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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5.06.15 갈라디아서 2과 바울의 사역에 대한 변증

갈라디아서


                                       제 2 과

                 바울의 사역에 대한 변증

                                                     (1:11-2:10)


   바울은 이제 그의 사역에 대한 변증을 시작합니다. 바울의 비판자들은 그에 대해 많은 신랄한 공격을 시작하였습니다. 의심할 것없이 그들은 바울의 메시지에 대한 신빙성을 부정하였습니다. 아마도 그들은 어느 곳에서도 바울이 할례나 다른 유대적인 의식을 제시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전하는 것이 비 성경적이며 무지한 것이라고 비난했을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이력을 통해 여섯가지 효과적인 논지로 대답했습니다. 이 과에서는 그 중 다섯가지를 살펴보겠습니다.


1:11 첫째로, 그의 복음은 하나님께 계시로 받은 것이며 사람들과는 독립된 것입니다(1:11, 12) (11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려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이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라).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라" 는 의미는 사람이 그 복음을 고안해 낸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잠시 이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1:12 바울의 복음은 사람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12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이것은 사람들이 만들어 낼 수 있는 구원의 종류가 아닙니다. 바울은 그것을 어떤 사람에게서 받은 것이 아니며 책을 통해 배운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직접 계시받은 것입니다.

1:13, 14 둘째로, 바울이 그의 복음에 유대인의 율법을 포함하지 않았다고 해서 바울이 유대교에 대해 전혀 모른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13 내가 이전에 유대교에 있을 때에 행한 일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핍박하여 잔해하고 14 내가 내 동족중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내 조상의 유전에 대하여 더욱 열심이 있었으나) 나면서부터 또한 초등 교육에서부터 그는 율법에 젖어 있었습니다. 그는 교회에 대한 큰 핍박자가 되는 길을 선택했습니다. 그는 조상들의 유전에 대해 여러 연갑자들보다 지나치게 열정적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율법을 제쳐놓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의 복음은 분명히 율법을 전혀 모르는 탓이 아닙니다. 그러면  왜 그는 복음을 전할 때 그것을 생략했습니까? 왜 그의 복음은 그의 배경과 그의 본능적인 기질, 그의 모든 종교적인 방향과 반대로 나아갔습니까? 간단하게 말하자면 그 복음이 자신의 생각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에게 직접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1:15-17 셋째로, 바울의 사역은 처음 몇 년동안 다른 사도들과 독립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1:15 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16 그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실 때에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17 또 나보다 먼저 사도 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오직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 바울은 이제 그의 복음과 관련해서도 다른 사람들과 독립되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가 회심한 후에 어떤 인도자들과 협의하거나 다른 사도들이 있던 예루살렘으로 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메섹으로 돌아왔습니다. 그가 예루살렘을 피하기로 한 결정은 다른 동료 사도들을 무시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는 부활하신 주님께로부터 이방인에 대한 특정한 사역을 사명으로 받았기 때문이었습니다(2:8). 그렇기 때문에 그의 복음과 그의 봉사는 사람들의 인정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모든 사람으로부터 독립되었습니다.

   이 구절에 있는 몇가지 표현들은 주의깊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15절에서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라는 표현에 주목하십시오. 바울은 그가 태어나기도 전에 어떤 특별한 사역을 위해 하나님에 의해 구별되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또한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라는 말을 덧붙임으로 다메섹 도상에서의 자신의 회심을 나타내었습니다. 사실 그 때에 바울이 무엇을 받을만한 자격이 있었다고 한다면 그것은 지옥에 던져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놀라운 은혜로 그를 구원하시고 그가 전에 잔해하려던 믿음을 전하기 위해 그를 이방인들에게로 보내셨습니다. 16절에서 그는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작정하셨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가 이 세상에 주 예수님을 나타낼 수 있도록 우리 안에 하나님의 아드님을 계시하려는,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의 목적에 대한 놀라운 시각을 우리에게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우리 마음에 나타내시는 것은(16절)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통해 나타나시기 위함이며(16-23) 이러한 나타남으로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기 위함입니다(24절).

   17절에서는 "아라비아로 갔다가"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모든 주님의 종들에게는 은둔과 묵상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모세는 40년간 사막 저편에서 보냈습니다. 다윗은 유대의 언덕에서 양들을 돌보는 동안 하나님과 단 둘이 있었습니다.

1:18-20 넷째로, 드디어 바울이 예루살렘을 방문하였을 때 그는 오직 베드로와 야고보만 만났습니다(18 그 후 삼 년 만에 내가 게바를 심방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저와 함께 십오 일을 유할 새 19 주의 형제 야고보 외에 다른 사도들을 보지 못하였노라 20 보라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거짓말이 아니로라). 그러한 것은 차치하고서라도 그는 유대의 교회들에게 비교적 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1:21-24). 자신이 다른 사도들과 독립적이라는 것을 더 나타내기 위해 바울은 회심후 거의 삼년동안 예루살렘을 방문하지 않았다는 것을 자세히 말하였습니다. 그는 게바(베드로)를 개인적으로 심방하려고 올라간 것이며 공식적인 방문은 아니었습니다(행 9:26-29). 그곳에 있는 동안 그는 주님의 형제 야고보도 만났습니다. 야고보는 열두 사도가 아니었으나 바나바처럼 아주 적은 의미로 사도처럼 여겨졌습니다(행 14:14). 그는 단지 15일을 머물렀으며 그 기간은 결코 훈련받기에 충분하지 못한 기간일 것입니다. 더욱이 본문은 그가 그 주님의 종들과 완전히 동등하였다고 나타내고 있습니다.

1:21, 22 이 후에 그는 길리기아(다소가 있는)와 수리아 지역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으며 그렇기 때문에 유대에 있는 여러 교회들이 그를 개인적으로 알지 못하였습니다( 21 그 후에 내가 수리아와 길리기아 지방에 이르렀으나 22 유대에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교회들이 나를 얼굴로 알지못하고) 1:23 그들 모두는 전에 그리스도인들을 아주 잔인하게 다루던 사람이 이제 그리스도인이 되어 다른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전한다고 알고 있었습니다( 23 다만 우리를 핍박하던 자가 전에 잔해하던 그 믿음을 지금 전한다 함을 듣고). 1:24 물론 이것은 바울의 삶에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행하신 것이기 때문에 그들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만들었습니다 ( 24 나로 말미암아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니라). (우리의 변화된 삶으로 인해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까?)

   다섯째로, 후에 바울이 예루살렘을 방문했을 때 사도들은 그의 복음이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했습니다(2:1-10). 교회가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에 사도들은 다소간에 그 도성을 본부로 삼았고,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모교회" 로 여기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기가 예루살렘 사도 중 한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에 다소간 열등한 자라는 비난과 싸워야 했습니다.

2:1 몇몇 성경학자들은 이 예루살렘 여행이 사도행전 11:30-12:25 에 기술되어 있는 기근 방문이라고 믿습니다( 2:1 십사 년 후에 내가 바나바와 함께 디도를 데리고 다시 예루살렘에 올라갔노니). 그러나 모든 증거는 갈라디아 2:1-10 이  사도행전 15:1-29 의 회의를 위한 방문과 연결되는것으로 보입니다. 여기에서의 십사년이 그의 회심 후인지 첫 번째 방문 이후를 말하는 것인지 우리는 알 수 없지만 우리가 아는 것은 바울은 그리스도께 가도록 계시받았고 그의 동역자인 바나바와 바울의 사역을 통해 얻은 이방인 회심자인 디도도 함께 갔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계시를 인하여" 올라갔다고 하는 사실은 사도행전 15:2, 3절의 안디옥에 있는 교회가 그를 보내었다는 것과 모순되지 않습니다. 둘 다 사실입니다. 유대주의자들은 완전한 구원을 위해 디도가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사도바울은 복음의 진리가 걸려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완강히 반대했습니다. (후에 바울이 디모데를 할례한 때에는 중요한 원리가 연루되지 않았습니다 : 행 16:3)

2:2 E. F. 케반은 "바울은 의롭게 되는 할례는 생각이 없는 사람들이 그렇다고 받아들이는 것으로 전혀 깨끗케 하는 의식이 아니라고 보았다. 할례 아래로 들어가는 것은 율법준수라는 율법적인 방법으로 의롭게 되려고 하는 것이며 그것은 바로 은혜의 근거들을 부인하는 것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2절에서 사도는 자기가 예루살렘에 도착했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말하고 있습니다. (2  계시를 인하여 올라가 내가 이방 가운데서 전파하는 복음을 저희에게 제출하되 유명한 자들에게 사사로이 한것은 내가 달음질하는 것이나 달음질한 것이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왜 바울은 온 교회에서 하지 않고 영적 인도자들에게 사사로이 말했을까요? 그가 전한 것에 어떤 잘못이 있는 경우에 그들에게 그의 복음을 인정받기 원했던 것이었을까요? 결코 아닙니다! 그것은 사도바울이 지금까지 말했던 것과는  전혀 반대되는 것입니다. 그는 그의 메시지가 하나님께서 그에게 계시로 주신 것이라고 주장햇습니다. 그는 그가 전한 교훈들이 진리임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참된 설명은 다른 면으로 봐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일반적인 예의에 대한 문제로서 인도자들에게 먼저 이야기한 것입니다. 이것은 바울의 복음에 대한 진실성을 충분히 납득시킬 수 있는 바람직한 것입니다. 만약 그들이 어떤 질문이나 어려움들을 갖게 되었을 때, 바울은 처음에 그들에게 답을 하기 원했습니다. 그 후에 그는 다른 사도들의 전적인 지원을 받으면서 교회 앞에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을 다룸에 있어서는 항상 갑정적인 말들로 인해 무리가 요동될 위험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처음에 그의 복음을 사사로이 제시하여 분위기 적으로 군중들의 흥분이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을 없애기 원했던 것입니다. 바울이 그렇게 하지 않고 다른 방법으로 행했다면 심각한 논쟁이 일어나 교회가 유대인과 이방인의 두쪽으로 나뉘었을 것입니다.

2:3 "내가 달음질하는 것이나 달음질한 것이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는 표현은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여행한 이유와 다른 면으로는 유대주의자들이 그의 사역을 심각하게 침해하고 있다는 것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또한 이것은 아마도 그가 먼저 유명한 자들에게 사사로이 나아간 것과 계명을 범함으로 그 여행을 위태롭게 하기 원치 않았다는 설명일 것입니다.

   율법주의자들의 질문은 디도의 경우에 절정에 달하게 되었습니다(3 그러나 나와 함께 있는 헬라인 디도라도 억지로 할례를 받게 아니 하였으니). 예루살렘 교회는 이 이방인 회심자를 교제권 내에 받아들일 것인지 아니면 먼저 할례를 받도록 주장할 것인지 결정해야 했습니다. (할례는 남성들에게 행하는 작은 외과 수술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그의 자손들에게 이 예식을 제정하셨을 때 그들과 언약의 표시 즉,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고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을 의도한 것이었습니다(창 17:1-10). 이것은 육체적인 표시일 뿐 아니라 영적인 상징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그가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표시로 할례를 행했습니다(롬 4:11). 유대인들은 이 할례의 영적 의미를 곧 잊어버렸고 이것을 단지 한 예식 또는 행사로 전락시켰습니다. 그래서 이 의식은 그들과 하나님과의 관계만큼이나 가치를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신약에서 할례는 하나님께서 이방인과 유대인을 동일하게 은혜로 다루실 때부터 더 이상 계명이 아니었습니다. 초대교회시대의 한 유대인 신자의 무리가 구원의 필요조건으로 할례를 주장했었습니다. 그래서 그 당파를 "할례당" 이라고 일컫게 되었습니다(갈 2:12).

   상당한 논의와 토론 끝에 사도들은 할례가 구원의 필요조건이 아니라고 결정했습니다. 바울이 이겼고 승리가 울려퍼졌습니다! (예루살렘에서의 이 회의에 대한 공정하고 자세한 설명이 사도행전 15장에 나와있으며, 이점에 대해 주의 깊게 상고해 보십시오)

2:4 4절은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이끌려 온 근본적인 이유를 제시하고 있습니다(4 이는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 까닭이라 저희가 가만히 들어온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의 가진 자유를 엿보고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함이로되) 2절의 첫부분과 4절의 첫부분을 연결해 보면 우리는 "계시를 인하여 올라가...이는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 까닭이라" 고 읽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전에 안디옥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제시해 주는 것입니다(행 15:1,2). 예루살렘으로부터 온 몇 명의 유대인 선생들이 그리스도인의 태도를 취하며, 안디옥 교회에 어찌하든지 가만히 들어와서 구원의 필수조건으로 할례를 가르쳤습니다(행 15:1). 바울과 바나바는 그들에 대해 강력하게 반대했습니다.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바울과 바나바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가서 그곳에 있는 사도들과 장로들로부터 견해를 구하기로 하였습니다.

   바울은 유대주의자들과 정면으로 대항했습니다. 한 순간도 그들의 구원을 위한 할례의 주장에 대해 굽히지 않았습니다. 그는 복음의 진리가 위태롭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5 우리가 일시라도 복종치 아니하였으니 이는 복음의 진리로 너희 가운데 항상 있게 하려 함이라). 우리는 이 길에서 믿음을 위해 싸운 사람들에게 얼마나 많은 빚을 지고 있는지요! 이 복음의 진리가 우리에게 이어진 것에 대해 그들에게 감사합시다.

2:6 예루살렘에서 인도자로 존경을 받는 그들은 바울의 메시지나 사도로서의 그에 대해 아무것도 덧붙이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 사항인지요! (6 유명하다는 이들 중에 ..본래 어떤 이들이든지 내게 상관이 없으며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아니하시나니..저 유명한 이들은 내게 더하여 준 것이 없고) 유대인 인도자들은 바울을 동등하게 영접하였으며 그의 복음이 어떠한 면에서도 부족하지 않다고 인정했습니다. 비록 바울은 그들과 독립적이었고, 그들에게서 배우지 않았으며, 그들과 아주 적은 접촉만 있었지만, 그들이 전한 복음은 바울과 정확하게 같은 것이었습니다. (6절의 어투는 바울이 다른 사도들을 깎아 내리려고 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단지 "어떤이들이든지" 다시말하면, 주 예수께서 이 땅에 계실 때 주님의 제자들에게 그가 존중해야 할 어떤 뛰어난 권위도 주시지 않았다고 말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외적인 구분으로 사람을 받으시지 않습니다.)

2:7.8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은 베드로가 유대인들에게로 보냄을 받은 것과 같이 바울이 무할례자(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도록 위임된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7 도리어 내가 무할례자에게 복음 전함을 맡기를 베드로가 할례자에게 맡음과 같이 한 것을 보고 8 베드로에게 역사하사 그를 할례자의 사도로 삼으신 이가 또한 내게 역사하사 나를 이방인에게 사도로 삼으셨느니라) 두 사람은 동일한 복음을 전했으나 다른 민족을 대상으로 하게 되었습니다.

2:9 분명한 교회의 기둥인 야고보, 게바(베드로)와 요한 조차도 하나님께서 바울을 통해 일을 하신다고 자각했으며, 그와 바나바에게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부탁하는 교제의 악수를 나누었습니다 (또 내게 주신 은혜를 알므로 기둥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도 나와 바나바에게 교제의 악수를 하였으니 이는 우리는 이방인에게로, 저희는 할례자에게로 가게 하려 함이라). 이것은 공적인 안수식의 의미가 아니라 바울의 사역에 대한 그들의 사랑의 관심을 나타낸 것입니다.

2:10 한가지 그들이 바울과 바나바에게 제안한 것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하는 섬김이었으며 바울은 그것을 행하기를 항상 힘썼다고 말했습니다( 10 다만 우리에게 가난한 자들 생각하는 것을 부탁하였으니 이것을 나도 본래 힘써 행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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