


   2. 이 구절에 대한 두 번째 해석은 원래 주 예수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지만 그 후에 그들의 구원을 유지하거나 거룩을 이루기 위해 자신을 율법아래 놓은 사람들을 말하고 있습니다. 다른 말로하면, 그들은 은혜로 구원을 받았지만 이제 율법으로 그 구원을 지키려고 하는 것입니다. 은혜에서 떨어진 것은 "외적인 의식과 예식들을 지킴으로 목적을 이루려고, 그들 안에 있는 성령의 사역에 의해 주님의 성도들을 완전하게 하는 하나님의 방법에서 돌아서는 것으로, 그들은 하나님의 성도들뿐 아니라 의식을 지킬 수 있는 육에 속한 사람들이다"(필립 마우로).

   첫째로 우리는 이 구절이 거룩함이나 성화를 구하는 그리스도인들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율법을 지킴으로 의롭게 되려고 하는 구원받지 않은 사람들을 묘사하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비성경적인 견해를 거절합니다. "율법 안에서 의롭다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이라는 말에 주의하십시오. 둘째 이 구절에 대한 이러한 설명은 구원받은 사람들이 그 후에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암시한 것이며,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올바른 시각과 일치하지 않습니다.


   3. 세 번째 해석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고백은 하였지만 참으로 구원받지 않은 사람들을 말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율법을 지킴으로 의롭게 되려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사도바울은 그들이 두 구원자를 가질 수 없으며, 그들이 그리스도이든지 율법이든지 선택을 해야만 한다고 그들에게 말하는 것입니다. 만일 그들이 율법을 선택한다면 그들은 의로움의 유일한 소망이신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는 것이며, 그들은 은혜에서 떨어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사람에게 모든 것이든지 아무 것도 아니든지여야 하며, 제한된 신뢰나 나뉘인 충절은 주님께 받아들여질 수 없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의롭게된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며,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고자 하는 사람은 아니다" (호그,바인).


5:5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좇아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 사도바울은 참된 신자의 소망은 율법주의자들의 것과는 매우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의의 소망을 기다립니다. 그는 주님께서 오실 때, 그가 영화로운 몸을 입게 될때 그리고 그가 더 이상 죄를 짓지 않게 될 때를 기다립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이 의롭게 되기를 소망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며, 그는 이미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신분을 가지고 있습니다(고후 5:21). 그러나 그는 자신 안에 의가 완전하게 될 그때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는 그가 할 수 있는 어떤 것으로 말미암아 의에 도달하기를 소망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성령으로 믿음을 좇아" 소망하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그 모든 것을 하실 것이며, 신자는 단순히 그것이 이루어지도록 믿음안에서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에 반하여 율법주의자는 자신의 행위로, 율법준수 또는 종교적인 의식들에 의해 의롭다함을 얻기를 소망합니다. 의로움은 이러한 방법으로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에 이것은 헛된 소망입니다.

   바울이 4절에서는 율법의 행위로 의를 구하는 사람들을 말하는 "너희" 라는 대명사를 사용한 반면에 이 구절에서는 참된 그리스도인들을 말하는 "우리" 라는 대명사를 사용한 것에 주목하십시오.

5:6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율법주의는 아무 효력이 없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람(즉, 그리스도인)에게는 할례가 그를 더 나은 자로 만들어 주지 않으며, 무할례가 그를 더 악하게 만들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신자 안에서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을 기대하시겠습니까! 믿음은 하나님께 완전히 의지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빈둥거림이 아니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사심없는 봉사로서 자신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러한 모든 봉사의 동기는 사랑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것이며, 율법이 아닌 사랑에 의해 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의식에 관심을 두시는 것이 아니라 경건한 삶의 실제에 두신다는 것은 여러 시대동안 성경안에서 발견된 진리입니다.

5:7 ( 너희가 달음질을 잘하더니 누가 너희를 막아 진리를 순종치 않게 하더냐) 율법주의는 이 진리에 순종하지 않습니다. 갈라디아인들은 그리스도인의 생활에서 좋은 출발을 하였으나 누군가가 그들을 막았습니다. 그 사람은 유대주의자요, 율법주의자요, 거짓 사도들입니다. 그들의 잘못된 가르침을 받아들임으로써 성도들은 하나님의 진리에 순종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5:8 (그 권면이 너희를 부르신 이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율법주의는 하나님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권면" 은 여기에서 신앙이나 교훈을 의미합니다. "너희를 부르신 이" 는 하나님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할례와 율법준수의 신앙은 하나님께로서 나온 것이 아니라 마귀에게서 나온 것으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에 더해진 것입니다.

5:9 (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느니라) 율법주의는 점점더 악한 것으로 이끌어갑니다. 성경에서 누룩은 일반적으로 악을 상징합니다. 여기에서도 누룩은 유대주의자의 악한 교훈을 말하고 있습니다. 누룩 또는 효모의 본질적인 특성은 그것에 접촉하는 모든 가루에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여기에서는 작은 잘못이 어쩔 수 없이 더 큰 잘못으로 이끌어간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사용되었습니다. 악은 멈추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자신의 거짓을 변호하기 위해 더 큰 거짓을 더합니다. 만일 어떤 교회에 잘못된 교훈을 주장하는 몇 명의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이 엄격하게 다루어지지 않는 한 그들은 더욱 더 많은 추종자를 얻게 될 것입니다.

5:10 (나는 너희가 아무 다른 마음도 품지 아니할줄을 주 안에서 확신하노라 그러나 너희를 요동케 하는 자는 누구든지 심판을 받으리라) 율법주의는 그것을 가르치는 자에게 심판을 가져옵니다. 사도바울은 갈라디아인들이 그 거짓 가르침들을 배척할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그의 확신은 "주 안에서' 였으며, 그것은 주님께서 그 문제에 있어서 바울에게 보증해 주신 것이라는 의미일 것입니다. 또는 그는 목자장께서 잃어버린 양을 회복시키실 것을 확신하였고, 아마도 바울이 그들에게 기록한 편지를 통해서도 주님께서 그렇게 하실 것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거짓 선생들에 관하여는 그들은 하나님께서 벌하실 것입니다. 잘못을 가르침으로 한 교회를 파괴하는 것은 심각한 일입니다(고전 3:17). 예를 들면 자신이 술주정꾼이 되는 것보다 술마시는 것을 허용할 수 있다고 가르치는 것이 더 악한 것입니다. 거짓 선생은 수백명의 다른 사람들을 자신과 같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5:11( 형제들아 내가 지금까지 할례를 전하면 어찌하여 지금까지 핍박을 받으리요 그리하였으면 십자가의 거치는 것이 그쳤으리니) 율법주의는 십자가의 거치는 것을 치워버렸습니다. 이제 바울은 그가 때때로 할례의 필요성을 전했다는 것 조차도 터무니없는 비난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는 계속해서 유대인들에 의해 핍박을 받고 있었습니다. 만일 그가 할례를 전했다면 십자가를 전하는 것을 포기한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그 핍박은 즉시 멈추었을 것입니다. 십자가는 사람에게 거치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구원을 얻기 위해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다고 말하기 때문에 십자가는 사람을 화나게 하거나 넘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육체와 육체의 노력에게 어떠한 여지도 주지 않습니다. 십자가는 사람의 행위가 끝났음을 의미합니다. 만일 바울이 할례를 전함으로 행위를 소개했다면 그는 십자가의 모든 의미를 버린 것입니다.

5:12 ( 너희를 어지럽게 하는 자들이 스스로 베어 버리기를 원하노라) 이것은 사도바울이 갈라디아에 있는 교회들이 스스로 거짓 선생들을 출교하기를 바라는 표현일 것입니다. 또는 아마 그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할례의 짐을 지웠기 때문에 그들 스스로 할례를 행하라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전자를 더 선호합니다. 그러나 만일 후자라면 의심할 것없이 바울이 풍자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대한 참된 의미


   은혜의 복음은 언제나 자기가 좋은 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는 비난을 받아왔습니다. 사람들은 "만약 구원이 믿음으로만 얻는다면 그 후에 사람들의 행위를 제어할 아무 것도 없지 않느냐" 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죄에 대한 방종이 아니라고 신속하게 지적하였습니다. 신자의 표준은 주 예수님의 삶이며, 그리스도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가 죄를 미워하고 거룩을 사모하는 것을 암시합니다.

   이것은 바울이 그의 독자들에게 이러한 방종에 대해 경계하기 위해 특별히 필요했을 것입니다. 사람들을 얼마동안 율법의 구속에 두었다가 자유하게 해준다면 거기에는 항상 속박이라는 극단에서 경솔함이라는 극단으로 흐르게 되는 위험이 있습니다. 올바른 균형은 율법과 방종사이에 놓인 자유일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율법으로부터 자유한 자이지만 무법자는 아닙니다.

5:13 (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죄를 허용하지 않으며, 오히려 사랑의 섬김을 격려합니다. 사랑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행동에 대한 동기로 보이지만 반면에 율법 아래에서는 형벌에 대한 두려움이 동기입니다. 핀들레이는 "사랑의 노예는 참된 자유인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것이며(2:4), 이것이 죄를 짓는 자유를 의미한다는 어떠한 생각도 배제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자유를 육체를 위한 행동의 기지로 삼아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마치 침투군이 더많은 점령지를 얻기 위한 작전 기지로서의 상륙거점을 확보하려고 애쓰는 것과 같아서, 육체는 자기 영역을 더 넓히려고 아주 작은 방종을 사용하려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의 자유에 대한 올바른 출구는 "다른 사람의 종이 되는 습관을 기르는 것" 입니다.

   A. T. 피어슨은 "참된 자유는 올바른 구속에 대한 순종 안에서만 찾을 수 있다. 강은 두 강둑 사이에서만 흐를 자유를 찾을 수 있고, 강둑이 없이는 진흙 속으로나 고여있는 웅덩이로 퍼져나갈뿐이다. 혹성들이 법칙에 지배를 받지 않는다면 혹성 자체 뿐 아니라 우주의 파멸을 가져온다. 우리가 담장 안에 있으면 다른 사람들은 담장밖에 있는 것은 같은 법칙이다. 구속은 우리의 자유를 단속하며 자유를 보증하고 보호하기도 한다. 이것은 통제가 아니라 통제의 올바른 종류이며 자유한 사람을 만들어주는 즐거운 순종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5:14 (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 이루었나니) 처음에는, 바울이 신자는 율법 아래 있지 않다고 서신전체를 통해 강조한 후에 여기에서 율법을 소개하려는 것이 이상하게 보입니다. 바울은 그의 수신자들에게 율법으로 돌아가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며, 율법이 요구했지만 이룰 수 없는 것을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행함으로 얻을 수 있는 결과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5:15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 율법주의는 한결같이 불화로 이끌며, 율법주의가 행한 것은 갈라디아에서처럼 명백합니다. 얼마나 이상한 일입니까? 여기 율법 아래에 있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율법은 이웃을 사랑할 것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바로 이것에 실패하게 됩니다. 그들은 피차 물고 뜯었습니다. 이러한 행동은 율법이 행동하도록 내어준 장소에서 육신으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Posted by 행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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