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언강해

 제11과     진실함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삶

                         Truthfulness Brings God's Delight

 

   본문말씀

 

   "거짓 입술은 여호와께 미움을 받아도 진실하게 행하는 자는 그의 기뻐하심을 받느니라"(잠 12:22).

 

   하나님은 진실을 사랑하십니다. 이는 변할 수 없는 절대적인 사실입니다. 이사야는 주 하나님을 "진리의 하나님"(사 65:16)이라고 불렀으며 주 예수님께서도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요 14:6)고 자신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가 진리의 사람들이 되므로 하나님께 속한 자들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선지자 스가랴를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내가 시온에 돌아와 예루살렘 가운데에 거하리니 예루살렘은 진리의 성읍이라 일컫게 되리라"(슥 8:3)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들이 진리를 말함으로 진리의 성읍을 이루고 사는 것을 원하시며 기뻐하십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들이 진리의 가정을 이루고 사는 것을 원하십니다. 부부와 온 가족들이 서로를 속이거나 거짓말을 하지않고 서로에게 진실을 말하며 진리의 가정을 이룬다면 하나님께서는 그 가정을 인하여 기뻐하실 것입니다.

 

   십계명 중에서도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출 20:16)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명령은 신명기 19:15-21에서 아주 심각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거짓 증언에 대해서 경고하시며, 만일 그와 같은 위증이 사실로 들어날 경우 그 징벌은 엄중한 형벌이 따를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가령 어느 사람이 재판정에서 살인에 대하여 거짓증언을 했을 경우 재판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그를 처형하도록 명하고 있습니다.

 

   신약에서는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하지 말라"(골 3:9)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거짓말은 사탄의 속성입니다. 예수께서는 사탄에 대하여 "그는 진리에 서지 못하고...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요 8:44)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거짓말을 하는 행동은 바로 사탄의 행동과 같습니다. 반면에 진리를 말하는 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진리를 사랑하는 자가 되라

 

   "인자와 진리가 네게서 떠나지 말게하고 그것을 네 목에 매며 네 마음판에 새기라. 그리하면 네가 하나님과 사람앞에서 은총과 귀중히 여김을 받으리라"(잠 3:3-4).

 

   여기에는 균형(balance)이 있습니다. 인자(mercy)와 사랑(love)이 없는 단순한 진리는 거칠게 됩니다. 잠언에서는 동시에 인자와 진리에 대해서 다섯 번 다르게 언급하고 계십니다. 신약에서도 역시 "사랑 안에서 진리로 말하라"(엡 4:15).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들의 말은 진리(truth)와 인자(mercy)그리고 진리(truth)와 사랑(love)의 속성들이 모두 함께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진리를 말하는 자는 의를 나타내어도 거짓 증인은 속이는 말을 하느니라. 칼로 찌름 같이 함부로 말하는 자가 있거니와 지혜로운 자의 혀는 양약과 같으니라"(잠 12:17-18).

 

   어떤 이는 사랑 없는 진리의 말을 함으로 사람들에게 오히려 상처를 입히기도 합니다. 반면, 지혜로운 자는 사랑과 함께 진리를 말함으로 사람의 상처를 치유해 줍니다.

 

   "구부러진 말을 네 입에서 버리며 비뚫어진 말을 네 입술에서 멀리 하라"(잠 4:24).

 

   본래 거짓말쟁이는 때로는 전적으로 다 거짓을 말하지 않으면서도 결국 거짓을 말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여하간 증인으로서 전체 진실이 아닌  반만의 진실을 증언하게 될 때 배심원들에게 그릇된 판정을 내리도록 영향을 줄 수도 있습니다. 전체 진실이 아닌 절반의 진실을 말하는 것 역시 거짓말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 내 입은 진리를 말하며 내 입술은 악을 미워하느니라. 내 입의 말은 다 의로운즉 그 가운데에 굽은 것과 패역한 것이 없나니 이는 다 총명 있는 자가 밝히 아는 바요 지식 얻은 자가 정직하게 여기는 바니라"(잠 8:7-9).

 

   솔로몬이 여기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절반만의 진리를 말하는 거짓된 사람을 경고하는 것입니다. 중국인들의 속담에 "반만의 진리는 모두 거짓말이다."란 말이 있습니다.

 

   "속이는 저울은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나 공평한 추는 그가 기뻐하시느니라"(잠 11"1).

 

   하나님께서는 사업을 하는 사람들의 행동을 늘 감찰하고 계십니다. 조작된 작업시간표, 속이는 저울, 가격 조작, 거짓 영수증 등은 모두 주께서 미워하시는 것들입니다. 만일 믿는 자들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기를 원한다면 그들은 전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정직한 방법으로 사업을 해야 합니다.

 

   "의인은 거짓말을 미워하나 악인은 언제나 남을 속이는 말(loathsome) 하기를 즐겨하다가 종국에는 수치를 당하느니라"(잠 13:5).

 

   남의 말을 엿듣고 악한 의도로 거짓말을 꾸며 대기를 좋아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이런 자들은 사탄에게 속한 자들입니다. 왜냐하면 거짓말은 사탄이 항상 즐겨하는 행동이요 사탄은 또한 거짓의 아비이기 때문입니다.

 

   "진실한 증인은 사람의 생명을 구원하여도 거짓말을 뱉는 사람은 속이느니라"(잠 14:25).

 

   누구의 청을 받지 아니할지라도 믿는 자들에게는 입을 열어야만 할 때가 있습니다. 가령 어떤 사람이 억울한 고소를 당했을 경우 믿는 사람은 그 사람을 구하기 위해서 진실을 말해 줘야 합니다.

 

   "악을 행하는 자는 사악한 입술이 하는 말을 잘 듣고 거짓말을 하는 자는 악한 혀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느니라...사람의 제안을 기뻐하는 자는 형벌을 면하지 못할지니라"(잠 17:4-5).

 

   거짓말과 중상과 험담을 즐기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이 실수로 넘어지는 것을 기뻐합니다. 예수님 당시 예루살렘 사람들이 그랬습니다. 거짓말로 꾸며진 고소에 의해 고난을 당하시고 재판 받으시는 예수님을 보고 온갖 희롱과 조롱하기를 기뻐했습니다.

 

   "허물을 덮어 주는 자는 사랑을 구하는 자요 그것을 거듭 말하는 자는 친한 벗을 이간하는 자니라. 한 마디 말로 총명한 자에게 충고하는 것이 매 백대로 미련한 자를 때리는 것보다 더욱 깊이 박히느니라"(잠 17:9-10).

 

   진실을 말한다는 것은 우리가 보고 듣고 아는 모든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말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믿는 자들은 때로 형제자매들이 실수하거나 혹은 죄로 넘어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대부분의 경우  믿는 자들은 사랑가운데서 그 사람을 사적으로 권고해야 합니다. 만일 그가 권고를 받아들이며 합당한 태도를 보이고 하나님 앞에 자신의 잘못을 회개 함으로 다시 회복될 경우 그 일을 비밀로 지키는 것이 합당하고 옳습니다.

 

   "사연을 듣기 전에 대답하는 자는 미련하여 욕을 당하느니라"(잠 18:13).

 

   거짓 보고는 종종 남의 자초지종을 다 듣는 데 실패함으로 비롯되는 것입니다. 자녀들은 종종 자신들이 외부에서 당했던 일들을 자기 부모에게 고합니다. 그럴 경우 어떤 부모들은 전체적인 이야기를 다 듣거나 자초지종을 다 들으려고도 하지 않고 먼저 화부터 내며 자기 자녀의 친구들을 혼내 주어야 한다고 속단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항상 말하는 사람의 온전한 의미와 그 뜻을 먼저 조심스럽게  모두 다 듣고 그 의미를 확인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만일 어떤 의문이 있을 경우 더 질문을 하고, 그 전체적인 진실을 좀 더 확인하도록 힘써야 합니다.

 

   "사람은 자기의 인자함으로 남에게 사모함을 받느니라 가난한 자는 거짓말하는 자보다 나으니라"(잠 19:22).

 

   거짓과 속임수로 직장을 지키는 것보다 진실 때문에 불이익을 당하고 직장을 잃어 가난하게 되는 것이 더 낫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자를 의의 길로 인도해 주십니다.(참고: 시 23:3).

 

   "많은 사람이 각기 자기의 인자함을 자랑하나니 충성된 자를 누가 만날 수 있으랴"(잠 20:6).

 

   충성된 사람은 진실한 사람입니다. 그러한 사람은 어떤 약속한 일을 끝까지 지키며 선히 완성하는 사람입니다. 진실함과 충성됨은 서로 매우 밀접한 상관관계가 있습니다.

 

   "속이고 취한 음식물은 사람에게 맛이 좋은 듯하나 후에는 그의 입에 모래가 가득하게 되리라"(잠 20:17).

 

   "속이는 말로 재물을 모으는 것은 죽음을 구하는 것이라 곧 불려다니는 안개니라"(잠 21:6).

 

   거짓말과 부정직한 속임수로 돈을 버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언듯 보기에 처음에는 달콤해 보이지만 종국에는 마치 돌들을 씹는 것과 같이 그 자신에게 큰 불행의 열매를 가져다 줄 것입니다. 이는 사망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정당한 방법이 아닌 부정직한 재물은 결코 우리에게 행복을 가져다 줄 수 없습니다. 그것은 현세에도 내세에서도 변할 수 없는 진리입니다. 그러나 속임수로 삶의 방편을 삼는 자는 항상 남의주머니의 돈을 자신의 주머니로 긁어모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는 영적으로 자살 행위와 같습니다. 믿는 자들은 이러한 생활태도를 멀리해야 합니다.

 

   "네 선조가 세운 옛 지계석(경계표)을 옮기지 말지니라"(잠 22:28).

 

   여기에서 말씀하고 있는 지계석(경계표, landmark)이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 땅을 배분해 주실 때 각 지파대로 나눠주신 땅의 경계표를 상징적으로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신명기 19:14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어 차지하게 하시는 땅 곧 네 소유가 된 기업의 땅에서 조상이 정한 네 이웃의 경계표를 옮기지 말지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교훈은 오늘날에도 매우 실제적인 교훈이 될 수 있습니다. 인간은 거짓말을 다릉 방법으로 나타낼 수도 있습니다. 가령 자신의 집 뒤뜰의 담장을 이웃집 쪽으로 슬쩍 옮겨 자기 땅을 넗히는 것은 속이는 말을 하는 행동과 다름이 없습니다. 이와 같은 거짓된 행위는 주님 앞에 미움이 되는 것입니다.

 

   "옛 지계석(경계표)을 옮기지 말며 고아들의 밭을 침범하지 말지어다. 대저 그들의 구속자는 강하시니 그가 너를 대적하여 그들의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잠 23:10)

 

   앞에서 언급한 대로 이웃의 담장을 옮겨 자기의 경계를 넓히거나 혹은 고아나 과부를 상대하여 사기로 피해를 입히는 악하고 거짓된 행동들은 하나님을 대적하여 죄를 범하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또한 외국 노동자들이나 시골에서 올라 온 약하고 외로운 사람들의 임금을 제대로 지불해 주지 않고 착취하는 자들은 모두 악한 자들입니다. 야고보서는 경고하기를 "보라 너희 밭에서 추수한 품꾼에게 주지 아니한 삯이 소리 지르며(임금을 받지 못한)그 추수한 자의 우는  소리가 만군의 주의 귀에 들렸느니라"(약 5:4)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공무원은 일반인들을 속이고, 기업가는 자신의 종업원을 속이고, 상인은 고객을 속이고, 교사는 제자들을 속이고, 정치가들은 백성들을 속인다면 그 사회, 국가는 곧 병들고 망하게 될 것입니다. 국가와 국가 간에도 각국 마다 그들의 옛 조상들로부터 물려받아  지켜 내려온 국토의 경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36년간 일본은 대한민국 땅을 침범하고 식민지화하여 자기들의 나라로 만들려고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과거 일본인들은 결국 자신들의 잘못에 대한 큰 대가를 지불하고 자신들의 손아귀에서 우리나라를 풀어주어야만 했습니다. 정의의 하나님은 언제나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진리를 사되 팔지는 말며 지혜와 훈계와 명철도 그리할지니라"(잠 23:23).

 

   솔로몬은 여기서 진리의 가치를 강조하고 있으며 그것을 추구하고 잊어버리지 말 것을 충고하고 있습니다. 진리야말로 가장 가치 있고 소중한 것이며 그것은 감춰진 보물과 같습니다. 우리의 인생 가운데 진리의 가치를 생각하며 귀중히 여기는 사람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요?

 

   "네가 말하기를 나는 그것을 알지 못하였노라 할지라도 마음을 저울질 하시는 이가 어찌 통찰하지 못하시겠으며 네 영혼을 지키시는 이가 어찌 알지 못하시겠느냐 그가 각 사람의 행위대로 보응하시리라"(잠 24:12).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르기를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의 행위와 그의 행실대로 보응하나니"(렘 17:10)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저지른 그릇된 일들을 나는 알지 못하노라고 거짓말하며 변명 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그들 자신들의 눈과 귀를 막고 그들의 행동에 아무런 책임을 지려하지 않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진리를 그 마음에 품고 그것을 온전히 따르기로 작정한 자들은 하나님께서 그들 속에 온전한 길로 인도하는 힘을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이렇게 고백할 것입니다.

 

   "하나님이시여 나를 살피사 내 마음을 아시며 나를 시험하사 내 뜻을 아옵소서. 내게 무슨 악한 행위가 있나 보시고 나를 영원한 길로 인도하소서"(시 139:23-24).

 

   "너는 까닭 없이 네 이웃을 쳐서 증인이 되지 말며 네 입술로 속이지 말지니라. 너는 그가 내게 행함 같이 나도 그에게 행하여 그가 행한 대로 그 사람에게 갚겠다 말하지 말지니라"(잠 24:28-29).

 

   거짓말을 하는 중요한 동기 중의 하나는 원한 때문입니다. 때때로 부부간의 가정불화의 원인도 그와 같은 경우가 많습니다. 남편이나 아내가 분노에 휩싸이게 될 때 그 동안 마음에 쌓였던 것들을 들어내며 ' 당신이 내게 대하여 행한 것 같이 나도 그리하노라'고 사실 이상의 거짓말로 상대편에게 복수하려 드는 경우가 많습니다. 결국 이러한 사태는 폭행 같은 사건으로 발전하여 육체적 가해를 입히는 불행한 사고를 야기하고 이로 말미암아 결국 법정에까지 서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끝까지 상대편을 속이고 거짓 주장으로 맞설 것입니다. 결국 그들은 피차 다시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은 허다한 허물을 덮는다"고 하는 말씀을 잊지 말 것입니다. 허물은 상대편이 아니라 내게 있다는 솔직하고 진실 된 마음으로 돌아와야 부부 사이도, 이웃 간에도 불행은 화평으로 바뀌게 될 것입니다.

 

   "너는 이웃과 다투거든 변론만하고  남의 은밀한 일은 누설하지 말라. 듣는자가 너를 꾸짖을 터이요 또 네게 대한 악평이 네게서 떠나지 아니할까 두려우니라"(잠 25:9-10).

 

   만일 두 사람이 언쟁을 할 일이 생기면, 가능하면 그 언쟁을 두 사람만의 일로 지키도록 하십시오. 다른 사람의 불 필요한 개입으로 개인적인 문제가 공개적인 다툼으로 전개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진실을 말한다는 것은 개인적인 문제를 만천하에 공개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면책은 숨은 사랑보다 나으니라. 친구의 아픈 책망은 충직으로 말미암은 것이나 원수의 잦은 입맞춤은 거짓에서 난 것이니라"(잠 27:5-6).

 

   사랑과 인자로 행동할 때 그 말은 진실하며 바른 때 바른 장소에서 항상 합당하게 행한 행동들은 하나님을 존귀케 만듭니다. 어떠한 환경 가운데서도 솔직하고 진실 된 말은 개인적인 우정 사이의 상처를 치유하고 우정을 더욱 깊게 만들어 줍니다.

 

   "관원이 거짓말을 들으면 그의 하인들은 다 악하게 되느니라"(잠 29:12).

 

   이 세상은 신실한 사회와 거짓과 부패한 사회가 공존하는 매우 다양한 양상을 띄고 있습니다. 가령, 덴마크는, 지구상에서 세금의 부정이 가장 낮은 나라로 칭송을 받는 나라입니다. 반면에, 많은 나라들은 그 정부나 사회 전반에 걸쳐 거짓과 뇌물과 부패가 깊숙히 스며들어 있습니다. 가정이나 어떤 단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궁극적으로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행동에 책임이 있으며, 한 가정이나 한 조직의 지도자는 반드시 정직한 원칙을 세워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다 순전하며 하나님은 그를 의지하는 자의 방패시니라. 너는 그의 말씀에 더하지 말라 그가 너를 책망하시겠고 너는 거짓말하는 자가 될까 두려우니라"(잠 30:5-6).

 

   설교자들이나 교사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 할 때 하나님의 말씀에 더하거나 혹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지 않은 것을 더 한다면 그들은 거짓말쟁이보다 나을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다루는 자들은 그 누구든지 절대로 정직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고후 4:2).

 

   종교적인 거짓말쟁이

 

   성경 속에서 종교적인 거짓말쟁이의 전형적인 대표 인물은 유다입니다 .열한제자들이 그의 중심을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그는 예수님의 훌륭한 제자 흉내를 냈습니다. 그들은 금전 회계 일을 그에게 맡겼습니다. 그렇지만 그의 모든 거짓은 결국 다 드러나고 말았습니다. 그는 몸으로는 예수님을 따랐으나 그영혼은 거짓의 아비 사탄을 따랐습니다.

 

   라울(Raul)은 형무소 재소자 중에서 98점이라는 놀라운 성적으로 모든 성경 통신과정을 훌륭하게 마쳤습니다. 그가 통신으로 보내온 서신들은 매우 영적이었고 사람들에게 감동을 줄 정도로 훌륭해 보였습니다.

 

   그는 서신으로 그가 가석방을 받았을 때, 옷이 필요하다고 호소했습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한 그리스도인이, 그에게 옷을 보내 주었습니다. 두 번째도 같은 방식으로 차가 필요하다고 호소하였고, 그 사실을 알게 된 그리스도인이 그에게 차를 보내 주었습니다. 세 번째 사람에게도 같은 방식으로 자신의 집에까지 차를 태워줄 수 없겠냐고 하여 그 소식을 들은 그리스도인이 그의 차로 집까지 그를 데려다 주었습니다. 네 번째의 또 다른 그리스도인에게는 그가 집에 당도했을 때 얼마의 돈이 필요하다고 호소 하였고, 네 번째 사람도 얼마의 돈을 그에게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기 집으로 돌아왔을 때 그의 부모님께도 이틀 후 식당으로 모시고 나가 식사를 잘 대접하겠다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그러나 라울은 그 약속조차도 지키지 않았습니다.

 

   가석방을 받은 지 30시간이 지난 후 라울은 옛 애인을 찾았고 그녀와 마약을 하며 밤을 함께 지냈습니다. 그의 부모님은 밤이 되어도 돌아오지도 않고 함께 식사를 나가자는 약속을 어긴 아들에게 몹시 실망했습니다.  그를 관리하던 가석방 감시관은 그를 거의 감옥으로 다시 돌려보내버릴 뻔 하였습니다.

 

   그곳 감시관은 그렇게 하는 대신 라울을 크리스천 훈련원으로 보내었습니다. 그곳에서 다섯 번째로 그를 돕는 또 한사람의 크리스천과 친구관계를 맺었습니다. 라울은 크리스천 친구에게 자신은 영적인 새 각성을 회복했노라고 말했습니다. 그곳 훈련원에서 나온 라울(Raul)은 다시 마약에 빠지게 되었고 결국 교도소로 되돌아가고 말았습니다.

 

   라울은 그를 돕던 다섯 사람의 크리스천들 중 몇몇 사람에게 아무런 사과도 없이 또 다시 돈이 필요하다며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라울(Raul)은 그의 부모들을 속였던 것처럼 크리스천들에게 똑 같이 행동했습니다. 그는 사람들을 계속해서 이용하려고 할뿐더러 자신은 그렇지 않은 것처럼 거짓과 속임 된 삶을 반복해서 살았습니다.

 

   결론

 

   라울은 종교적 거짓말쟁이의 전형적인 한 표본입니다. 그의 삶은 자신의 쾌락만을 좇을뿐 다른 이들은 상관하지 않았습니다. 반면에, 진실한 그리스도인은 단지 진실을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 나타냅니다. 그는 약속을 지키며 크거나 작은 모든 일에 신실합니다. 그는 신뢰할 만하며 순전합니다. 그는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요 1:47)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나다나엘과 같은 사람입니다.

 

   예수께서 나다나엘을 칭찬하신 이유는 현대적인 표현을 빌리자면, "본 것과 취한 것이 동일하다"(What you see is what you get)라는 말과 같습니다. 나다나엘은 순수했고, 솔직했고 정직했으며 이의가 없었습니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거짓 입술은 여호와께  미움을 받아도 진실하게 행하는 자는 그의 기뻐하심을 받느니라"(잠 12:22).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과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라"(엡 4:25).   EMMAUS

Posted by 행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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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언강해

제10과 자신을 겸비시킴으로 얻는 존귀

Humbling Yourself Bring Honor

 

본문말씀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잠언 16:18).

 

"겸손과 여호와를 경외함의 보상은 재물과 영광과 생명이니라"(잠언 22:4).

 

교만의 반대는 겸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한결같이 교만한 사람은 결국 실패에 이르게 된다는 사실을 말씀해 주시고 계십니다. 반면에 겸손한 사람은 하나님을 깨닫는 자이며, 그로 인하여 존귀를 얻게 될 것을 말씀해 주시고 계십니다.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교만(pride)이란 말의 의미는 "치켜세우다"(lifting up)라는 뜻으로 거만함(arrogance), 자랑함(boasting), 오만함(haughtiness), 주제넘음(presumption) 등과 같은 의미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을 앎으로 진실한 '자랑'을 깨달은 사람입니다. 그는 기록하기를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고전 1:31)고 하였습니다. 또한 그는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갈 6:14)고 말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회심 이후 빌립보서 3:3-11을 통하여, 지난날 자신의 모든 종교적인 공로들이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앞에선 단지 쓰레기(오물, 배설물)와 같다고 고백했습니다.

 

모세는 그 겸손함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 위에 뛰어난 인물이었음을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민 12:3). 솔로몬 또한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종으로 종의 아비 다윗을 대신하여 왕이 되게 하셨사오나 종은 작은 아이라 출입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왕상 3:7)라고 고백하였습니다. 다음은 신약성경 중에서 예수님의 겸손을 나타낸 가장 아름다운 구절입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6-8).

 

성경 회화 백과사전(Pictorial Encyclopedia of the Bible)에서, 겸손이란 오직 성경 안에서만 발견할 수 있는 덕(virtue)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모든 비 성경적인 종교들은 그들이 추구하는 자랑의 형태나 혹은 자부심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성경이 참된 그리스도인들에게 요구하는 겸손은 단지 다른 사람들의 인정을 추구하는 가식적 겸손이 아닙니다. 이제 본과를 통하여 잠언 말씀이 정의하고 있는 자랑과 겸손에 대해서 공부해 보도록 합시다.

 

교만의 앞길은 패망이다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는 것 곧 그의 마음에 싫어하시는 것이 예닐곱 가지이니, 곧 교만한 눈과 거짓된 혀와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는 손과, 악한 계교를 꾀하는 마음과 빨리 악으로 달려가는 발과, 거짓을 말하는 망령된 증인과 및 형제 사이를 이간하는 자이니라"(잠 6:16-19).

 

하나님은 거짓말이나 살인을 미워하시는 것처럼 교만을 미워하십니다. 그렇지만 현대인들은 명예(fame)나 자만(pride)을 오히려 선망합니다. 우리는 연예계 잡지의 표지에 실린 모델 사진이나 수많은 여러 다른 잡지들에 실린 미녀들 사진이나 혹은 육체미를 자랑하는 남성들의 사진을 우리는 흔히 보게 됩니다. 거의 대부분 이런 모델들의 사진은, 자신들의 몸매나 얼굴 심지어 눈짓표정에서도 그들 자신의 교만함을 교묘히 풍기고 있다는 인상을 우리에게 심어줍니다. 이 모든 것은 대중들에게 지나친 허영심이나 교만과 자만심을 조장하며, 그것들을 선망하는 마음을 우리에게 불러 일으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엔 우리 영혼을 패망으로 이끌게 되는 것입니다.

 

"눈이 높은 것과 마음이 교만한 것과 악인이 형통한 것은 다 죄니라"(잠 21:4).

 

악한 범죄자의 특징은 오만한 태도와 교만한 눈빛입니다.

 

"교만이 오면 욕도 오거니와 겸손한 자에게는 지혜가 있느니라"(잠 11:2).

 

교만한 사람은 가르칠 수가 없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모든 것을 다 아는 자처럼 행동하며 유식한 척 가장합니다. 그러나 겸손한 사람은 자신이 모르는 것에 대해서 질문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교만에서는 다툼만 일어날 뿐이라 권면을 듣는 자는 지혜가 있느니라"(잠 13:10).

 

만일 방 안에 교만한 자들로 가득 차 있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각자 저마다 자기 자신이 주목의 대상이 되기를 원할 것입니다. 아무도 남의 이야기는 들으려 하지 않고 모든 사람이 저마다 발언하기를 원하며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기를 원할 것입니다. 머지않아 거기에는 논쟁과 다툼이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미련한 자는 교만하여 입으로 매를 자청하고 지혜로운 자의 입술은 자기를 보전하느니라"(잠 14:3).

 

이 구절은 미련한 자는 그의 교만으로 인해 자기 스스로에게 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사실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 마음이 교만과 자랑으로 가득 찬 자는 싸움을 유발합니다. 그는 자신을 위하여 다른 사람들을 원수로 삼게 됩니다. 이와 반대로 지혜로운 자는 그의 말로 어려움들을 벗어나는 방법을 알고 있는 자입니다.

 

"무릇 마음이 교만한 자를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나니 피차 손을 잡을지라도 벌을 면하지 못하리라"(잠 16:5).

 

교만한 사람은 하나님께 인정을 받지 못합니다. 그는 마치 자신이 하나님인 양 행동을 합니다. 만일 방안에 그 나라 임금이 함께 앉아 있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사람들은 그의 앞에서 교만한 행동이나 큰소리나 자기 자랑을 드러내는 대신 겸손과 잠잠함과 정중한 태도를 보이려 할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자만심으로 가득한 자는 하나님을 인정하려 들지 않습니다. 심지어 그는 하나님을 생각하려 들지도 않습니다.(시 14:1).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겸손한 자와 함께 하여 마음을 낮추는 것이 교만한 자와 함께하여 탈취물을 나누는 것보다 나으니라"(잠 16:18-19).

 

마약 밀거래 자들은 보석과 화려한 고급의상으로 자신의 몸을 치장하고 나타납니다. 한편으로, 대부분 가난한 사람들이 거주하는 길거리에서는 경건한 여인들이 노숙자들을 위하여 음식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마약 거래자들은 결국 체포되어 처벌을 받고 형무소 안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반면에, 조용히 가난한 이웃들을 위하여 구제에 힘쓰는 경건한 여인들의 그 아름다운 덕은 많은 사람에게 큰 감화를 불러일으킬 것이고, 많은 칭송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은밀하게 선을 행하는 사람들은 진실로 세상에 어떤 부자들보다도 영적으로 더욱 부한 사람들입니다.

 

"사람의 마음의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길잡이니라"(잠 18:12).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은 결코 체포되지 않으리라는 확신을 가지고 완벽한 범죄를 도모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기회를 따라 담대히 범죄를 실행합니다. 그러나 성공을 장담하던 교만한 그들은 자산들의 죄로 말미암아 처벌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반면, 열심히 일하며 살아가는 겸손한 사람들은 결국 존귀를 얻게 됩니다. 혹 때로는 그가 죽은 후라도 존귀가 따르게 됩니다.

 

"무례하고 교만한 자를 이름하여 망령된 자라 하나니 이는 넘치는 교만으로 행함이니라"(잠 21:24).

 

냉소자(scoffer)는 남을 조롱하며 모욕하는 자입니다. 그는 무례하고, 지나치게 자만(self-confident)하고, 쉽게 허풍과 자랑하기를 좋아합니다. 시편 1:1은 이르기를 경건한 사람은 남을 경멸하거나 냉소하는 자(scornful)와 함께 어울리거나 자리에 함께 앉지 않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겸손과 여호와를 경외함의 보상은 재물과 영광과 샘명이니라"(잠 22:4).

 

베드로(벧전 5:6)와 야고보(약 4:10)는 믿는 자들이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길 아래 겸손히 자신을 낮출 때 결국 하나님께서 그들을 높이실 것을 동일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세상은 스스로 자신을 높이지 않으면 아무도 그를 높이지 않는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인생은 오직 살아 있을 동안의 일만 중히 여겼기에 영리하게 대처하는 것이 승리의 삶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겸손하게 낮아진 자는 실패자라고 가르치는 것이 이 세상 사람들의 일반적인 사고입니다.

 

"사람이 교만하면 낮아지게 되겠고 마음이 겸손하면 영예를 얻으리라"(잠 29:23).

 

오만한 자의 교만은 결국 자기 스스로를 파멸의 길로 이끌게 됩니다. 반면에 겸손하여 자신의 업적이나 능력을 자랑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러한 사람은 결국 그가 어떠한 사람이었는가에 대해서 인정함을 받는 날이 반드시 돌아 오게 될 것입니다.

 

"진실로 그는 거만한 자를 비웃으시며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나니"(잠 3:34).

 

우리 하나님은 그 심령이 겸손하고 온유한 자에게 그의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그 훌륭한 본보기를 누가복음 2:36-38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연로한 과부 안나(Anna)는 예루살렘 성전 안에서 전심으로 기도하며 그녀의 여생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밤낮으로 금식하고 하나님을 경배하고 있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 성전을 예배하기 위해 드나들었고 그들 중에는 종교지도자들과 부한 자들도 있었지만 아무도 그녀를 거들떠보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보잘것없고 늙고 가난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녀를 물리치시지도 저버리시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교만한 사람들 대신 그녀를 택하셔셔 메시아를 계시해 주시고 자신의 눈으로 직접 그를 대면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겸손하고 경건한 이 여인을 통하여 예루살렘의 구속을 바라는 사람들에게 아기 메시아에 대해서 증언했던 사실을 성경기록을 통하여 찾아 볼 수 있습니다(38절). 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와 축복입니까!

 

 

또한 누가복음 2:8-20에서 우리는 들에서 양을 지키던 목자들에게서 동일한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들에게 구주의 탄생 소식을 전하실 때 세상의 부한 자나 종교지도자들과 같은 교만한 자들 대신 매우 비천한 사람들에게 그 기쁜 소식(good news)을 전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날에도 교만한 자들을 물리치시고 겸손항 자들에게 은혜를 나타내십니다. 부한 자들과 스스로를 부족함이 없다고 자만하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보내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하지만, 세상에서 가난하고 소외되고 마음이 낮아진 자들은 그리스도를 필요로 하며 자신의 구주로 받아들이고 믿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지자 예레미야는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지혜로운 자는 그의 지혜를 자랑하지 말라 용사는 그의 용맹을 자랑하지 말라 부자는 그의 부함을 자랑하지 말라.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 9:23-24)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지혜의 훈계라 겸손은 존귀의 길잡이니라"(잠 15:33).

 

누구든지 하나님 앞에 존귀를 얻으려면 반드시 겸손해야 합니다. 솔로몬은 그가 부친 다윗으로부터 왕위를 물려받게 되었을 때 하나님 앞에 나아가 겸손히 그 자신의 마음을 낮추고 이처럼 고백하였습니다.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종으로 종의 아버지 다윗을 대신하여 왕이되게 하셨사오나 종은 작은 아이라 출입할 줄을 알지 못하고, 주께서 택하신 백성 가운데 있나이다 그들은 큰 백성이라 수효가 많아서 셀 수도 없고 기록할 수도 없사오니"(왕상 3:7-8)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의 이와 같은 겸손한 마음을 기뻐하시고 넘치는 축복을 그에게 내려 주셨습니다. "솔로몬이 이것을 구하매 그말씀이 주의 마음에 든지라. 이에 하나님이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것을 구하도다 자기를 위하여 장수하기를 구하지 아니하며 부도 구하지 아니하며 자기 원수의 생명을 멸하기도 하지 아니하고 오직 송사를 듣고 분별하는 지혜를 구하였으니, 내가 네 말대로 하여 네게 지혜롭고 총명한 마음을 주노니 네 앞에도 너와 같은 자가 없었거니와 네 뒤에도 너와 같은 자가 일어남이 없으리라. 내가 또 네가 구하지 아니한 부귀와 영광도 네게 주노니 네 평생에 왕들 중에 너와 같은 자가 없을 것이라"(왕상 3:10-13).

 

"꿀을 많이 먹는 것이 좋지 못하고 자기의 영예를 구하는 것이 헛되니라"(잠 25:27).

 

여러 번 강조하지만 겸손한 사람은 남 앞에서 자신의 공을 전시하거나 뽐내지 않으며 자랑하지 않습니다. 자기 자신을 스스로 칭찬하는 것 보다 타인으로부터 칭찬을 듣게 될 때 그것이야 말로 진정으로 가치 있는 일이며 큰 의미가 있다 할 수 있습니다.

스스로 자랑과 겸손을 채점해 보기

 

다음의 간략한 질문들은 우리 자신이 얼마나 교만한 가를 일깨워 주는데 도움을 줄 것입니다. 이중에서 나 자신이 해당된다고 생각되는 항목을 골라 보십시오.

 

( ) 나는 말을 많이 하며 종종 남의 말을 중단시킨다. 나는 사람들이 내가 누구인지를 알아주기를 원하며, 내가 얼마나 중요한 사람들을 많이 알고 있으며, 내가 얼마나 박식한 가를 알아주기 원한다.

( ) 나는 어떤 사람이 나와 동의하지 않거나 혹은 나의 잘못을 지적하려 할 때 이를 불쾌히 여기거나 화를 낸다.

( ) 나는 사람들이 나와 대화하려 할 때 그의 말을 들으려고 하는 대신 대꾸할 말을 먼저 생각한다.

( ) 나는 나와 인종이 다른 사람들을 싫어한다.

( ) 나는 죄를 범함으로 감옥에 들어오게 된 사실을 부끄럽게 여기는 대신 체포된 사실에 대하여 화가 난다.

( ) (만일 내가 남자라면) 나는 여자 지배하기를 좋아한다. (만일 내가 여자라면) 나는 남자들이 나를 뛰어난 미인으로 여겨주기를 바란다.

( ) 나는 노인이나, 병자들이나, 저능한 사람들이나, 불구자들을 싫어한다.

( ) 아동 범죄자들을 멀리하고, 그들은 나와 거리가 먼 사람들이라 여기며, 그런 사람들과는 대화조차 거부한다.

( ) 나는 지난 과거생활 중에서 얼마나 많은 성적 파트너를 가지고 있었는가를 자랑한다.

( ) 나는 근본적으로 선한 사람이며, 형무소의 재소자들과는 다르다고 여긴다.

( ) 나는 같은 형무소 구역 안에서 나 자신이 제일 건장한 육체의 소유자라고 생각한다.

( ) 나는 냉정하고 굳은 표정을 지키려고 애쓴다.

 

만일 이상 이외에도 생애 중에 자신의 교만한 면이 더 있다고 생각되는 것이 있다면 자신의 노트에 적어보십시오.

교만에서 겸손으로

 

드루(Drew)는 대학 학력 이상의 고등교육을 받은 41세의 재소자였습니다. 그는 과학 분야에서 박사학위를 취득 후 연구과정에 있는 사람들이 사용하는 전문교재를 읽고, 그것을 이해할만큼 매우 비상한 머리를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젊은 시절에는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천재적인 지능에 대하여 몹시 자랑했었노라고 합니다. 그는 무신론자이었으며 마약 복용자였습니다. 그는 스스로 표현하기를 언제 어디서나 자신을 필요로하는 곳이면 동참했으며 이교도 우상 숭배자들의 사악한 파티에도 출석했다고(pagan partygoer)말하였습니다.

 

통제력을 상실한 드루의 행동은 결국 그 자신을 감옥으로 인도하였습니다. 감옥에 들어오고 나서야 비로소 그는 갑자기 제 정신을 차리게 되었고, 현재의 형무소 생활이란 본래 자신의 인생에서 자신이 원하던 삶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뒤 늦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제 그의 교만(pride)과 자만심은 산산이 부서지기 시작하였습니다. 바로 그 무렵, 나약한 몸을 지닌 어느 한 노인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 하기 위하여 드루가 수감되어 있던 형무소를 방문하였습니다. 그 때 참으로 그리스도의 영이 역사하였고, 드루는 마침내 그의 무릎을 꿇고 엎드려 자신의 죄를 회개하며 그리스도께 항복하였습니다.

 

그 이후로, 드루(Drew)의 삶은 전적으로 그리스도께 복종하는 삶으로 변하였고, 결국 동료 재소자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 자로까지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드루는 이중 언어를 구사 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재소자들 중, 영어를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도 개인적인 전도사역을 시작하였습니다. 그는 스페인어 성경을 구해서 스페인 이민 재소자들에게 성경을 가르쳤습니다. 그는 인종이 다른 사람들이나,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나 혹은 외국에서 이민 온 사람들과 함께 어울렸고 그들에게 성경을 가르치는 것을 조금도 창피하거나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드루는 교도소 안에서 크리스천의 믿음을 전파한다는 이유 때문에 여러 번 신체적인 공격을 당하기도 하였습니다. 사람들은 크리스천을 생각할 때면 그들 편에서 가장 쉬운 공격대상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는 "만일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지 않으며, 내 안에 계시지 않고, 나를 붙들어 주시지 않았다면, 나는 이미 육체적으로 교도소 안에서 살해당하였을 것이다. 그러한 일은 이 곳에서 충분히 쉽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다." 라고 썼습니다.

드루(Drew)는 3일에 한 번씩 금식 기도하는 시간을 보내었습니다. 그는 입으로만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면서 감옥 안에서 마약을 은밀히 거래하는 자들이나, 도둑질을 하는 자들이나, 성적으로 부도덕한 행위를 하는자들에게 크리스천의 신앙으로 그들을 경각시키고 도전하는 일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의를 위하여 용감히 싸웠습니다. 지난 날 그의 교만한 태도나, 하나님을 거부하는 불신적인 태도나, 마약에 빠졌던 일들은 그에게는 이미 지나간 과거의 일이었습니다. 대신에 그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전한 사람으로 바뀌어져 있었으며 말씀 안에서 담대한 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겸손하며 영적으로 마음이 상하고 부서진 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전적으로 그리스도의 주권 아래 복종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결론

 

사탄과 마귀의 목적은 사람들로 하여금 교만한 자가 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사탄은 교만의 근원입니다. 에스겔서 28장 안에서, 선지자 에스겔은 이스라엘의 북방에 있는 두 도시, 두로와 시돈 왕들의 교만을 정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영적으로 더 깊은 의미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본래 하나님의 천사장이었던 루시퍼는 교만한 마음을 품고 스스로 자신을 높여 하나님 보다 더 높은 위치에 오르기를 원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하나님에게 쫓겨난 타락한 천사 루시퍼가 사탄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사탄이 에덴에서 이브를 유혹하는 자로 출현하는 것을 창세기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 유혹자 사탄은 이브로 하여금 금단의 열매를 먹으면 하나님과 같이 될 것이라고 유혹했습니다. 사탄은 그녀에게 만일 하나님을 도전하면 더 높게 될 것이라고 하는 생각을 불어 넣어 주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교만의 본질입니다. 사탄이 원하는 것은 우리들을 스스로 더 높아지는 자로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실상 사탄의 유혹의 결과는 우리를 부끄럽게 만들었습니다.

 

이와 반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들로 하여금 스스로 전능하신 하나님의 권능아래 겸손한 자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때가 이르면 그가 우리들을 친히 높이시고 영광스럽게 해 주실 것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심판의 날에 "먼저 된 자로서 나중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마 19:30)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우리 스스로를 겸손한 자로 낮추는 것이 매우 중요함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약 4:10; 벧전 5:6). 드루(Drew)는 감옥생활 가운데서 스스로 결단을 내렸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겸손한 자가 되었고 이제 하나님께서는 그로 하여금 교도소 밖에 있는 다른 사역자들이라도 쉽게 할 수 없는 특별한 사명 곧 형무소 내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귀중한 임무를 맡은 자가 되게 하셔서 그를 높여 주셨습니다. EMMA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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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언 제 1 과

믿음,신앙 2013. 2. 21. 14:17

제 1 과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얻는 대인관계의 지혜

(Fearing God Helps in Personal Relationship)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나 어리석은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한다"(잠 1:7)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게 되나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안전하리라"(잠 29:25)고 했습니다. 그리고 "여호와를 경외함은 생명으로 인도하고, 만족 가운데 거하게 되며 재앙을 만나지 아니하리라"(잠 19:23)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지혜란 무엇인가?

시편은 하나님과 우리 인간과의 관계를 다루고 있다면, 잠언은 우리 인간들 간의 관계를 다루고 있습니다. 잠언 말씀을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지혜는 우리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방법을 통하여 우리 인간들 간의 관계에 필요하고 합당한 지혜를 깨닫도록 해줍니다. 그리고 이러한 지혜는 우리들의 매일의 삶 가운데 합당한 때에 합당한 방법으로 우리들로 하여금 올바른 행동과 올바른 말을 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반면에 어리석은 자의 지혜는 이와 정반대입니다. 어리석은 자는 언제나 잘못된 때에 잘못된 방법으로 자기 자신의 그릇된 행동과 말을 드러내게 됩니다. 어리석은 자는 마땅히 두려워해야 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대신 사람을 두려워합니다. 즉 "미련한 자는 명철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자기 스스로의 마음을 드러낸다" (잠 18:2) 하였으며 "미련한 자는 자신의 눈에 옳은 길을 쫓으나 지혜로운 자는 권고를 듣는다"(잠 12:15)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잠언의 처음 아홉 장은 지혜와 어리석음에 대하여 비교하고 있습니다. 윌리엄 맥도날드는 그의 주석 책 "믿는 자들을 위한 성경주석" (영어 원본 Believer's Bible Commentary) 793 페이지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 사람들은 인생행로에서 길을 가다보면 사람을 부르는 두 개의 다른 여인의 음성을 듣는다. 그 하나는 지혜자의 음성이고 다른 또 하나는 길거리의 낯선 여인의 음성이다. 여기에서 첫 번째 여인인 지혜자의 음성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그리고 두 번째 낯선 여인의 음성은 죄의 유혹과 불경건한 이 세상의 음성을 상징한다."

젊은 아들에게 아버지는 "지혜를 취하라, 명철을 택하라, 지혜를 거절하지 말라, 지혜가 너를 보호하리라. 지혜를 사랑하라, 지혜가 너를 지키리라"(잠 4:5,6)고 거듭거듭 권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젊은이는 이와 같은 지혜자의 권고를 거절합니다. 대신 그는 어리석은 여자를 택하게 됩니다. 그에게는 어리석은 여자의 음성이 더욱 달콤하게 들립니다. 잠언 9:13-18 말씀을 보면 어리석은 여자는 젊은이의 마음을 사로잡는 유혹자의 상징입니다. 결국 어리석은 젊은이는 유혹하는 여자의 집으로 들어갔고, 사망이 그곳에 있는 것을 알지 못했으며, 그는 깊은 지옥의 음부 속에 거하고 있는 여자의 덫에 빠진 망한 손님들 중에 한 사람이 되고 맙니다(잠 7:7-27).

지혜의 교훈을 주는 성구들

"저들이 주를 경외하기를 선택하지 아니하고 그 교훈을 싫어함으로...그들이 자기의 행위의 열매들을 먹으리라(잠 1:29-31)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반드시 지혜를 택하고 지혜를 열망해야 합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결국 우리에게 고통이 찾아오고 마는 것입니다. 잠언 중에 지혜란 단어는 50번이상, 지식이란 단어는 40번이상 나오고 있습니다. 그중에 지혜를 언급한 대표적인 몇 구절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지혜를 발견한 사람은 복이 있고 명철을 얻으리라"(잠 3:13).

"지혜가 으뜸 원리이니 그러므로 지혜를 얻으라. 그리고 너의 가진 모든 것으로 명철을 얻으라. 그를 높이라, 그리하면 그가 너를 높이리라. 그를 품에 안으면 그가 너에게 존귀를 안겨 주리라"(잠 4:7-8).

"지혜는 루비 보석보다 나으니, 무릇 원하는 그 어떤 것들과 비교할 수 없도다"(잠 8:11).

"주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교훈이라"(잠 15:13 전반부).

"금 보다 지혜를 얻는 것이 얼마나 귀한고! 명철을 얻는 것이 은을 얻는 것 보다 더욱 나으니라"(잠 16:16).

"진리를 사고 그것을 팔지 말라, 그리고 지혜와 훈계와 명철도 그리할지니라"(잠 23:23).

"지혜를 사랑하는 자는 그의 아버지와 그의 어머니를 즐겁게 하리라"(잠 29:3).

"지혜가 부족하므로 어리석은 자는 죽으리라"(잠 10:21후반부).

"지혜를 얻는 자는 그의 영혼을 사랑하는 자며, 명철을 지키는 자는 복을 찾으리라"(잠 19:8).

지혜에 대한 열망과 그 획득

솔로몬은 우리가 지혜를 얻는 가장 으뜸가는 방법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잠 9:10). 그와 같은 말은 우리 귀에 낯설기도 하고 이상스럽게 들릴 수도 있습니다. 대부분 사람들이 믿기로는, 지혜를 얻는 방법은 대학을 가서 고등학문을 배우거나, 혹은 훌륭한 책들을 읽어서 얻는 것이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참되고 올바른 지혜를 얻는 길은 반드시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얻게 되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잠언은 약 20번 가량 우리 인간들의 하나님께 대한 경외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경외하다(to fear)라고 번역한 동사는 히브리어 '이라' (yirah)에서, 경외함(fearing)이란 명사는 '야레' (yare)에서 번역된 것입니다. 이 단어의 본래의 의미는 존경하다(to reverence)란 뜻입니다. 즉 하나님을 경외 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공경하고, 영화롭게 하며, 사랑하며, 하나님께 충성을 바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와 대조적으로, 잠언 29:25 말씀에는 인간에 대한 두려움(fearing)에 대해 말씀하고 있는데, 여기에서 사용된 단어는 전적으로 그 의미가 다른 '차라다'(charadah)라는 단어를 쓰고 있습니다. 이는 떨다(tremble), 공포에 사로잡히다(terrified)란 의미입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십대 소년기는 같은 또래의 무리들로부터 받는 압력의 두려움이 있습니다. 청년기에는 타인의 비판과 배척에 대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형무소 재소자들에게는 그들의 적들에 대한 두려움 말고도 동료갱단 친구들에 대한 두려움도 있습니다. 특히 재소자 중에서 어느 사람이 예수님을 믿고 크리스천으로 변한 후, 이전에 속해 있던 갱 단원으로부터 그가 탈퇴하려 할 때, 기존의 옛 동료 갱 단원들로부터 가해질 위협과 보복에 대하여 두려움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모든 인간들에 대한 두려움들을 그냥 버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게 되나 누구든지 주를 의지하는 자는 안전하리라"(잠 29:25)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사람을 두려워하는 대신 하나님 자신을 더 두려워하라고 분명히 말씀하고 계십니다. "나는 너의 창조자이다. 나는 너희를 돌보는 하나님이며 나는 네 입의 모든 말을 다 알고 있으며 너희의 모든 생각을 알고 있다"(시 139:2-4)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끝 날에 "모든 것을 친히 심판하리라"(고후 5:10)고 말씀하십니다. "나를 공경하라 나를 경외하라 나를 두려워 하라 너희는 나로 말미암아 살며 기동하며 생존한다."(행 17:28)고 말씀하십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나는 너희의 유일한 창조자니 너희는 마땅히 나를 경외하며 인간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힘주어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대신 사람을 두려워 함

레이(Ray) 의 인생은 그 출발부터 순탄하지 못하였습니다. 그가 어렸을 때 아버지는 그의 곁을 떠났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거의 술집에서 살다시피 하였습니다. 그나마 그에게 가장 가까운 친척이었던 삼촌마저 그를 괴롭혔습니다. 그는 아동 보호소에서 성장했으며 결국 후에는 형무소에 들어가 그곳에 있는 난폭한 사람들과 함께 지내야 했습니다. 그는 심한 대인 공포증에 걸렸습니다. 그는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해하려는 것같은 공포증으로 말미암아 그 누구와도 가까이 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훗날, 레이(Ray)는 형무소 내에서 복음 전도자로부터 복음을 듣게 되었고 주 예수를 자신의 구주로 영접함으로 구원함을 받은 거듭난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그후 그는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자신과 동일한 처지에 있는 다른 감방의 재소자들을 찾아가 하나님의 말씀과 복음을 그들에게 전하여주었습니다. 그러자 차츰 재소자들은 오히려 레이(Ray)를 광신자처럼 여겼습니다. 그 후로 레이(Ray)는 또 다시 그 누구하고도 가까워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생겼습니다. 심지어 그는 그리스도인 형제들과도 오랜 친구관계를 지속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레이(Ray)에게 가석방이 내려졌고 그는 한 선교단체에 속한 제자훈련 프로그램에 등록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훈련원 프로그램 중반쯤 이르렀을 때 레이(Ray)는 그 곳 훈련원으로부터 더 이상 훈련을 받을 수 없으니 떠나 달라고 하는 퇴교 요청을 받았습니다. 선교훈련원의 담당자는 레이(Ray)는 도저히 선교를 위한 훈련을 목적으로는 가르치기 어려운 사람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선교훈련원에 있을 동안에도 그는 단 헌명의 친구도 없이 지냈습니다. 선교원에서 훈련을 그만 둔 이 일로 마음에 상처를 입은 레이(Ray)는 다른 거처 할 곳을 구하였고, 마침내 새로운 일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그 직장에서도 마찬가지로 배척을 받았고 그는 또 다시 새로 얻은 직장을 그만두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그는 또 다시 새로운 직업을 찾아 계속하여 전전하였습니다. 그러는 중에 레이(Ray)는 점점 외톨이가 되어 갔습니다. 그의 곁에는 사귀는 친구들도 거의 없었고, 점점 처음 구원 받았을 때 가지고 있던 그리스도를 향한 첫 사랑마저도 잃어버렸습니다. 그는 여러 교회들을 방문하며 자신에게 맞는 교회를 찾아보려고 노력을 해보았지만, 그의 마음을 정할 곳을 찾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한 목사님이 그를 제자로 삼으려고까지 배려를 했으나 레이(Ray)는 이를 거절하였습니다. 그는 모든 사람들을 의심하기 시작하였으며 심지어 그를 진심으로 돕고자하는 장성한 그리스도인 형제, 자매들마저 믿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이 사람은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레이(Ray)는 거듭난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의 능력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전연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찾아가 복음을 전하는 일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여전히 누구하고도 친구가 되려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주위에 있는 그리스도인 형제, 자매들은 그를 가까이 하려고 노력하고 힘썼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누구와도 건전한 관계를 이루려고 하는 시도를 하지 않았으며 그들의 요청을 받아드리려 하지도 않았습니다. 레이(Ray)는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은 전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에게서 복음을 들은 사람들을 그 자신에게로 이끌지 못하였고 그렇기 때문에 불신자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이끄는데도 결코 성공할 수 없었습니다. 이 사람의 문제는 다른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이려 하지 않았으며, 다른 사람으로 부터 어떠한 충고도 받아드리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과 친교관계를 이루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한 사람이었습니다. 레이(Ray)의 근본적인 문제는 무엇입니까? 그는 사람들을 두려워하였고 다른 사람들과 온전한 관계를 이루는데 필요한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고 배우려는 노력을 전혀 하지 않은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과 원만하고 성공적인 관계를 이룰 수 있는 지혜를 얻을 수 있는 열쇠는 먼저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 대신 하나님을 두려워하라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를 의롸하게 될 때 우리는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우리들로 하여금 여러 다양한 사람들과 어울리며 올바른 관계를 가질 수 있는 지혜를 가르쳐 줍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인 후, 우리 인간들은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는데 어려움을 겪게 되었습니다. 인간들 사이에는 두려움과 미움과 욕심과 질투의 담이 생기게 되었고 이 담이 서로를 가로막게 되었습니다. 두려움은 우리 마음을 관대하고 너그럽지 못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경외하기 시작할 때 다른 인간에 대한 두려움은 물러가게 되는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가인의 아우 아벨이 살해된 사건 이 후 우리 인간들에게 하나님의 지혜를 주시며 우리 인간들을 가르치시기 시작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대한 두려움을 없애주셨습니다. 그리고 대신에 우리에게 사랑을 주시고 이로 말미암아 다른 사람들과 온전하고 합당한 관계를 이루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다른 사람을 사랑해야 할 것을 우리들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러한 모든 일은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시작되는 것입니다.

인간 대신 하나님 경외를 가르치신 예수님

예수께서는 그의 제자들에게 "몸을 죽이고 영혼을 죽이지 못하는 자를 두려워하지 말라. 그 대신에 능히 너희 몸과 영혼을 함께 지옥 가운데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마 10:28)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우리들의 잘못된 두려움에 대해서 깨우쳐 주셨습니다. 마땅히 하나님을 두려워했어야할 경우 사람을 두려워했던 한 가지 실례를 우리는 요한복음 9:22를 통하여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에 의하여 눈을 뜨게 된 소경의 부모는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진실을 바로 이야기하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지상 생활 그 마지막 때에 그가 처했던 여러 가지 모든 위험들을 상상해 보십시오. 헤롯은 그를 죽이려 했습니다. 예수님의 고향 나사렛 사람들은 그를 절벽 아래로 밀쳐버리려고 했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호시탐탐 그를 체포할 계교와 음모를 꾸미고 있었습니다. 제자 가롯 유다는 그의 스승을 배신할 기회를 찾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의 가족들마저 그를 실망시키고 있었으며, 자신의 제자들 또한 예수님을 잘못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결국 그 마지막에는 우리들의 모든 죄를 지시고 십자가 위에 달리셨을 때 예수님은 하나님께로부터 버림을 당하셨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마 27:46).

그렇지만 예수님은 어떠셨습니까? 그는 이러한 모든 시련과 고통 중에서도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브리서 12:2)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 세상 모두가 다 그를 버린다 해도 결코 두려워하지 않으셨습니다. 영원한 하나님의 아들 되신 그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고전 1:24)가 되셨기 때문입니다. 그는 모든 우리 믿는 자들이 필요로 하는 지혜의 근원이 되십니다. 우리는 여러 복음서들을 통하여 종종 그의 원수들이 찾아 와 그를 시험하며 그에게 올무를 씌우려 할 때 그는 언제나 놀라운 그의 지혜로 적들의 입을 다물게 하셨으며 어떻게 그들을 다루셨는가하는 사실들을 찾아 볼수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불과 12살의 나이에 이미 성숙하고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을 만한 태도로 그의 부모님들을 대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로마정부를 위하여 유대인들에게 세금을 징수하던 세리 마태나, 로마정부에게 항거하며 그들을 미워하던 열심당원 시몬 같은 제자들을 다루시는 법을 그는 아셨습니다. 그는 어린 아이들을 축복해 주기를 바라고 찾아 온 어머니들을 거절치 않으셨으며 유리하고 방황하는 무리들과 각종 질병을 고침 받고자 자신에게로 찾아 나아오는 사람들 그리고 노동자와 어부들과 같은 여러 부류의 사람들을 각각 어떻게 다뤄야할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또한 구원의 길을 묻고자 찾아온 부자 관원과 어느 날 밤 은연중에 그를 찾아 온 유대 종교 지도자 니고데모를 다루시는 법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답변을 요구하는 빌라도와 헤롯등 그 모든 사람들을 어떻게 다뤄야 할 지 지혜를 그는 알고 계셨습니다. 이처럼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에게 나타내 보여 주셨던 우리 주님의 그 모든 지혜에 대해서 우리는 단지 놀랍다는 말 밖에 달리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항상 예수께서는 언제나 모든 사람들을 완벽하게 다루 실 수 있는 하나님의 지혜(고전 1:24)의 본체이셨습니다.

결론

다니엘서에서 여러분들은 네 명의 젊은 유대 소년들이 어떻게 하나님을 경외했었는가 하는 사실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극렬한 용광로나 사자의 굴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악한 왕의 위협이나 고소 자들의 참소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대신에 그들은 다만 하나님만을 온전히 경외했습니다. 그들은 결코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았으며 오직 그들에게 지혜를 주시는 하나님(단 1:17)만을 경외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당한 모든 어려운 곤경들을 능히 대처하는 지혜를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혜가 부족하면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우리가 기도로 구할 때 그 지혜를 얻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야고보 1:5).

엠마오성경학교

Posted by 행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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