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믿음에 있는가

                      시험하고 확증하라


                              성경을 고치려는 신자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마태복음 5:18).


   기독교의 생명을 무엇인가? 성경의 완전함이다. 성경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무엇인가? 말씀은 곧 하나님이라 하셨다. 그런데 만약 성경을 고치려는 사람들이 있다면 하나님을 고치겠다는 사람들이 아닌가. 그런데도 오늘날 한국 기독교의 현실은 성경을 고치려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다고 하면 지나치다 하겠는가. 필자는 오늘 이 문제를 생각하면서 한국의 기독교가 회개하기를 바란다.

   필자가 만나보는 기독교인들에게 필자는 다양한 질문으로 교제를 나누고 있다. 그 중에는 성경에 없는 교회의 여러 가지 형식과 가르침에 대해서 질문하면 그들은 성경에 없더라도 교회의전통을 중시하고 따라가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이 얼마나 무모한 말인가.

   예수님 당시에 예수님을 반대했던 유대인들과 그의 지도자들은 구약에 기록된 예언의 성취로 오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고 말았다. 그들은 다양한 말로 주님을 대적했는데 그 중에는  자기들의 전통, 즉 장로의 유전을 지키지 않는다고 비방하기도 하였다. 물론 그것은 성경에는 없는 것들이었다. 그들은 구약성경에 새로운 자기들의 전통을 접목시키고 있었다. 이것은 얼마나 잘못된 일인가. 성경을 무시하는 일이며 고치려는 처사인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기독교의 현실도 동일하다. 필자와 함께 성경이 말하지 않는 기독교 전통들을 생각하면서 진정한 믿음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보자.

   첫째로 교회 건물을 성전이라고 부르는 문제이다. 성경 어떤 말씀을 인용하는지는 몰라도 성경은 교회 건물을 성전이라고 부른 적이 없다. 성경에 보이는 성전은 오직 예루살렘 성전만 있었을 뿐이다. 오히려 성경은 참된 성전이 무엇인가를 보여주고 있다. 고린도전서 3장 16절에 보면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라고 하셨고, 6장 19절에 보면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셨다. 진정한 성전은 신자들의 몸이다. 왜냐하면 죄인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어 거룩한 신분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제는 죄인이 아니라 의인이다. 그러므로 의인의 몸에 성령님께서 거하시게 된 것이다.

   성령님은 누구신가.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이 아니신가. 그러므로 구원받은 성도들의 몸은 성전이다. 필자는 어렸을 때 건물을 교회라고 배웠는데 목사님에게 물어보니 교회는 유형교회와 무형교회가 있다 하였거니와 오직 교회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의 모인 무리일 뿐이다.

   절대로 건물은 교회도 아니요 성전도 아니다. 그러므로 성전을 짓는다든지 성전 봉헌식을 한다는 말들은 소경의 넋두리요 성경을 고치려는 처사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둘째로, 교회 구조를 성직자와 평신도로 나누는 문제이다. 성경 어떤 말씀을 근거로 성직자와 평신도로 나누는가? 성경은 오직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들이 모여서 각양 지체로 한 몸을 이루어 그 지체의 기능에 따라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생명체가 교회임을 가르치고 있다. 교회 지도자가 성직자가 되어서 교회를 대표하고 평신도와 하나님 사이의 교량 역할을 하는 교리는 어떤 말씀에 근거하고 있는가? 마르틴 루터는 종교 개혁 당시 만인은(구원받은 자는) 다 같은 제사장이라고 외치지 아니하였던가. 성경 베드로전서 2장 5절과 9절에 단정코 말씀하셨다. 신부가 하나님과 사람의 중간 역할을 할 수 없다고 종교개혁을 하였는데 오늘날은 신부 대신 목사로 명칭만 바뀌었지 아니한가. 성경은 여기에 대해서 분명하게 증거하고 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디모데전서 2:5).

   예수 그리스도 외에 누가 중보일 수 있는가. 분명히 말하거니와 성직자와 평신도로 나누는 제도는 성경에 근거하지 아니한 잘못된 전통일 뿐이다.


   셋째로, 교파에 관한 문제이다. 이 문제는 한국의 기독교를 위해서 누군가는 외쳐야 할 중대한 문제라고 생각된다. 도대체 성경 어디에 교파를 나누어서 당을 짓고, 담을 쌓고, 경계선을 그리고, 명칭을 붙이고, 대표를 뽑고, 조직을 만들고, 조직을 운영할 헌법을 만들라고 가르쳤는가? 헌법이 성경을 대신하고, 대표가 예수님을 대신하며, 조직이 성령을 대신한다면 과장된 표현일까? 사람이 하나님의 일을 조직을 통하여 대신하면 하나님의 할 일은 무엇인가?

   1900여 년 전 하나님을 섬겼던 신실한 종 바울은 교파 문제에 관해서 분명하게 언급하고 있다.

   "내 형제들아 글로에의 집 편으로 너희에게 대한 말이 내게 들리니 곧 너희 가운데 분쟁이 있다는 것이라 이는 다름 아니라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는 것이니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뇨"(고린도전서 1:11~13).

   바울은 당파를 짓는 것은 육신적인 것이라고 분명하게 경고하고 있다. 그것은 유아적 발상이며 시기와 질투의 소산이며 육신에 속한 사람들의 육신적인 정욕을 만족시키려는 발버둥이다.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너희가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고린도전서 3:1,3).

   말씀이 이와 같이 분명하게 당파에 대한 경고를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종파주의를 주장하고, 종파에 속하고자 하지 아니하는 사람들을 핍박하는 이 사람들은 성경을 능멸하는 사람들이 아닌가. 분명히 말하거니와 교파는 성경에 없는 것이며 교파주의를 지향하는 한국의 기독교는 성경을 뜯어고치려는 사람들이라고 비판을 받아 마땅하다. 고린도 교회와 같이 오늘날도 사람을 중심으로 하여 교파로 모이는 것은 정확하게 닮은 모습이다.

   넷째로 헌금에 관한 문제이다. 기독교와 그의 지도자들은 대답해 보라. 오늘날 명단을 공개하는 헌금은 성경 어떤 말씀을 근거로 하고 있는가? 수많은 부작용을 일으켜 교회에 대해서 부정적인 사람들만 양산하는 헌금제도는 반드시 개혁되어야 한다. 시중에 돌고 있는 여론은 "돈 없으면 예수도 못 믿는다. 예배당에 나가도 돈 없으면 행세하지 못한다. 예수도 돈 있는 사람만 좋아한다" 하지 아니한가?

   헌금의 종류는 왜 그렇게 많은가? 그냥 헌금하면 되지 않는가?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를 생각하고 주님이 주신 물질의 분량대로, 믿음의 분량대로 헌금하면 되지 아니한가? 영원한 멸망의 지옥에서 건져주신 놀라운 은혜가 있는데 이름 쓰면 헌금하고 쓰지 아니하면 헌금하지 않는 믿음의 수준이겠는가? 필자가 속한 교회를 40여 년간 지켜보는데 한 번도 기명헌금을 하거나 강요하지도 않았다. 그렇지만 예배당도 짓고 선교도 하고 교회도 잘 운영되고 불편 없이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 초대교회는 구제헌금을 할 때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하였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느니라...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희 아버지가 갚으시리라"(마태복음 6:1~4).

   이 말씀은 두 가지를 이야기하고 있다. 하나님을 섬김에 있어서 사람에게 보이려는 외식을 경계하고 있고, 하나님의 보심을 기억하여 은밀하게 할 것을 말하고 있다. 오늘날 한국의 기독교가 엄청난 헌금으로 인하여 많은 발전을 하며 거대한 예배당을 짓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지만 하나님이 거기 계시는지 필자는 확신할 수 없다. 아마 하나님은 산동네에 있는 가난한 자들과, 그들을 복음으로만 돌아보는 허름한 예배당의 허름한 차림의 주의 종들과 함께 할 것이다.


   다섯째로 복음의 변질이다. 성경이 말하는 정확한 복음을 지금 언급하고 싶다. 지옥에 대한 인식이 신자들에게 있어야 한다. 한국교회의 변질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대부분의 신자들이 지옥을 분명하게 깨닫지 못하고 있다. 막연하게 믿고 있을 뿐이다.

   지옥에 대한 깨달음이 없으면 하나님을 믿어야 할 필요성을 깨닫지 못한다. 그러기 때문에 기복신앙이 한국 기독교에 파고드는 것이다. 분명히 말하거니와 기복신앙은 한국 토속신앙의 산물이지 기독교의 본질이 아니다. 기복신앙이 기독교를 변질시키고 타락시켜도 누구 하나 외치는 사람을 보기가 힘들다. 기복신앙은 현실에 바탕을 둔 것이다. 정성껏 예수 믿으면 복 받고 잘된다고 한다. 이것은 성황당에 정성껏 빌면 복 받고 잘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지옥이 빠진 기독교는 토속신앙의 또 다른 모습일 뿐이다.

   지옥에 대한 깨달음이 분명하지 않으니 속죄에 대한 감격도 없다. 지옥의 절망을 뼈저리게 깨닫지 못했는데 지옥에서 건져주는 핵심 진리인 속죄에 대한 감사가 있을 리 있는가? 이것이 오늘날 기독교 신자의 가장 핵심적인 문제의 분석이다. 속죄를 그냥 교리로만 알고 있는 것이다.

   강단에서 지옥에 대한 끔찍한 사실을 많은 시간 사용하여 경고하여야 한다. 필자가 생각할 때는 모든 설교시간에 지옥을 언급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한번 지옥에 가면 영원히 나올 수 없다. 1200도가 넘는 펄펄 끓는 불 속에서 미친 듯이 뛰면서 영원히 고통을 당해야 하는데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지 아니한가. 지옥에 간 가룟 유다에 대해서 태어나지 않는 것이 나을 뻔했다고 주님이 친히 말씀하지 아니하였던가. 이토록 무섭고 끔찍한 지옥을 오늘의 기독교 지도자들이 경고하지도 않고 지옥에 대한 대책을 풀어주지도 못하고 있다. 이것은 심각한 한국 기독교의 고질병이다. 이 고질병으로 인하여 영문도 모르고 지옥으로 떨어지는 수천만의 기독교인들을 생각할 때에 눈물이 있다.

   구원의 확신에 대해서도 말하고 싶다. 성경은 분명하게 구원의 확신을 가지게 된 경험을 말하고 있다. 그것은 능력 체험도 아니고 감정적인 어떤 경험도 아니고 환상이나 꿈이나 기타 기적을 경험하는 것도 아니다. 멸망의 지옥에 갈 수밖에 없는 불쌍한 자신의 처지를 깨닫고 고통하는 죄인이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을 통하여 죄 용서함 받고 천국에 갈 수 있는 확신을 갖게 되는 날이다. 존 뉴턴도 우리 찬송가 405장에서 이 놀라운 날을 간증하고 있지 아니한가?

   "이 복음이 이미 너희에게 이르매 너희가 듣고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골로새서 1:6).

   얼마나 분명한가. 여러분에게 이런 날이 있는가? 어떤 집사님은 구원받았는가 물으니 자기 교회 목사님이 자기 교회 교인은 다 선택받았을 뿐만 아니라 또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하였는데 다 믿음으로 교회에 나오니 전체로 구원받은 것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일인가. 예정론에 대한 잘못된 인식은 얼마나 많은 영혼들을 지옥으로 내몰고 있는가. 이와 같은 경우는 극단적이지만 실제로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들이 자기는 천국에 가겠거니 하는 막연한 믿음으로 예배당에 출입하고 있다. 이것은 오늘날 기독교의 어떠한 변질보다도 무서운 변질이다. 복음이 잘못되면 하나님과 아무 관계가 없을 뿐만 아니라 천국과도 관계가 없다. 복음이 잘못되면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근본적인 이유가 변질되는 것이다. 성경 핵심이 복음이요 성경 중심이 복음이며 결론이 복음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말씀을 떠난 기독교를 어찌 다 말하겠는가. 이외에도 필자는 한국의 기독교를 향하여 할 말이 많다. 성경을 고쳐가는 저들은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음이 분명하다. 이제 여러분에게 말하고 싶다. 진정한 진리는 성경뿐이다. 성경대로 믿고 성경대로 죄 용서받고 성경대로 구원받아 성경이 말하는 천국에서 함께 살 수 있게 되기를 바랄 뿐이다. 구원은 개인적이고 단회적이고 실제적이다. 교파를 초월해서 구원받은 사람은 누구나 천국시민이요 하나님의 백성이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는 다 같은 천국시민이요 하나님의 백성이다. 여러분 개인의 구원 문제에 대해 점검하는 기회가 되었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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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07 건너편 지역들(13-15장)


요절 : 사도행전 13장 39절, 15장 11절

요점 :

1. 구약성경은 그리스도에 대한 많은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2. 대부분의 유대인들이 복음을 거절했습니다.

3. 핍박은 우리가 주님을 섬기는 것을 막을 수 없습니다.

4. 선행은 아무도 구원할 수 없습니다.

5. 선행은 구원받은 어떤 사람도 지켜줄 수 없습니다.

6. 선행은 구원해 주신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나타내는 필수요소입니다.


바울의 1차 전도 여행


1. 바울과 바나바가 파송됨(13:1-12)


안디옥 교회에는 바울과 바나바 이외에도 세명의 다른 성경 교사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기도하며 주님을 섬기고 있을 때, 성령님께서 그들을 위해서 시킬 특별한 일을 위해 그 두 사람을 파송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의심의 여지없이 바울과 바나바는 이 부르심에 대해 준비가 되어 있었고 교회의 다른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방법으로 그들을 파송하는 것을 기뻐했습니다. 전도자들과 교회가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했습니다.

   그들이 방문한 첫번째 장소는 구브로 섬이었고 마가 요한은 수종자로 그들과 함께 갔습니다. 그들이 복음을 전파하며 온 섬 가운데로 지나갈 때, 그들은 서기오 바울(Sergius Paulus)이라 불리는 그 지방을 관리하는 사람에게 갔습니다. 그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에 관심이 있었지만 박수 엘루마가 진리를 듣지 못하도록 방해했습니다. 결국 바울이(Paul : 이때부터 계속 이 이름으로 불리워짐) 엘루마를 얼마동안 소경이 되도록 벌함으로 복음의 빛을 방해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서기오 바울이 주님을 믿었습니다... 진리의 빛을 방해하는 것은 무서운 일입니다.

얼마 후에는, 사람이 진리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하게 되어 마치 소경과 같이 되므로 더 쉽게 사단의 거짓말을 믿게 될 것입니다.


2.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바울의 증거- 그리스도의 죽으심(13:13-29)


그들은 구브로에서 더 위험한 지역인 대륙으로 돌아왔으며 이곳에서 마가 요한은 예루살렘으로 되돌아 갔습니다. 우리는 마가가 왜 돌아갔는지 알 수 없지만, 많은 젊은 사람들이 주님의 사역을 아주 용감히 시작하지만, 곧 떠나게 되는 것이 현실입니다. 주님께서 신실한 일꾼을 사랑하시는 것에 비하면 이일은 매우 슬픈 일입니다.

   곧 두 사람은 비시디아 땅에 있는 안디옥이라 불리는 다른 도시에 도착했습니다. 바울은 언제나 회당으로 먼저가서 유대인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할 기회를 가졌습니다. 우리는 이곳에서 바울이 전한 말씀에 대한 기록을 가지고 있고, 다른 장소에서도 자주 그와 같은 방식으로 전했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먼저 스데반이 했던 것처럼 그들에게 구약 내용을 제시하고는 가능한 빨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서 말하기를 시작했습니다(23절). 바울은 주님께서 다윗 왕의 직계였다는 것과 주님의 선구자인 세례요한, 유대인들이 주님을 배척한 것, 그분이 바로 보내심을 받은 분이라는 것, 그리고 그분의 죽으심 자체가 구약성경의 예언의 성취임을 말했습니다. 그리스도에 대해 잘 말하려면 구약성경과 신약성경 모두를 잘 알아야 합니다. 그 두가지는 우리의 구원자에 대한 놀라운 사실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3. 바울이 전한 말씀 :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심(13:30-41)


물론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신 것을 듣는 것만으로 사람이 행복하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바울은 즉시 주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영광스런 부활하심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사실에 대해서는 많은 증인들이 있었으며 바울은 그 사실이 분명함을 입증하기 위하여 구약성경의 시편을 인용했습니다. 그후에 바울은 그분을 통해서 그들의 죄를 용서받을 수 있으며 만일 이러한 하나님의 제안을  거절할 경우에 대한 경고를 하였습니다. 실제로 구원에 대해 주님을 믿지 않고도 그리스도께서 놀라운 분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믿지 않는 자들은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4. 안디옥에서 바울이 전한 말씀에 대한 결과(13:42-52)


그 다음 안식일에 유대인과 하나님을 믿는 이방인들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바울의 설교를 다시 듣기 원했기 때문에 거의 온 성이 그에게 들으려고 나왔습니다. 이것은 믿지 않는 유대인들에게 들으려고 그런 큰 무리가 모인 적이 없었기 깨문에 그들에게는 너무도 대단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바울과 논쟁을 시작했고 변박하고 비방했습니다. 그래서 바울과 바나바는 주님께서 그들에게 명령하셨기 때문에 이방인들에게로 향하겠다고 말했습니다. 물론 이것은 이방인들을 기쁘게 했지만 유대인들을 더욱더 분노하게 했고 결국 매우 큰 소란이 일어나 사도들은 그 성을 떠나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구원받은 것을 기뻐하는 한 무리의 행복한 제자들을 뒤에 남겨두었습니다.

   은혜의 때가 주어질 때마다 사단이 소동을 일으키고 할 수 있다면 주님의 사역을 방해하려 한다는 것을 학신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들은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받는 것을 기뻐하였으며 그 후로 특히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오직 우리의 증거를 통해서만 주님을 알게 된다면 믿지 않는 몇몇 사람들로부터 받을 약간의 모욕을 염려하시겠습니까?


5. 이고니온과 루스드라에서 바울이 처음에는 경배를 받았지만 후에는 돌에 맞음(14:1-18)


사도들은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이고니온으로 가서 복음을 전파하고 병자를 치유하면서 아주 오랜 기간동안 머물렀으며 그 결과는 매우 비슷했습니다. 즉 많은 사람들이 믿었지만 유대인들은 대적했고 사람들에게 바울과 바나바를 죽이게 돌을 던지라고 선동했습니다. 그러나 그때 그것을 알고 피신하여 이웃한 큰 성 루스드라로 도망했습니다.


   루스드라에서 바울은 나면서 앉은뱅이된 자를 치유했는데 이것이 사람들에게 바울과 바나바가 사람의 형상으로 내려온 두 이방신임에 틀림없다는 인상을 주었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믿음으로 바울과 바나바에게 짐승을 희생제물로 드리려고 했습니다. 물론 고넬료가 베드로 앞에서 절하려고 했을 때 그에게 일어서라고 말한 것과 같은 이유로 바울과 바나바는 받지 않았습니다. 어떤 사람이든지 신적인 경배를 받는 것은 매우 죄악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해 그렇게 선하신데도 왜 사람들은 하나님이 아닌 어떤 피조물을 그렇게 자주 기꺼이 경배하려 하는 것일까요?


6. 루스드라를 떠나 안디옥으로 돌아옴(14:19-28)


그러나 루스드라의 군중들은 주위에 의해 곧 변화되어 유대인들이 바울에 반대하도록 선동시켰을 때, 분노하여 바울을 돌로 쳐 죽이려고 했습니다. 바울이 죽었다고 생각되자 버려두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를 다시 일으켜 세우셨습니다. 그에게는 아직 주님을 위해  해야할 큰 사역이 남아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무서운 경험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주님만을 섬겨 나가기 원했습니다. 그들은 더베로 갔었지만 그곳에서 다시 안디옥 교회로 돌아가는 여행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를 가혹하게 취급했던 이 성들을 결코 피하지 않고 그들이 그곳에 있을 때 구원받았던 몇 사람들을 굳게 하면서 바울은 그 모든 성들을 다시 지나서 곧장 나아갔습니다. 그는 또한 각처에 세워진 작은 교회들을 보기 원했기 때문에 그곳의 그리스도인들을 만났고 서로를 도울 수 있었습니다. 마침내 그들은 본 교회로 돌아와 하나님께서 많은 영혼들을 구원하신 놀라운 일에 관하여 말하게 되었습니다.



예루살렘의 공회의


1. 유대 그리스도인들과 논쟁(15:1-5)


우리는 11장에서 믿은(적어도 믿었다고 말하는) 유대인 지도자들 중의 일부는 베드로가 이방인들과 교제했다는 것 때문에 그와 논쟁했다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베드로가 주님께서  자기를 어떻게 인도 하셨는지 설명하자 그들은 더이상 할말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그들이 다시 문제를 일으키고 있으며 안디옥까지 가서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 할례는 어떤 사람이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복을 구한다는 구약 시대의 표시였습니다. 이 일은 그 당시에는 선한 일이었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다른 사람들에게 그렇게 하도록 명령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구약의 모든 의식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어졌고 폐해졌습니다. 더욱이 구원의 필수적인 요소로서 그리스도의 사역에 어떤 것을 더하려는 것은 전적으로 잘못된 것입니다. 구원받기 위한 유일한 필요사항은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주님께서 이루신 사역뿐입니다. 자신의 죄를 깨달은 비참한 죄인은 하나님의 사랑외에는 하나님께 아무것도 바랄 수 없지만 할례. 세례, 또는 교회 출석과 같은 자신의 어떠한 선한 행위도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에게 필요한 모든 것은 그리스도이며, 믿음에 의해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삼을 수 있습니다. 당신은 그리스도의 보혈을 신뢰하십니까? 아니면 이것에 당신의 공로를 덧붙이겠습니까?

   안디옥에 있는 성도들은 이 잘못된 가르침에 혼동되었고 바울과 바나바는 그것이 참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확신시켰지만 그래도 그들은 예루살렘에 가서 교회 지도자들과 상의해야 한다고 결정했습니다. 사도들은 바울과 바나바를 매우 반갑게 영접했지만, 믿는 바리새인 중 일부는 모든 사람이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2. 베드로가 어떻게 성령님이 이방인 신자들에게 주어졌는지를 말함(15:6-11)


그래서 그들은 함께 모이기로 결정하여 철저하게 그 문제에 대해 토론했습니다. 대부분의 문제와 논쟁들은 함께 모여 끝까지 대화한다면 해결될 수 있습니다.

   처음에 많은 논쟁이 있었지만 베드로는 어떻게 하나님께서 그들의 믿음에 근거해서 사실상 이방인들을 받으셨는 가를 단순하게 상기시켰습니다. 이것은 고넬료와 다른 여러 사람들에게 성령님이 주어졌기 때문에 증명된 것입니다. 그런데 왜 바리새인들이었던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아무런 조건없이 받으신 사람들에게 율법 준수라는 짐을 지우려고 애쓰는 것입니까? 유대인 자신들도 율법을 준수함으로써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된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유대인들도 지키지 못한 것을 이방인들에게 행하도록 강요하는 것입니까?


3. 바울, 바나바 그리고 야고보가 말함(15:12-21)


그후에 바울과 바나바는 루스드라에서 앉은뱅이가 나음을 받은 것과 같은 예를들면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방인들 사이에서 놀라운 표적을 행하셨는지 말했습니다. 더욱 더 놀라운 것은 수백명의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구원받았다는 것입니다.

   마침내 야고보는 하나님께서 주의 이름을 부르는 이방인들을 받으셨다는 베드로의 진술을 지지하기 위해서 아모스의 예언을 인용했습니다. 이것으로 논쟁이 해결되었고 우리에게 구약성경과 신약성경 모두가 하나님의 말씀임을 아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다시금 보여주었습니다.

야고보의 결론은 이방인들에게 할례와 모세의 법을 지키도록 요구해서는 안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사도들은 이방인들에게 편지를 써서 음행과 우상과 어떤 음식들로 인한 죄를 피하도록 했습니다.

   이것은 모든 이방인들에게 온 율법을 지키는 것은 짐이 되기 때문에 매우 좋은 소식이었습니다. 또한 금지된 네가지 일들 조차도 구원의 방법이라고 언급되지 않았습니다. 대신에 그것은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자녀이며, 그런 행위가 그를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어 주지 않기 때문에 피해야 할 것들이라는 것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잘 이해하지 못하는 매우 중요한 구분이 있습니다. 선행은 구원의 열매이지 구원의 도구가 아닙니다.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았고 이제 내가 구원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섬기기 원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내 자신의 구원을 지켜주는 것도 아니고 단지 나를 먼저 사랑하신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것입니다.


4. 이방인 신자들에게 쓴 서신(15:22-29)


야고보의 제안은 모든 교회에 잘 받아들여졌으며 그들은 그 서신을 가지고 안디옥으로 돌아갈 유다와 실라 두 사람을 택했습니다. 이 두 사람은 "형제 중에 인도자"(22절)로 표현되었습니다. 틀림없이 그들은 이 영광스러운 칭호를 받을 가치가 있었지만, 그보다 더 나은 표현을 25절에서 보게됩니다.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유명해지려고 애쓰는 것보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데 자신의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는 것이 더 나은 것입니다. 그러나 몇몇 그리스도인들은 명성을 얻기 위해 그들의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 서신에서 사도들은 무엇보다도 먼저 사람들에게 할례를 받아야 될 것을 전하라고 그 사람들을 보낸 것이 아님을 나타냈습니다. 그들은 네가지 필수적인 일들 이외에는 그들에게 어떠한 짐도 지우지 않았습니다.


5. 이방인들이 기쁨으로 그 서신을 받음(15:30-35)


그들이 안디옥에 도착하자 온 교회를 모아 서신을 읽어 주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잘못된 가르침에 의해 실제로 괴롭힘을 당했습니다. 이제 그들은 바울의 가르침이 결국 옳았으며 누구든지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아야 한다는 것을 듣고 크게 안심했습니다. 더우기 유다와 실라도 그 사람들을 가르치며 그들의 믿음을 굳게했습니다. 얼마 후에 형제들이 그들을 예루살렘에 돌려 보냈지만, 실라는 계속 머물며 주님의 사역을 돕고자 했습니다.

   당신은 구원을 받기 위해 율법을 지키는 문제가 이제 완전히 해결되어졌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바울 서신에서 보면 유대인들이 매우 적극적으로 이 사람들에게 그 가르침을 더하려고  매우 먼곳까지도 간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바울이 직면한 이러한 잘못된 가르침은 갈라디아서, 고린도전서, 빌립보서, 골로새서에 있습니다.


6. 바울과 실라가 제2차 전도여행을 시작함(15:36-41)


얼마 후에 바울이 바나바에게 전에 구원받은 사람들이 있는 성들을 다시 방문하러 가자고 제안했습니다. 바나바는 기꺼이 원했지만, 그 첫번째 전도여행에서 낙오한 조카 마가를 데리고 가자고 했습니다. 바울은 그렇게 하기를 거절하므로 결국 그들은 서로 다른 길로 가야만 했습니다. 이제 사도행전에서 바나바나 마가를 볼 수 없지만 바울은 그들 모두를 친구로 여겼습니다(고전 9 :6, 딤후 4:11).

   바울은 실라가 복음을 전하기 위해 그와 함께 가기를 기뻐하는 것을 알았습니다. 형제들은 그들을 하나님의 은혜에 부탁하며 전송했습니다. 언제나 하나님의 뜻 안에 있는 것은 선한 일입니다.

Posted by 행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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