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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5.08.24 갈라디아서 제12과 결론

갈라디아서


                         제 12 과

                           결론(6:11-18)


거짓 선생들의 목적(6:11-13)


6:11 (내 손으로 너희에게 이렇게 큰 글자로 쓴 것을 보라) 권위역 성경에는 "내가 친필로 너희에게 얼마나 긴 편지를 썼는지 보라" 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개역성경이 더 나은 번역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인들에게 긴 편지를 썼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이 서신은 아주 짧은 서신입니다. 이 서신은 그가 항상 하던 대로 대필자에게 대필하게 한 것이 아니라 바울 자신이 이 편지를 썼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큰 글자들은 율법주의자들을 대적하려는 그의 깊은 감정과 그가 얼마나 유대인들의 잘못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나타내는 것이든지 아니면 많은 사람들이 이 구절과 다른 구절들로부터 추측하는대로 그의 시력이 나빴던 것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우리는 후자의 견해가 옳다고 생각합니다.

6:12 (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 억지로 너희로 할례받게 함은 저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인하여 핍박을 면하려 함뿐이라) 유대주의자들은 많은 무리의 추종자들을 형성함으로 육체의 모양을 내기 원했습니다. 그들은 할례를 주장함으로 그렇게 할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들의 습관을 바꾸라고 요구받지 않는 한 종종 예식과 의식을 기꺼이 지키고자 합니다. 오늘날에도 낮은 표준으로 많은 교인들을 형성하는 일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바울은 거짓 선생들의 위선을 보고 그들이 십자가로 인한 핍박을 피하려한다고 비난했습니다. 십자가는 육체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노력을 저주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십자가는 육체의 성품과 그 고결한 노력에 대한 죽음을 말합니다. 십자가는 악으로부터 분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십자가의 은혜의 메시지를 싫어하고, 그것을 전하는 사람들을 핍박하는 것입니다.

6:13 (할례받은 저희라도 스스로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로 할례받게 하려 하는 것은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니라) 실제로 그들은 율법을 지키는 것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들이 원했던 것은 많은 추종자들을 자랑할 수 있도록 쉬운 방법으로 회심자를 얻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파산할 수 밖에 없는 것으로 다른 사람을 사려고 하는 시도이기 때문에 할례자인(즉, 유대인) 그들 조차도 율법을 지킬 수 없는 것이다" (제임스 보이스).


바울의 목적(6:14-17)


6: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바울의 자랑의 근거는 사람의 육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있었습니다. 십자가에서 세상은 바울에 대해 죽었고 바울은 세상에 대해 죽었습니다.  한 사람이 구원 받으면 세상은 그에게 작별을 고하며, 그도 세상에 대해 작별을 고하는 것입니다. 그는 세상의 덧없는 쾌락에 더 이상 관심이 없기 때문에 세상이 관계되어 있는 것은 쓸모없는 것이며, 그가 완전한 만족이 되시는 분을 발견했기 때문에 세상은 그에 대하여 매력을 잃어버렸습니다. 핀들레이는 " 그는 세상을 결코 믿을 수 없으며, 세상을 자랑하지도 않고, 더 이상 세상에 경배하지도 않는다. 그것은 세상의 영광에 대해 벗어버렸으며, 그를 다스리고 매력을 주는 능력을 잃어버린 것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세상과 하나님의 자녀 사이에 있는 커다란 장애물이며, 구분선입니다.

6;15 (할레나 무할례가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은 자 뿐이니라) 비록 처음 볼 때는 그렇게 보이지 않지만, 이구절은 이 서신 전체에서 그리스도인에 대해 가장 중요한 선언 중의 하나입니다.

   할례는 외적인 의식, 예식입니다. 유대인 선생들은 모든 것을 이 의식을 준수하는 것에 의존하게 했습니다. 할례는 유대교의 기초입니다. 바울은 "할례나...아무것도 아니로되" 라고 함으로 그것을 일소해 버렸습니다. 예식이나 유대교나 율법주의는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다음 바울은 "무할례가" 라고 덧붙였습니다. 의식이 없는 것으로 자신을 자랑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모든 교회봉사는 예식에 대해 반대하는 것입니다. 아무런 가치도 없습니다.

   새로 지으심을 받은 자가 하나님께 참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변화된 생활을 보기 원하십니다.  핀들레이는 "참된 기독교는 악한 사람들이 선한 사람들로 바뀌는 것이며, 죄의 종이 하나님의 아들들로 변하는 것이다" 라고 했습니다. 모든 사람은 두 창조 중 하나에 속해 있습니다. 세상에 태어났을 때 그들은 타락한 아담을 머리로 한 옛 창조에 속하게 되었습니다. 이 창조에 속한 사람들은 죄악되고, 도울 자가 없으며, 저주를 받았습니다. 자신을 구하고자 하는 모든 노력이나 선한 행위나 선한 성품으로 자신들을 구원하는데 있어서 하나님을 도우려고 하는 것은 쓸데없으며, 변화되지 않은 채로 자신을 두는 것입니다. 새 창조는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며, 주님 안에서 죄에서 구속을 받고 새 생명을 받은 모든 사람들을 포함합니다. 이 새 창조는 시작부터 끝까지 그리스도께서 모든 것이 되시기 때문에 성품이나 행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총을 얻으려는 어떠한 사상도 배제합니다. 거룩한 삶은 단지 의식을 지킴으로써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 복종하고 신자들 안에서 주님께서 사실 수 있도록 주님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새 창조는 옛 창조를 개선하거나 덧붙이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6:16 (무릇 이 규례를 행하는 자에게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을지어다) 사도바울이 여기에서 말하는 규례는 무엇입니까? 새 창조의 규례입니다. 그는 "이것이 새 창조에 속한 것인가?" 라고 질문함으로 가르침들을 판단하며, 그렇지 않은 모든 것을 거절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평강과 긍휼의 두가지 복이 있을 것을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많은 사람들은 이것이 교회를 의미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이스라엘은 유대인으로 태어나 메시야이신 주 예수님을 받아들인 사람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율법 아래에서 행하는 사람들에게는 평강도 긍휼도 없으며, 이 두가지는 새 창조 안에 있는 사람들의 몫입니다.

6;17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 율법의 종 되었던 바울은 주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그 속박에서 건짐을 받았습니다. 이제 그는 기꺼이 종되기 원하여 주님께 속한 자가 되었습니다. 종들에게 그 주인의 낙인을 찍는 것과 같이 바울은 그의 몸에 주 예수님이 주인되신 흔적들을 가졌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유대인 핍박자들에게서 받은 상처입니다. 이제 그는 "누구도 나를 되사려고 하지말라. 나에게 율법에게 매였음을 나타내는 할례의 낙인에 대해 말하지 말라. 나는 예수 그리스도, 나의 새로운 주인의 낙인을 가졌다"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율법이 아닌 은혜의 축복 기도


6:18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 아멘) 이제 바울은 그의 펜을 놓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한가지 덧붙이는 말로 끝내야 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은혜-그의 복음의 특징을 나타내는 단어입니다. 은혜는 율법이 아닙니다. 그는 이 주제로 시작하였고(1:3) 이 주제로 마쳤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 지어다"


율법과 그리스도인의 관계


   율법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주어진 것이며(출 20:2), 이방인들에게는 율법이 주어지지 않았으나(롬 2:14), 그들의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갖고 있습니다(롬 2:14,15). 각자는 이러한 근거에 의해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롬 2:12). 하나님께서 인류의 표본으로 사용한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실패는 인류의 실패를 증명하였습니다(롬 3:19).

   율법은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하고 신령합니다(롬 7:7, 12, 14, 16; 딤전 1:8). 그러나 율법은 행위라고 하는 나쁜 원재료로 되어있습니다(롬 7:7-9). 율법은 육체로 말미암아 연약한 것입니다(롬 8:3). 율법은 아무것도 온전케 할 수 없습니다(히 7:19).

   율법의 본질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며 그 이웃에 대한 사랑입니다(마 19:16-22; 눅 10:25; 롬 4:15; 5:20; 롬 7:7; 고전 15:56; 갈 3:19; 딤전 1:8,9). 율법을 이러한 목적으로 사용하면 선한 것입니다.

   율법이 없는 곳에서는 죄가 죄되게(범법자로 만들지) 하지 못합니다(롬 5:13).

   율법을 듣는 것에는 아무 미덕도 없으며, 율법은 그것을 순종 할 것을 요구합니다(롬 2:13).

   율법을 범한 것에 대한 형벌은 사형입니다(갈 3:10). 저주 아래 있지 않고는 율법아래 있는 것은 불가능합니다(갈 3:10; 5:3; 약 2:10; 11). 율법의 한가지를 범하면 모두를 범한 것입니다.

   율법은 사람들에게 무엇을 행하라고 말하면서도 그것을 할 수 있는 힘을 주지않습니다. 율법은 사람 안에 잠자고 있는 욕망과 욕구를 깨우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롬 7:9, 10).

   율법은 하나님의 궁극적인 계획이 아닙니다. 그 자손이 올 때까지 더하여진 것입니다(갈 3:19).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우리의 몽학선생입니다(갈 3:24).

   그리스도는 율법을 폐하려고 오신 것이 아니라 완전하게 하려고 오셨습니다(마 5:17).

   주님은 주님의 생명으로 율법을 완전하게 지키셨으며 주님의 죽음으로 율법의 두려운 형벌을 치루셨습니다. 주님은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다 이루기까지 없어지지 않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 5:18). 그러므로 신자들은 갈보리에서의 그리스도의 사역으로 율법을 이룬 것입니다.

   율법으로는 의롭다하심을 얻을 자가 없습니다(행 13:39; 롬 3:20; 갈 2:16, 21; 3:11). 어떤 사람이 율법으로써 구원을 받는 것은 하나님의 뜻하신 바가 결코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 이날 이후로 율법을 완전하게 지킨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과거의 것도 요구하시기 때문에 그는 여전히 의롭게 될 수 없습니다.

   율법을 지킴으로 성령님을 받을 수 없습니다(갈 3:2).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율법의 저주로부터 구속하셨습니다(갈 3:13; 4:4,5).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몸으로써 율법에 대해 죽었습니다(롬 7:4, 6; 갈 2:19). 이제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우리는 더 이상 율법 아래 있지 않습니다(갈 3:25). 성령으로 인도하심을 받는 자는 율법아래 있지 않습니다(갈 5:18). 율법은 신자들에 대해서는 없어진 것입니다(고후 3:7-11).

   성령님을 좇아 행하는 자에게는 율법의 의가 이루어집니다(롬 8:4).

   신자는 율법아래 있지 않고 은혜아래 있지만(롬 6:14, 15) 무법한 자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의 법 아래있는 자가 되었습니다(고전 9:21).

   복음은 율법을 무효로 만드는 것이 아니고 율법을 세우는 것입니다(롬 3:31). 율법이 요구하는 형벌은 주 예수님에 의해 치루어졌습니다. "엄격한 의는 더 이상 요구할 것이 없지만 긍휼은 자기의 곳간을 나누어 줄 수 있습니다."

   율법 자체는 죽지 않았습니다. 율법은 결코 폐해지지 않습니다.

   십계명 중 아홉가지가 신약에서 반복되었지만,형벌이 따르는 율법으로 반복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들을 위한 의의 교훈으로 된 것입니다.


       계명                                                                          신약성경의 참조구절

1. 너는 내 앞에 다른 신을 있게 말지니라                                  마 4:10; 고전 6:9, 10; 10:7, 14; 요일 5:20,21

2.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등                              행 17:29; 롬 1:23; 고전 10:7

3.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마 5:33-37; 약 5:12

4. 네 부모를 공경하라                                                             엡 6:2; 골 3:20

5. 살인하지 말지니라                                                               마 5:21, 22; 요일 3:15

6. 간음하지 말지니라                                                               마 5:27, 28; 살전 4:3-5

7. 도적질하지 말지니라                                                            고전 6:9, 10; 엡 4:28

8.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지니라                               마 5:43-48; 엡 4:25

9.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지니라                                             롬 7:7


   한가지 계명이 반복되지 않았는데 그 한가지는 안식일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결코 안식일을 지키라고 가르침을 받지 않았습니다(가령 우리가 말씀 안에 일주일 중 하루라는 원리가 있다는 것을 인정할 지라도).

   신자들의 생활 규범은 율법이 아닌 그리스도이십니다(요일 2:6). 주님은 우리의 표준이시며, 우리의모범이시며, 우리의 본이십니다(요 13:15; 15:12; 엡 5:1, 2, 8, 15, 16; 요일 3:16).

   은혜와 율법은 공존할 수 없습니다(갈 4:30). 믿음과 율법은 반대의 원리입니다(갈 3:12). 그러나 율법은 하나님의 약속들을 거스리지 않습니다(갈 3:21).


안식일에 대한 부록


   1. 안식일을 지키라는 것은 십계명 중 하나이며,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자들에 대하여 "없어진"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한 것입니다(고후 3:7-11). 어떤 사람들이 하는 것처럼 이 구절이 의식적인 율법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도덕적인 율법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하는 것은 쓸데없는 논쟁입니다. 7절에서 그 율법이 "돌에 써서 새긴 죽게 하는 의문의 직분" 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단지 도덕적인 율법, 바꾸어 말하면 십계명을 제시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그다음에 11절에서 우리는 이 죽게하는 직분이 비록 영광이 있는 것이지만 "없어진" 것임을 읽게 됩니다. 이보다 더 분명한 것은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안식일을 지킬 의무가 없습니다. 이미 언급한 것처럼 다른 아홉가지 계명들은 신약성경에서 반복되었지만 율법으로서가 아니라 은혜아래 있는 자들을 위한 교훈으로써 된 것입니다.


   2. 어떠한 이방인도 안식일을 지키라는 명령을 받지 않았습니다. 율법은 유대 백성들에게 주어진 것입니다(출 31:13). 비록 하나님께서 일곱째 날에 쉬셨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때 안식일을 지키도록 어느 누구에게도 명하시지 않았습니다.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시내산에서 명하신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오직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하신 것입니다.


   3. 어떤 주장과 같이, 어떤 교황의 신조에 의해 안식일이 주일로 바뀌었다는 것을 사실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의 날을 주님을 섬기고 예배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특별한 이유에 의해 따로 정했습니다.

   a. 주 예수님이 그 날 부활하심으로 구속 사역이 완전하게 되었다는 것을 증명하셨기 때문입니다(요 20:1).

   b.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다음 두 주일에 나타나셨기 때문입니다(요 20:19, 26).

   c. 성령님이 주의 첫날에 오셨기 때문입니다(오순절날은 부활후 일곱번째 일요일입니다)

   d. 초기 제자들은 주님의 죽으심을 나타내는 떡을 떼기 위해 그날 모였기 때문입니다(행 20:7).

   e. 바울은 주의 첫날에 그리스도인들이 헌금을 하도록 가르쳤기 때문입니다(고전 16:1, 2).


   4. 율법 아래 있는 유대인들은 고생스러운 한 주일의 마지막 날을 안식의 날로 정했습니다. 은혜 아래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안식의 날과 함께 한 주일을 시작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사역을 마치셨기 때문입니다.


   5. 안식일은 의무적인 날입니다. 주님의 날은 특권의 날입니다. 세속적인 일로부터 놓인 우리는 특별하게 그날을 주님께 드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6. 안식일은 처음 창조를 기억하게 합니다. 반면에 주님의 날은 새 창조와 연관되었습니다.


   7. 안식일은 올 것의 그림자로서, 그 취지는 그리스도께 속하는 것입니다(골 2;16).


   8. 그리스도인은 안식일을 범하는 것으로 비난받을 수 없습니다(골 2:16). 그러나 안식일을 지키는 사람들은 권위역 성경에 있는 골 2:16의 '안식일들" 이 주일의 안식일을 제외한 모든 안식일들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다른 역본들은(한글 개역성경도-역자주) 그 구절에서 단수로서 "안식일" 이라고 했습니다.


   9. 율법은 어떤 한 날을 엄히 지킴으로가 아니라 이웃을 사랑함으로 이루었기 때문입니다(롬 13:8-10; 갈 5:14).


   10. 안식일을 지키는 사람들은 십계명이 모든 세대에 대한 도덕적 원리들로 간직되었다고 주장합니다. 그들은 안식일에 관련된 계명이 도덕적이라기 보다는 의식적이라는 것을 알지못한 것입니다. 어떤 날을 지키는 것은 그 자체가 본질적으로 옳다거나 그른 것이 아닙니다. 일곱째 날에 일을 하는 것이 잘못이라는 유일한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Posted by 행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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