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믿음에 있는가

                                             시험하고 확증하라


                         지옥을 믿지 않는 신자들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버리라. 불구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마가복음 9:43).


   주님은 지옥에 대해서 이토록 간곡하게 외치셨건만 왜 기독교인들은 지옥을 안 믿는가? 왜 무시하는가? 왜 가볍게 여기는가?

   필자가 이렇게 말하면, "무슨 소리냐? 우리 교단에서 만든 헌법에도, 우리 교회에서도 분명히 지옥을 가르치고 있다"고 항변할 것이다. 그러나 필자가 만나본 수많은 기독교인들은 지옥을 믿지 않고 있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지옥을 모르고 있었다.

   물론 그들이 지옥을 부정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어떤 이는 기독교인이면서도 지옥을 믿지 않는다고 말한다. 허나 대다수 기독교인들은 한결같이 지옥을 믿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들의 실상은 지옥을 믿지 않고 있다.

   어떤 열렬한 신자를 만나서 물었다.

   "지옥이 있습니까?"

   "지옥이 있다고 믿습니다."

   "그러면 지옥이 어떤 곳입니까?"

   "잘은 모르겠습니다.'

   "아니, 기독교인이 지옥을 잘 모른다니요?"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천국에 가기 때문에 지옥에 관심이 없습니다."

   또 어떤 이는 지옥은 무서운 곳이지만 내가 갈 곳이 아니라는 생각에 자신은 깊이 생각해보거나 연구해보지 않았으니 앞으로 연구해보겠다고 했다.

   이와 같은 논리들이 여러분 생각에 옳다고 여겨지는가? 옳은 듯 보일 수 있으리라 그러나 성경 전체를 보면 이 같은 말보다 더 어리석은 말은 없다. 이것은 자신에게 속은 말이요, 자신을 속이는 말이요, 성경의 근본이나 구원의 참 뜻을 전혀 모르는 소경의 말이다. 그들이 자신의 말대로 지옥가지 않고 천국에 간다면 그들은 지옥을 가족과 이웃에게 전하기 위하여 전력 수고하고 있어야 하리라. 그러나 그들은 한결같이 가족이나 이웃에게 지옥을 전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전할 필요성도 느끼지 못하고 있다.

   구원이란 무엇인가? "건진다", 또는 "구하여 준다"는 뜻이 아닌가? 죄로 말미암아 지옥 불에 던져져서 영원히 고통당할 불쌍한 죄인임을 깨닫고 살려달라고 몸부림치는 죄인이 예수 십자가의 속죄의 은혜를 깨닫고 지옥에서 건짐 받는 것이 구원이다.

   필자가 만난 건짐 받은 자(구원 받은 자)의 특징은, 아는 사람들에게 지옥을 경고하고 구원받게 하기 위해 노력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구원받은 자들의 첫 번째 변화이다. 지옥이 얼마나 끔찍한 곳인데 내가 가지 않으니 관심 없다고, 어떤 곳인지 잘 모른다고 말하는 것은 자신과 사단과 거짓 목자에게 속은 불쌍한 사람의 신앙고백일 뿐이다.

   최근에 필자는 더 큰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었다. 구도자 중 하나가 필자에게 말하기를 자기는 000목사님을 존경한다고 했다. 그분은 우리나라에 교계를 대표하는 유명한 목사요, 언론에도 수시로 나오는 진보주의 목사다. 필자는 "그 목사님을 왜 존경하느냐"고 물으니. "그목사님은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하셨는데 어찌 사람을 지옥에 보내겠느냐? 사랑이신 하나님이 사람을 고통스러운 지옥에 보내고 마음이 편하시겠느냐?' 하더라"는 것이다.

   얼마나 놀랍고 충격적인 이야기인가? 하나님이 사랑이신 것만 알았지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을 알지 못한 슬픈 넋두리인 것이다. 지옥이 없다면, 지옥에 보내지 않는다면 왜 사람에게 주신 성경에 지옥을 상세히 기록하셨을까? 지옥을 부인하는 사람이 이단이요, 사단의 종이다.

   필자는 최근, 어렸을 때 구원받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만났다. 그 중 어떤 이는 자신이 확실히 구원받았다고 주장하기에, 오랜 시간 토론하여 결국 구원받지 못한 것을 깨닫고 지금은 구원받아 주님을 신실하게 섬기고 있다. 그리고 그가 주변 사람에게 전도하여 열매가 나타나기 시작하고 있다. 필자가 그에게 구원받지 못한 이유를 증명했는데 그 중에 지옥에 관한 부분을 증명했다. 그는 어려서 복음을 접하고 예수를 개인의 구주로 영접했다고 하였는데 필자는 거기에 대해서 동의했다. 그러나 필자가 질문한 것은 그때에 지옥에 대한 깨달음이 있었느냐는 것이었다. 지옥의 심각성과 죄의 형벌을 받는 문제에 대한 깨달음이 없이 죄가 용서되었다는 복음만 접하니 지옥에서 해방 받은 기쁨이 있을 리 만무하다. 그러니 다른 이에게 지옥에서 구원받는 전도도 하지 않음이 분명하다.

   필자가 어떤 목사님에게 지옥 이야기를 하니 그 목사님이 말하기를 "지옥 설교하면 인기 없어요" 하였다. 나는 묻기를 "그러면 무슨 설교가 인기가 있나요?" 하니 가정 행복론과 축복론을 잘해야 인기가 있단다. 한국의 기독교가 예수 잘 섬기면 복 받아 세상에서 잘되고 출세하고 부자 된다는 달콤한 말로 영혼들을 노략질하고 있는 것이다. 멸망의 지옥에 가야할 영혼이 십자가의 복음으로 말미암아 구원받아 영생을 얻으니 하나님의 자녀요, 그 자녀가 하나님의 주신 믿음의 분량에 따라 하나는 부하게도 살고 하나는 가난하게도 사는 것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말미암는 분복이다. 모두가 다 감사해야 할 주님의 은혜인 것이다.

   기독교인들이 지옥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라고 앞에서 말했다. 그러면 무엇인가? 그들이 지옥을 믿되 교리적으로 믿고 일반적으로 믿고 관념적으로 믿는 것이다. 지옥을 믿으나 지옥을 두려워하지 않으니 전파하거나 경고하지도 않고 다른 이들이 지옥 가는 것에 대해서 아무런 감각도 없고 자신이 혹시 지옥에 갈까하는 마음도 없으니 자신의 신앙을 점검해보려는 생각도 없는 것이다.

   유머적인 예화를 들어보고 싶다.

   사단과 그의 추종자 귀신들이 회의를 하였다. 봇물처럼 터져 나오는 복음의 역사를 어떻게 막을 것인가 대책을 강구하는 1차 회의에서 결정된 것은 폭력으로 막으라는 것이었다. 그 날 이후 사단은 예수 믿는 자들을 마구 잡아 죽이고 옥에 가두었다. 12제자들이나 그 이후의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핍박으로 죽었다. 그러나 핍박으로는 복음 전파를 막을 수가 없었다. 이 때 다시 회의하여 결정된 것이 기독교를 변질 시키자는 것이었다. 사단의 이 전략은 성공하여서 오늘날 기독교를 잘 들여다보면 초대교회와는 너무나도 다른 모습을 볼 수 있다. 예수께서 가르치시고 강조하신 말씀들이 전해지지 않고 실천되지 않는 것이다. 그 중에 지옥에 대한 부분이 특히 그렇다. 초기 교회와 다른 점, 변질된 점을 어찌 말로 다할까?

   사단의 본질은 거짓말쟁이이다(요한복음 8:44). 사단은 금일의 기독교인들에게, 그들이 속한 교회에 공문을 보내서 지옥을 믿지 말라고 전파한 것이다. 그리고 부득이 지옥을 전할 양이면 지옥에서 빠져나오는 법은 절대 가르치지 말고 그냥 교회생활 열심히 하고, 선하고 착하게 살면 천국 가는 것으로 막연히 가르치라고 오염시킨 것이다. 사단의 이 전략은 정확하게 성공하여서 오늘날 대다수 기독교인들이 지옥에 관심이 없을 뿐 아니라 자기는 잘 믿으니 천국에 가겠거니 하고 살아가고 있다. 그들은 지옥의 무서움을 경험해 본적이 없는 자들이다. 그들은 지옥에서 건짐 받은 기쁨을 맛보지 못한 자들이다. 그들은 지옥에서 건짐 받는 기쁨이란 것이 있는지 조차도 모르는 자들이다.

   언젠가 대단히 열심 있는 집사를 만나 지금 죽으면 지옥 가느냐, 천국 가느냐고 물으니 화를 버럭 내면서 "왜 그렇게 복잡하게 믿는지 모르겠다. 그냥 믿으면 되는 것 아니냐"는 것이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죄와 지옥에서 건짐 받은 기쁨으로 충만하였으며 그들은 그 끼쁨을 힘을 다해 전파하였다. 지옥이 빠진 기독교는 알맹이 다 먹고 난 깡통과 같다. 빈 깡통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기독교는 사후 세계에 대해 증거한다. 이 땅에서 잘 살아 보아야 수십 년 사는 것 아닌가. 사후 세계는 영원한 지옥과 영원한 천국, 두 길이 있다. 이 땅에서 짧은 삶을 위해, 즉 병고치고 돈벌어 부자되고 좋은 학교 나와 출세하라고 예수님이 세상에 오셨는가? 요한 복음 3장 16절에서 예수님이 오신 것은 멸망 받는 사람을 영생 얻게 하기 위해 오셨다고 기록하셨지 아니한가?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죄 값을 치르는 멸망의 지옥, 생각만 하여도 끔찍한 멸망의 지옥, 이 지옥에서 그대를 건지시기 위하여 예수께서 세상에 오신 것이다. 그분은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이셨지만 그대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셨다. 그분은 죽음 직전에 있는 힘을 다하여 외치셨다.

   "다 이루셨다"(요한복음 19:30).

   이 짤막한 한 마디가 인류역사를 변화시키고 인간들의 삶을 변화시켰다. 멸망의 지옥에서 영생의 천국으로 옮긴 것이다.

   "다 이루었다"는 말은 인간을 지옥에서 건져내기 위한 작업을 완수하셨다는 뜻이다. 이것은 인간의 모든 종교적, 사상적 방황을 마감 지었다는 뜻이다. 인간의 종교, 사상, 철학 등 모든 것이 인간의 죄, 즉 인간의 불완전성과 관계가 있다. 죄인을 달리 말하면 인간의 불완전성이 아닌가? 인간이 불완전하여 죄를 짓고 죄 가운데서 헤어나지 못하여 고통당하다가 결국 죄 값으로 멸망의 지옥에 가야하는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인류의 죄를 단번에 다 해결하셨다. 예수께서 온 인류의 죄, 즉 모든 사람, 개개인의 과거, 현재 미래의 죄를 다 용서하심으로 그들이 천국에 갈 수 있는 길을 활짝 열어놓으신 것이다. 지금 하나님을 대적하는 어떤 이의 죄뿐만 아니라 충실한 집사인 그대의 죄까지 모두 이미 용서하셨다. 우리가 그 사실을 믿기 때문에 용서하신 것이 아니고 믿든지 아니 믿든지 이미 다 용서하셨다는 것이다. 이제 이와 같은 십자가의 속죄를 믿는 자는 천국에 가는 것이요, 믿지 아니함으로 지옥에 간다. 안타까운 것은 그들의 죄가 다 용서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실을 모르고 지옥에 가거나, 알고도 안 믿어 지옥에 간다는 것이다. 이 일에 대해서 히브리서 10장 10절에서는 "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하였다. 십자가의 속죄로 부정한 죄인이 거룩해졌다는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 외에 누가 감히 거룩할 수 있는가? 그런데 십자가의 속죄를 믿는 그대는 거룩해졌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또 로마서 3장 23,24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죄 많은 그대가 "의인"이 되었다는 말이다. 참으로 놀랍고 놀라운 선언이다. 이것은 십자가의 속죄로 얻은 은혜의 신분이다.

   또 요한복음 6장 47절에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오, 그대여, 그대가 십자가 죄 용서의 사실을 믿었다면 지옥에 갈 걱정은 안 해도 된다. 영원한 지옥에서 영원한 천국으로 옮겨진 것이다. 진정 기뻐하기 바란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한복음 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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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죄와 종교로부터의 자유


                    다른 복음으로 고통받는 기독교인들이여!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 좇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갈라디아서 1:6).


   바울은 갈라디아의 여러 교회들이 진리에서 떠나 급속히 변질되어 가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슬프고 탄식하는 마음으로 이 글을 쓰고 있음이 분명하다. 앞에서 필자는 사람을 따라 다니는 불쌍한 갈라디아인들을 생각하며 오늘날 우리의 신앙 상태를 점검하여 본 바 있다.

   여기서는 다른 복음에 병들어 있는 갈라디아인들을 생각하면서 우리의 신앙을 진단하여 보고자 한다.

   다른 복음! 이것은 분명 복음은 복음인 것 같은데 다른 복음이다. 쉽게 생각할 때 복음과 비슷한 가르침이지만 실상은 그 질과 내용에 있어서 가짜 복음인 것이다.

   그렇다면 다른 복음이 무엇인가를 알기 위하여 다른 복음에 병들어 있는 사람들의 증상을 살펴봄으로 우리의 신앙을 진단하여 확실한 깨달음이 있기를 원한다.

   참 복음을 듣지 못하고 다른 복음에 붙잡혀 있는 사람들의 첫 번째 증상은 교회에 다니나 기쁨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기독교가 다른 종교보다 뛰어난 것이 많은데 그 중에 폭포수같이 쏟아져 내리는 큰 기쁨이 신자들 중심에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도 요한복음 14장 27절에 약속하시기를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하셨다.

   이 약속은 신실하여 오늘날 예수님을 통하여 진실로 거듭난 성도들에게는 실제로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세상 종교들의 특성은 인생의 모든 고뇌와 죄악과 고통을 극복하기 위해 자신의 육체를 학대하거나 심신을 단련하는 등, 스스로의 부단한 노력을 권장하고 있다. 자신의 인격과 능력을 의지한 자기 노력으로 평안을 이루려고 고생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구원을 이루기 위해 자신을 수양하는 과정에 있는 종교인들에게 무슨 평강과 기쁨이 있겠는가? 종교인의 얼굴은 세월이 갈수록 심각하여지고, 거듭남으로 그리스도인답게 사는 사람의 얼굴은 날이 갈수록 기쁨으로 가득 찬 밝은 모습이다. 우리 자신의 인격이나 성격, 그리고 육신을 들여다 볼 때 기쁨과 소망이 있을 수 있을까? 아니다! 오히려 근심과 절망이 있을 뿐이다.

   어떤 종교는 참 도를 찾아서 방황하다가 죽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여 심지어는 순교자의 반열에 서는 것을 보게 된다. 생각하여 보라! 아무리 종교적 업적을 훌륭히 쌓고 종교적으로 높은 수준에 이르렀다 하여도 그의 중심에 참 평안이 없다면 무슨 가치가 있겠는가? 또는 세상 종교는 그렇다하여도 주님을 믿는다는 기독교인이 참 평강을 가지지 못하였다면 이것은 껍질만 있는 쭉정이에 불과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렇다! 다른 복음에 잡혀있는 종교인의 모습은 쭉정이 그 자체다. 쭉정이의 특징은 겉으로는 알곡처럼 보이는데 속은 텅 비어있는 가짜다. 겉으로는 주님의 제자인 듯하나 속에는 내적인 변화가 없이 스스로 자신을 속이고, 하나님을 속이고, 세상을 속이는, 변화된 기쁨이 없는 쭉정이 기독교 교인은 물론이요 지도자들도 포함되고 있다고 성경은 증언하고 있음을 주목하기 바란다(마태복음 7:21~23).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마태복음 3:12).

   최근에 그리스도 안에 들어온 어떤 성도는 죽기 위하여 자살 장소로 가다가 친구 집에 잠시 들러 구원받고 주님을 만난 후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변화되어 큰 기쁨 중에 주님을 섬기고 있다.


   다른 복음에 붙잡힌 자의 두 번째 증상은, 기쁨이 없을뿐만 아니라 거듭난 확신이 없다는 것이다. 그들은 입술로는 천국에 갈 수 있다고 하지만 그들의 생활에서는 천국의 소망에 붙잡혀 사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은 찾아 볼 수 없다. 입으로만 그리스도인이지 실제로는 세상 일에 빠져서 천국에 대한 확신과 소망 가운데 사는 모습이 전혀 없는 것이다. 죄 용서받는 십자가의 진리를 기독교 교리 중 하나로 이해하고 있을 뿐 구원의 근원, 즉 생명의 근원이 되는 천국의 열쇠로 깨닫지 못하고 있다. 예수님의 피로 속죄 받고 천국에 가는 진리는 성경의 주제이며 모든 믿는 자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고 깨달아야 하며 늘 감사해야 할 놀라운 말씀이다.

   이와 같이 확실한 구속의 진리를 믿음으로 거듭난 성도는 거듭남의 기쁨을 바탕으로 하여 하나님과의 사귐 속에서 확신 중에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면서 천성을 향하여 살아간다. 이것을 정상적인 신앙생활이라 한다. 이말은 가정이나 직장이나 사회생활에 무책임하거나 무관심해도 된다는 뜻이 아니니 오해 없기 바란다.


   다른 복음에 붙잡혀 지옥에 가는 자들의 세 번째 증상은, 성경과 전혀 관계없는 생활을 할뿐만 아니라 성경에 대한 깨달음이 없다는 것이다.

필자는 최근 상담 중 18년 동안 교회에 다녔다는 한 종교인을 만나 성경의 주제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고 물으니 "말씀이지요" 하고 대답했다. 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대답인가!

   12년 동안 교회에 다닌 어떤 사람에게 구약은 "옛날에 주신 약속", 신약은 "새로 주신 약속" 이라고 말하니 " 그 말이 그 뜻입니까?" 하고 눈이 휘둥그레지는 것이다. 기가 막힐 일이다. 거듭나지 못하였으니 성령이 그 속에 없는 것이요, 그 속에 성령이 없으니 성경이 깨달아지지 않는 것이 당연하다.

   그들은 성경을 도대체 읽지 않는다. 성경은 예배당에서 설교 때 한두 번 찾아보기 위하여 소지하고 있을 뿐 도대체 읽지 않는다. 바빠서도 그렇지만 그들의 중심에 주님의 영이 없으니 성경을 읽을 의욕이 없는 것이다.

   불쌍하고 불쌍하다. 안타깝고 불쌍하다. 그들은 생각하기를 성경은 교회 지도자나 기타 특정 자격이 있는 사람만 깨달아지는 책으로 치부하고 있으며. 그들의 지도자 또한 그렇게 가르치는 경우가 허다하다.

   또한 그들은 성경을 읽어도 깨달음이 전혀 없다. 사실 그들이 소경이기 때문에 깨달음이 없는 것이 당연하다. 정상적인 성도라면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과 교제하고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문제나 잘못을 깨닫고 바른 생활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성경은 신자들을 바른 길로 깨우치고 인도하는 지침서이다. 모름지기 거듭난 신자라면 부지런히 성경을 읽고 깨닫고 실천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디모데후서 3:16).

   성경에 대한 정상적인 깨달음이 없으니 내적인 기쁨과 평강이 없을 뿐 아니라 외적인 변화도 없는 것이다.


   다른 복음에 붙잡혀 있는 종교인들의 네 번째 증상은, 기도응답을 몇 번 경험한 것으로, 혹은 광신적인 체험을 경험한 것으로 구원 얻었다고 착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 그들 중에는 양보할 수 없는 구원의 확신이 있으나 자세히 분석하여 보면 어려운 상황에서 기도할 때 주님의 도우심을 몇 번 경험한 것으로 구원받았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알 것은 구원받지 아니한 이방인도 하나님이 돌보신다는 사실이다. 그러한 기도응답이 구원의 궁극적인 증표가 될 수 없다.

   또 어떤 사람들은 방언이나 기타 신비한 체험을 가지고 구원으로 주장하고 있는바 이것은 다 위험한 신앙관임을 알아야 한다. 초대교회에 특수한 목적으로 주어진 방언이 오늘날 그러한 목적성이 사라진 때에도 존재한다고 보기 힘들다. 방언을 통해서 초대교회 성도들이 계시 받고 하나님을 섬겼고 그러한 섬김의 모습 속에서 서신서들이 기록되었다. 오늘날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다고 증거할만한 분명한 근거도 없거니와 그것이 구원의 증거는 더더욱 될 수 없다.

   신비한 체험들이 구원의 증거가 될 수 없으니 이러한 것들 또한 다른 복음에 잡혀 있는 불행한 현상이다.


   다른 복음에 붙잡혀 지옥으로 가고 있는 종교인들의 다섯 번째 증상은 그들 마음에 있는 무거운 짐을 풀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어떤 집사님과 대화한 내용을 소개해 보겠다. 그 집사님은 자신의 신앙을 나에게 관철시키려고 변론하는 가운데 있었다. 그는 필자에게 "우리가 구원에 이르는 길은 얼마나 험난하고 힘든 길이며, 고난의 길이며, 어려운 길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하고 말하는 것이었다. 필자는 그에게 마태복음 11장 28절을 펴서 보여 주면서 "내가 믿는 예수님은 이렇게 모든 짐과 인생의 짐을 다 풀어 주셔서, 나는 기쁘고 평안하게 주님을 섬기고 있는데 당신이 믿는 예수님은 무슨 짐을 오히려 지워줍니까? 그 예수님은 나의 예수님과 다른 이상한 예수님이네요?" 하고 말하니 그 후에는 대답을 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렇다. 예수님은 인생의 모든 고뇌를, 모든 죄를 다 담당하셨다. 주님은 거짓말하실 리가 없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태복음 11:28).

   이 얼마나 놀라운 말씀인가! 이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의 자비인가! 죄의 짐에 눌려 웃을 날이 없고, 평강이 없으며, 고통 가운데 살던 자에게 주신 기쁜 소식이 아닌가!

   예수님이 그대의 죄를 짊어지고 죽으셨다는 것을 지식적으로나 교리적으로는 알지만 그 말씀이 그대의 생활을 변화시키지 못하였다면 그대는 구원받은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그대의 모든 죄를 친히 담당하심으로 그대를 죄와 죄의 고통에서 실제로 해방시켜주셨다. 이제 죄의 굴레가 결단코 그대를 고통스럽게 하지 못한다.

   우리는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분명히 설정하여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궁극적 신앙의 대상이다. 그분에게 우리는 기도하는 것이며 예배하는 것이며 그분의 뜻 안에서 살아야 한다. 우리는 궁극적으로 그분 뵈올 날을 기다리는 것이다. 천국에서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거하게 될 것이다.

   "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요한계시록 21:3).

   우리는 잠시 후에 하나님의 영광의 자리에 함께 동참하게 될 소망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예수님은 무슨 역할을 하고 계시는가? 하나님이 궁극적 신앙의 대상이라면 예수님은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시는 구원자요, 인도자이신 것이다.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께 예배하며, 기도하며,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들림 받을 때에도 예수님께서 친히 공중까지 마중 나오셔서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실 것이다(데살로니가전서 4:16 ; 요한복음 14: 2,3 참조).

   그런 관점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왜 십자가에서 보혈을 흘리셔서 인간의 죄악을 담당하셔야만 하였던가 하는 사실을 이해하게 된다. 인간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데 있어서 최대의 걸림돌이며, 유일한 걸림돌이 되는 것은 죄악이다.

   "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이사야 59:2).

   이 말씀과 같이 인간의 죄악이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교제를 끊는 걸림돌이 되었으니 주님의 십자가의 속죄는 인간에게 최고의 복음(기쁜 소식)이 아니겠는가!

   이 단번에 이루신 십자가 사역으로 인간의 모든 죄가 완전하게 청산되었고 그러므로 죄인이 하나님 앞에서 떳떳이 고개를 들 수 있게 되었다. 또는 아주 악질적인 죄인도 천국의 소망을 가질 수 있는 길이 활짝 열리게 되었다. 인류 역사 6,000년에 최고의 경사가 있다면 주님의 십자가 사역이다. 이일로 말미암아 죄인이 그의 죄로 인하여 지옥에 갈 그 어떠한 이유도 사라졌다. 다만 완전한 속죄와 영원한 속죄(히브리서 10:17~18, 9:12)를 믿지 아니함으로만 지옥에 가는 것이다.

   그대가 만약 영원한 속죄로 말미암아 죄인의 굴레를 벗어버린 사실을 심령으로 깨닫고 믿었다면, 분명히 하나님의 말씀을 힘입어 말씀드리건대 그대는 의인이 되었으며 구원을 받은 것이다(히브리서 10:10~18 ; 요한복음 5:24 참조). 그러므로 지옥과 인연이 끊어졌고 죄악과도 인연이 끊어졌다. 하나님은 그대의 영원한 아버지와 보호자가 되신 것이요 예수 그리스도는 그대의 영원한 구원자가 되신 것이다.

   그분은 세상에 계실 때에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한복음 14:6)고 하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참 복음의 실체다. 당신에게 참된 기쁨을 주실 수 있는 구세주시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을 그대도 받아들이고 주님의 참 제자가 되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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