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와 종교로부터의 자유


                    다른 복음으로 고통받는 기독교인들이여!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 좇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갈라디아서 1:6).


   바울은 갈라디아의 여러 교회들이 진리에서 떠나 급속히 변질되어 가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슬프고 탄식하는 마음으로 이 글을 쓰고 있음이 분명하다. 앞에서 필자는 사람을 따라 다니는 불쌍한 갈라디아인들을 생각하며 오늘날 우리의 신앙 상태를 점검하여 본 바 있다.

   여기서는 다른 복음에 병들어 있는 갈라디아인들을 생각하면서 우리의 신앙을 진단하여 보고자 한다.

   다른 복음! 이것은 분명 복음은 복음인 것 같은데 다른 복음이다. 쉽게 생각할 때 복음과 비슷한 가르침이지만 실상은 그 질과 내용에 있어서 가짜 복음인 것이다.

   그렇다면 다른 복음이 무엇인가를 알기 위하여 다른 복음에 병들어 있는 사람들의 증상을 살펴봄으로 우리의 신앙을 진단하여 확실한 깨달음이 있기를 원한다.

   참 복음을 듣지 못하고 다른 복음에 붙잡혀 있는 사람들의 첫 번째 증상은 교회에 다니나 기쁨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기독교가 다른 종교보다 뛰어난 것이 많은데 그 중에 폭포수같이 쏟아져 내리는 큰 기쁨이 신자들 중심에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도 요한복음 14장 27절에 약속하시기를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하셨다.

   이 약속은 신실하여 오늘날 예수님을 통하여 진실로 거듭난 성도들에게는 실제로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세상 종교들의 특성은 인생의 모든 고뇌와 죄악과 고통을 극복하기 위해 자신의 육체를 학대하거나 심신을 단련하는 등, 스스로의 부단한 노력을 권장하고 있다. 자신의 인격과 능력을 의지한 자기 노력으로 평안을 이루려고 고생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구원을 이루기 위해 자신을 수양하는 과정에 있는 종교인들에게 무슨 평강과 기쁨이 있겠는가? 종교인의 얼굴은 세월이 갈수록 심각하여지고, 거듭남으로 그리스도인답게 사는 사람의 얼굴은 날이 갈수록 기쁨으로 가득 찬 밝은 모습이다. 우리 자신의 인격이나 성격, 그리고 육신을 들여다 볼 때 기쁨과 소망이 있을 수 있을까? 아니다! 오히려 근심과 절망이 있을 뿐이다.

   어떤 종교는 참 도를 찾아서 방황하다가 죽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여 심지어는 순교자의 반열에 서는 것을 보게 된다. 생각하여 보라! 아무리 종교적 업적을 훌륭히 쌓고 종교적으로 높은 수준에 이르렀다 하여도 그의 중심에 참 평안이 없다면 무슨 가치가 있겠는가? 또는 세상 종교는 그렇다하여도 주님을 믿는다는 기독교인이 참 평강을 가지지 못하였다면 이것은 껍질만 있는 쭉정이에 불과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렇다! 다른 복음에 잡혀있는 종교인의 모습은 쭉정이 그 자체다. 쭉정이의 특징은 겉으로는 알곡처럼 보이는데 속은 텅 비어있는 가짜다. 겉으로는 주님의 제자인 듯하나 속에는 내적인 변화가 없이 스스로 자신을 속이고, 하나님을 속이고, 세상을 속이는, 변화된 기쁨이 없는 쭉정이 기독교 교인은 물론이요 지도자들도 포함되고 있다고 성경은 증언하고 있음을 주목하기 바란다(마태복음 7:21~23).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마태복음 3:12).

   최근에 그리스도 안에 들어온 어떤 성도는 죽기 위하여 자살 장소로 가다가 친구 집에 잠시 들러 구원받고 주님을 만난 후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변화되어 큰 기쁨 중에 주님을 섬기고 있다.


   다른 복음에 붙잡힌 자의 두 번째 증상은, 기쁨이 없을뿐만 아니라 거듭난 확신이 없다는 것이다. 그들은 입술로는 천국에 갈 수 있다고 하지만 그들의 생활에서는 천국의 소망에 붙잡혀 사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은 찾아 볼 수 없다. 입으로만 그리스도인이지 실제로는 세상 일에 빠져서 천국에 대한 확신과 소망 가운데 사는 모습이 전혀 없는 것이다. 죄 용서받는 십자가의 진리를 기독교 교리 중 하나로 이해하고 있을 뿐 구원의 근원, 즉 생명의 근원이 되는 천국의 열쇠로 깨닫지 못하고 있다. 예수님의 피로 속죄 받고 천국에 가는 진리는 성경의 주제이며 모든 믿는 자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고 깨달아야 하며 늘 감사해야 할 놀라운 말씀이다.

   이와 같이 확실한 구속의 진리를 믿음으로 거듭난 성도는 거듭남의 기쁨을 바탕으로 하여 하나님과의 사귐 속에서 확신 중에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면서 천성을 향하여 살아간다. 이것을 정상적인 신앙생활이라 한다. 이말은 가정이나 직장이나 사회생활에 무책임하거나 무관심해도 된다는 뜻이 아니니 오해 없기 바란다.


   다른 복음에 붙잡혀 지옥에 가는 자들의 세 번째 증상은, 성경과 전혀 관계없는 생활을 할뿐만 아니라 성경에 대한 깨달음이 없다는 것이다.

필자는 최근 상담 중 18년 동안 교회에 다녔다는 한 종교인을 만나 성경의 주제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고 물으니 "말씀이지요" 하고 대답했다. 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대답인가!

   12년 동안 교회에 다닌 어떤 사람에게 구약은 "옛날에 주신 약속", 신약은 "새로 주신 약속" 이라고 말하니 " 그 말이 그 뜻입니까?" 하고 눈이 휘둥그레지는 것이다. 기가 막힐 일이다. 거듭나지 못하였으니 성령이 그 속에 없는 것이요, 그 속에 성령이 없으니 성경이 깨달아지지 않는 것이 당연하다.

   그들은 성경을 도대체 읽지 않는다. 성경은 예배당에서 설교 때 한두 번 찾아보기 위하여 소지하고 있을 뿐 도대체 읽지 않는다. 바빠서도 그렇지만 그들의 중심에 주님의 영이 없으니 성경을 읽을 의욕이 없는 것이다.

   불쌍하고 불쌍하다. 안타깝고 불쌍하다. 그들은 생각하기를 성경은 교회 지도자나 기타 특정 자격이 있는 사람만 깨달아지는 책으로 치부하고 있으며. 그들의 지도자 또한 그렇게 가르치는 경우가 허다하다.

   또한 그들은 성경을 읽어도 깨달음이 전혀 없다. 사실 그들이 소경이기 때문에 깨달음이 없는 것이 당연하다. 정상적인 성도라면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과 교제하고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문제나 잘못을 깨닫고 바른 생활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성경은 신자들을 바른 길로 깨우치고 인도하는 지침서이다. 모름지기 거듭난 신자라면 부지런히 성경을 읽고 깨닫고 실천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디모데후서 3:16).

   성경에 대한 정상적인 깨달음이 없으니 내적인 기쁨과 평강이 없을 뿐 아니라 외적인 변화도 없는 것이다.


   다른 복음에 붙잡혀 있는 종교인들의 네 번째 증상은, 기도응답을 몇 번 경험한 것으로, 혹은 광신적인 체험을 경험한 것으로 구원 얻었다고 착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 그들 중에는 양보할 수 없는 구원의 확신이 있으나 자세히 분석하여 보면 어려운 상황에서 기도할 때 주님의 도우심을 몇 번 경험한 것으로 구원받았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알 것은 구원받지 아니한 이방인도 하나님이 돌보신다는 사실이다. 그러한 기도응답이 구원의 궁극적인 증표가 될 수 없다.

   또 어떤 사람들은 방언이나 기타 신비한 체험을 가지고 구원으로 주장하고 있는바 이것은 다 위험한 신앙관임을 알아야 한다. 초대교회에 특수한 목적으로 주어진 방언이 오늘날 그러한 목적성이 사라진 때에도 존재한다고 보기 힘들다. 방언을 통해서 초대교회 성도들이 계시 받고 하나님을 섬겼고 그러한 섬김의 모습 속에서 서신서들이 기록되었다. 오늘날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다고 증거할만한 분명한 근거도 없거니와 그것이 구원의 증거는 더더욱 될 수 없다.

   신비한 체험들이 구원의 증거가 될 수 없으니 이러한 것들 또한 다른 복음에 잡혀 있는 불행한 현상이다.


   다른 복음에 붙잡혀 지옥으로 가고 있는 종교인들의 다섯 번째 증상은 그들 마음에 있는 무거운 짐을 풀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어떤 집사님과 대화한 내용을 소개해 보겠다. 그 집사님은 자신의 신앙을 나에게 관철시키려고 변론하는 가운데 있었다. 그는 필자에게 "우리가 구원에 이르는 길은 얼마나 험난하고 힘든 길이며, 고난의 길이며, 어려운 길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하고 말하는 것이었다. 필자는 그에게 마태복음 11장 28절을 펴서 보여 주면서 "내가 믿는 예수님은 이렇게 모든 짐과 인생의 짐을 다 풀어 주셔서, 나는 기쁘고 평안하게 주님을 섬기고 있는데 당신이 믿는 예수님은 무슨 짐을 오히려 지워줍니까? 그 예수님은 나의 예수님과 다른 이상한 예수님이네요?" 하고 말하니 그 후에는 대답을 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렇다. 예수님은 인생의 모든 고뇌를, 모든 죄를 다 담당하셨다. 주님은 거짓말하실 리가 없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태복음 11:28).

   이 얼마나 놀라운 말씀인가! 이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의 자비인가! 죄의 짐에 눌려 웃을 날이 없고, 평강이 없으며, 고통 가운데 살던 자에게 주신 기쁜 소식이 아닌가!

   예수님이 그대의 죄를 짊어지고 죽으셨다는 것을 지식적으로나 교리적으로는 알지만 그 말씀이 그대의 생활을 변화시키지 못하였다면 그대는 구원받은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그대의 모든 죄를 친히 담당하심으로 그대를 죄와 죄의 고통에서 실제로 해방시켜주셨다. 이제 죄의 굴레가 결단코 그대를 고통스럽게 하지 못한다.

   우리는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분명히 설정하여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궁극적 신앙의 대상이다. 그분에게 우리는 기도하는 것이며 예배하는 것이며 그분의 뜻 안에서 살아야 한다. 우리는 궁극적으로 그분 뵈올 날을 기다리는 것이다. 천국에서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거하게 될 것이다.

   "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요한계시록 21:3).

   우리는 잠시 후에 하나님의 영광의 자리에 함께 동참하게 될 소망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예수님은 무슨 역할을 하고 계시는가? 하나님이 궁극적 신앙의 대상이라면 예수님은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시는 구원자요, 인도자이신 것이다.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께 예배하며, 기도하며,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들림 받을 때에도 예수님께서 친히 공중까지 마중 나오셔서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실 것이다(데살로니가전서 4:16 ; 요한복음 14: 2,3 참조).

   그런 관점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왜 십자가에서 보혈을 흘리셔서 인간의 죄악을 담당하셔야만 하였던가 하는 사실을 이해하게 된다. 인간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데 있어서 최대의 걸림돌이며, 유일한 걸림돌이 되는 것은 죄악이다.

   "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이사야 59:2).

   이 말씀과 같이 인간의 죄악이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교제를 끊는 걸림돌이 되었으니 주님의 십자가의 속죄는 인간에게 최고의 복음(기쁜 소식)이 아니겠는가!

   이 단번에 이루신 십자가 사역으로 인간의 모든 죄가 완전하게 청산되었고 그러므로 죄인이 하나님 앞에서 떳떳이 고개를 들 수 있게 되었다. 또는 아주 악질적인 죄인도 천국의 소망을 가질 수 있는 길이 활짝 열리게 되었다. 인류 역사 6,000년에 최고의 경사가 있다면 주님의 십자가 사역이다. 이일로 말미암아 죄인이 그의 죄로 인하여 지옥에 갈 그 어떠한 이유도 사라졌다. 다만 완전한 속죄와 영원한 속죄(히브리서 10:17~18, 9:12)를 믿지 아니함으로만 지옥에 가는 것이다.

   그대가 만약 영원한 속죄로 말미암아 죄인의 굴레를 벗어버린 사실을 심령으로 깨닫고 믿었다면, 분명히 하나님의 말씀을 힘입어 말씀드리건대 그대는 의인이 되었으며 구원을 받은 것이다(히브리서 10:10~18 ; 요한복음 5:24 참조). 그러므로 지옥과 인연이 끊어졌고 죄악과도 인연이 끊어졌다. 하나님은 그대의 영원한 아버지와 보호자가 되신 것이요 예수 그리스도는 그대의 영원한 구원자가 되신 것이다.

   그분은 세상에 계실 때에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한복음 14:6)고 하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참 복음의 실체다. 당신에게 참된 기쁨을 주실 수 있는 구세주시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을 그대도 받아들이고 주님의 참 제자가 되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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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속아사는 인생들이여!


                       구원은 완전한 속죄다


" 나아만이 이에 내려가서 하나님의 사람의 말씀대로 요단강에 일곱번 몸을 잠그니 그 살이 여전하여 어린 아이의 살 같아서 깨끗하게 되었더라' (열왕기하 5:14).


   어떤 전도자가 장로님에게 묻기를 "장로님, 영원한 속죄를 아십니까? " 하니 장로님 대답이 "처음 듣습니다. 어디에 그런 말이 있습니까?" 하였다. " 예, 히브리서 9장 12절입니다." 하고 보여주니 한참 들여다보던 장로님은 " 나는 42년간 헛 믿은 것 같다. 속았다" 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구원받았다.


   여기서는 나아만이 고침받은 문둥병에 관하여 생각해 보자.

   이 문둥병은 히브리 말로 "차라" 즉 " 몹시 괴롭다" 라는 말에서 유래되었는데, 인간을 오래 괴롭게 하다가 결국 죽게하는 병이다. 이 문둥병은 죄가 인간을 괴롭히다가 지옥에 끌고감을 생각나게 한다. 예수님 당시에도 많은 문둥병 환자들이 일반인들과 격리되어 있었던 것을 보게 된다.

   이 문둥병의 특성은 감각이 없어져서 살이 점점 썩어가는 것이다. 이것은 죄를 지으면서도 감각없이 살아가는 수많은 죄인들을 잘 나타내주고 있다.

   금일에 수많은 사람들은 죄를 짓고도 전혀 양심의 가책없이 당당하게 살아가며 심지어는 죄를 짓고도 이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필자는 감각이 없어지는 특성을 가진 이 문둥병을 통한 교훈을 생각하며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모습을 발견하고자 한다.


   죄인은 첫째로 하나님께 대해서 감각이 없다.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시편 14:1).

   말씀에서 보는 바와 같이 "하나님이 없다" 고 하는 자는 어리석은, 즉 바보같은 자라고 경고하고 있다. 경험하지도 못하면서 하나님이 없다고 섣불리 단정하는 자이다.

   그들의 행위가 시편 14편 4절에 있는바 "저희가 떡먹듯이 내 백성을 먹으면서 여호와를 부르지 아니한다." 즉 그들의 잇사이에 씹힌 그리스도인들이 한둘이 아닌 것이다. 자신들이 무지무각하여 하나님을 배반하였거늘 선한 양심을 좇아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나님을 따르는 성도들을 늘 괴롭히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너희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라고 질문하며 성도들을 괴롭히고 울게 하는 어리석은 핍박자들이다.

   " 사람들이 종일 나더러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니 내 눈물이 주야에 내 음식이 되었도다" (시편 42:3).

   그들은 터무니없는 이론으로 하나님을 반박하나 이미 그들은 하나님을 멀리떠나 있으며 지옥을 향하여 힘차게 나아가고 있음을 그 자신은 전혀 깨닫지 못하는 꿈꾸는 자들이다. 이것은 마치 나이아가라 폭포에서 뱃놀이 하는 사람들 중에 폭포의 낭떠러지를 모르고 힘차게 나아가다가 떨어져 죽는 자들의 모습과 같다. 얼마나 불쌍한 모습인가? 독자중 이런 분들이 있거든 속히 회개하고 돌아오기 바란다.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당신을 기다리신다.


   둘째로 죄인은 자신의 양심에 감각이 없다.


   양심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고귀한 선물이다. 이 양심은 인간이 인간답게 살기 위하여, 행복하기 위하여 필요한 것이다. 수많은 계몽가들이, 운동가들이, 교육가들이 그들의 요구사항을 양심에 호소하고 있지 아니한가? 인간이 인간답기 위해서는 양심을 회복해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어떠한가? 시들어버린 목련꽃처럼 인간들의 양심이 더럽혀져 있지 아니한가? 양심대로 사는, 살려는 사람들이 바보 취급받는 현실이 아닌가? 학교에서는 정직할 것을 가르치지만, 정직하게 살아보라. 세상에서 어디 사업이 되는가? 출세가 되는가?

   한번 더렵혀진 양심은 인간 세계의 그 무엇으로도 고칠 수가 없다. 주님을 믿겠노라고 수십 번 약속하고도 믿지 아니하는 거짓말장이들이 우리 가족 중에 얼마나 많은가? 사람을 속임이 아니요, 자신의 양심을 속임이요 하나님을 속임이니 당신의 양심은 어떠한가?

   하나님 앞에 돌아오는 것을 성경은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 (히브리서 10:22), "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 (히브리서 9:14)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독자여, 당신의 양심의 악을 깨닫고 주께 나아와 씻어 새 사람이 되라. 하나님의 신령한 축복이 당신에게 있을 것이다.


   세번째로 죄인은 죄에 대하여 감각이 없다.


   이 시대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않는 시대이다. 사람이 사람을 죽이고도 별로 가책을 느끼지 않는다. 어떤 형무소에서 나온 사람에게 들으니 그 안에 있는 죄수의 대부분이 자신은 억울하게, 또는 운이 없어서 이곳에 왔다고 생각하더라는 것이다. 다 죄를 짓는데 왜 하필이면 나만 이곳에 오느냐고 원망하는 자들이 대부분이었다는 것이다. 에베소서 4장 17절에 보면 "...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있도다...저희가 감각없는 자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라고 서술하고 있다. 사람들은 죄에 대하여 감각없는 자 되어 자신은 항상 옳고 정직하여 깨끗한 것처럼 착각에 빠져 교만한 마음으로 지옥을 향하여 가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거니와 당신이 죄를 깨닫지 못하는 것은 죄가 없어서가 아니라 감각이 없어서이다. 하나님 앞에서 가장 악한 죄인의 모습 중 하나는 이것인데 곧 " 나는 양심적으로 살았다. 다른 사람은 속이지 않고 정직하게 살아왔다. 나는 법없어도 살 사람이다" 라고 말하는 교만한 자들이다.


   이제 나아만의 문둥병이 어떻게 나았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 나아만이 이에 내려가서 하나님의 사람의 말씀대로 요단강에 일곱번 몸을 잠그니 그 살이 여전하여 어린 아이의 살 같아서 깨끗하게 되었더라" (열왕기하 5:14).


   나아만의 병이 절반만 고쳐졌다면 문둥병자가 아닌가? 삼분의 이만 고쳐졌다면 문둥병을 다 고쳤다고 말할 수 있는가? 문둥병은 어느 한 부분에만 있어도 곧 퍼진다. 왜냐하면 피로서 퍼지는 병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나아만의 문둥병을 온전히 고치셨다. 오늘날도 죄인이 온전히 죄용서함 받지 못하면 구원받은 것이 아니다. 필자가 슬프게 생각하는 것은 수많은 사람들을 상담해 보면, 죄 문제를 분명히 해결하지 못하고 있으면서도 구원받았고 천국에 갈 것이라고 여기는 불쌍한 기독인들이 많다는 것이다.

   구원은 "완전한 속죄" 에 있다. 서두에서 말한 장로님처럼 속지 마시기 바란다, 십자가에서 당신의 죄는 완전히 해결되었다. 당신이 기도할 때마다 " 죄인, 죄인" 하고 죄용서함을 믿지 못한다면 당신은 확실히 구원받지 못한 자이다.

   다음 말씀을 천천히 깊이 생각하며 읽으시고 구원을 받기 바란다.

   " 저가 한 제물(예수님)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 (히브리서 10:14).

   나아만이 온전히 깨끗해진 것처럼 당신이 온전히 깨끗한 의인의 신분으로 변화된 것을 경험하기 바란다.

   " 이것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드릴 것이 없느니라" (히브리서 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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