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 매킨토시의

                                    완전한 구원


                                                3장

                           그리스도인은 하늘에 속한 사람

 


   "주께서 그 구속하신 백성을 은혜로 인도하시되

주의 힘으로 그들을

주의성결한 처소에 들어가게 하시나이다" (수 15:13)

 


   우리는 지금까지 두 가지 주제를 살펴보았습니다. 첫 번째는 피의 보호아래 있었던 이스라엘 민족, 두 번째는 홍해 바닷가에 서있던 이스라엘 민족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스라엘 민족이 요단강을 건넌 후, 현 시대 그리스도인의 참된 위치를 나타내는 길갈에서 유월절을 기념한 것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어린양의 피에 의해 심판으로부터 벗어났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통해 악한 세상에서 해방을 받고, 현재 하나님 우편에 계신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복을 받았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하늘에 속한 사람이며,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선한 손에 의해 주어진 다양한 관계와 책임 가운데 합당하게 행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존재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결코 수도사나 신비주의자, 또는 구름 가운데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 사람은 땅에도 하늘에도 합당치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꿈속을 걷거나, 안개속을 더듬거나, 비현실적인 영역에서 사는 사람이 아니라 그와는 반대로 날마다 하늘에 속한 그리스도의 은혜와 미덕을 이 세상의 상황과 환경 속에 반영하는 행복한 특권을 가진 사람입니다. 또한 그리스도인은 성취된 구속의 견고한 터 위에서 무한한 은혜를 통하여 성령의 권능에 의해서 그리스도와 연결된 사람입니다. 신약 성경의 가르침에 따르면 바로 그런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성경은 이 사실에 대해 어린아이라도 알 수 있고, 깨달을 수 있고, 제시할 수 있을 정도로 매우 명확하고 또 명백하게 이 사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그리스도인은 죄 사함을 받은 사람이며,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고 있으며, 또한 자신이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자기 속에 성령님이 거하시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 용납되었으며(받아들여졌으며), 부활하시고 영화롭게 되신 그리스도와 연합된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장사됨으로써 세상과의 관계가 끊어진 사람이며, 죄와 율법에 대하여 죽고 자신을 사랑하사 자기 몸을 내어주신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의 삶의 목적과 삶의 기쁨과 영적인 활력을 발견하는 사람으로서, 주님의 오심을 날마다 고대하며 사는 사람입니다.


   반복해서 말씀드리지만, 이것이 신약성경에서 말하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오늘날 흔히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고 고백하는 사람들의 모습과는 얼마나 다른지 스스로 생각해보십시오. 이제 독자들은 하나님이 정하신 기준으로 자신을 평가해보시고, 과연 자신이 어떤 점에서 부족한지 점검해보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해봄으로써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사역, 그리고 성령님의 증거가 존재하는 한, 참된 그리스도인들에게 속한 풍성하며 귀한 모든 신령한 복을 충만하게 누리지 못할 이유가 없다는 것을 확신하며 안식할 수가 있습니다.


   율법주의로 인한 어두운 불신앙과 잘못된 신학과 거짓된 종교심은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자녀들에게서 자신들의 합당한 위치와 마땅히 누려야 할 분깃을 강탈해갑니다.

   그럴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의해서 자연스럽게 세상과의 분리를 해야 함에도, 그렇게 하지 않음으로써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슬프게도 하늘에 속한 사람으로서의 자신의 위치와 특권에 대해서 거의 알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제 여호수아 3-5장을 통해 모형적인 이스라엘의 역사 안에 계시된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여호수아가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서 이스라엘 사람들로 더불어 싯딤에서 떠나 요단에 이르러서는 건너지 아니하고 거기서 유숙하니라 삼일 후에 유사들이 진중으로 두루 다니며 백성에게 명하여 가로되 너희는 레위 사람 제사장들이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언약궤 메는 것을 보거든 너희 곳을 떠나 그 뒤를 좇으라 그러나 너희와 그 사이 상거가 이천 규빗쯤 되게 하고 그것에 가까이 하지는 말라 그리 하면 너희 행할 길을 알리니 너희가 이전에 이 길을 지나보지 못하였음이니라" (수 3:1-4)


   이제 독자들은 순전하고 명쾌하게 요단강의 참된 영적인 중요성을 깨달아야 합니다. 홍해바다가 그리스도의 죽음을 예표 하듯이 요단강은 또 다른 면으로 그리스도의 죽음을 나타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 바다를 건너서 광야 쪽에 서있게 되었을 때, 그들은 구속의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들은 애굽과 바로의 권세에서 해방된 백성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대적들이 바다에 빠져 죽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승리에 찬 감격을 가지고 약속의 땅으로 들어갈 것을 기대할 수 있었습니다.


   "주께서 그 구속하신 백성을 은혜로 인도하시되 주의 힘으로 그들을 주의 성결한 처소에 들어가게 하시나이다 열방이 듣고 떨며 블레셋 거민이 두려움에 잡히며 에돔 방백이 놀라고 모압 영웅이 떨림에 잡히며 가나안 거민이 다 낙담하나이다 놀람과 두려움이 그들에게 미치매 주의 팔이 큼을 인하여 그들이 돌같이 고요하였사오되 여호와여 주의 백성이 통과하기까지 곧 주의 사신 백성이 통과하기까지였나이다 주께서 백성을 인도하사 그들을 주의 기업의 산에 심으시리이다 여호와여 이는 주의 처소를 삼으시려고 예비하신 것이라 주여 이것이 주의 손으로 세우신 성소로소이다 여호와의 다스리심이 영원무궁하시도다 하였더라" (출 15:13-18)


   이 모든 것은 너무도 장엄한 것이며 신성한 진실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아직 가나안 땅에 들어간 것이 아닙니다. 그들과 약속의 땅 사이에 있는 요단강에 대해서는 아직 영광스러운 승리의 노래가 불리어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목적 안에서나 믿음의 판단에서나 그 땅은 참으로 그들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약속의 땅을 얻기 위해서 그들은 실제로 광야를 통과해야만 했고, 요단강을 실제로 건너야만 했습니다.


   우리는 구원받은 우리 영혼의 역사 속에서 이 모든 것들이 실제적으로 나타나는 것을 얼마나 끊임없이 보는지요! 처음 회심했을 때, 우리에겐 기쁨과 승리와 찬송 밖에 없었습니다. 우리는 우리 모든 죄가 용서되었음을 알았고 우리 마음은 경이로움과 사랑과 찬송으로 가득했습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어, 하나님과 화목한 자가 되고,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기뻐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로마서 5장 1-11절의 상태입니다.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는 그 이상 높은 것은 없었습니다. 심지어는 천국에서 조차도,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하는 것" 보다 더 높거나 더 나은 것이 없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종종 로마서 8장이 로마서 5장보다 더 높다는 말을 합니다. 하지만 무엇이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 하는 것" 보다 더 높을 수 있을까요? 만일 우리가 하나님앞에 나아갔다면, 우리 영혼이 나아갈 수 있는 가장 높은 위치에까지 나아간 것입니다. 하나님을 우리의 분깃이며 안식이고, 처소이며 목적이고 또 우리의 모든 것으로 아는 것, 그리고 하나님 안에서 영적인 모든 자원을 소유하는 것, 언제나 어디서나 어떤 상황에서나 하나님을 우리의 보호자로 아는 것, 이것이 바로 신자들에겐 천국 그 자체인 것입니다.


   하지만 로마서 5장과 8장은 차이가 있는데, 바로 6장과 7장이 그 사이에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영혼이 로마서 6장과 7장을 실제적으로 통과하며 그 안에 담긴 심오하며 귀중한 가르침을 우리 안에 내주하는 죄와 율법의 심각한 문제에 적용하는 방법을 배우게 될 때, 그 때에 우리는 더 높은 수준이라기보다는 분명히 더 나은 상태에 들어가게 됩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실제적으로 통과할 때" 라는 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우리가 만일 하나님이 말씀하신 거룩한 신비 속으로 들어가고자 한다면 반드시 통과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죄에 대하여 죽고 또 율법에 대하여 죽었다는 것을 말로 하는 것은 쉽습니다. 로마서 6장과 7장에 기록된 내용들을 우리의 이성으로, 단지 이론적으로 깨닫고 이해하는 것도 어렵지 않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과연 그러한 것들이 실제적으로 우리의 것이 되었느냐는 것입니다. 과연 성령의 능력을 통해 우리 영혼에 실제적으로 적용해본 적이 있습니까? 놀라운 복과 특권의 자리로 우리를 인도하신 주님을 위해, 그리고 그것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신 그분의 영광을 위해 그러한 것들이 우리 삶에 생생하게 나타나고 있습니까?


   지극히 거룩한 믿음의 깊고도 보배로운 이러한 비밀들을 많은 사람들이 단지 지식으로만 인지하고 있다는 사실은 참으로 두려운 일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영적인 능력으로만 소유할 수 있고, 그럴 때 실제적인 결실을 맺을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본 주제로 돌아가야만 합니다. 그리고 독자들에게 참으로 요단강의 영적인 중요성을 바로 깨달았는지를 묻고 싶습니다. 요단강의 의미는 과연 무엇일까요? 우리는 요단강이 그리스도의 죽음을 예표 한다는 것을 이미 살펴보았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면에서 그렇다는 것일까요?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다양한 측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요단강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나타낸다는 것은 믿고 있지만, 그것을 통해 해방을 받아 자유를 얻는 것으로는 아직 적용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홍해는 이스라엘을 애굽과 바로의 권세에서 해방시켰습니다. 요단강은 그들을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도록 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서 이 두 가지를 보게 됩니다. 그리스도, 그분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시길! 그분은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서 우리를 우리 죄와 죄책과 정죄로부터 해방시켰고, 또 사단의 권세와 악한 세상으로부터 우리를 건져냈습니다.

   하지만 이 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께서 그 동일한 무한히 보배로운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우리를 이제 전적으로 새로운 위치, 즉 하나님 우편에 계신 그분과의 살아 있는 연합 속으로 우리를 이끄셨다는 것입니다. 그에 대한 분명한 가르침이 에베소서 2장에 있습니다.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4-6절)


   여기 "앉히시니" 에서 동사가 완료형으로 사용된 것을 주목해보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이 장차 앉히실 것이다.' 라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이미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이루신 일입니다. 신자는 죽을 때에야 비로소 천국에 들어가려고 기다리고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신자는 이미 영원히 사시는 그리스도의 인격 안에 있고, 또한 영광을 받으신 머리이신 주님과 연합되어 영으로, 믿음으로 이미 천국에 있는 존재들입니다.


   이 모든 것이 사실이며 실제일까요?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고, 무덤에 묻히신 것만큼이나 사실이며 실제적입니다.  우리가 허물과 죄로 죽어 있었던 것만큼 사실이며 실제적입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진리만큼이나 사실이며 실제적입니다. 모든 참된 신자 속에 성령님이 내주하신다는 진리 만큼 사실이며 실제입니다.


   독자들이여, 우리는 지금 이 모든 영광스러운 진리가 그리스도인의 매일의 삶 속에서 날마다 실제적으로 일어나고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님을 주목하십시오. 그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입니다. 아! 만일 참된 그리스도인의 위치가 신앙을 고백하는 그리스도인의 실제적인 행위를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라면, 우리는 기독교를 신화나 속임수나 우화로서 포기해야만 할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 감사하게도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참된 기독교가 무엇인지를 신약성경에서 배워야 합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배운 후에 신령한 빛을 통해 우리 자신과 우리의 행동과 우리의 환경을 살피도록 해야 합니다. 이러한 방법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의 부족함에 대해 고백하고, 애통하는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이렇게 할 때 우리의 마음은 무한하신 은혜로 우리를 그러한 영광스러운 위치, 곧 그분의 아들과의 연합과 사귐 속으로 인도하신 하나님께 대한 찬송으로 가득 차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찬송합시다! 그 위치는 우리 자신의 상태에 따라 좌지우지 되지 않습니다. 참으로 이 진리를 깨달았다면 이것은 우리 인생 전체와 행동과 성품에 강력한 영향을 미칠 것이 분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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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여     성


                                      제 5 과

                           주 예수님과 여성들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셨던 당시의 여성들은 희랍에서도, 로마에서도, 유대에서도 열등한 존재로 취급되었습니다.  즉, 희랍에서 여성은 노예와 동등한 지위에서 남편의 지배와 권위 아래 있었습니다. 로마에서 아내는 법적으로 남편의 소유였습니다. 로마의 여성들이 희랍의 여성들보다는 자유가 있었지만, 이것은 오히려 도덕적 방종과 이혼률의 증가를 초래했습니다. 물론 유대에서도 여성은 남편들보다 열등한 존재로 취급되었으나, 가정에서는 권위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여성들에게는 법적 권리가 거의 없었고, 종교 교육조차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남성 위주의 사회에서 일생을 보내셨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배경과는 달리 여성들에 대한 예수님의 태도는 매우 특이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여성에 대해 편견을 보이신 적이 없으셨고, 경멸의 어조로 말씀하신 적도 없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여성 특유의 능력을 인정하셨으며, 예의 바르고 정중하게 대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여성들의 소원에 대해서 동정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열병을 앓던 베드로의 장모(마 8:14)와, 자기의 겉옷을 만졌던 혈루병 걸린 여자(마 9:20)와, 18년 동안이나 꼬부라져서 펴지 못한 가련한 여인(눅 13:11) 들을 고쳐 주셨습니다. 나인성에서 예수님은 과부의 죽었던 아들을 살리셔서 과부에게 돌려 주셨습니다(눅 7:12~15). 심지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간음한 여인을 예수님께 데리고 왔을 때에도, 주님은 그여인을 신중하면서도 은혜스럽게 대해 주셨습니다(요 8:3~11). 이렇듯 감당하기 어려운 시련을 당하던 여인들, 그리고 주님의 사랑에 이끌려 주님께 나아온 여인들은 "내게 오라...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는 말씀에서 틀림없이 큰 위안을 받았을 것입니다. 특별히 주님은 십자가 상에서 까지도 모친에 대한 연민의 정을 보이셨습니다(요 19"25~27).

   한편 주님께서는 몇몇 여인들을 칭찬해 주시기도 했습니다. 귀신들린 자기 딸을 고쳐 달라고 간구하던 가나안 여인에게 주님은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마 15:21~28)라고 칭찬하셨습니다. 어느날 성전의 연보궤 옆에 앉으셨던 때에, 부자가 푸짐하게 헌금하는 모습과 가난한 과부가 두 렙돈 넣는 것을 지켜 보시고서 주님은 "이 가난한 과부가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눅 21:1~4)라고 이 과부의 희생적인 헌금을 칭찬하셨습니다. 즉, 주님은 헌금의 분량을 보신 것이 아니라, 헌금하는 자의 중심을 꿰뚫어 보셨던 것입니다. 부자는 별 손해가 없을 정도로 바쳤지만, 이 여인은 그의 소유를 모두 바침으로써 하나님의 마음을 흡족하게 해 드렸던 것입니다.

   또한 주님은 여성들의 지성적이고도 영적인 능력을 인정하셨습니다. 그래서 별도로 소녀들이나 부인들을 교육하신 적은 없으셨으나, 주님은 개인적으로 대중적으로 여성들을 가르치셨습니다. 주님 자신에 관해서나 성부에 관한 깊은 계시를 여인들에게 개인적으로 주시기도 했던 것입니다.

   실례로 요한 복음 4장에서 우리는 주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으로 더불어 우물가에서 대화하시는 광경을 보게 됩니다. 비록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치 아니했으며(요 4:9), 유대인 선생들은 자기의 부인과도 여럿 앞에서는 대화를 하지 않았으나, 주 예수님은 사회적으로 버림받은 이 여인과 대화하셨던 것입니다. 주님은 그에게 예배에 관해서, 하나님께서는 영이시기에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께 예배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요 4:24). 이로써 주님은 자신이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이 기다리고 있는 바로 그 메시야임을 계시하셨는데, 이러한 계시는 이 여인 외에 아무에게도 계시하신 적이 없으셨습니다. 이 여인은 이것을 믿었으며, 자기가 살고 있던 동네에 가서 예수님을 증거함으로써 여러 이웃 사람들도 주님께로 나와 믿게 하였습니다.

   또한 베다니에 살던 마르다와 마리아의 가정에서 마리아는 "주의 발 아래 앉아 그의 말씀" 을 들었습니다(눅 10:39).  주 예수님은 이것이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임을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마리아에게 음식을 장만하라고 타이르시지 않고, 도리어 주님의 가르침을 사모하는 그녀의 열의와 태도를 칭찬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마르다의 봉사를 무시하신 것은 결코 아닙니다. 다만, 봉사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음을 마르다에게 부드럽게 보여 주셨던 것입니다. 우리도 "주의 발 아래 앉아 그의 말씀" 을 배우는 시간을 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의 봉사' 보다 '우리 자신' 을 더 원하십니다. 결국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되느냐' 하는 것이 '우리가 무엇을 하느냐' 보다 더욱 중요한 것입니다.

   얼마 후에 마르다와 마리아의 오라비인 나사로가 병들어 죽었습니다. 이때 주님께서 마르다에게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요 11:25) 라고 하신 말씀은 오늘날까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큰 위로와 감명을 주고 있습니다.

   주 예수님은 여자들의 봉사를 기뻐하셨습니다. 이미 살펴본 대로 주님은 베다니에 있던 가정에서 헌신적인 두 자매의 영접과 접대를 받으셨습니다. 그 밖에도 "예수를 섬기며 갈릴리에서부터 좇아 온 많은 여자" (마 27:55)나 "여러 여자가 함께 하여 자기들의 소유로 저희를" (눅 8:2,3) 섬겼던 사실도 볼 수 있습니다. 한 무리의 여자들이 주님을 좇아, 순회하면서 사역하는 데 따르는 갖가지 불편과 고난을 감수하면서, 주님과 제자들의 신변을 보살펴 드렸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에 대해 라이리(C. C. Ryrie)는 "예수님을 측근에서 섬긴 자들에 관한 기록을 보게 되면 예외없이 여자가 아니면 천사였다. 주님을 섬기는 무리 중에 있다는 것은 얼마나 기쁜 일일까!" 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여성들의 호의와 친절을 고맙게 여기셨습니다. 누가복음 7장 36~50절에서 이 사실을 볼 수 있습니다. 이 구절에서 우리는 예수님이 어떤 바리새인의 집에 식사 초대를 받으셨을 때 일어났던 사건을 보게 됩니다. 식사 중 죄 많고 가련한 한 여인이 주님의 발치에 서서 울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눈물이 주님의 발에 떨어졌을 때 이 여자는 자기의 머리카락으로 닦고 그 발에 입을 맞추었으며, 아주 값비싼 향유를 그의 발에 부었습니다. 그 바리새인은 이 여인을 부정한 것이나 되는 것처럼 쫓아 버리려 하였지만, 예수님은 이 여인에게서 사랑의 선물을 받으셨습니다. 주님은 "이 여인의 많은 죄가 사함을 받았기 때문에 이처럼 나를 생각해 주는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여자가 보여준 호의에 데해서 칭찬하셨을 뿐 아니라, 바리새인의 냉담한 반응에 대해서는 묵살하고 계심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눅 7:44~46). 그렇다면 주님이 오늘날 우리들에게서는 무엇을 받고 계실까요?

   주님의 지상에서의 사역이 마지막에 이르렀을 무렵에도 이와 비슷한 사건이 있었습니다(마 26:6~13 ; 요12:1~8). 주님이 베다니에 있는 그의 사랑하는 친구의 집에 계셨을 때, 주의 발 아래 앉아 있던 마리아가 값진 향유를 가져다가 그의 발에 부었습니다. 그러자 제자 중 한 사람은 낭비라고 책망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에게 있어서는 주님께 드릴 수 없을 만큼 아까운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주님께서도 마리아에게 좋은 일을 했다고 칭찬하셨습니다. 주님께 드리기에 너무 귀하고 값진 것이 있을까요? 더욱이 제자들이 주님의 죽으심이 가까왔음을 전혀 예측할 수 없었던 그때에 마리아의 헌신이야말로 주님께 너무나 뜻깊은 일이었습니다. 마리아는 주님께 향유를 바름으로써 주님의 죽으심을 예표했던 것입니다. 주님을 돌보던  다른 여인들은 너무나 늦게 향품을 갖고 왔기 때문에 아무 쓸모가 없었습니다(눅 23:55 ; 24:3). 그러므로 구속을 받은 자들은 바로 오늘 '찬미의 제사'로, 그의 이름에 감사함으로, 사랑과 경배로 주님께 나아가시기 바랍니다(히 13:15).

   주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제일 먼저 여자들에게 나타나심으로써 여인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최초로 뵙게 되는 영광을 얻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주님은 그 여인들에게 자신이 부활한 희소식을 제자들에게 전할 수 있는 특권도 주셨습니다(마 28:1~10 ; 막 16:1~10 ; 눅 24:1~10 ; 요 20:1~18). 우리가 아는 바로는, 요한을 제외한 어느 제자도 십자가 곁에 없었으나 여인들은 있었습니다(마 27:55). 그리고 부활하시던 "아침 일찍 아직 어두울 때" 에도 여인들은 무덤에 왔었습니다. 그들이 모두 낙심 가운데 있었음을 볼 때 그들의 믿음이 제자들의 믿음보다 더 위대했던 것 같지도 않습니다. 다만 다른 사람과는 다르셨던 주님, 그들의 생애를 변화시켜 주신 주님에 대한 사랑이 주님이 계셨던 곳으로 그들의 발걸음을 옮기게 했을 것입니다. 결국 그들의 사랑은 보상을 받았습니다. 참으로 훌륭한 보상을 받았습니다. 죽음에서 살아나신 승리의 주님을 뵈었을 때, 그들의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었고, 애곡이 변하여 찬송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하여 달음박질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사랑으로 주님을 찾는 자는 그 보상으로 주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주님은 위대한 자나 유능한 자나 똑똑한 자에게는 자신을 숨기시고, 비천하지만 간절한 마음으로 주님을 사랑하며 사모하는 자에게는 자신을 계시하십니다. 그리고 주님에 대한 사랑이 크면 클수록  주님을 더욱 잘 뵐 수 있습니다. '주님이 어디에 계실까?' 하며 애타게 찾아 부르짖던 마리아에게 주님께서 친히 "마리아야" 하고 부르셨으며, 그 순간에 마리아는 애타게 찾고 있던 주님을 뵙게 되었습니다. 이 시간 우리가 사모하여 찾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기억하십시오. 주 예수님은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요 14:21)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과에서 인용된 대목을 더 자세히 연구해 보시고 각각의 사건에서 여성들에 대한 주 예수님의 태도를 묵상해 보십시오.

Posted by 행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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