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7과 하나님의 법과 죄의 법

                                                            (7장 1절~25절)


   복음은 그리스도인들이 거룩한 생활을 하기 위하여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는가?


   사도 바울은 이미 사람이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는 결코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아주 명백하게 증명하였습니다. 우리에게 또 하나의 의문이 제기될 수 있는 것은, 사람이 구원을 받은 후에 생활의 규범이라 할 수 있는 율법을 꼭 지켜야만 하는가 하는 점이다. 우리는 6장에서, 그리스도인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을 알았습니다. 이에대한 이유는 이제 분명해질 것입니다. 덧 붙여서 사도 바울은, 사람의 노력으로는 도저히 거룩해질 수 없음을 증명하였는데, 이것은 그의 경험으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1. 율법은 죽은 사람에 대해서 재판할 권리가 없습니다. 이것은 혼인법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즉 혼인법은 부부가 함께 살 동안만 유효합니다. 그러나 부부 중 한사람이 죽으면 그 법은 무효가 되고, 살아있는 사람은 다시 결혼할 수 있습니다(1~3절).


   2. 하나님의 자녀는 그리스도의 몸을 통하여 율법에 대해 죽었습니다(4절). 주 예수님이 우리의 형벌을 대신 담당하셨다는 점에서, 그리스도인은 율법에 대해 죽은 것입니다. 이제 성도는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 지낸 바 되었으므로 그 역시 율법에 대해 죽은 것입니다. 율법의 모든 요구가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다 이루어졌기 때문에, 율법은 더 이상 그리스도인에 대해 관계할 수 없습니다.

  

   3. 율법으로부터 해방된 신자는, 죽음으로부터 부활한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게 됩니다(4절). 이제는 율법이 아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신자의 생활 규범이 됩니다. 혼인은 연합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그리스도의 생명을 나누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보잘 것 없는 노력으로 거룩해지려고 하는 것보다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구원하신 그리스도의 생명의 옷을 입어야 합니다.


   4. 율법으로부터의 해방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서 열매를 맺게 합니다(4절).

   1)율법이 어떤 것을 금할 때, 사람의 마음은 그일을 더 하고 싶어합니다. 율법은 어긴데 대한 형벌은 죽음이고, 또 우리는 율법을 지킬 만한 힘이 없기 때문에 율법 아래서 맺은 열매는 죽음뿐입니다(5절).

   2) 이제 우리가 율법으로부터 해방되었기 때문에 주님을 두려움이나 의무로써가 아니라, 자진해서 즐거운 마음으로 섬기는 것입니다(6절).


   5. 이 말이 율법자체가 죄악이라는 뜻이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그렇지 않다고 힘주어 말합니다. 율법의 거룩함 바로 그것이 사람의 죄악의 큼을 나타냅니다. 예를 들면, 사도 바울은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다면 악한 행동은 물론, 악한 생각이 죄라는 것을 알지 못했을 것이라고 지적합니다(7절). 그러나 우리의 악하고 부패된 성품을 이용하여 마음속에 각양 악한 생각을 일으켜서 우리로 금지된 행동을 하고 싶어 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율법이 없으면, 죄를 죄로 여길 수 없습니다. 그러나 율법이 나타날 때, 죄를 죄로 여기며, 죄가 기회를 타서 활동할 것입니다(8~11절). 그러므로 율법은 거룩하고, 의롭고, 선한 것입니다. 율법은 죄의 본능인 사악함을 그대로 드러냅니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은 부패하여 금지하는 것을 하고 싶어합니다(12~14절).


   6. 자기 자신의 노력으로 거룩한 생활을 이루고자 함은 낙심과 절망을 가져옵니다. 사도바울은 이 점에서 자신의 체험을 예로 들고 있습니다(15~24절).

   1) 그는 마땅히 해야 한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 일을 행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그 자신이 미워하던 일을 행했습니다.

   2) 그는 율법이 선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옛 성품은 그것에 순종하기에는 무력했습니다.

   3) 그가 옳은 일을 행하고자 할수록, 그에 따른 실패는 더욱 컸습니다.

   4) 마침내 그는 손을 들고 이렇게 패배를 자인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24절)


   7. 이 때 비로소 사도 바울은 성결의 비밀이 자기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만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 하리로라." 라고 외치는 것이 그의 승리의 선언이었습니다. 죄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 안에서 역사할 때에만 가능한 것입니다(25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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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마서


                                           6과 하나님의 종

                                                    (6장 1절~23절)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는다는 복음의 가르침은 죄악의 생활을 조장하거나 허용하는가?


   은혜의 복음을 전파할 때 사람들은 한결같이 "구원을 얻기 위하여 할 일의 전부가 그리스도를 믿는 것뿐이라면, 세상에서 나가서 마음대로 생활해도 괜찮지 않습니까?" 라고 묻습니다. 로마서 6장은, 왜 이것이 불가능한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1. 믿는 자들이 제일 먼저 직면하는 크나 큰 사실은 그리스도인들이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것입니다. 이 말의 뜻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단순히 우리의 옛 성품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악하고 부패한 성품을 고치거나 개선시킬 의향을 가지고 계시지는 않으셨습니다. 그 성품에 대한  하나님의 유일하신 해결책은 죽음이었습니다. 그런데 구주께서는 죽으실 때,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예수께서 죽으실 때, 모든 사람이 죄에 대하여 죽은 것입니다. 옛성품에 속한 모든것은 갈보리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께서 장사되셨을 때, 우리도 장사되었습니다. 그것이 죄 지은 피조물로서의 우리를 영원히 하나님의 면전에서 제거해버린 것입니다. 우리의 옛 자아는 그가 갈 곳 즉, 사망으로 추방되었습니다.


   2. 침례가 이 모두를 상징하고 있습니다(3~7). 우리는 물속에 들어갈 때, 우리가 아담의 후손으로서 꼭 죽어 마땅하다는 것을 증거한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옛 자아, 곧 사람이 살 가치가 없다는 것을 하나님 앞에서 인정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 그와 함께 장사되었다는 사실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으로 영원히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하셨으므로, 이제 우리는  죄와 상관할 권리가 없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에 대해서 죽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무죄하다는 뜻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죽은 자와 같이 보시기 때문에, 죄가 우리를 주장할 권리가 없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3.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우리를 다시 산 자로 보고 계시는 것입니다(8,10절). 그러나 우리가 다시 산 것은 우리의 옛 생활을 반복하려 함이 아닙니다. 우리 자신은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우리가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다시 살아난 것은 이제부터는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4. 이것은 다 신성한 사실들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느낌의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가 이것을 사실로 받아들이든 그렇지 않든 간에, 하나님이 의롭다 하신 모든 사람은 죄에 대하여 죽어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었고, 그와 함께 다시 일으키심을 받아 새 생명 곧, 그의 생명을 받은 사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의 우리의 신분인 것을 알고 있기를 원하십니다. 즉 하나님은 우리가 이 사실을 믿음으로 인정하기를 원하십니다.


   5. 다음 관계는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자로 여기는" 것입니다(11,12절). 이것은 당신의 신분상으로 이미 그렇게 된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이 사실이 당신의 실제생활에서 실현되기를 바랍니다. 죄와, 자아와, 세상에 대해서는 죽고, 하나님께 대해서는 산자로 죄가 당신을 다스리지 못하게 행동하십시오. 당신이 죄에 대해서 죽은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6.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 자신을 드려야 마땅합니다(13절). 하나님이 당신을 주관하시도록, 당신 몸의 지체들을 매일, 아니 항상 하나님께 드리십시오. 그 때에 당신은 자기 중심적 생활을 하는 대신에 그리스도께서 당신 안에 거하시는 것을 체험할 것입니다.


   7. 죄가 믿는 자를 주관하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14절). 이것은 우리가 알고 있어야 할 대단히 중대한 사실입니다.


   1) 사람이 율법 아래 있으면, 죄가 그를 주관합니다. 율법은 할 일을 가르쳐 주지만, 그 일을 행할 능력은 주지 못합니다. 뿐만 아니라 죄인에게 어떤 일을 하지 말라고 하면, 그는 곧 그것을 더욱 더 하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2) 그리스도인은 은혜 아래 있습니다. 율법은 우리에게 "거룩하게 살라. 그러면 그리스도인이 될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은혜는 말하기를 "주님의 은혜로 그리스도인이 되었으니 이제부터는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거룩하게 살라"고 합니다. 사람은 의무감이나 형벌이 두려워서는 하지 않을 것이라도 사랑 때문에는 합니다.

   30 그리스도인이 율법 아래 있지 않다는 사실은 그가 죄 가운데 살아도 괜찮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죄를 미워하는 새 성품을 받았습니다. 또한 거룩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힘을 주며, 격려해 주시는 성령님이 그속에 내주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구주께서 자기 죄 때문에 어떠한 희생을 당하셨는가를 잊지 못합니다. 이제 그는 그가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하는 자의 종인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는 과거에는 항상 죄의 노예였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러한 생활을 부끄러워하고 있습니다(16~21절).


   8.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가 크게 사모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생명이 그 속에 나타나게 하기 위하여 자신을 하나님께 종으로 드리는 것입니다(22,23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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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마서

                                                5과  하나님과의 화평

                                                           (5장 1절~21절)


   한 사람의 생애에 베풀어지는 복음의 여러가지 축복들은 무엇인가?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의 교리를 설명한 사도 바울은 이제 신자의 생활 속에 일어난 이 기적의 결과를 말하고자 합니다. 그는 사실상 "정말 그렇게 됩니까?" 라는 실제적인 질문에 대한 답을 주고 있습니다. 5장 말씀의 구절구절이 칭의의 축복이 놀라운 실제적이라는 것을 거듭거듭 증거하고 있습니다. 한 가지 주목할 일은 이 모든 축복이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신자들에게 흘러 들어온다는 사실입니다. 그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이시므로, 하나님의 모든 은사가 그를 통해서 베풀어집니다. 그러면 이제 칭의의 여러 가지 열매들을 열거해 보겠습니다.


   1.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을 이루었습니다(1절). 전에 우리는 하나님과 원수 되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대적하여 싸웠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주관하시는 것을 싫어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 투쟁이 끝났습니다. 우리는 무조건 항복하였습니다. 평안한 마음이 찾아왔습니다.


   2.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현재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옴을 얻었습니다(2절). '우리가 서 있는 이 은혜'는 우리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인도된 놀라운 은총의 영역입니다.


   3.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합니다(2절). 하나님의 영광이 우주에 나타날 그 때를 바라본다는 것은 기쁜 일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다 소망을 즐기고 있습니다.


   4. 우리는 환난 중에도 즐거워합니다(3절). 우리가 구원 얻지 못했을 때에는 시련 속에서 즐거워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것을 통해서만 인내와 연단, 그리고 소망과 같은 미덕들을 우리의 생활 속에 나타내실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습니다.


   5. 우리는 우리의 소망이 결코 좌절로 변하지 않는다고 확고부동한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5절).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무사히 하늘나라에 들어가도록 돌보아 주십니다. 우리가 어떻게 이러한 확신을 가질 수 있습니까? 그 이유는 성령님이 아래와 같은, 우리에게 대한 하나님의 영원하신 사랑의 증거들로 우리의 마음을 채워주시기 때문입니다.


   1) 우리가 연약하고 경건치 않은 때에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이제 그리스도 안에 완전히 거할 수 있겠습니까(6절)

   2)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고결하고 착한 그 때가 아니라, 죄인 되었을 때에 우리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우리가 이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께서 앞으로 임할 심판에서 우리를 구원하시지 않겠습니까(7~8절)

   3) 우리는 원수 되었을 때에 하나님과 화목 되었습니다. 이제는 분명코 우리가 그의 친구가 되었으니, 그는 우리를 보호하십니다(10절).

   4) 우리는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 되었습니다. 죽음은 연약함을 말합니다. 만약에 그의 연약함과 패배가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 시킬 만큼 충분한 힘이 되었다면, 하물며 그의 무궁한 생명의 능력이야말로 우리의 완전하고도 최후의 구원을 보증하는데 어떠하겠습니까(10절)


   6.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기뻐합니다(11절). 이것은 굉장한 변화입니다. 구원 얻기 전에 우리는 하나님을 전혀 찬양하지 않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을 잊을 수 있을때에만 우리는 즐거워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우리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가장 친근하고 존귀한 분으로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사도 바울은 신자들을 위한 구세주의 사역의 결과에 대해 일목요연하게 결론짓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로마서 1장부터 5장 11절까지의 요약 서라고 부르겠습니다.


   로마서 1장~5장 11절의 요약서(롬 5:12~21참조)


   지금까지 우리는 두 개의 중요한 주제, 곧 정죄와 칭의의 문제를 다루었습니다. 아담이 인류에게 정죄를 가져옴에 비해서, 주 예수님은 칭의를 베푸셨습니다. 이제 사도 바울이 이 둘을 비교하여 대조하는 것을 주목하여 보겠습니다.


   1. 죄와 사망이 아담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들어왔습니다(12절). 사실은 아담이 전 인류를 대표하여 행동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한 국가의 정부에서 행하여지고 있는 하나의 비근한 예로 설명될 수 있겠습니다. 한 나라의 통치자가 공문서에 서명할 때, 그는 그 국가의 국민을 대표해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아담이 죄를 범하였을 때, 그 행동의 결과는 전 인류에게 미쳤습니다.

    그가 죄를 범하였을 때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고 따라서 죽음은 모든 사람에게 임하였습니다(12절). 이것이 흥미 있는 방법으로 증명됩니다. 아담으로부터 모세 때까지의 사람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법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계시된 계명을 불순종한 것이란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이 때에도 사람들은 죽었습니다. 이것은 옳고 그름을 분간치 못하는 유아들에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면 그들이 어찌하여 죽었습니까? 그 이유는 그들이 아담 안에서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2. 아담은 그리스도의 예표 곧 상징입니다(14절). 아담이 전 인류를 위한 대표자로 대행했던 것과 같이, 예수님은 새 인류를 대행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러나 다음의 두드러진 대조들을 주목하여 보십시오(15절).

   1) 한 사람의 죄로 인해서 많은 사람이 죽은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가 인간의 죄보다 얼마나 더 큰가를 생각하여 보십시오. 하나님의 은혜 뿐 아니라, 주 예수님을 통하여 많은 사람에게 흘려 나가는 은사를 생각하여 보십시오(15절).

   2) 한 사람의 죄의 결과가 모든 사람이 정죄의 선고를 받은 것이라면, 하물며 하나님의 은사의 결과는 얼마나 더 크겠습니까? 그 은사란, 정죄를 받지 아니하는 것뿐만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의 완전한 신분을 말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단 하나의 죄가 아닌 많은 죄에도 불구하고 그렇습니다(16절).

   3) 한 사람의 죄로 말미암아 죽음이 무자비하게 폭군처럼 왕 노릇 하였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은혜로운 은사로 말미암아 주께서 주시는 생명을 누리며, 왕같이 다스리고 있습니다(17절).

   4) 이와 같이 한 사람의 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를 받은 것처럼, 십자가 위에서의 그리스도의 의로운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들에게 의가 준비되었습니다(18절).

   5) 아담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그리스도의 죽음의 순종으로 그를 믿는 많은 사람들이 의롭다 하심을 얻게 된 것입니다(19절).


   3. 하나님이 율법을 주신 것은 죄가 심히 죄됨을 그대로 드러나게 하기 위해서 였습니다. 그러나 갈보리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는 인간 전체의 죄보다 더 큰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으로 인해서 죄와 죽음의 폭정이 끝났습니다. 그리고 그를 믿는 자들은 아담이 죄를 범하지 않았을 경우보다 더 유복해졌습니다(20,21절). 아담이 무죄의 상태 그대로 있는 한, 그는 지상에서의 장생을 기대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하나님의 자녀나, 하나님의 역사,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가 되는 약속은 없었을 것입니다. 또한 하늘 본향에 대한 약속이나 영원히 그리스도와 함께 거하며, 그의 형상으로 변화함을 받을 것에 대한 약속도 없었을 것입니다.

   신자는 그리스도의 공로로 말미암아 이상의 여러 가지 축복은 물론 그 외의 많은 축복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래와 같이 말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아담의 후손들은

   그들의 조상이 처음 받은 축복보다

   더 많은 축복을 자랑하리라"


   아마 이것이 '왜 하나님은 죄가 세상에 들어오도록 허락하셨는가?' 라는 질문에 대한 부분적인 대답이 될 것입니다.  처치 할 죄가 없었을 경우보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을 통해서 큰 영화를 받으셨고, 사람은 더 많은 축복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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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 경  개 요


                          제12과 밖을 보고, 위를 보라!


                                         히브리서


   히브리서의 저자는 확실치 않으나, 본서를 바울 서신 중 하나일 것으로 추측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바울 서신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으므로 바울 서신에 포함시키지 않고 제 12과에 본서를 배치했습니다. 결국 본서의 저자에 대해서는 확실히 모른다고 말하는 편이 가장 무난할 것입니다.

   히브리서가 기록된 배경은 다음과 같습니다.

   최초로 기독교 신앙에 대하여 많은 의문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은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전파되는 복음을 듣고 이에 대해 상당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리스도를 믿노라고 고백한 사람도 더러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기독교는 지극히 단순하여 유대교의 복잡한 예식과는 지극히 대조를 이루었습니다. 그래서 그들 중 대부분은 볼 수 없는 그리스도의 기독교를 버리고, 성전이라든가 제단이라든가 제사장이라든가 제물 등의 볼 수 있는 유대교로 돌아 가고 싶은 유혹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에 히브리서 저자는 이제껏 세상에 있던 어떤 종교보다도 기독교가 우월하다는 사실을 다음과 같이 이들에게 보여 주려 했던 것입니다.

   1. 사람들은 자신들이 만든 장막에서 예배를 드리지만, 우리 성도들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앞에 믿음으로 나아가 예배를 드립니다.

   2. 사람들은 죄인으로서 언젠가는 죽게 될 사람을 제사장으로 섬기고 있으나, 우리들은 거룩하시고 불의가 없으시며 쇠하지 않고 죽지않는 대제사장을 모시고 있습니다.

   3. 유대교는 눈에 보이는 물질적인 것으로서, 일시적이고 불완전하며,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의 그림자요, 모형이요, 그림에 불과합니다. 반면에 기독교는 눈에 보이는 것은 없을지라도 참되고 영원합니다. 기독교는 믿음으로만 깨달을 수 있으며, 이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릴 수도 없습니다.


                                     야고보서


   본서는 우리 주님의 형제로 생각되는 야고보가 당시 세상 끝까지 흩어져 있던 유대인 성도들에게 쓴 서신인데, 서신서 중에서 최초의 편지로 분별됩니다. 아마도 본서는 교회 성도의 대부분이 유대인이었고, 그래서 유대인의 관습이 많이 남아 있던 초대 교회 시대에 씌어진 듯합니다.

   이 야고보서는 아주 실제적인 편지로서, 저자는 계급적인 차별이나 길들이지 못한 혀나 시기나 다툼이나 가난한 자에 대한 압제 등을 책망하고 있습니다. 야고보는 그저 입술로만 믿는다는 믿음과 선한 행실이 동반하는 믿음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고 강조하였습니다. 그렇다고 야고보의 가르침이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다는 사도 바울의 가르침과 상반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믿음이 있으면 선한 행실은 따르게 마련이라고 주장할 따름입니다.

   마지막으로 야고보는 성도들에게 고난 중에 인내하며 서로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권면하면서 본서를 끝맺고 있습니다.


                                     베드로 전서


   베드로 전서는 핍박으로 인하여 말할 수 없이 고난을 당하고 있던 소아시아 지방의 유대 성도들에게 씌어진 편지로서 소망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즉 그리스도인이 고난 저 편에 있는 영광을 바라보게 될 때에는 아무리 현실이 어려울지라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로 만족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어떠한 큰 핍박이 몰려온다 할 지라도 그리스도의 보혈과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누리게 될 성도의 기업은 결코 쇠하지도 아니하고 빼앗아 갈 수도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베드로 사도는 성도들에게 거룩하게 생활하셨던 주님을 본받으라고 강조하고,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운 이 때에 한 국가의 국민으로서, 한 가정의 남편이나 아내로서, 종으로서 충성하라고 강조하였습니다. 또한 장로들에게는 충성할 것을 권면하는 동시에 청년들에게는 순종하고 복종하라고 권면하기도 했습니다.


                             베드로 후서


   베드로 후서는 데살로니가 후서나 디모데 후서와 더불어 완전히 타락하게 될 기독교계의 말세 상태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1장에서는 장차 하나님의 나라가 분명히 임할 것이며, 선악 간에 행한 것을 따라 상급을 받게 될 터이니, 모름지기 성도들은 그리스도인답게 살아가라고 간곡히 부탁하였습니다. 

   2장에서는 거짓 선생들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케 할 것이지만, 필경 그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피할 수 없으리라고 경고하였습니다.

   3장에서는 마지막 때에는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신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자들이 나타날 것이나 주님의 재림과 세상의 심판은 너무나 자명한 진리라고 강조했습니다. 따라서 성도들은 더욱 부지런해야 하고 거룩해야 하며 믿음을 굳게 하고, 주 예수님의 오심을 고대하면서 은혜 주시는 대로 자라가야 한다고 권면하였습니다.


                                            요한 일서


   이 책에서 요한은, 하나님의 가족의 일원으로서 성도가 지닌 특성에 관해 상세히 기록해 줍니다.

   인간적으로도 자식은 부모를 닮게 마련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의 자녀인 우리가 하나님과 닮은 성품은 어떤 것들일까요?

   1. 성도는 어두움 가운데 행하지 않고 빛 가운데 행합니다. 성도라면 습관적으로 계속해서 죄를 짓지는 않습니다.

   2. 성도가 범죄했을 때 단란하고 행복한 가정을 이루기 위해서 그 죄를 자백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3. 성도는 모름지기 하나님의 계명을 준수합니다.

   4. 성도는 성도 상호 간에 형제애로써 사랑합니다.

   5. 성도는 언행심사를 통하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합니다.

   6. 성도는 성령님을 모시고 있습니다.

   7. 성도는 세상을 능히 이깁니다.

   아울러 사도 요한은 주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에 관한 오해를 지적하면서, 예수님은 완전한 하나님인 동시에 완전한 사람이시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와 상관이 없는 신에대한 모든 개념은 이방 종교라고 했습니다.


                            요한 이서와 요한 삼서 


   요한 이서와 요한 삼서는 그 내용이 서로 대조를 이루고 있어 자못 흥미롭습니다.

   요한 이서에서는 거짓 교사들에 대하여 경고하면서 이러한 자들을 용납하지 말라고 충고하는 반면, 요한 삼서에서는 참 신자들에 관해 설명하면서 이러한 자들을 접대하며, 이들에게 친절하라고 권면했습니다.

   요한 삼서에는 세 인물에 관해 기록되어 있습니다. 가이오는 경건하고 손님을 잘 접대함으로 칭찬을 받았고, 디오드레베는 이기적이었기 때문에 책망을 받았으며, 데메드리오는 꾸준한 생활 간증에 대해 칭찬을 받았습니다.


                                         유다서


   유다서에는 진리를 알고 있으면서도 멸시하는 배도의 죄에 관해 기록되어 있습니다. 즉 저자는 타락했던 이스라엘과 타락했던 천사들 그리고 소돔과 고모라 등의 세 가지 사건을 인용하여 배도자들은 반드시 벌을 받게 되리라고 경고하였습니다. 아울러 유다는 구약 인물들을 인용하여 세 부류의 배도자들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1. 가인은 인위적인 종교를 고집하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미워했습니다.

   2. 발람은 신령한 일을 핑계삼아 돈 벌 궁리만 했습니다.

   3. 고라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규칙을 어기고 반역했습니다.

   이러한 자들이 공의의 심판을 받는다는 것은 자명한 일입니다. 따라서 성도들은 주님의 오심을 고대하면서 지극히 거룩한 믿음위에 자기를 건축하고, 성령으로 기도하며, 하나님의 사랑으로 자신을 지켜야 합니다.


                                요한 계시록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 사도 요한이 본 계시는,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경륜이 완성되고 새 하늘과 새 땅이 시작될 미래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분별에 도움이 될까 하여 본서를 몇 부분으로 분류해 보았습니다.

   1 - 3장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보낸 편지로서, 당시의 교회들에게 실제적으로 적용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교회사에 나타나게 될 여러 교회의 모습을 간략하게 묘사해 주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4,  5장에서는 하늘에서 성도들이 보좌를 중심으로 모여 어린 양께 경배하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많은 성도들은 이 사건이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그의 백성들을 데려 가신 후에 일어날 것으로 분별하고 있습니다.

   6 - 19장에는 야곱의 환난의 때요, 대환난으로 알려진 기간에 불신 세상에 쏟아지게 되는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심판은 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의 상징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최후에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러한 심판들로 대적들을 진멸하시기 위하여 친히 오실 것입니다.

   20 - 22장은 그리스도께서 사단을 무저갱에 감금하시고 천 년동안 세상에서 통치하실 것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통치가 끝나게 될 때 주님은 창세 이래의 모든 악인들을 심판하시어 불못에 던지실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새 하늘과 새 땅이 나타나고, 하나님의 백성들은 죄도 없고 죽음도 없는 곳에서 주님과 함께 영원히 행복하게 살게 될 것입니다.

   구약 성경의 마지막이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는 말씀으로 끝나고 있음에 반하여, 신약 성경의 마지막은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 지어다. 아멘" 이라는 말씀으로 끝나고 있음은 주목할 만한 일입니다. 결국 신구약 사이에 갈보리 십자가가 있었음으로 저주가 은혜로 바뀌게 되었던 것입니다.

Posted by 행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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