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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4.06.25 "오직 그리스도는 만유시요."
  2. 2013.02.21 잠언 제 1 과

"오직 그리스도는 만유시요."

                                                                      (Christ is All)

 

   그리스도께서는 땅과 하늘을 통틀어 우리의 모든 것이 되시는 분이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그분께서 하나님의 자녀들 가운데 마땅히 취하셔야 할 자리 곧, 만유 되시는 분으로서의 위치를 확보하지 못하고 계시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마땅히 차지하셔야 할 절대적인 믿음의 대상의 자리에 오르지 못하고 계시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가 아닌 우리 믿음의 대상이란, 그리스도 본체와는 다른 어떤 것을 말하는데 그것은 교리가 될 수도 있고, 신조가 될 수도 있으며 하나의 교권 형태의 당파가 될 수도 있고, 혹은 우리 인간의 개인적인 영적 체험이 될 수도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변화산에서 베드로로 하여금 "우리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겠습니다 (마 17:4, 막 9:5, 눅 9:33)라는 말을 하도록 부추긴 것과 같은 영에 사로잡혀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그들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그 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와 더불어 말하는 것이 그들에게 보이거늘 베드로가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만일 주께서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님을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시는지라. 제자들이 듣고 엎드려 심히 두려워하니 예수께서 나아와 그들에게 손을 대시며 이르시되 일어나라 두려워하지 말라 하시니 제자들이 눈을 들고 보매 오직 예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더라"(마 17:1-8).

 

   사랑하는 형제여, 여러분은 한 번이라도 하나님과 함께 몰려오는 빛난 "구름(cloud)"속에 들어가 본적이 있습니까? 이 구름 속에서 나오는 하나님의 "음성(voice)"을 들어 본적이 있습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엎드려" 본 적이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손 대심(touch)"을 느껴 본 적이 있습니까? 그 후에 예수께서 여러분에게 "일어나라."고 하시는 또 하나의 음성을 들어 본 적이 있습니까? 여러분도 제자들처럼 "오직 예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는 일을 경험해 본적이 있습니까? 그 때에도 아마 많은 사람이 산의 정상까지는 따라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주 극소수의 사람만이 "구름(cloud)"속에 들어갔고, 아주 소수의 사람만이 이 구름 속에서 나오는 "음성(voice)을 들었고, 아주 극소수의 사람만이 일어나 "오직 예수님"만을 본 것입니다.

 

   "오직 그리스도는 만유시요"(골 3:11) 우리는 그리스도를 모든 면에서 우리의 만유가 되시는 분으로 만들어 드리고 있습니까? 이 질문이 나의 구원에 관한 문제입니까? 성경은 구원에 대하여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행 16:31)고 말합니다. 이 질문이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에 관한 문제입니까? 성경은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갈 3:26)라고 말합니다. 이 질문은 나의 경험에 관한 문제입니까? 성경은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빌 1:21)라고 말합니다.이 질문은 나의 섬김과 봉사에 관한 문제입니까? 성경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라고 말합니다. 이 질문이 나의 인생행로에 관한 문제입니까? 성경은 "내가 곧 길이요"(요 14:6)라고 말합니다. 이 질문이 천국 또는 나의 인생행로의 종착지에 관한 문제입니까? 그리스도께서 직접 그 곳을 "나 있는 곳"(요 14:3)이라고 정의해주셨습니다. "오직 예수"(마 17:8)만 바라보는 것이라는 말은 "오! 오직 그리스도가 만유가 되게 함으로서 오는 그 풍성한 복을 더 많이 알기를 원합니다."와 같은 말입니다. 우리의 부르짖음이 - "오, 내가 그리스도를 알고."(빌 3:10)와 같은 부르짖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이기심 때문에 복을 달라고 부르짖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참으로 필요로 해야 하는 복은 복을 주실 수 있는 분, 바로 그리스도 자신이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의 마음에서 나오는 기쁨 그 자체이신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에게서 취하시는 그 기쁨을 우리도 하나님과 함께 맛보기를 원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교리나 우리의 탁월한 영적 체험보다도 무한히 높고 고상하신 분이십니다. 우리의 탁월한 영적 경험이란 우리가 마땅히 소유할 수는 있는 것이지만 오직 그리스도와 함께한 경험만이 우리의 심령으로 하여금 참된 기쁨에 사로잡혀 그리스도께로 이끌어 가도록 하는 것입니다.

 

   왜 우리는 "영광에서 영광으로"(고후 3:18) 더 많이 변화되어 있지 않습니까? 이제는 성소의 휘장이 찢어졌습니다. 이제 우리에게 보혈이 뿌려졌습니다. 또한 이제는 우리에게 성령이 주어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변화되지 않는 이유는 우리 자신이 예수님 한 분께만 사로잡혀있지 않고 오히려 우리 자신에게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며 또한 성령의 일이라고 주장하지만 사실은 자기 스스로의 일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광범위하게 퍼져 있으면서도 많은 부분에 있어 피상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경건운동이 가지고 있는 약점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이 흘러나오도록 수건을 벗은 우리 주님의 얼굴을 바라보아야 합니다(고후 3, 4장). 우리가 수건을 벗은 우리 주님의 얼굴이 있는 그 곳에 있기만 한다면 그 밖의 다른 모든 것은 빛을 잃어버리고 사라져버릴 것입니다.

 

   여기에서 꼭 말씀 드리고자 하는 것은 -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님께서는 성령 자신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사로잡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성령 자신의 사역에 사로잡혀 있다 할지라도, 우리가 그 일 자체에 사로잡혀 있다면, 성령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 밖에서 성령의 주위를 맴돌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은, 우리 안에 내주해 계시는 성령님께서 무엇을 하고 계시는 분인지를  분명하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성령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요 16:13) "성령 그가 내(그리스도의) 영광을 나타내리니"(요 16:14) 성령님께서는 결코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 우리 주님의 영광만을 나타냅니다(요 16:5-15).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면, 그리스도의 사역 역시, 실로 놀라울 정도로 복된 사역이기는 하지만, 결코 그리스도의 사역, 그 일 자체가 우리 심령을 만족시키는 믿음의 대상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사역이 나의 양심에 평안, 아니 그보다 더 달콤한 평안을 가져다주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삼위 하나님 가운데 제2의 위를 가지고 계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그분 자신만이 우리의 심령을 만족시켜주실 수 있는 우리의 믿음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오!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이분께서 우리의 심령을 얼마나 놀라울 정도로 만족시켜주시는지요! 영원히 우리 주님을 찬양하기 원합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우리의 주의를 주님께로만 항하도록 명하십니다(마 17:5).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시는지라"(마 17:5).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요 6:39).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그분만이 우리 믿음의 대상이십니다.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그분만이 우리의 사랑의 대상이십니다. 그분만이 우리의 소망의 대상이십니다.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를 우리의 믿음 소망 사랑의 대상으로 하지 않는, 믿음 소망 사랑은 거짓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인생행로에서 모든 것 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섬김과 봉사의 모든 것 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예배의 의 모든 것이 되시는 분이십니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의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찬송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지금 십자가 위에 계시지 않습니다. 또 무덤 속에도 계시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지금 보좌 위에 계십니다. 얼마나 놀라운 사실입니까?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영광중에 계시는 분이라니요! 그븐께서 바로 한 분 뿐인 나의 구주, 곧 우리의 구세주라니요! 또 그분께서는 나의 대제사장이십니다. 그분께서는 나의 보혜사(대언자, 변호자, 중재자, 보호자, 조력자, 위로자, 상담자)이십니다. 나를 위해 죽으시고, 살아나시고, 나를 위해 다시 오실 바로 그 유일하신 구주이십니다. 아, 바로 이분께서 교회의 신랑이 되실 바로 그분이십니다.

 

   베드로가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벧전 2:7)라고 말한 것도 사실은 그렇게 놀랄 일이 아닙니다.

 

   종교적인 세계의 사람들은 물론 경건치 않은 세상 사람들도 똑같이 주님을 그들 자신에게서 완전히 내쫓아버리는 일에 열심을 내고 있습니다. 경건치 않은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불사르기 위하여 보존하여 두신 것입니다(벧후 3장, 계3장).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 두 부류 모두를 가까이하지 말고 멀리해야합니다. 만일 우리가 그들을 멀리 하고 있지 않다면, 지금이라도 서둘러 "우리도 그의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히 13:13) 나아가야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한분만으로 충분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우리의 모든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야말로 진정으로 우리의 구주되시는 그리스도를 기쁘시게 하는 일입니다.

 

   그리스도, 그리스도, 그리스도 오직 그분께서만 우리와 함께해 주시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에게 주시는 것보다 더 좋은 분깃이나 장소를 소유할 수 없습니다. 이 땅이 주는 여러분의 분깃은 "먹을 것과 입을 것"(딤전 6:8)이 전부이고 여러분이 거하는 장소는 "그리스도 밖" 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믿음 가운데 있을 그곳에서 여러분의 분깃은 "모든 신령한 복" 입니다. 여러분이 거할 장소는 "그리스도 안" 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여, 이제 여러분의 모든 애정과 모든 욕망과 모든 생각 그리고 모든 목적이 그리스도께로 향하고 그리스도로 집중 되도록 합시다.(F.C.B.)   EMMAUS 

Posted by 행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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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언 제 1 과

믿음,신앙 2013. 2. 21. 14:17

제 1 과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얻는 대인관계의 지혜

(Fearing God Helps in Personal Relationship)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나 어리석은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한다"(잠 1:7)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게 되나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안전하리라"(잠 29:25)고 했습니다. 그리고 "여호와를 경외함은 생명으로 인도하고, 만족 가운데 거하게 되며 재앙을 만나지 아니하리라"(잠 19:23)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지혜란 무엇인가?

시편은 하나님과 우리 인간과의 관계를 다루고 있다면, 잠언은 우리 인간들 간의 관계를 다루고 있습니다. 잠언 말씀을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지혜는 우리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방법을 통하여 우리 인간들 간의 관계에 필요하고 합당한 지혜를 깨닫도록 해줍니다. 그리고 이러한 지혜는 우리들의 매일의 삶 가운데 합당한 때에 합당한 방법으로 우리들로 하여금 올바른 행동과 올바른 말을 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반면에 어리석은 자의 지혜는 이와 정반대입니다. 어리석은 자는 언제나 잘못된 때에 잘못된 방법으로 자기 자신의 그릇된 행동과 말을 드러내게 됩니다. 어리석은 자는 마땅히 두려워해야 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대신 사람을 두려워합니다. 즉 "미련한 자는 명철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자기 스스로의 마음을 드러낸다" (잠 18:2) 하였으며 "미련한 자는 자신의 눈에 옳은 길을 쫓으나 지혜로운 자는 권고를 듣는다"(잠 12:15)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잠언의 처음 아홉 장은 지혜와 어리석음에 대하여 비교하고 있습니다. 윌리엄 맥도날드는 그의 주석 책 "믿는 자들을 위한 성경주석" (영어 원본 Believer's Bible Commentary) 793 페이지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 사람들은 인생행로에서 길을 가다보면 사람을 부르는 두 개의 다른 여인의 음성을 듣는다. 그 하나는 지혜자의 음성이고 다른 또 하나는 길거리의 낯선 여인의 음성이다. 여기에서 첫 번째 여인인 지혜자의 음성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그리고 두 번째 낯선 여인의 음성은 죄의 유혹과 불경건한 이 세상의 음성을 상징한다."

젊은 아들에게 아버지는 "지혜를 취하라, 명철을 택하라, 지혜를 거절하지 말라, 지혜가 너를 보호하리라. 지혜를 사랑하라, 지혜가 너를 지키리라"(잠 4:5,6)고 거듭거듭 권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젊은이는 이와 같은 지혜자의 권고를 거절합니다. 대신 그는 어리석은 여자를 택하게 됩니다. 그에게는 어리석은 여자의 음성이 더욱 달콤하게 들립니다. 잠언 9:13-18 말씀을 보면 어리석은 여자는 젊은이의 마음을 사로잡는 유혹자의 상징입니다. 결국 어리석은 젊은이는 유혹하는 여자의 집으로 들어갔고, 사망이 그곳에 있는 것을 알지 못했으며, 그는 깊은 지옥의 음부 속에 거하고 있는 여자의 덫에 빠진 망한 손님들 중에 한 사람이 되고 맙니다(잠 7:7-27).

지혜의 교훈을 주는 성구들

"저들이 주를 경외하기를 선택하지 아니하고 그 교훈을 싫어함으로...그들이 자기의 행위의 열매들을 먹으리라(잠 1:29-31)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반드시 지혜를 택하고 지혜를 열망해야 합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결국 우리에게 고통이 찾아오고 마는 것입니다. 잠언 중에 지혜란 단어는 50번이상, 지식이란 단어는 40번이상 나오고 있습니다. 그중에 지혜를 언급한 대표적인 몇 구절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지혜를 발견한 사람은 복이 있고 명철을 얻으리라"(잠 3:13).

"지혜가 으뜸 원리이니 그러므로 지혜를 얻으라. 그리고 너의 가진 모든 것으로 명철을 얻으라. 그를 높이라, 그리하면 그가 너를 높이리라. 그를 품에 안으면 그가 너에게 존귀를 안겨 주리라"(잠 4:7-8).

"지혜는 루비 보석보다 나으니, 무릇 원하는 그 어떤 것들과 비교할 수 없도다"(잠 8:11).

"주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교훈이라"(잠 15:13 전반부).

"금 보다 지혜를 얻는 것이 얼마나 귀한고! 명철을 얻는 것이 은을 얻는 것 보다 더욱 나으니라"(잠 16:16).

"진리를 사고 그것을 팔지 말라, 그리고 지혜와 훈계와 명철도 그리할지니라"(잠 23:23).

"지혜를 사랑하는 자는 그의 아버지와 그의 어머니를 즐겁게 하리라"(잠 29:3).

"지혜가 부족하므로 어리석은 자는 죽으리라"(잠 10:21후반부).

"지혜를 얻는 자는 그의 영혼을 사랑하는 자며, 명철을 지키는 자는 복을 찾으리라"(잠 19:8).

지혜에 대한 열망과 그 획득

솔로몬은 우리가 지혜를 얻는 가장 으뜸가는 방법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잠 9:10). 그와 같은 말은 우리 귀에 낯설기도 하고 이상스럽게 들릴 수도 있습니다. 대부분 사람들이 믿기로는, 지혜를 얻는 방법은 대학을 가서 고등학문을 배우거나, 혹은 훌륭한 책들을 읽어서 얻는 것이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참되고 올바른 지혜를 얻는 길은 반드시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얻게 되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잠언은 약 20번 가량 우리 인간들의 하나님께 대한 경외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경외하다(to fear)라고 번역한 동사는 히브리어 '이라' (yirah)에서, 경외함(fearing)이란 명사는 '야레' (yare)에서 번역된 것입니다. 이 단어의 본래의 의미는 존경하다(to reverence)란 뜻입니다. 즉 하나님을 경외 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공경하고, 영화롭게 하며, 사랑하며, 하나님께 충성을 바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와 대조적으로, 잠언 29:25 말씀에는 인간에 대한 두려움(fearing)에 대해 말씀하고 있는데, 여기에서 사용된 단어는 전적으로 그 의미가 다른 '차라다'(charadah)라는 단어를 쓰고 있습니다. 이는 떨다(tremble), 공포에 사로잡히다(terrified)란 의미입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십대 소년기는 같은 또래의 무리들로부터 받는 압력의 두려움이 있습니다. 청년기에는 타인의 비판과 배척에 대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형무소 재소자들에게는 그들의 적들에 대한 두려움 말고도 동료갱단 친구들에 대한 두려움도 있습니다. 특히 재소자 중에서 어느 사람이 예수님을 믿고 크리스천으로 변한 후, 이전에 속해 있던 갱 단원으로부터 그가 탈퇴하려 할 때, 기존의 옛 동료 갱 단원들로부터 가해질 위협과 보복에 대하여 두려움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모든 인간들에 대한 두려움들을 그냥 버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게 되나 누구든지 주를 의지하는 자는 안전하리라"(잠 29:25)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사람을 두려워하는 대신 하나님 자신을 더 두려워하라고 분명히 말씀하고 계십니다. "나는 너의 창조자이다. 나는 너희를 돌보는 하나님이며 나는 네 입의 모든 말을 다 알고 있으며 너희의 모든 생각을 알고 있다"(시 139:2-4)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끝 날에 "모든 것을 친히 심판하리라"(고후 5:10)고 말씀하십니다. "나를 공경하라 나를 경외하라 나를 두려워 하라 너희는 나로 말미암아 살며 기동하며 생존한다."(행 17:28)고 말씀하십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나는 너희의 유일한 창조자니 너희는 마땅히 나를 경외하며 인간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힘주어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대신 사람을 두려워 함

레이(Ray) 의 인생은 그 출발부터 순탄하지 못하였습니다. 그가 어렸을 때 아버지는 그의 곁을 떠났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거의 술집에서 살다시피 하였습니다. 그나마 그에게 가장 가까운 친척이었던 삼촌마저 그를 괴롭혔습니다. 그는 아동 보호소에서 성장했으며 결국 후에는 형무소에 들어가 그곳에 있는 난폭한 사람들과 함께 지내야 했습니다. 그는 심한 대인 공포증에 걸렸습니다. 그는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해하려는 것같은 공포증으로 말미암아 그 누구와도 가까이 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훗날, 레이(Ray)는 형무소 내에서 복음 전도자로부터 복음을 듣게 되었고 주 예수를 자신의 구주로 영접함으로 구원함을 받은 거듭난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그후 그는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자신과 동일한 처지에 있는 다른 감방의 재소자들을 찾아가 하나님의 말씀과 복음을 그들에게 전하여주었습니다. 그러자 차츰 재소자들은 오히려 레이(Ray)를 광신자처럼 여겼습니다. 그 후로 레이(Ray)는 또 다시 그 누구하고도 가까워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생겼습니다. 심지어 그는 그리스도인 형제들과도 오랜 친구관계를 지속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레이(Ray)에게 가석방이 내려졌고 그는 한 선교단체에 속한 제자훈련 프로그램에 등록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훈련원 프로그램 중반쯤 이르렀을 때 레이(Ray)는 그 곳 훈련원으로부터 더 이상 훈련을 받을 수 없으니 떠나 달라고 하는 퇴교 요청을 받았습니다. 선교훈련원의 담당자는 레이(Ray)는 도저히 선교를 위한 훈련을 목적으로는 가르치기 어려운 사람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선교훈련원에 있을 동안에도 그는 단 헌명의 친구도 없이 지냈습니다. 선교원에서 훈련을 그만 둔 이 일로 마음에 상처를 입은 레이(Ray)는 다른 거처 할 곳을 구하였고, 마침내 새로운 일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그 직장에서도 마찬가지로 배척을 받았고 그는 또 다시 새로 얻은 직장을 그만두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그는 또 다시 새로운 직업을 찾아 계속하여 전전하였습니다. 그러는 중에 레이(Ray)는 점점 외톨이가 되어 갔습니다. 그의 곁에는 사귀는 친구들도 거의 없었고, 점점 처음 구원 받았을 때 가지고 있던 그리스도를 향한 첫 사랑마저도 잃어버렸습니다. 그는 여러 교회들을 방문하며 자신에게 맞는 교회를 찾아보려고 노력을 해보았지만, 그의 마음을 정할 곳을 찾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한 목사님이 그를 제자로 삼으려고까지 배려를 했으나 레이(Ray)는 이를 거절하였습니다. 그는 모든 사람들을 의심하기 시작하였으며 심지어 그를 진심으로 돕고자하는 장성한 그리스도인 형제, 자매들마저 믿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이 사람은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레이(Ray)는 거듭난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의 능력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전연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찾아가 복음을 전하는 일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여전히 누구하고도 친구가 되려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주위에 있는 그리스도인 형제, 자매들은 그를 가까이 하려고 노력하고 힘썼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누구와도 건전한 관계를 이루려고 하는 시도를 하지 않았으며 그들의 요청을 받아드리려 하지도 않았습니다. 레이(Ray)는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은 전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에게서 복음을 들은 사람들을 그 자신에게로 이끌지 못하였고 그렇기 때문에 불신자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이끄는데도 결코 성공할 수 없었습니다. 이 사람의 문제는 다른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이려 하지 않았으며, 다른 사람으로 부터 어떠한 충고도 받아드리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과 친교관계를 이루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한 사람이었습니다. 레이(Ray)의 근본적인 문제는 무엇입니까? 그는 사람들을 두려워하였고 다른 사람들과 온전한 관계를 이루는데 필요한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고 배우려는 노력을 전혀 하지 않은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과 원만하고 성공적인 관계를 이룰 수 있는 지혜를 얻을 수 있는 열쇠는 먼저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 대신 하나님을 두려워하라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를 의롸하게 될 때 우리는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우리들로 하여금 여러 다양한 사람들과 어울리며 올바른 관계를 가질 수 있는 지혜를 가르쳐 줍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인 후, 우리 인간들은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는데 어려움을 겪게 되었습니다. 인간들 사이에는 두려움과 미움과 욕심과 질투의 담이 생기게 되었고 이 담이 서로를 가로막게 되었습니다. 두려움은 우리 마음을 관대하고 너그럽지 못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경외하기 시작할 때 다른 인간에 대한 두려움은 물러가게 되는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가인의 아우 아벨이 살해된 사건 이 후 우리 인간들에게 하나님의 지혜를 주시며 우리 인간들을 가르치시기 시작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대한 두려움을 없애주셨습니다. 그리고 대신에 우리에게 사랑을 주시고 이로 말미암아 다른 사람들과 온전하고 합당한 관계를 이루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다른 사람을 사랑해야 할 것을 우리들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러한 모든 일은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시작되는 것입니다.

인간 대신 하나님 경외를 가르치신 예수님

예수께서는 그의 제자들에게 "몸을 죽이고 영혼을 죽이지 못하는 자를 두려워하지 말라. 그 대신에 능히 너희 몸과 영혼을 함께 지옥 가운데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마 10:28)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우리들의 잘못된 두려움에 대해서 깨우쳐 주셨습니다. 마땅히 하나님을 두려워했어야할 경우 사람을 두려워했던 한 가지 실례를 우리는 요한복음 9:22를 통하여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에 의하여 눈을 뜨게 된 소경의 부모는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진실을 바로 이야기하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지상 생활 그 마지막 때에 그가 처했던 여러 가지 모든 위험들을 상상해 보십시오. 헤롯은 그를 죽이려 했습니다. 예수님의 고향 나사렛 사람들은 그를 절벽 아래로 밀쳐버리려고 했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호시탐탐 그를 체포할 계교와 음모를 꾸미고 있었습니다. 제자 가롯 유다는 그의 스승을 배신할 기회를 찾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의 가족들마저 그를 실망시키고 있었으며, 자신의 제자들 또한 예수님을 잘못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결국 그 마지막에는 우리들의 모든 죄를 지시고 십자가 위에 달리셨을 때 예수님은 하나님께로부터 버림을 당하셨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마 27:46).

그렇지만 예수님은 어떠셨습니까? 그는 이러한 모든 시련과 고통 중에서도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브리서 12:2)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 세상 모두가 다 그를 버린다 해도 결코 두려워하지 않으셨습니다. 영원한 하나님의 아들 되신 그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고전 1:24)가 되셨기 때문입니다. 그는 모든 우리 믿는 자들이 필요로 하는 지혜의 근원이 되십니다. 우리는 여러 복음서들을 통하여 종종 그의 원수들이 찾아 와 그를 시험하며 그에게 올무를 씌우려 할 때 그는 언제나 놀라운 그의 지혜로 적들의 입을 다물게 하셨으며 어떻게 그들을 다루셨는가하는 사실들을 찾아 볼수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불과 12살의 나이에 이미 성숙하고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을 만한 태도로 그의 부모님들을 대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로마정부를 위하여 유대인들에게 세금을 징수하던 세리 마태나, 로마정부에게 항거하며 그들을 미워하던 열심당원 시몬 같은 제자들을 다루시는 법을 그는 아셨습니다. 그는 어린 아이들을 축복해 주기를 바라고 찾아 온 어머니들을 거절치 않으셨으며 유리하고 방황하는 무리들과 각종 질병을 고침 받고자 자신에게로 찾아 나아오는 사람들 그리고 노동자와 어부들과 같은 여러 부류의 사람들을 각각 어떻게 다뤄야할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또한 구원의 길을 묻고자 찾아온 부자 관원과 어느 날 밤 은연중에 그를 찾아 온 유대 종교 지도자 니고데모를 다루시는 법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답변을 요구하는 빌라도와 헤롯등 그 모든 사람들을 어떻게 다뤄야 할 지 지혜를 그는 알고 계셨습니다. 이처럼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에게 나타내 보여 주셨던 우리 주님의 그 모든 지혜에 대해서 우리는 단지 놀랍다는 말 밖에 달리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항상 예수께서는 언제나 모든 사람들을 완벽하게 다루 실 수 있는 하나님의 지혜(고전 1:24)의 본체이셨습니다.

결론

다니엘서에서 여러분들은 네 명의 젊은 유대 소년들이 어떻게 하나님을 경외했었는가 하는 사실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극렬한 용광로나 사자의 굴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악한 왕의 위협이나 고소 자들의 참소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대신에 그들은 다만 하나님만을 온전히 경외했습니다. 그들은 결코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았으며 오직 그들에게 지혜를 주시는 하나님(단 1:17)만을 경외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당한 모든 어려운 곤경들을 능히 대처하는 지혜를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혜가 부족하면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우리가 기도로 구할 때 그 지혜를 얻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야고보 1:5).

엠마오성경학교

Posted by 행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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