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도                     

               말씀하시는

                  하나님

                                                         윌리암 맥도날드

                                                  1장

                 하나님은 어떻게 말씀하시나?


   하나님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자기 백성들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분은 자기를 증거하지 않은 채 내버려두지 않으셨으며(행 14:17), 인류에게 그분을 알지 못할만한 타당한 핑계를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1. 그분은 자기 아들을 통해 말씀하십니다. 과거에는 선지자들을 통해 부분적인 계시를 허락하셨지만, 이제는 그리스도를 통해 자신에 관한 최종적이고도 완전한 계시를 허락하셨습니다(히 1: 1,2).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를 완전하게 선포하셨습니다(요1:18).


   2. 하나님의 음성은 그분의 말씀인 성경에서 들을 수 있습니다. 그 영감 받은 오류가 없는 책에서 그분은 생명과 경건에 필요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벧후 1:3). 시편 기자 다윗은 "주께서 주의 말씀을 주의 모든 이름 위에 높게 하셨음이라"(시 138: 2)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자신의 살아있고 기록된 말씀을 자신에 대한 모든 계시 위에 높이셨음을 말해줍니다.


   3. 그분은 창조를 통해 말씀하십니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언어가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 말씀이 세계 끝까지 이르도다"(시 19:1-4).


   4. 그분은 양심을 통해 말씀하십니다. 이 마음속에 있는 감지기가 사람들로 옳고 그른 것을 구분하게 해줍니다. 잠언 20장 27절은 양심을 사람의 영혼이라고 했습니다. "사람의 영혼은 여호와의 등불이라. 사람의 깊은 속을 살피느니라." 사도 바울은 양심이 사람들에게 증거하는 것을 "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송사하며 혹은 변명하여..."라고 묘사했습니다((롬 2:15).


   5. 그분은 성령을 통해 말씀하십니다. 성령은 주로 말씀을 통해 뜻을 전달하십니다. 하지만 우리의 마음과 감정과 지성을 감화하심으로 자기 뜻을 나타내실 수도 있습니다(행 16:6,7).


   6. 그분은 종종 다른 사람들을 사용하여 우리에게 정보를 전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분은 경건한 전도자와 교사와 장로들을 통해 말씀하십니다. 그분은 예외적이긴 하지만, 구원받지 않은 사람들을 사용하실 수도 있습니다.


   7. 그분이 꿈이나 이상을 사용하실 수 있을까요? 욥과 변론한 사람 중 하나인 엘리후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은 무관히 여겨도 하나님은 한번 말씀하시고 다시 말씀하시되 사람이 침상에서 졸며 깊이 잠들 때에나 꿈에나 밤의 이상 중에 사람의 귀를 여시고 인치듯 교훈하시나니"(욥 33:14~16).

   이것은 구약의 야곱이나 요셉, 바로의 술 관원과 떡 관원장, 느브갓네샇, 다니엘 등과, 신약의 요셉과 그 아내 마리아, 바울 등에게 사실이었습니다.


   8. 사람들은 천사, 특히 구약에서 여호와의 사자(천사)를 통해 하나님의 메시지가 전달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것은 성육신 이전에 나타나신 주 예수님이었습니다.


   9. 우리는 하나님께서 천둥이나(욥 37:1~5; 시 29:1~9; 77:18; 104:7), 노아 시대의 홍수와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 등의 재앙 같은 자연현상을 통해 말씀하시는 음성을 듣습니다.


   10. 그분은 표적(標的)과 기사(奇事)를 통해 말씀하십니다. 표적(signs)은 어떤 메시지를 담은 초자연적인 사건을 말하고, 기사(wonders)는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하기 위해 행해진 기적을 말합니다.


   11. 적어도 한번의 극적인 사례에서, 그분은 동물을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선지자 발람이 불의한 흥정에 나서는 것을 보고 그의 나귀가 그 주인을 꾸짖었습니다(민 22:28,30).


   12. 하나님은 상황의 놀라운 변화를 통해서 말씀하실 수 있습니다. 사건들이 전혀 뜻밖의 방법으로 꼭 맞춰 일어날 때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말씀하고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에스더 6장 1~4절과 열왕기하 8장 1~6절 등이 그 예입니다.


   다음 장부터는, 하나님께서 성경말씀을 통해 사람들에게 말씀하신 놀라운 방법들을 살펴보겠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확신하지 못했지만 그 말씀을 들은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혹 문맥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해도 상관없었습니다. 중요한 것이 해석이 아니라 적용이었습니다.


   그러나 먼저 주의할 점이 있습니다. 때때로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 그들에게 말씀하셨다고 오해할 수가 있습니다. 여기 불치병으로 죽어가는 한 사람이 있습니다. 이미 그 병으로 가족 중 몇 사람이 죽었습니다. 친지나 친구들이 볼 때는 하나님께서 이미 자기 뜻을 보이신 것이 분명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곧  그 환자를 하늘 본향에 데리고 가실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와 그의 아내가 아침 경건의 시간을 갖고 있다가 시편 118편 17절에 이르렀습니다.

   "내가 죽지 않고 살아서 여호와의 행사를 선포하리로다."

   그들은 그 말씀을 완전한 치유에 대한 약속으로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환자는 몇 주 만에 죽고 말았습니다. 그들의 믿음은 왜 보상받지 못했을까요? 솔직히 말해서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 길이 완전하신 분께 그 문제를 맡기는 것입니다(시 18:30).

  

   만일 그렇게 어떤 약속을 주장하다가 후에 잘못 적용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는 항상, 풀무불에서 죽을 운명이었던 세 명의 히브리인들이 한 말에서 지혜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건져주실 줄을 확신했습니다. "...우리가 섬기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단 3;17).

   그런 다음 그들은 하나님께서 다른 계획을 갖고 계실 수도 있음을 인정하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의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단 3;18).

   그들처럼 우리는 항상 "그리 아니하실지라도..."라는 단서를 붙일 수 있습니다.


   물론 제비뽑기를 하듯 성경을 가볍게 다루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신자가 주님의 인도하심을 구하다가 성경 아무데나 펴서 한 구절을 택하고 그것을 하나님이 자기에게 하신 말씀으로 받아들입니다.

   우스운 이야기를 들려드리겠습니다. 어떤 청년이 성경을 펴서 "유다가...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란 구절을 읽었습니다(마 27:5). 그는 그 구절이 마음에 들지 않아 다른 데를 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고 했습니다(눅 10:37). 그래서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또 다른 데를 폈습니다. 그랬더니 " 네 하는 일을 속히 하라"고 했습니다(요 13:27). 그 경험이 그로 하여금 자신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그런 식으로 찾지 말도록 가르쳐주었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그런 우스운 이야기가 있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기록된 말씀을 통해 자기 백성들에게 직접 말씀하실 수 있으며 또 말씀하신다는 사실을 부인해서는 안 됩니다. 신자는 간절하고 진실되게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자는 진지하게 성경을 상고하고 시간을 들여 기도해야 합니다. 그런 조건들이 충족될 때 하나님께서는 종종 적절한 때에 적절한 말씀을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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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희 믿음에 있는가

                                    시험하고 확증하라


                 하나님을 믿지 않는 신자들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나의 말하는 것을 행치 아니하느냐"(누가복음 6:46).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을 믿는가? 이 말은 심각하게 생각해 보아야 할 주제다. 세상의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위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날마다 외치고, 골방에서 기도하며, 나가서 전도하고, 예배당에서 찬송하고, 직장에서 하나님 때문에 고난당하고, 희생하고, 손해를 보면서도 주님을 찬송하며 감사하고 기쁨으로 살아가는 기독교인들을 향하여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고 한다면 말이나 되는가. 그런데 기가 막힐 이 일이 현실인 것이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국민이 대통령을 아는 것과 대통령이 국민 개인을 아는 것은 차이가 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사랑하지만 하나님을 만난적이 없어 실제로는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삶이다. 기막히고 놀라운 것은 그러한 사람들이 자신은 하나님을 잘 믿으며 천국에 갈 뿐만 아니라 면류관을 받을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다는데 있다. 왜 그런 문제가 왔는가?

   만약 어떤 사람이 아버지를 믿고 아버지를 존경하고 아버지를 사랑한다고 기회만 있으면 주장하면서도 그가 아버지의 말씀은 전혀 순종하지 않고 순종할 의사도 없다면 그가 아버지를 믿고 존경한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오늘날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성경 말씀을 순종하지 않을 뿐 아니라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교파나 그 지도자들을 맹목적으로 좇아가고 있다. 요한복음 1장 1절에 보면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니라"고 하셨다.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말씀을 사랑하는 것이며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은 말씀을 순종하는 것이다.

   필자는 전도하면서 기독교에 목숨을 걸고 있는 모범적인 신자들을 수없이 만나보았다. 그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 말씀을 곱게 순종하여 구원받는 사람들이 혹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성경에 근거하지도 않은 자기주장이나 교파의 주장이나 목사님들의 가르침만 외치면서 분명한 성경말씀을 보여주어도 말씀을 거부했다. 성경말씀을 순종해야지 사람의 생각을 따르면 안 된다는 필자의 말에, 성경이 그럴지라도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끝까지 자기주장을 굽히지 않고 지옥으로 가는 사람들을 얼마나 많이 보았는지 모른다.

   서두의 말씀에 주님께서 "나더러 주여 주여 하면서 나의 말하는 것은 행치 않는다"고 탄식하신 말씀은 이 시대에 이루어졌다.

   어떤 목사님은 성경에 없는 교파의 전통을 지적하며 말하는 필자에게 우리의 신앙도 시대에 따라서 변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도대체 이 시대는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할 의사가 있는가? 수많은 기독교 지도자들이 자기들의 종교적 출세를 위하여 하나님을 이용하고 있지는 않는가? 그를 따르는 수많은 기독교인들은 자기의 행복한 인생을 위하여, 축복받기 위하여, 자신을 위해 하나님을 필요로 하지 않는가? 나의 건강, 나의 행복, 나의 출세, 나, 나, 나! 나를 위해서 하나님을 이용하고 하나님을 필요로 하는 어리석은 기독교인들이 어찌 지옥의 심판을 피할 수 있겠는가? 창조주 하나님이 그대를 꾸미는 액세서리란 말인가?

   구체적으로 이야기해보자. 열정적인 기독교인들을 만나서 신앙의 동기나 과정을 물어보면 하나 같이 말하기를 하나님이 자기를 축복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을 소위 기복신앙이라고 한다. 이 기복신앙은 무속신앙에서 출발하였다. 한국의 기독교는 무속신앙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음을 부인할 수 없다. 무속신앙의 본질은 자기에게 도움이 필요하기 때문에 자기보다 나은 어떤 신을 숭상하는 것이다. 돌이나 나무나 바다나 산에 많은 신을 만들어 숭상하는 것이다. 오늘날 수많은 기독교인들도 자기에게 하나님이 필요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따른다. 무속신앙을 만들어낸 사단이 기독교도 샤머니즘으로 변질시켜 가고 있는 것이다.

   성경을 자세히 보라. 창세기 1장 1절에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라고 기록되어 있지 아니한가.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이유는 복을 주셔서가 아니고, 기도를 들어 주셔서가 아니고, 병을 고쳐주셔서가 아니다. 이것은 마귀도 흉내 낼 수 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기 때문에, 그것이 사실이기 때문에 사실을 사실로 인정하는데서부터 믿음생활의 출발이 있다.

   신앙이 근본주의에 잡혀 있지 않고 현실주의에 잡혀 있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것이다. 왜냐하면 현실은 항상 변하기 때문에, 그런 신앙은 정함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신앙의 근본을 말씀에 두어야 한다.

   다시 본 주제로 돌아가서 생각해 보자. 예수님이 오시기 전 말라기 선지자도 하나님을 믿지 않는 하나님의 백성 유대인들을 크게 책망한 적이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선민이었다. 그들에게는 율법이 있고, 성전이 있고, 성경이 말하는 제사장이 있고, 절기가 있었다. 절기마다 절차를 따라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다. 그들은 어려서부터 성경을 배우며, 철저하게 율법을 지키며, 율법을 따라서 생활하며 그렇게 훈련된 백성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였다. 그들의 제사장들도 지도자들도 따르는 백성들도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였다. 하나님은 이 타락한 사람들을 보기가 역겨워 차라리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하였다(말라기 1장).

   오늘날 기독교인들과 너무나 흡사하지 않는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해서 특별히 만들어놓은 옷을 입혀 목사님들을 제사장처럼 꾸미고, 성가대를 만들고, 예배당을 성전처럼 특별히 만들지만, 그리고 거기에서 온갖 의식이 진행되지만 진정 주님이 거기에 함께 계신가를 심각하게 생각해보아야 한다.

   마르틴 루터가 만인 제사장 주의를 부르짖고 종교개혁을 하여 기독교가 회복되었다. 다시 말해서 구원받은 모든 성도는 다 제사장이며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릴 수 있는 귀한 신분이 되었다. 그런데 오늘의 현실은 목사님을 새로운 제사장으로 성직자로 추대하였다. 이것이 마르틴 루터의 뜻이며 성경의 가르침인가? 실로 슬프지 아니할 수 없다.

   말라기서의 이야기를 다시 해보자. 흠 없는 깨끗한 양으로 제사 드릴 것을 레위기에서 명하셨거늘 그들은 눈먼 것, 저는 것, 병든 것으로 드리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였다. 그들은 하나님을 속이려 하였다. 그들은 율법을 정면으로 거부하였다. 오늘날 기독교가 성경대로 하는 것이 몇 가지나 되는가? 생각해 보아야 한다.

   또 있다. 말라기 시대의 백성들은 성전에 와서 눈물과 울음과 탄식으로 여호와의 단을 가렸다고 말하고 있다(말라기 2:13) 그들은 성전에서 통곡하고 울므로 회개하는 척, 경건한 척, 진실한 척하였던 것이다. 오늘의 기독교인들도 어찌 그리 똑같이 닮았는가. 왜 예배당만 가면 울고 기도만 시작하면 통곡하는가? 그들은 말씀을 순종치 아니하고 하나님을 닮은 삶은 나타내지 아니하면서 통곡과 탄식으로 자기를 포장하고 신앙의 본질을 훼손하는 것이다.

   물론 필자도 경우에 따라서 울며 부르짖는 기도를 하기도 한다. 또 이것이 필요하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예배당에서 통곡과 탄식으로 우는 것과는 본질이 다른 것이다. 성경에 "항상 기 뻐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하였지 "항상 울어라. 범사에 통곡하라" 하였는가? 습관적이고 종교적이고 기계적인 눈물은 하나님의 눈에 눈물을 드릴뿐이다.

   눈물에 관해서 한마디 더 하고자 하는데 성경의 본질은 모든 죄를 다 용서받아서 주체할 수 없는 기쁨으로 흘리는 감사의 눈물이어야 하며, 또 살아가는 가운데 베푸신 은혜를 생각하고 감사함으로 흘리는 눈물이어야 하며, 또 죄를 지었을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원이 사라지지 아니함을 인하여 죄를 자백함과 함께 감사의 눈물을 흘려야 함이 옳다.

   예수님은 세상에 오셔서 하나님을 목숨보다도 더 사랑하는 유대인들과 그 지도자들을 향하여 충격적인 말씀을 하셨다.

   "그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지 아니하니 이는 그의 보내신 자를 믿지 아니함이니라"(요한복음 5:38).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노라"(요한복음 5:42).

   그들은 입으로는 하나님을 높이고 사랑하고 충성을 다하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이었다. 예수님은 그 이유를 그들 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없기 때문이라고 지적하셨다. 오늘날 우리의 기독교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고 있는가?

   이제 개인적인 신앙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마태복음 7장 24절 이하에는 믿음의 두 기초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하나는 반석이요 하나는 모래다. 잘 아시는 대로 모래 위에 지은 집은 비가 오고 창수가 나매 무너졌지만 그러나 반석 위에 지은 집은 큰 홍수가 나도 든든히 서 있었다고 말씀하신다. 반석 위에 지은 집은 무엇인가? 말씀을 듣고 순종하여 말씀의 기초 위에 믿음을 건축한 그리스도인이 아니겠는가!

   어떤 집사님에게 필자가 어떻게 구원받았느냐고 질문하였다. 그는 대답하기를 "예수님을 믿으니 천국 가는 것 아니냐"고 하였다. 다시 묻기를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느냐" 하니 "우리 집이 점쟁이 집이었는데 계속 어려운 일이 있어서 예수님 앞에 나오니 잠잠해졌다"고 하였다. 또 질문하기를 "성경적으로 구원을 이야기해 보라" 하니 버럭 화를 내면서 "왜 그렇게 꼬치꼬치 파느냐? 믿으면 믿는 것이고 천국가면 가는 것이지 그렇게 깊이 파고드는 것은 머리 아프다"고 반박하였다.

   이 글을 읽는 독자들 중에도 이런 경험이 있거나,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으리라고 본다. 생각하여 보라. 자기 영혼의 문제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는가? 시장에서 물건 하나를 사도 얼마나 망설이고 사는가. 하물며 한번 잘못되면 영원한 지옥에서 영원한 형벌을 받는데 집요하게 파고드는 사람이 잘못인가? 대강 믿는 사람이 잘못인가? 구원은 말씀에 기초하여 완성되어지지 아니하면 잘못된 구원이다. 우리의 믿음의 기초는 말씀이요 증거도 말씀이다. 말씀은 하나님이며 말씀은 예수님이며 말씀은 성령님이다. 말씀을 믿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며 말씀을 따르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배척하는 것이다.

   오늘의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모습은 또 있다.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감사하고 그분과 함께 살아가는 모습을 나타내지 못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진정 나를 지옥에서 구원해 주신 생명의 은인이라면, 그것을 깨닫고 경험했다면 그분을 얼마나 사랑하며 기뻐하고 함께 걸어갈 것인가!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신앙생활 따로, 사회 생활 따로 하지 아니한가? 또 교회 생활 따로, 가정생활 따로 하고 있지 아니한가? 그러므로 교회에 가면 경건한 신자인데 집이나 직장에 가면 딴 사람으로 바뀌는 것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도대체가 하나님을 닮지 아니한 자식들이 친자식일까?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른다면 하나님을 닮아야 하지 않을까? 일말의 양심이라도 있다면 하나님 아버지라고 기도하지 말고 의붓아버지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앞에서, 예배당에서 종교적으로 우는 사람들에 대해서 언급한 바가 있다. 그들이 우는 이유를 필자는 잘 안다. 필자도 수없이 울어보았고 또 상담을 통해서도 들었다. 큰 문제는 죄다. 죄를 용서받은 확신이 없기 때문이다. 목사님은 회개하라고 외치고 가슴속을 들여다보면 죄악들이 가득 차 있고 일주일 동안의 삶을 돌이켜보면 온통 죄, 죄, 죄 뿐이다.

   죄를 지은 자신도 밉고, 죄를 짓게 하는 친구도 밉고, 죄를 짓지 않을 수 없는 현실도 밉고, 그렇다고 현실을 탈피할 수 있는 방법은 없고...! 그 마음의 고통을 어찌 다 말로 표현하랴, 나오는 것이 눈물이요 짓는 것이 한숨이라. 탄식은 기도의 주체요 슬픔은 기도의 동력이라. 하염없이 울고 나면 마음은 시원한데 시원함도 잠깐이고 또 다른 걱정이 살아나니 내일부터 지을 죄를 걱정하지 아니할 수 없다. 자신이 위선자 같아서 몇 번이고 교회를 떠나고 싶었지만 하나님의 징계가 무서워서 그렇지도 못함이라. 이런 현실 속에 잡혀 있는 사람이 어찌 하나님을 믿는 사람인가? 그는 믿는 사람이 아니다.

   하나님은 무엇이라 말씀하셨는가? 요한복음 19장 30절에 " 다 이루었다" 즉, "모든 죄를 다 갚았다", "다 용서했다"고 말씀하시지 아니하였는가? 다 용서한 사실을 믿지 않고 죄 때문에 울고 있는 사람이 과연 하나님을 믿는 사람인가? 요한복음 1장 29절에 "세상 죄를 지고 갔다" 하였는데 그러면 과거, 현재, 미래가 다 세상 안에 속하지 아니하였는가?

   죄 용서해 주심에 감사하지는 못할망정 왜 울고 있는가? 이것은 분명히 믿는 사람이 아니다. 거짓 신자다. 그들의 인격이 거짓 신자가 아니고 신분이 거짓 신자다.

   히브리서 9장 12절에 "영원한 속죄"라고 하였는데 영원한 속죄라 함은 과거와 미래로 영원한 속죄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기 때문이다(히브리서 13:8).

   진정 믿는 자는 모든 죄를 용서해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뻐하며, 모든 죄를 용서받은 아들의 신분으로 살아가면서 순간순간 짓는 죄를 자백하고 뉘우치면서, 그러나 죄에 대한 형벌 때문에 고통하거나 지옥에 갈 걱정 없이 평화롭게 살아가는 것이다. 이것이 참 구원 받은 자의 모습이요 진실로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진지하게 자신의 구원 문제를 검토해보길 바란다.

   "저희 죄와 저희 불법을 다시 기억지 아니하리라"(히브리서 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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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엠마오성경학교(ECS)에 실려

              하나님의 말씀에 정박하다.

                                                                                        롭 플린더스(Rob Frlinders)

 

   심브리아(Cimbria) 호는 동남아시아와 호주 동부의 항구를 잇는 대형 상선입니다. 왕복으로 35일은 족히 걸리는 거리를 왕래하는 상선이지요.

 

   2008년 9월, 심브리아 호는 시드니 항구에 정박 중이었습니다. 그날 저는 선박 기관실을 담당하고 있던 롤리 씨를 우연히 만나게 되었습니다. 롤리 씨는 하던 일을 잠시 멈추고 커피를 한 잔 마시던 중이었습니다.

 

   대화를 나누며 자연히 롤리 씨에대해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롤리 씨의 집은 필리핀에 있었고 아내 델리아와 아들 여섯, 딸 하나의 대가족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아이들은 두살부터 스물한살까지 터울이 매우 컸습니다. 또한 롤리 씨가 카톨릭 집안 출신인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대화를 마칠 무렵 저는 롤리 씨에게 항해 중에 엠마오성경학교(ECS) 영어 통신교재 한 과정을 공부해보기를 권했습니다. 다시 만나기를, 또 항해를 하는 동안 교재를 마치고 돌아오기를 바라는 마음도 함께 전했습니다. 롤리 씨는 그 권유를 기쁘게 받아들였지만 저는 그것이 진심인지 그 당시에는 확실히 알 수 없었습니다. 그저 저의 끈질긴 부탁에 하는 수 없이 관심이 있다는 표시로 저에게 친절하게 대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2개월이 지난 11월 중순, 드디어 심브리아 호가 긴 항해를 마치고 시드니에 정박했습니다. 롤리 씨는 배에서 내리자마자 엠마오 통신강좌의 답안지를 가지고 채점을 받기위해 저에게 달려왔습니다. 엥마오 통신강좌 교재는 책마다 12개의 단원으로 구성되어 있고 매 단원마다 10개 문제씩 120개 문제가 있습니다. 그만큼 만만치 않은 양에도 불구하고 그의 답안지는 빼곡했습니다. 채점을 해보니 결과는 90점이었습니다. 예상외로 높은 점수에 저는 너무나 기뻤습니다.

 

   롤리 씨가 다시 항해를 떠나기 전, 저는 롤리 씨가 공부한 것을 토대로 진리의 성경 말씀과 복음에 대해 많은 시간동안 그와 교제할 수 있었습니다. 적어낸 답변에 대해 서로의 생각을 주고받기도 했습니다. 하나님과 말씀을 알고자하는 롤리 씨의 열정은 대단했습니다. 저는 두 번째 강좌인 <성경의 기본진리(What the Bible teaches)>를 롤리 씨에게 건넸습니다. 이 교재는 성경의 기본적인 진리를 토대로 복음을 알기 쉽게 풀어 설명해놓은 근사한 책이었습니다.

 

   선원의 신분으로 항해 기간 중에 이번 강좌를 공부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통신 강좌 교재 내에는 직접 성경을 펴서 참조해야하는 구절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다음 해 1월 중순이 되어 다시 시드니 항구에 배가 정박했을 때 놀랍게도 롤리 씨는 이미 교재 내에 있는 모든 단원을 끝낸 상태였습니다. 채점 결과는 무려 95점이나 되었습니다.

 

   그렇게 한 해가 지나고 돌아온 1월, 롤리 씨는 다음으로 <신앙생활의 원리(Lessons for Christian Living)>를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2월에는 <하나의 길, 한 분 하나님(One God, one Way)>을 시작했습니다. 롤리 씨는 열심히 공부하여 두 강좌를 3월까지 성공적으로 마쳤고 93점과 96점이라는 높은 점수를 받았습니다.

 

   롤리 씨의 다른 출항 계약이 거의 성사될 무렵, 그와 잠깐 만날 기회가 있었습니다. 지난 8개월 동안 엠마오성경학교의 통신 강좌와 교재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한 것이 롤리 씨의 마음에 큰 축복이 되었나봅니다. 그는 그 동안에 생명을 지닌 구원의 복음에 대해 알게 되었고 믿음을 가지게 되어 예수님을 개인의 구주로 받아들였습니다.

 

   이제 롤리 씨는 주님 안에서 함께 복음을 전하는 일에 동역하는 저의 동역자 형제가 되었습니다.

 

   저는 항해하면서도 엠마오 통신교재를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했던 롤리 씨를 가족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습니다. 롤리 씨는 매우 즐거운 표정이었습니다. "저의 아내는 정말 행복해 했고 어머니는 제 소식을 듣고 너무 기뻐서 울기까지 하셨어요." 롤리 씨는 어머니께서 복음을 듣고 깨달아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나신 지 10년 정도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나니 롤리 씨의 어머니께서 아들을 위해 이때까지 신실하게 기도하고 계셨음을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자신이 맡고 있는 항해사 일도 충실히 수행한 롤리 씨는 현재 휴가를 받아 고향 필리핀으로 돌아갔습니다. 그의 어머니께서 거듭난 그리스도인,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돌아온 아들을 다시 볼 때의 감정이란 말하지 않아도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아마 너무 기쁜 마음에 아들을 힘껏 부둥켜안으시겠지요. 늘 하나님께 기도했던 자신의 아들이 영원한 생명을 소유한 거듭난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로 이끌어주신 하나님께 드리는 벅찬 감사와 찬양이 어머니의 마음에 있을 것이라 확신합니다.

 

   이후 롤리 씨가 필리핀에 가서도 지속적으로 말씀과 복음을 교제할 수 있도록 '필리핀 해양인의 집(SCFS)'에 부탁해놓았습니다. 이제 곧 항해를 떠나게 될 그의 손에 다이아몬드보다 귀한 엠마오성경학교 영어 통신교재 3권 <신앙 생활의 성장 원리(Guide to Christian Growth> . <성경속으로의 여행(A Journey through the Bible)> . <완전한 인간, 완전한 구속(Perfect  Person, Perfect Work)>도 함께 건네주었습니다. 비록 우리는 잠시 떨어져 있지만 그의 삶이 예수님을 닮아가는 여정이 되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EMMA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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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

예수님께서 나를 대신하여 죽으셨습니다.

 

 

한 믿지 않는 선장이 바다를 항해하고 있었습니다. 이 선장이 타고 있던 배는 바다 한 복판을 항해하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바로 그 때에 이 선장은 선장실 방안에서 곧 자신에게 들이닥칠 죽음을 응시하면서 마지막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로부터 생명을 취해가기 위하여, 몹시 무겁게 내리누르며 괴롭혀 온 이 영원한 두려움의 존재인, 공포의 왕이 마침내 목전에까지 출현하여 자신에게 가까이 다가 오는 것을 보자, 그는 움찔 놀라면서 뒷걸음 쳤습니다. 그는 즉시 사람을 보내 그의 조수인 일등항해사를 불러왔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에게 말하기를 "윌리암즈, 자네 나를 위해 기도 좀 해주게. 그렇지 않으면 성경 말씀 몇 구절만이라도 좀 읽어주게. 자네도 잘 알다시피 나는 평생 몹시 사악한 죄 가운데서 인생을 살아오지 않았는가. 이제 나는 곧 죽게 될터이니 제발 나를 위해 그렇게 해주게나."

 

"선장님 당신도 알다시피, 저는 평생 기도라고는 해 본 적도 없고 또 기도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리고 또 성경은 읽어드릴 수 있기는 해도, 읽어 드릴 성경책이 여기에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자네 네 조수 중에 이등항해사 토마스를 좀 불러주게. 아마 그 사람이라면 몇 마디라도 기도는 해줄 수 있을 걸세." 그러자 두 번째 조수인 이등항해사 토마스가 금방 다 죽어가는 선장 앞에 불려오게 되었습니다. 선장은 그의 조수인 토마스에게 다시 부탁을 하였습니다. "이보게, 토마스 나는 이제 곧 영원을 향한 긴 여행을 시작할 것일세. 나는 지금 정말 두렵다네. 여기 앉아서 나를 위해 기도를 좀 해 줄 수 없겠나? 하나님께 나같이 불쌍한 영혼에게 자비를 좀 베풀어 주시라고 말일세."

 

"선장님 제가 할 수만 있다면 선장님 마지막 소원을 들어드리는 일인데 기꺼이 해드려야지요. 그렇지만 선장님, 제가 청년 때 언젠가 한번 기도해 본 것 말고는 이제껏 기도를 해본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다시 기도해 줄 수 있는 사람을 불러오기 위해 배안을 샅샅이 찾아보았습니다. 성경을 읽어 줄 수 있는 사람을 찾아보았지만, 모두 허사였습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선원들 가운데 한 사람이 선장에게 말하기를 배의 전속 요리사의 심부름꾼으로 일하고 있는 월리 플랫이라고 하는 매우 작고 어린 친구가 있는데, 그가 성경책처럼 보이는 책을 들고 있는 것을 언젠가 본 적이 있다고 말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즉시 그아이를 찾아 선장실로 데려 왔고 선장은 그 아이에게도 마찬가지로 성경을 읽어 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거기에 좀 앉게나. 그리고 성경에서 나를 도와 줄 수 있는 좋은 말씀이 있는지 좀 찾아 줄 수 있겠나, 나는 곧 죽게 될 터인데, 지금 나는 몹시 두렵다네. 나 같은 죄인에게도 자비를 베푸시는 하나님에 대하여 말해주고 있는 말씀이 있으면 제발 그와 같은 말씀을 찾아서 내게 좀 읽어 줄 수 있겠나?"

 

윌리는 어디를 찾아서 읽어야 할지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윌리는 그가 집을 떠나기 직전에 그의 어머니가 이사야 53장을 찾아서 읽어주신 것이 기억났습니다.

 

윌리는 존 카웃츠 선장과 같이 불쌍한 죄인들을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자비에 관하여 완전무결하게 이야기해놓은 하나님의 복된 말씀인 이사야 53장을 펼쳤습니다. 그리고서 이 복된 하나님의 말씀을 선장에게 조용히 읽어 주었습니다. 이사야서 53장을 처음부터 읽어 내려가 마침내 53장 5절에 이르렀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사53:5).

 

이 말씀을 들었을 때, 자신의 마지막 생명을 위하여 극도의 주의를 기울여 열심히 듣고 있던 선장은 순간 아직도 자신이 구원받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확실히 남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잠깐만, 젊은이! 그 말이 내가 아직도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말해주는 말씀같아! 그 말씀을 한 번만 더 읽어 줄 수 있겠나" 소년은 이 복된 이사야서 53장 5절 말씀을 한 번 더 읽어 주었습니다.

 

"그래 맞어, 나의 젊은 친구, 그 말씀이 너무 좋아 그게 내가 찾던 바로 그 말씀이야 이 말은 진심이야."

 

이 말을 듣는 순간 소년 윌리는 크게 고무되었고 큰 격려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윌리는 용기를 내어 선장에게 말했습니다. "선장님 제가 집에서 이사야 53장 5절을 읽을 때, 제 어머니께서는 제게 그 절속에 우리라는 말 대신에 저의 이름을 넣어서 읽으라고 말씀하셨어요. 그러니까 이번에는 어머니께서 제게 시키신 대로 이 말씀구절 속에 제 이름을 넣어서 읽어드릴까요?"

 

"물론이란다 아들아, 너의 어머니가 네게 말씀하신대로 그 속에다 네 이름을 넣어서 다시 한 번 읽어다오."

 

이 소년은 경건한 목소리로 자신의 이름을 넣어 천천히 이사야 53장 5절 말씀을 읽어주었습니다. "그(예수님)가 찔림은 월리 플렛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윌리 플렛은 평화를 누리고 나음을 받았도다."(사53:5)

 

윌리가 말씀 구절을 다 읽어주자 선장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상반신을 침대 밖으로 내밀면서 소년을 향하여 손을 뻗으며 부탁하기를, "내 사랑하는 아이야, 그 구절 속에다 내 이름을 넣어서 한 번 더 읽어다오, 그래 줄 수는 없겠니---내이름 죤 카우츠이니까, 죤 카우츠를 그 구절 속에 넣어서 말이야."

 

소년은 선장의 이름을 넣어 천천히 이사야 53장 5절 말씀을 읽어주었습니다. "그(예수님)가 찔림은 죤 카우츠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죤 카우츠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죤 카우츠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죤 카우츠는 나음을 받았도다."(사53:5)

 

소년이 성경말씀 구절을 읽어주는 일을 다 마쳤을 때에, 이 선장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아! 그래. 그 정도로도 이제 충분하다. 내 사랑하는 소년아, 이제는 네 자리로 돌아가도 좋다."

 

그리고서 선장은 그의 베개를 등에 대고 누워서 이사야 53장 5절에 있는 이 보배로운 말씀을 계속 반복해서 말하되 매번 자기 자신의 이름을 그 속에 넣어서 그 말씀을 반복하였습니다 .그가 그렇게 이 말씀을 그렇게 반복할 때에 천상에 속한 사람들만이 누리는 기쁨이 그의 영혼을 충만하게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이 사람은 구원 받은 사람인가요? 물론입니다. 이 사람은 구원을 받았습니다. 우리 주님을 찬양합니다. 이 사람은 정녕 구원 받았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또 한 사람의 불쌍한 죄인이 "주님을 영접하였습니다."(요1:12)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롬10:9)

 

죤 카우츠 선장이 예수님 품 안에서 잠들기 전에 그는 자기 배에 타고 있던 한 사람 한 사람 모든 사람에게 인자로 오셔서 갈보리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리스도께서 찔림은 죤 카우츠 선장 자신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죤 카우츠 선장 자신의 죄악 때문이라는 사실을 웅변으로 증거해주었습니다. 선장 자신이 마땅히 받아야하는 징계를, 기꺼이 자신의 복된 대속물이 되어주신 그리스도께서 징계를 받으므로 죤 카우츠 선장 자신은 평화를 누리게 되었고, 그가 채찍에---이 채찍은 십자가 위에 계실 때에 예수님에게 가해진 채찍을 말합니다.--- 맞으므로 죤 카우츠 선장 자신은 나음을 받았다는 사실을 배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증거해 주었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증거입니까!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5:8)

 

이 글을 읽고 계신 사랑하는 독자여러분, 이와 같은 구원에 대하여 알고 계셨습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의 존전에서 한 사람의 불쌍한 "경건치 않은 죄인" 또는 "믿지않는 죄인"의 모습으로 여러분의 위치를 그대로 고수하시겠습니까? 아니면 하나님 앞에서 죄 용서를 받기 위하여 그리스도를 믿으시겠습니까?

 

"그러므로 형제들아 너희가 알 것은 이 사람을 힘입어 죄 사함을 너희에게 전하는 이것이며 또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도 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이것이라."(행13:38.39) EMMA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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