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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5.07.28 갈라디아서 -제8과 종이냐 자유자냐

갈라디아서


                              제 8 과

                           종이냐 자유자냐(4:17-5:1)


동기의 대조(4:17-20)


4:17 거짓 선생들의 동기는 바울과 달랐습니다. (4:17 저희가 너희를 대하여 열심 내는 것이 좋은 뜻이 아니요 오직 너희를 이간 붙여 너희로 저희를 대하여 열심 내게 하려 함이라) 그들은 추종자들을 원했지만 바울은 갈라디아인들의 영적인 부요함에 관심이 있었습니다(4:17-20). 거짓 선생들은 갈라디아인들의 열정을 얻으려고 열심히 노력했기에 그들의 동기가 진실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너희를 쫓아내기 원한다" (한글 개역성경에는 "너희를 이간붙여" 라고 되어있음-역자주)는 구절에 다비역에는 "우리에게서" 가 더해져있습니다. 유대주의자들은 갈라디아인들을 사도바울에게서 떼어놓기를 원했습니다. 그들은 추종자들을 원했고 그 추종자들을 얻기 위해 분파를 형성하려 했던 것입니다.

4:18 결론적으로 바울은 "나는 내가 없을 때에라도 순수한 동기와 선한 목적으로 행하는 한 다른 사람들이 너희 가운데에서 사역하는 것에 마음을 쓰지 않는다" 고 말하는 것입니다. (18 좋은 일에 대하여 열심으로 사모함을 받음은 내가 너희를 대하였을때뿐 아니라 언제든지 좋으니라)

4:19 갈라디아인들을 자기의 자녀들이라고 부름으로 바울은 자신이 그들에게 그가 그리스도를 나타내준 사람인 것을 상기시켜 주었습니다. (19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그들을 위한 해산의 고통을 다시 겪는 것은 그들의 구원을 찾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리스도께서 그들 안에서 이루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완전한 목적입니다(엡 4:13; 골 1:28).

4:20 이 구절은 바울이 갈라디아인들의 참된 상태에 대해 알기 원한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20 내가 이제라도 너희와 함께 있어 내 음성을 변하려 함은 너희를 대하여 의심이 있음이라) 그들이 진리에서 떠났다는 것에 바울은 의심이 들었습니다. 바울은 그들에 대하여 분명함과 확신함을 가진 음성과 말로 바뀔 수 있게 되길 바랐던지 아니면 그의 편지에 대해 그들이 어떻게 반을할지 몰랐던 것같습니다. 그는 그들과 함께 있으면서 말하는 것이 더낫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면 그의 음성의 높낮이를 바꿈으로 자신을 더낫게 표현할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만일 그들이 그의 책망을 받아들인다면 그는 부드럽게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일 그들이 거만하고 완고하게 된다면 그는 엄하게 될 것입니다. 말하자면 그는 그들에 대해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으며, 그의 메시지에 대한 그들의 반응이 어떻할지 말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종으로 매는 율법주의(4:21-31)


   거짓 선지자들이 아브라함을 그렇게 중요시 하여 신자들이 그의 할례받은 본을 따라야 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에, 바울은 아브라함의 가정 역사를 통해 율법주의는 종된 것이며 은혜와는 섞일 수 없음을 보여주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그와 그의 아내 사라가 매우 늙었지만 한 아들을 낳을 것을 약속하심으로 자연히 자녀들을 갖게 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으므로 의롭게 되었습니다(창 15:1-6). 얼마 후에 사라는 아브라함이 약속된 아들을 기다리는 것을 방해하게 되어 아브라함에게 자기의 계집종 하갈을 통해 자녀를 갖도록 제안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그녀의 충고를 따랐고 이스마엘이 태어났습니다. 이스마엘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후사가 아니라 아브라함의 초조함과 세속성과 신뢰의 부족에 의해 태어난 아들이었습니다(창 16장).

   그 후, 아브라함이 백세가 되었을 때, 약속의 자녀인 이삭이 태어났습니다. 이 탄생은 분명히 기적적이었습니다. 이것은 오직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으로 가능하게 된 것입니다(창 21:1-5). 이삭의 젖떼는 통상적인 의식을 치루었을 때, 사라는 이스마엘이 자기 아들을 희롱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사라는 아브라함에게 "이 종의 아들은 내 아들 이삭과 함께 기업을 얻지 못하리라" 고 말함으로 이스마엘과 그의 어미를 집에서 내쫓으라고 했습니다(창 21:8-11). 이것이 사도바울이 지금 갈라디아서에서 시작하려는 논증의 배경입니다.

4:21 (내게 말하라 율법 아래 있고자 하는 자들아 율법을 듣지 못하였느냐) 이 구절에 나오는 "율법"은 두가지 다른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첫째로는 거룩에 이르려는 수단으로서의 율법을 제시하였고, 그 다음은 율법서인 구약성경(창세기에서 신명기까지)을 말하는 것으로 특히 창세기를 가리킵니다. 바울은 "내게 말하라 율법을 지킴으로 하나님의 은총을 얻으려는 자들아 율법책의 메시지를 듣지 못하였느냐?"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4:22 ( 기록된 바 아브라함이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계집종에게서, 하나는 자유하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나) 두 아들은 이스마엘과 이삭입니다. 계집종은 하갈이며 자유하는 여자는 사라입니다.

4:23 (계집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하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의 계획적인 간섭한 결과로 태어났습니다. 이에 반하여 이삭은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4:24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 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가라) 비유적인 이야기는 처음 보기보다는 깊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사건의 참된 의의는 명백하게 진술된 것이 아니라 암시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삭과 이스마엘에 대한 참된 이야기는 바울이 지금 설명하고자 하는 깊은 영적 진리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두 여자는 두 언약입니다. 하갈은 율법의 언약이고 사라는 은혜의 언약입니다. 율법은 시내산에서 주어졌습니다. 너무도 묘하게 "하갈" 이라는 말은 아랍어로 "바위" 를 의미하며 아랍인들은 시내산을 "바위산" 이라고 부릅니다. 시내산에서 주어진 언약은 종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계집종인 하갈은 율법에 대한 알맞은 모형입니다.

4:25 (이 하가는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 산으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데니 저가 그 자녀들로 더불어 종 노릇 하고) 율법의 모형인 하갈은 유대나라의 도성이며 여전히 율법을 지킴으로 의롭게 되려고 하는 구원받지 못한 이스라엘인의 중심인 예루살렘을 나타냅니다. 이것은 그들의 자녀들과 함께 그들의 추종자들을 종으로 만들었습니다. 때문에 바울은 믿지않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사라보다는 하갈에게, 이삭보다는 이스마엘에게 연결시킴으로 그 특성을 신랄하게 묘사하였습니다.

4:26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의 어머니라) 믿음으로 의롭게 된 사람들의 도성은 하늘의 예루살렘입니다. 이것은 유대인과 이방인 모든 신자들의 본향입니다.

4:27 (기록된 바 잉태치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구로치 못한 자여 소리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하였으니) 이사야 54:1에서 인용한 이 구절은 하늘 도성의 자녀들이 지상 예루살렘의 자녀들보다 더 많아질 것을 예언한 것입니다. 사라는 오랫동안 구로치 못하고 홀로 사는 여자였습니다. 하갈은 "남편있는" 여자였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사라 또는 하늘 예루살렘의 최후의 승리를 알 수 있습니까? 그 대답은 율법아래 거하는 하갈의 자녀들보다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오는 이방인과 유대인이 포함된 약속의 자녀들이 더 많다는 것입니다.

4:28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참된 신자는 사람의 뜻으로나 육체의 뜻을 따라 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따라 난 자들입니다. 이것은 셀 수 있는 자연적인 후손들이 아니라 주 예수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거룩하고 기적적으로 태어난 것을 말합니다.

4:29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한 것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이스마엘이 이삭을 놀린 것같이 언제나 육체를 따라 난 자들이 성령을 따라 난 자들을 핍박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구원받지 못한 자들에 의해 받은 우리 주님의 고난과 사도바울의 고난을 생각하십시오. 이스마엘이 이삭을 놀린 것이 우리에게는 하찮은 잘못으로 보일 수 있지만 성경은 그것을 기록하였고, 바울은 그것에서 늘 존재하고 있는 육체와 성령 사이의 불화를 보았습니다.

4:30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계집종과 그 아들을 내어쫓으라 계집종의 아들이 자유하는 여자의 아들로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느니라) 갈라디아인들에게 성경을 언급함으로 그들은 율법과 은혜는 섞일 수 없으며, 사람의 공로나 육체의 노력에 기초하여 하나님의 복을 유업으로 이을 수 없다는 판결을 듣게된 것입니다.

4:31 (그런즉 형제들아 우리는 계집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하는 여자의 자녀니라)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은총을 얻으려는 수단으로서의 율법과 어떠한 관계도 없습니다. 그들은 자유하는 여자의 자녀들이며, 그들은 그 어머니의 사회적인 조건들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유자(5:1)


5:1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4장의 마지막 구절은 자유자라는 신자들의 신분을 묘사하였습니다. 이 5장의 첫구절은 자유한 자로서 살아가야 한다는 그의 처신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여기 우리에게 율법과 은혜의 차이에 대한 아주 훌륭한 예가 있습니다. 율법은 "네가 자유를 얻으려면 네가 자유자가 되어야 한다" 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은혜는 "너는 그리스도의 죽음이라는 매우 큰 대가를 치르고 자유하게 되었으니 이제 주님께 감사하며 너를 자유자로 만들어 주신 그리스도로 인한 자유 안에 굳게 서라" 고 말합니다. 율법은 명령하지만 행할 수 없습니다. 은혜는 율법이 요구하는 것을 제공함으로 성령의 능력으로 그의 신분에 맞는 삶을 살 수 있게 합니다.

   C. H. 매킨토시는 "율법은 아무 것도 없는 사람에게 능력을 요구하여 만일 그가 그것을 나타내지 못할 경우 그를 저주한다. 복음은 아무 것도 없는 사람에게 능력을 주어 그것을 나타내는 사람에게 복을 준다' 라고 말했습니다.


   율법은 명했네, '달려라 그러면 살리라' 고

   그러나 내게는 다리도 팔도 주지않았네.

   훨씬 뛰어난 복음의 소식이 오자

   내게 날으라고 명했네, 날개를 주면서"

Posted by 행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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