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와 종교로부터의 자유
죄인도 의인도 아닌 기독교인들이여!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 하다가 죄인으로 나타나면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는 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갈라디아서 2:17).
"성경은 왜 기록되었는가? 예수님은 왜 이 땅에 오셨는가?" 필자가 교회에 열심히 다니는 기독교인들을 만나면 흔히 던지는 질문들이다. 시원스럽게 깨닫고 대답하는 사람이 많지 않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하여 기록된 책이라는 것을 필자가 지면을 통하여 증거한 바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왜 오셨는가?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켜 주시기 위해 오셨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마태복음 1:21).
성경을 믿고 예수님을 진실로 믿는 거듭난 성도라면 당연히 죄를 용서받고 해방된 놀라운 간증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을 증거하게 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하다. 이 글을 쓰면서 찬송가 405장의 작시자가 기억난다.
죤 뉴톤은 아프리카 노예상인이었으며 탕아였고 이교도였다. 그러나 그가 더럽고 추악한 죄악의 사슬에서 용서받고 해방 받은 기쁨을 찬송시로 간증하고 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큰 죄악에서 건지신 주 은혜 고마워
나 처음 믿은 그 시간 귀하고 귀하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이라면 마땅히 이와 같은 간증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필자가 오늘날 우리 주변의 여러 교인들을 만나서 "죄인인가요, 의인인가요" 라는 질문을 할 때, 어떤 사람은 "우리 모두가 죄인이지요" 라고 말하며, 어떤 사람들은 "의인이 되었어요" 라고 말하고, 혹은 "의인이 되었지만 죄인이라고 말해야 하지요" 라는 답변까지 듣게 된다.
잠깐 멈추어서 묻건대, 이글을 읽고 있는 그대는 어떠한가? 무어라 답변하겠는가? 성경이 씌어진 목적도,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이유도, 수많은 전도자들이 피를 흘리며 전도한 목적도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의 피로 죄인이 의인이 된 진리를 전파하고 수호하기 위해서가 아닌가!
인간은 출생 때부터 모두가 구조적으로 생리적으로 죄인일 수밖에 없다. 수많은 종교적 노력과 인격적 수양과 교육을 통해서도 의인이라는 호칭을 들을 수 없으며, 멸망당할 수밖에 없는 불행한 죄인들에게 십자가의 영원한 속죄는 긴 가뭄에 단비처럼 충격적인 기쁜 소식임에 틀림없다. 이것이 복음의 실체가 아닌가!
도대체가 의인이면 의인이고 죄인이면 죄인이지 "의인이 되었으나 죄인이라고 불러야 한다" 는 것은 또 무엇인가? 생각하여 보라! "빚을 다 청산하여 빚은 없으나 빚쟁이라고 불러야 한다"고 말한다면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인을 죄에서 해방시켜 의인의 신분으로 만들뿐 아니라, 의인된 기쁨에 동참시켜 주시기 위하여 십자가의 고난과 수치를 당하셨다고 성경에 수없이 기록되었거늘, 수 십년 교회에 다녔다는 사람들이 이 같은 고백을 늘어놓으니, 도대체 그들은 성경을 보는 것인가, 보지 않는 것인가? 성경을 믿는 단 말인가, 부정한단 말인가? 얼마나 우습고 안타까운 일인가!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이사야 53:5).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로마서 8:1).
필자는 이러한 부류의 사람들이 왜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해 그 몇 가지 이유를 여기에 나열하고자 한다.
첫째, 그들이 죄인과 의인의 문제에 대하여 분명하지 못한 이유는 그들 중의 상당수가 지옥에 대하여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들은 입으로 지옥을 부정하거나 믿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오히려 지옥을 인정하고 있다고 장담하고 있다. 그러나 막상 지옥에 대해서 어떤 곳인지 아는 대로 말해보라고 하면 그냥 무서운 곳이라느니 불타는 곳 정도로 막연하게 대답하기 일쑤다. 또한 그들에게 지옥에 대해서 진지하게 들어본 적이 있느냐고 물어보면, 설교 때 잠시 듣거나 다른 기회에 지나가는 말로 약간 들은 경우 말고는 정말 지옥의 무서움과, 내가 왜 지옥에 가야만 하는가 등에 대한 심각한 깨달음이 없었다.
그대는 어떠한가? 혹시 지옥에 대해서 피상적으로 생각하고 있지는 않는가? 입으로 지옥을 믿으나 실제로는 지옥을 두려워하지 않고 있지는 않는가?
지옥은 끔찍한 곳이다. 마가복음 9장 43절 이하에 보면 지옥은 끔찍한 곳임을 주님께서 친히 경고하셨다. 예수님은 사역 초기부터 지옥에 대해서 증거하시고 회개하여 천국에 들어가야 할 것을 가르치셨다.
"이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처음으로) 전파하여 가라사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마태복음 4:17).
예수님은 이 땅에 왜 오셨는가? 요한복음 3장 16절에서 잘 증거된 것처럼, 죄인이 멸망당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기 위하여 오시지 않았는가? 사람이 멸망의 지옥에 떨어지는 일이 얼마나 끔찍하고 무서운 일인가를 누구보다도 우리 주님은 친히 잘 알고 계셨다. 그러므로 주님은 기회 있을 때마다 천국과 지옥을 증거하셨고 지옥에 가지 말 것을 경고하셨다(마태복음 4:17, 5:22, 7:13, 10:28, 18:8,9 등).
성경의 주제는 천국이요, 지옥이다. 예수님은 눈물로 지옥을 경고하셨다. 슬픔과 애절한 음성으로 아픈 가슴으로 지옥을 경고하셨다. 성경은 이 지옥과 천국을 증거하기 위하여 씌어진 것이다. 그러나 성경을 믿고 따르며 교인이라고 하는 상당수 사람들이 지옥을 피상적으로, 지식적으로 알거나 관념적으로만 생각하여 자신이 지옥에 갈 수도 있다는 가능성마저 무관심하고, 자기 나름대로는 믿는다고 하면서 교회나 교파의 가르침만 맹종하고 있으니 얼마나 슬픈 일인가!
독자여! 그대가 만일 지옥에 대하여 두렵게 깨달아 본적이 없다면 그대의 구원을 검토하여 보라고 권하고 싶다. 왜냐하면 그대가 열심이 있는 기독교인이라 할지라도 지옥에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지옥의 문제가 내 속에서 분명하게 깨달아지면 자연적으로 내가 죄인이냐 의인이냐 하는 문제는 우리의 관심사가 되어져서 이 문제의 분명한 해결을 통한 거듭남, 곧 구원을 받게 될 것이다.
둘째, 그들이 죄인과 의인의 문제에 대하여 분명하지 못한 이유는 그들 중에 상당수가 자신이 죄인임을 진정으로 깨닫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입으로는 죄인임을 물론 시인한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미워하기만 하여도 이미 살인한 자가 되었다고 하고, 혹은 음욕만 품어도 이미 간음하였다고 하니, 죄인 아닌 사람이 있으랴. 그러니 나는 죄인이지 아니한가"라고 생각하거나, 또는 "로마서 3장 10절에 있는 대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라고 하신 것을 보아도 내가 죄인이지 아니한가" 하는 막연한 생각으로 죄인이라고 인정하고 있다. 그들이 처한 상태가 분명치 못하기 때문에 죄로부터의 구원이 분명치 못한 것이며 죄인과 의인의 규정도 분명치 못한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무엇을 증거하고 있는가? 인간을 가리켜 심히 부패하고 썩은 죄인이라고 말하고 있지 아니한가! 스스로는 구제불능의 추악한 죄인이, 자신의 노력으로 자신을 죄에서 구원할 수 없으므로 겸손하게 구원자 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할 터인데, 이 구원의 길을 거절한다면,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자멸하는 죄인으로 규명하고 멸망의 지옥에 던지시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인생을 보시는 관점은 심히 더러운 구더기 같은 인생이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눈에는 달이라도 명랑하지 못하고 별이라도 깨끗치 못하거는 하물며 벌레인 사람 구더기인 인생이랴"(욥기 25:5,6).
독자여, 그대는 구더기처럼 더럽고 심판 받아 마땅한 죄인임을 깨닫고 주님 앞에 나와서 속히 죄 씻음 받고 구원을 얻으시라.
결론적으로 자신이 끔찍하고 무서운 심판의 목전에 놓인 가련한 죄인임을 양심적으로 깨달은 사람은 자연히 죄인의 사슬에서 벗어나고자 몸부림칠 것이며, 그러한 사람은 '죄인과 의인의 문제'를 분명히 하여 구원을 받게 되는 것이다.
셋째, 그들이 죄인과 의인의 문제를 분명히 하지 못하는 것은 성경에서 말하는 죄인과 의인의 개념을 분명히 모르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죄인은 단순히 죄를 짓는 사람 정도가 아니다. 죄인의 개념은 마귀의 자식이라고 하는 두려운 뜻이 있다. 요한복음 8장 44절에서는 "너희는 마귀에게서 났으니 죄를 짓는다"고 하셨고, 요한일서 3장 8절에서는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니라"라고 말씀하고 있다.
거듭났다는 뜻은 마귀의 자식이 하나님의 자식으로 다시 태어났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또한 죄인의 신분이 의인의 신분으로 변화된 것을 의미한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로마서 3:23, 24).
넷째, 그들이 의인과 죄인에 대해서 분명치 못한 것은 자신들의 행위와 노력으로 의로워지려는 종교적 고뇌에 붙잡혀 있기 때문이다.
서두에 기록된 갈라디아서 2장 17절과 갈라디아서의 다른 말씀들을 검토하여 보면, 갈라디아 교회도 예수님을 믿는다고는 하지만 실제로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고 가르치는 이단적 가르침에 미혹된 자들이 있었다.
성경은 분명하고 힘있게 믿음으로만 의로워지고 구원받는다고 증언하고 있다(갈라디아서 3:1; 에베소서 2:8 ; 로마서 3:28).
생각하여 보라! 자신의 행위를 의지하고 있는 기독교인이 허물과 죄가 수없이 드러나고 있는 자신을 외식과 거짓으로 꾸미지 않고 진실하게 드러낼 때 어찌 감히 의인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겠는가! 율법적 사고를 가진 사람이 자신을 의인이라고 주장한다면 자신과 하나님을 속이고 있거나, 어떤 착각에 빠져 있음이 분명한 것이 아닌가!
구원받는 것은 온전한 하나님의 선물이며 이것을 단순히 받아들이는 믿음뿐이지 행위는 전혀 관계되지 않는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에베소서 2:8,9).
혹자는 말할 것이다. "야고보서 2장 26절에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행위도 필요한 것이 아니냐"라고... .
그러나 여러분이 야고보서 2장 14~26절까지 자세히 살펴보면 의롭다함을 받고 구원받는 것은 믿음으로 되는데, 그 믿음에 거짓이 없는가 하는 문제는 믿음을 통한 행위가 증명한다는 것을 말함이 분명하다.
다시 말하자면 확실하고 분명하게 믿음으로 구원받는 사람, 즉 의롭다 함을 얻은 사람은 십자가의 속죄를 믿은 사람이며, 그 믿음의 진실 여부는 변화된 모습(행위)을 통해서 증명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한가지 조심하여야 할 것은 믿음 후에 오는 행위는 자신의 인격과 능력을 의지한 인위적 행위가 아니고, 거듭난 이후에 우리 속에 임재하신 성령을 통한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아름다운 성령의 열매를 뜻하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독자여! 이제는 문제가 자명하여지지 않았는가! 죄인의 결국은 멸망이요, 의인의 결국은 영원한 소망인 천국이 아닌가! 그대의 믿음을 확실히 하시라. 예수님의 십자가는 그대의 모든 죄를 이미 다 용서하였으니 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고귀한 피의 가치를 깨닫고 그리스도의 흘리신 피로 의인이 된 사실을 깨닫기 바란다. 그대도 부디 하나님의 자녀의 영광에 동참하게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죄(죄인)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선물)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로마서 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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